마을명 : 왕궁면 > 금광마을

구술 기본정보

구분 내용
마을명 왕궁면 > 금광마을
구술자 송낙규(1938)남자
면담자 하정일, 장윤준, 이순영
구술요지 마을 유래담
지명 유래담
민담
전설
구술일시 2012-08-22
비고 면담장소 : 왕궁 금광마을 마을회관
면담시간 : 오전 11시
내용 : 지명유래 및 민담 등에 대한 인터뷰 진행.
키워드  

문헌내용

금광(金光, 능줄, 능지울)․산수남이 : ‘능줄’은 마을 뒤에 큰 고총(古冢)이 있는데 그 묘를 ‘능’이라 했고 능줄기(등성이)의 밑의 마을이므로 생긴 이름.‘산수남이’도 그 묘를 ‘산소’라고도 하므로 ‘산소 너머’의 뜻인 ‘산소넘이→산수남이’.

『익산시사』

함벽정( 涵碧亭)
◦ 소 재 지 : 왕궁면 동용리 금광마을
함벽정은 1920년 왕궁저수지를 만들기 위하여 쌓은 제방이 완성된 후,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왕궁면의 갑부 송병우(宋炳雨)가 개인 재산을 들여 창건한 정각(亭閣)이다.
정각의 주변에는 푸른 저수지물과 벚꽃나무 숲이 우거져 있으며, 동쪽으로는 여산송씨(鎭川宋氏) 제각 건물이 들어서 있는 아름다운 우산(紆山)이 있고, 서쪽으로는 시대산(始大山)이 솟아 있어 이 정각을 감싸주고 있어 봄, 가을의 이곳 경치는 극치를 이룬다. 실로 익산시에서 손꼽히는 경승지라 할 만하다.
사방 16칸의 큰 건물에 단청까지 되어있으나 근래에 들어와 관리가 쉽지 않자 익산시에서 이를 맡았다.
『익산시사』

왕궁저수지(함벽정)
금마에서 동으로 5km쯤 호남 고속도로 진입로를 따라 들어가면 왕궁면 도룡리 금광 부락에 왕궁저수지가 있다. 우북(紆北)산과 도순산의 계곡에 동봉리 동룡리의 2개 리(理)에 저수된 몽리면적이 넓은 큰 저수지이다. 이 저수지의 수문(水門) 옆에 높이 50여m의 암대가 있는데 이 암대 위에 함벽정(涵碧亭)사가 있다.
안대에는 석축을 하여 주변에 벚꽃나무를 심어놓았다. 봄이 되면 함벽의 물에 벚꽃이 만바하여 풍경이 극치를 이룬다.
인근에는 호남 고속도로가 지나가고, 또 동쪽에 우산(紆山), 성묘산(省墓山)이 솟아있다. 여기에는 진천송씨(鎭川宋氏)의 재각(齋閣)건물이 고색이 창연하게 들어서 있고 그 앞에는 넓은 옛 연못(蓮池)이 있으며 「익산탑」이라 칭하는 왕궁리 5층석탑의 모형탑이 세워져 함벽정과 이어지는 익산군 유일의 경승지라 하겠다.
『익산시사』

구술요지

1) 새로 채록된 내용:
- 금광마을의 유래 : 금광 이전에는 능지울이라고도 하고 산수냄이라고도 했다. 마방집이라고도 불렸다.

2) 유적, 터 및 기타지명 :
- 마방집 : 마방집의 위치는 마을 앞 사거리에 위치했다. 옛날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갈 때 그 사람들이 머물던 집이 있었다. 밥을 팔고 말을 재워준다 하여 마방집이다.
- 함벽정 : 송병우씨라는 참봉이 돈이 많아 만석꾼이 왕궁저수지 옆에 지었다.
-금광마을의 과거 모습 : 바로 옆에 면소재지랑 주재소(당시 경찰서)까지 있었다.

3) 전설 및 민담 :
- 이서구 : 이서구라는 사람이 도술을 써서 잡술을 쓰는 사람을 따돌렸다고도 하며, 금광마을을 지나가며 말 발굽에 묻는 흙도 아깝다고 했다. 그 말의 의미는 옆에 송선동이란 마을은 옹기 굽는 마을인데 어딜 파도 옹기 굽기 좋은 진흙이 나오기 때문에 한 이야기이다.
- 일번국도와 철도 : 일제가 쌀을 수탈하기 위해서 철도를 지금의 노선으로 깔았다고 전해진다.

4) 민속 :
- 기세배 : 왕궁에서 가장 위에 있고 사람이 많이 살아 기가 모였다고 한다.


구술채록

A1 : 송낙규 1938

B1 : 하정일
B2 ; 장윤준
B3 : 이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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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2 : 어르신 우리 마을은 어떤 마을입니까?

A1 : 사실은 난 이 동네에서 오래 살았지만 이 동네 뭐 특별허게 전설적으로 내려오는 말이 없어. 특성이 없어. 전해 내려오는 말이 없어. 뭐 동네 이름은 뭐 에 능지울이라고도 했고 옛날에 산수냄이라고도 했어. 산수냄이. 그 무슨 뜻인지 몰라 그냥 옛날에 그렇게 불리웠다는 것만 알고 근래에 와서는 금광마을이라고 하지. 금광마을이라고 허는 것은 일본 사람들이 지금 편의상 지은 이름이여. 그리고 동네를 말할적의 마을이 우리 말인디 왜 일본 사람들이 와서 부락이라고 말을 지었어. 얕잡아 봐가지고. 그래서 부락이란 말은 지금들 안쓰고 있지. 뭐 별시런 말이 있어. 인제 마방집이라는 말은 여그 이 동네 넘어가면은 삼거리 사거리라고 해야것고만 사거리. 거기 귀퉁이가서 술집이 있었어. 솔찬히 오래되는디 거기가 고빼집으로 술 집이 있었는데 그 집을 마방집이라고 불렀어. 마방집이라고 불룬 이유는 에 나는 잘 모르지만은 옛날에는 여그가 교통의 요지였다고 그려. 그래가지고 멀리 가는 손님은 말을 거그다 매 놓고 인자 뭐 말 뭐 먹이도 주고 어쩌고 이러고 해서 마방집이라는 말이 붙은 맬이고 지금은 국도가 여산에서 금마로 해서 삼례로 해서 전주로 이렇게 가는 국도가 지금 현재는 교통도 번잡허고 잘 닦여져 있고 하지만 옛날에는 그거 못지 않은 국도가 우리 동네를 지나갔어. 마방집이라고 하는 집으로. 그래가꼬 그 길이 에 여산을 여산을 거쳐서 요그 저 우리 왕궁면의 동봉리 연정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거그로부터 그 마방집 그 앞으로 해서 이 밑에 송선동이라는 마을이 있어. 송선동이라는 말이 있는데 거기 해서 죽 허니 지금의 봉동읍 일부를 거쳐서 삼례로 연결되는데 이것이 옛날의 말하자믄 국도와 같이 요지 지금 전주가는 관찰사가 부임을 헐라믄 이 길로 갔다는 거야. 이게 그렇게 큰 길이었어. 그것은 들어서 아는 바고 뭐 여기 별시런 얘기가 없어 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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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2 : 우리 마을은 송씨 집성촌이었습니까?

A1 : 아 비교적 좀 많이 살았지. 지금에 와서는 그렇지 않지만 그 전에는 비교적 많이 산 편이었지. 진천 송씨. 진천송가가 우거헌지는 내게로 17대 할아버지. 그 때부터 죽허니 살아 내려온 자린데 인제 그 때에 얘기는 그건 뭐 우리 성을 가진 사람이 관심을 가질 얘기지 다른 지방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얘기는 아닌디 그 이 넘어를 가면은 여기 왕궁 봉동읍 XXX이라고 하는디 여기를 뭐라고 하냐면 우주골이라 그랬어. 그런디 인제 거기 산이 우리 종산이 있는데 에 내게로 17대 할머니가 우주 황씨여. 근데 그 우주 황씨 할머니가 계시기 때문에 여기에 그 처가에 땅에서 오신 것 같아 아마. 그런 내력이 있고 그 그에 대한 얘기는 일반인들은 별로 관심이 없는 얘기고 우리 성을 가진 사람들이나 관심 가질 얘긴데.


A1 : 아주 오래된 마을이지 그 때부터 우주골 이라는 그 저 뭐여 지명으로 불리우고 지금은 우주골이라고 부르는 디가 없거든 근디 우주골이라 그랬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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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2 : 함벽정은 무엇입니까?

A1 : 함벽정은 건립헌지는 지금으로부터 한 80년 전 한 80년 전 될꺼여 그게. 나 어렸을 때 지었으니까 나 초등학교 막 들어가서 다닐 적에. 내가 지금 여든 다섯 살인디 나 초등학교 다녔을 때 지었어. 그런데 왜 지은 것은 누가 지었냐 하면은 송병우씨라고 허고 인제 우리나라 그 벼슬 저 끄트머리에 참봉이라고 있지. 그 참봉이라고 하는데 돈이 만석꾼이라고 그렇게 불리웠어. 부자였지. 그런데 그 양반이 왕궁 저수지라고 있잖여. 저수지 그걸 공사하는데 일본 사람들 치하에서 헌 것이거든. 인자 그 관 주도였지. 근데 그 때 초대 조합장을 하셨어. 그래서 지금도 가보면 비도 있고 한디 그런디 돈도 있고 하니까 저수지 옆으다가 여그 뾰쪽헌 산이 있는데 공사하고 나머지 거기다가 함벽정이라는 단촐헌 좋은 집을 지으셨어. 현재는 그것이 이리 시청 소유가 돼 있어. 왜냐하면 그 자손이 관리 보존허기가 힘드니까 시청에 기부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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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1 : 인제 아까 교통 요지에 대해서 얘기했지만은 본래는 그런 교통이었기 때문에 이 왕궁면의 면사무소도 우리 동네에 있었어. 고개 넘어가면 바로 거기여. 면사무소가 여기에 있었고. 그 때는 지금 파출소라 그러지만 경찰관서 그 저 지서라 그랬지 지서. 그 당시에는 일정때는 주재소라 그랬어. 그런데 그 주재소도 이 마을에 있었어. 그 자리는 그거 왕궁초등학교. 이 초등학교가 있는 자리가 그게 왕궁 이리 경찰서 왕궁 주재소 자리여. 초등학교가 거가 생긴 것도 이유는 주재소 건물 조금 남은 것을 여기서 왕궁으로 왕궁 면 소재지로 학교를 다닐라믄 4키로 남짓 가야하는데 그 초등학교 1학년 다니는 학생들은 거가 다니기 힘드니까 분교를 여기다 설치 했던 거여. 주재소 자리에다가. 그런디 그것이 처차처차 지방민들이 힘을 써가지고 한 학교로 승격을 허고 독립을 허게 되얐지. 그렁게 면 사무소도 여깄었고 주재소도 여기 있었고 그만큼 여가 교통의 요지였기 때문에 그런 XX도 여기에 있었던 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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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2 : 저는 예전에 금광마을에서 금맥에 대한 얘기를 들었습니다.

A1 : 그렁게 내가 듣기에도 지명에 금자가 들은 마을은 금허고 관련이 있단 말을 들었어. 왕궁면에두 저 앵금리라는 데가 있어. 거기선 뭐 금덩이가 나왔단 말을 혀드만. 새만한 금덩이가 나왔단 그런 말이 있어. 근디 우리 동네는 내가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금허고 관계된 얘기는 지금 하나도 전해내려온 얘기도 없고 금을 많이 가진 사람도 없는데 우리가 생각해볼 것은 금이란 것은 귀중 한 것 아녀? 화폐를 만드는 것이여 금이. 화폐여. 현재 지금 보석 박물관이 여기 들어서가지고 보석 여러가지 있거든? 이것이 말하자믄 금이나 한가지여. 이것이 그렇게 맨들어진 것이 우리 지명과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냐 나는 그렇게 생각 하고 있어. 광산은 없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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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1 : 우리 동네가 이게 오래된 동네여 역사적으로. 오래된 동네인데 에 지형이 이 근동 마을 있는 표고로 봐서는 우리 동네가 젤 높아. 여기 뭐 용남 송선동 이 봉동면에 소재한 동네 몇 개 볼 적으 우리 동네가 젤 높아. 그렇기 때문에 우리 농촌의 관습으로 해서 농촌은 농기가 있어. 농기. 큰 뭐 폭이 이 방바닥만 허다고 혀야하나 앵간한 장정은 장대 이만한데다 달아가지고 들지를 못했으니까. 힘이 그 만큼 무게가 있던 거여. 그런데 그것이 동네 뭐다 있는디 이 동네가 제일 높은 디 있고 오래된 마을이기 때문에 이 근동에 있는 마을 그 기가 모이면은 우리 동네에 기다 대고 절했다는 그런 얘기가 있어. 근데 기세배라고 익산에서 그 전에 행사가 있었지 옛날에 얼마 전에. 그런 것이 전해 내려오는 것 뿐이지 나도 보덜 못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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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2 : 이 근처에 오래된 것은 무엇입니까?

A1 : 에 그 성 성 흔적은 지금도 있어. 우리 마을이 아니라 이 산으로 죽 허니 가면 저기 산이 보여. 성묘산이라는 산이여. 성묘산이라는 산이 있는데 거기 가면은 성을 쌓았던 돌이 잔뜩 있어 지금도 흔적이 잔뜩 있고. 쌓았던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어. 근데 그 성이 어떻게 해서 쌓아져 있는가 그 내력은 들어보도 못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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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2 : 여기가 일번국도라고 하셨습니다.

A1 : 지금은 인자 다 없어졌지. 저수지로 들어가고 그 전에는 저수지가 다 빠지면 옛날에 길이었던 것이 죽 허니 표나. 응. 그것이 표나는데 지금은 없을거여. 지금은 물이 다 안빠징게 잘 몰라 또 내가 잘 가보덜 안항게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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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2 : 어디서 읽었는데 이몽룡이 이 길을 지나갔다고 들었습니다.

A1 : 아 서울서 올라면 이 길을 지나갔다니까? 인자 저 우스운 이야기로는 저 그 전이 뭐 야담으로는 인자 한 마딘디 에 강산 이서구씨 알어? 호는 강산이고 이서구. 근데 어느 땐가 조선시대 어느 땐가는 모르것고 막 그 양반이 이인이여. 뭘 알어. 근데 이 서구씨가 전라 감찰사로 도입을 허는데 이 사람이 도술을 헐 줄 알어. 그렁게 이인이라고 내가 얘기 허잖여. 근데 저 여기에서 고산가서 잡술을 하는 사람이 살았다고 그려. 도 도는 돈디 진짜가 아니라 가ᄍᆞ란 얘기지. 잡술을 허는 사람이 인자 거그 잘하는디 그 사람이 이서구씨가 돌아다닌다 항게 어떻게 하는가 가봐야겠다 하고 사람이 아닌 다른 뭘로 변신을 해가지고 이 길목을 가서 지키고 있었는디 아무리 지켜야 일행이 가들 안혀 도인의 일행이. 그래서 나중은 참 이상하다고 알아보니까 거기 지키고 있을적으 벌이 한 덩어리가 웅 허니 지나간 일이 있디야. 근디 그 관찰사 일행이 그 벌로 변해가지고 그 인식을 시킨 것이지 정술로. 그런 말은 있어. 근데 이서구가 관찰사로 갈 적인가 언젠가는 모르지만 우리 마을 밑에 송선동이라는 마을이 있는디 바로 여기에. 거기가 도자기를 많이 만드는 마을이여. 옛날에는 도자기 마을이었어. 지금은 다 폐해버리고 않지만. 지금도 도자기가 아니고 옹기 옹기를 굽던 굴이 있어. 일은 않고 다 폐한지는 오래지만 근디 이서구씨가 여기를 지나면서 여그 이 땅은 말발굽에 묻는 흙도 아깝다 인자 이런 말씀을 하셨는디 그거 뭣이냐. 진흙 옹기를 진흙이 좋은 진흙이 파기만 하면 여기저기서 나와서 굉장히 많이 만들었거든. 인자 그런 얘기가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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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2 : 그런데 일번국도가 이쪽으로 지나가는데 왜 일번국도는 다른 곳으로 지나갔는지 알고 계십니까?

A1 : 왜놈들이 인자 했을 것이고 평야를 위주로 해서 헌것이었을테지. 호남평야의 쌀을 왜놈들이 다 갖다가 군산항을 통해서 다 실어 갔잖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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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2 : 구렁이 얘기를 알고 계시다면 한번 해주십시오.

A2 : 그게 왜그냐면 집이 망해갈 때 내가 알긴 아는데 그 원인은 나중에서야 알았지 우리 망할 때 구렁이가 이만한 게 나와서 그 희안한 게 능청능청 허는 것이 걸쳐있는데 떨어질 듯 안떨어져. 이 쌔카만 이거 큰놈이. 암만 우리 엄니가 물 떠갔고 와서 상에다 놓고 무당 놓고 빌어쌌는데 그게 XX한 것이 XX로 들어간 것을 안 잊어먹어. 그래서 쑥 들어가서 또 나오고. 그 때 625가 나서 우리가 이사가는데 지금와서는 못 이사가게 그랬다고. 아 날마다 나왔어. 그래서 끝끝내 우리가 이사가버렸어. 우리가 이시가도 계속 나와서 동네사람들이 불나서 태워버렸다 하더라고 잡아다가. 긍게 지금 그게 생각항게 와봤덩게 내가 발꼬락이 발이 나왔다고 하는데 발이 아니고 그게 숫놈인가봐 X이 두개가 나왔다고 하더라고. 그걸 인정 안혀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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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사진

금광마을 표지석


금광마을 송낙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