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광대학교 대안문화 연구소 : 익산시 구술사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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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라면 해제

1. 개괄

함라면은 마한의 54개국 중 ‘감해국’이 터를 잡았던 곳이다. 함라산 일대는 산성의 흔적과 함께 이곳이 군사적 요충지임을 알리는 지명들이 산재해 있다. 관원리, 장군리, 무장리가 그것인데 정치행정의 요충지였음을 알리는 지표다. 현재 함라면에 예비군 훈련소가 설치된 것도 선택적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
‘함라’라는 명칭은 함라산에서 유래한 것으로 ‘스님이 장삼을 입고 손을 벌리는 모양’에서 발원한 물이 봉화산에서 시작한 물과 만나 탑천으로 흐른다. 함라면사무소 앞 두물머리는 ‘분수령’ 혹은 ‘도깨비 새뚝’이라고 불린다. 예로부터 용은 산과 하천의 신앙적 상징이었다. 함라산과 탑천이라는 주체가 대응물로 수동마을의 용샘 전설을 불러왔다고 할 수 있다. 용은 신화적으로 우사(雨師)이며 왕의 상징이다. 함라면에 왕비가 난 것과 어래산성의 유래는 함라산이 범상치 않은 터임을 상징한다.
지역 풍수가들은 ‘함라 삼부자집’을 최고의 터로 친다. 이 자리는 ‘스님의 밥주발 자리’인데(교동) ‘터의 좋고 나쁨은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가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는 풍수적 입장에서 볼 때, 함라 삼부자는 그들은 쌓은 재물보다 베푸는 인정으로 더 유명해졌다. 해방과 6.25전쟁을 겪으면서 해를 입지 않았다는 것은 이 지역의 마을이라는 장소의 의미가 인문현상적 가치로 받아들여 졌다고 볼 수 있다. 즉 명당은 공동체 구성원들과 경험관계의 형태에서 만들어진다는 사상이다. 죽은 이들을 위한 묏자리(음택)뿐만 아니라, 현재 살고 있는 사람의 삶의 터(양택) 또한 중요하다 할 수 있다. 아무리 좋은 터를 잡고 살고 있어도, 삶의 태도가 바르지 않다면 불운이 생긴다고 믿어진다. 한 사람의 운명은 그가 속한 공동체의 운명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함라면의 구술 채록은 보여준다.
함라면 사람들의 감수성은 유교적 인문지리에 닿아 있다. 익산시에서 유생들의 힘이 센 곳을 꼽으면 동금마, 북삼기, 서함라를 든다. 그중 함라의 유생들의 유세는 가장 최근까지 이어져 조선시대 말까지 부임한 원님이 ‘노소’로 인사 올 정도였다.
함라의 향촌 사대부들은 ‘중국에 가서 공자의 영정을 받아 올 정도’로 유교적 자부심이 강했다. 이들은 지역자치조직인 ‘노소’에서 모여 ‘윽강법’이라는 자치법으로 이 지역의 질서를 잡았는데 ‘현감의 아들이 망나니짓을 하면 회의를 하여 거세를 할 정도’로 초법적이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이 지역에 건설되려던 철도의 부설계획이 유생들의 힘으로 저지 당하는 바람에 역설적으로 함열이라는 이름은 과거 역전 촌락에 불과했던 ‘와리’에게 내어주고 말았다.

2. 채록요약

1) 지명유래

함라면의 중심지는 수동마을과 교동마을이다. ‘현청’과 ‘향교’로 대표되는 이 마을의 과거는 곧 함라면 정치·행정의 역사다. 금마면이 고도익산의 중심이었다면 함라면의 ‘머리마을(수동)’은 익산시 서쪽의 정치 1번지다. 육모정은 함열 현감의 가족이 살던 ‘내아채’가 있던 곳이며, 행동마을은 ‘역말’이라는 옛 명칭으로 짐작해 볼 때 조선시대 교통·통신의 거점임을 알려준다. 지금 함라 파출소 자리는 과거 ‘옥터’가 있던 자리다. 이처럼 구술사 채록은 장소의 현재에서 과거의 정체성을 부감시킨다. 19세기 말까지 존재했다는 감옥은 연못으로 쌓여 있어서 죄인의 탈출이 어려웠다. 이 지역에 유배 온 이들 중『홍길동전』의 저자로 알려진 허균도 있었으니, 수동마을은 조선시대 향토문화백과사전인 ‘성소부부고’의 집필지인 셈이다.(교동, 수동, 칠목)
교동마을은 함라면의 또 하나의 민간 정부였다. 향교에 설치된 ‘양사청’은 지역 선비들이 운영했던 일종의 자치 감찰청이다. 유생들은 법도(유학)에 어긋나는 사람들을 잡아다 다스릴 정도로 위세가 컸다. 이렇게 지역 여론과 유교적 질서를 옹위했던 전통은 현재 함라면 ‘노소’까지 이어졌다. 하여 외지에서 돌아온 마을의 젊은이들은 먼저 ‘노소’에 들려 인사를 하는 권위를 지속되고 있다.
함라산 일대가 과거 군사적 요충지였음을 알 수 있는 유래도 다수 채록되었다. 함라산성을 비롯하여 ‘관원리(관원쟁이)’, ‘장군리’와 ‘무장리’는 과거 군대가 주둔했던 흔적이 이름으로 남은 것. 성산면의 봉화터와 연결된 봉수대가 있던 소방산을 비롯하여 소룡마을을 둘러싼 ‘남병산성(어래산성)’은 ‘남쪽의 병사들’이 축조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며 관원리는 전쟁 시에 군사들이 후퇴하지 못하게 후방에 버티고 있던 헌병대 격의 부대가 주둔한 곳이다. 특히 어래산성의 명칭은 ‘왕이 왔다 갔다’는 의미인데 산 아래의 마을에서 ‘궁골’이라는 지명이 채록된 점은 향후 고고학적인 연구의 실마리를 제공한 귀중한 자료가 됐다.
기존의 문헌과 상이하거나 타 지역과 비슷한 지명유래도 채록되었다. 수동마을을 타지에서는 ‘장수마을’로 알고 있거나, 장점(長店)마을을 현지에서는 ‘장점’과 ‘장고재’ 에서 유래한 것으로 믿고 있으며 금곡마을은 뒷산에 금이 채취되면서 마을 이름이 바뀐 경우다.(금곡, 수동, 천남) 마을의 현재의 모습이 지역민의 의식에 투영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고문헌의 내용을 보강하는 구체적인 실례도 나타났다. 망월 마을은 망월은 달맞이를 하던 곳에서 유래했으며, 입남마을은 ‘갓골’에서 유래했다. 한편 소룡마을과 회룡마을은 수동마을의 용샘 전설과 관련 있는 지명이다. 함라산의 ‘금’과 수동마을의 ‘용’ 이야기는 금마면의 서동설화의 모티브와 여러모로 유사한 점이 발견되었다.

2) 전설 및 민담

함라면의 전설은 심상 지리적 흔적을 자연물에 담았다. 심상의 지리적 흔적이란 지역민의 무의식이 인문지리에 투사되어 나타남을 의미한다. 지역민들의 정치적 무의식은 고분(古墳)의 출토에서 ‘왕이 다녀갔다’는 유래를 지닌 ‘어래산성’의 흔적에 닿아 있다. 이 산성은 나당연합군의 총관이었던 소정방이 백제를 멸망시키기 전에 머물던 곳. 어래산성에는 ‘공기바위’ 이야기가 전해진다. 장수들이 바위로 힘자랑을 하며 공기놀이를 한 후에 바위를 포개어 놓았다. 그후 산 아래 마을에 공기바위의 정기를 받아 아이가 태어났으니 이름이 공바우다. 공바우는 축지법을 쓸 줄 알아서 불 위에 밥을 앉히고 곰개장에 갔다 온 후에야 밥물이 끓기 시작했다고 한다.(교동, 천남)
행동마을 은행나무와 수동마을의 ‘용샘’은 함라면의 살아있는 전설이다. 행동마을의 은행나무는 금빛으로 물든다. 그 이유는 ‘함라산’에 묻힌 금이 나무에 영향을 준다는 설과 한 쪽 나뭇잎만 물드는 것은 금빛 새가 한 쪽에만 앉았다가 가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이 은행나무는 마을잔치가 벌어지면 제사상을 받을 정도로 대접 받는다.(교동, 금곡, 수동, 행동, 천남)
수동마을의 ‘용샘’은 웅포의 한 마을과 땅 속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용이 그 사이를 오고 가기 위함이라고. 천담마을의 육모정 우물은 용의 꼬리가 자리한 곳이라고 전한다. 입남마을에는 용이 나갔다는 용샘과 옥바둑판이 묻혀 있다는 옥담골이 있는데 여름에 땀띠가 나면 성당면 사람들까지 용샘에 찾아 왔다. 이곳에 ‘3번 가면 피부병이 낫는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기 때문이다.(수동, 입남, 대기, 진소)
함라면 민담은 전통 사회의 금기와 풍수지리적 특징이 있다. 그 예로 ‘헌종비가 된 홍씨 처녀’는 함라면 사람들의 정체성을 잘 보여준다. 조선말 헌종비는 함라 현감의 딸인 홍씨 처녀가 되었다. 홍씨 처녀는 인물이 출중하고 품행이 방정하여 궁궐까지 소문이 났다. 그녀는 당시 세도가였던 광산 김씨를 제치고 왕비로 간택될 정도로 현숙했는데, 지역에선 홍씨 처녀가 왕비가 된 이유 중 ‘역술’에도 능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후 함열현이 왕비의 고장이라는 명예를 얻은 후에는 이 지역에 어사가 다녀가도 출두한 적은 없었다.(교동)
함라 삼부자 중 하나인 김안균 집안의 지관이 ‘묘 옆으로 기차가 지나가면 가세가 기울 것’이라고 했다는 예언이 기차길이 생기고 현실화 되었다고 믿는 이도 있다. 일제 강점기에 함라 삼부자를 중심으로 인근 유생들이 철도 부설을 극구 반대했던 것도 풍수의 훼손에 대한 지역정서 때문일 것이다.
‘칠목재의 끊어진 혈’ 이야기는 함라면 사람들에게 혈맥 보존에 대한 강한 지향성을 보여준다. 칠목제는 산의 형세가 용을 닮았는데 일제강점기에 이곳에 도로를 내면서 용의 머리 부분을 잘라서 혈을 끊었다는 것이다. 혈이 끊어진 자리에서 피가 흘렀고, 그 후 일곱 명의 장수가 태어날 자리에서 일곱 명의 목수가 태어났다고 한다. 장수의 기가 사라져 버린 것. 지역민들은 그 후로 함라에 큰 인물이 나지 않는다고 믿는다. 소룡마을에는 비보풍수 전설이 있다. 칠목재 혈이 끊어지자 ‘용머리 혈’ 앞 쪽에 왕버들을 심어서 재물이 새어 나가는 것을 방비한 것이다. (교동, 소룡, 장점)
민간의 내려오는 금기는 사회적 관습과 지역의 생활문화를 보여준다. 수동마을 향교의 500년 된 은행나무를 베던 사람이 변고를 맞았다거나 마을의 고목나무가 갑자기 울자 6.25 전쟁이 발발했다는 이야기를 통해 민속의식이 사회 인류학적으로 어떻게 기능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교동, 금곡, 천남) 소룡 마을에는 ‘수보막이’이라 하여 안 좋은 일이 생기면 나무를 심고 처녀와 총각이 죽으면 짝을 지어 길 한 가운데 가묘를 쓰는 풍습이 있다. 이것은 액땜과 관련이 있다.(소룡) 망월마을에는 한 사람에게만 보이는 집큼이(구렁이)가 벽장에 살았다. 끼니 때마다 구렁이 밥을 주어 키웠으나 언제부턴가 반절만 먹고 남기곤 했다. 그 후로 부자집이 망하고 말았다.(망월) 예전엔 처녀, 총각이 죽으면 공동묘지에 안 묻고 길 위에 묻었다. 그리고 길 가에는 메밀을 볶아서 심었는데 그 이유는 볶은 메밀을 먹으며 한을 달래라는 것.(소룡, 장점)
함라면의 도깨비 이야기는 사람에게 해꼬지를 한다는 점에서 타 지역의 도깨비 이야기와 다르다. ‘각막골’ 도깨비에 밤새 시달리던 여자는 길에서 흉사를 당했으며 ‘진북리’ 도깨비는 비 오기 전엔 소리를 내며 돌아다니다가 사람을 낯선 곳에 끌고 간다. ‘진덕메’ 도깨비는 솥뚜껑을 솥 속에 넣는 장난을 했다. 천남마을 도깨비는 우물에 사람을 빠트리거나 취한 사람이 길을 헤매게 한다. 이렇게 사람이 도깨비에게 시달리고 나면 꼭 앓게 된다고 한다. 사람을 돕는 도깨비도 있었다. ‘관운정’ 도끼비는 방죽의 수채 구멍에 돈이나 물고기를 모아 두었다. 어떤 사람이 그곳에 거울을 가져다 놓으니 도깨비가 제 얼굴에 놀라 도망을 갔다. 그 사람은 도깨비가 놓고 간 돈(물고기)를 팔아서 부자가 되었다. 천남 마을에는 여자 도깨비가 도와줘서 부자가 된 사람도 있다.(행동, 장점, 천남)

3) 사회 민속

함라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은 조해영, 김완균, 이배원 세 명이다. 이들을 함라의 삼부자라 부르는 데, 구한말 99칸 기와집을 지을 정도로 위세가 대단했다. 지역민들은 삼부자의 부의 축적이 조상의 음택(명당)과 현세의 선행이 있다고 굳게 믿고 있다. 조해영의 집안은 구한말 정읍 군수을 지내고 일제강점기 평의원을 지낼 정도로 부를 축적했다. 조해영은 대원군 이하응의 집을 지은 대목수를 불러 꽃무늬 담장을 두른 대저택을 지었다. 조해영의 집에는 언제나 임방울 등의 가객들이 끊이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주인이 삼부자중 가무에 가장 관심이 많았기 때문이다.
마부출신이었던 김완균 집안이 부자가 된 이유는 선조의 덕행으로 전한다. 그의 조부가 어려운 사람을 도왔더니 좋은 묫자리를 알려주어 음택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 집안은 구한말 운봉군수를 지낼 정도로 가세가 늘었다. 김완균 집안은 남로당 당수였던 박헌영과 친분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배원 집안은 상업에 재주가 있었다. 누룩장사로 큰 부를 축적했다고 한다. 삼부자가 터를 잡고 사는 곳은 지역민에게 ‘스님 밥그릇처럼 생긴’ 길지로 전해진다.
삼부자는 베풀기를 잘해서 인심을 얻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집을 찾는 이는 걸인도 대접을 받았다고 한다. 그 덕인지 6·25 전쟁에도 피해를 없었다. “할 일 없으면 곰개 가서 소금 한 가마니 지고 오세”라는 말은 평상시 삼부자 집의 밥을 얻어먹는 것이 미안하니 소금 나르는 일이라도 자원하자는 뜻이다.(교동, 금곡, 수동, 천남)
얼마 전까지 정월이면 함라면은 기싸움으로 긴장감이 생길 정도였다. 금마의 기세배 놀이는 함라면의 기싸움에 영향을 받은 것이라 한다. 함라 기싸움의 최대 라이벌은 수동과 교동마을이다. 수동마을은 고을의 원이 살았고 교동은 향교가 있는 곳이라서 인사를 먼저 받으려 옥신각신 하다 싸움이 시작된다. 또 섣달 그믐날엔 풍물패가 마을을 돌며 부정을 쫓는 ‘매고를 친다.’ 매고를 칠 때는 대나무 빗자루에 불을 붙이고 우물, 부엌, 화장실 순으로 돌았다. 또 쥐불놀이는 집안의 자질구레한 것에 불을 놓고, 이후 논두렁 밭두렁을 태웠으며 정월 대보름날에는 기고사를 지낸 마을의 기를 들고 나와 애들을 무등 태워서 ‘꽃나무 풍장을 쳤다.’(교동, 수동)
위에서 언급한 기싸움과 매고치기는 타 지역에서 볼수 있다. 그러나 ‘봉고제산’에서 이뤄진 오리잡기는 이 지역만의 사회민속이다. 봉수대가 있었던 봉고제산에 삼월이면 이 지역 사람들이 모였다. 금강을 넘어 오는 오리를 잡으려는 것이다. 이들은 금강을 지나 산을 넘어가려는 오리들을 몰래 숨어 있다가 갑자기 그물을 들어 잡았다.(입남, 장전, 천남)
함라면의 음식문화의 발달은 삼부자집의 영향이 크다. 음식문화는 원래 물산이 풍부하고 부가 축적된 지역에서 발전했는데, 이 지역에서는 ‘1송천, 2수체, 3두리기’라고 하여 물맛이 좋은 순서를 매길 정도로 미식의 척도가 높았다. 함라 미나리는 과거 임금님 진상풍으로 바칠 정도였으며, 귀한 손님에게 대접한 ‘신선로’는 그 맛과 모양이 훌륭해서 한 번 먹어 본 사람은 그 맛을 잊지 못한다(수동, 회령, 수체)


3. 시사점

함라면 일대의 구술사 채록은 조선시대에서 근대 시기에 이르는 익산의 역사문화적 지도를 완성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그 예로 ‘함라 삼부자집’ 내력을 채록하는 중에 알게된 함라 선비문화의 문화사적 기록을 들 수 있다. 판소리 중 호남가의 한 대목인 ‘풍속은 화순이요. 인심은 함열이다.’의 배경이 된 것이 함라 삼부자집이다. 함라 삼부자 집의 흥망사를 일별한 구술 자료는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도 가치가 높아서 즉시 문화관광 자료로 사용할 수 있다.
이번 채록에서 익산 철도 100년의 건설 민담이 채록된 점도 의의가 크다. 일제 강점기 익산시 철도부설 계획은 수차례 변경이 되었다. 가장 큰 이유는 동쪽의 금마면과 서쪽의 함라면 유생들이 극구 반대했기 때문이다. 특히 함라면은 군산항으로 이어지는 내륙 철도의 최적의 조건이었다. 이때 함라의 유생들은 철도부설 변경계획을 추진한다. 함열읍 와리의 일본인 ‘담옥’은 로비자금을 받아 철도를 자신의 농장 가까이 놓게 되었다.
함라면과 금마면의 문화적 정체성은 이란성 쌍둥이처럼 닮았다. 마한 시대 감해국과 건마국의 중심지였으며 금강과 만경강을 중심으로 외부와의 교류를 활발히 한 거점지로서의 역할을 수행했기에 풍수지명과 장소의 정체성 또한 유사할 가능성이 높다. 예로 함라면에서 채록된 용샘과 금덩어리 이야기는 서동설화에서도 유사한 모티브를 발견할 수 있다. 또한 ‘섬돌’, ‘물탕골’은 금마면에서 채록된 명칭과 같다. 기세배 놀이를 비롯하여 철도부설과 관련된 유생들의 반대 역시 금마면과 함라면은 닮은 꼴이 많다. 지역의 구체적 현상이나, 현장의 재현은 장소의 의미를 재구성하는 데 의미가 있다. 금마면과 함라면의 상호 텍스트성에 대한 이후의 연구는 보다 다양한 문화콘텐츠를 확보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