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광대학교 대안문화 연구소 : 익산시 구술사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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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포면 해제

1. 개괄

웅포면은 함라산맥을 따라 흐르는 금강과 인접한 3개면(용안, 성당, 웅포)중 하나다. 마한시대에는 ‘감해국’의 영지였으며 조선 이후 함열군에 속해 있었다. 웅포면을 이루는 마을은 대부분 동족촌으로 형성되어 있다. 본 구술채록의 결과 기세배 놀이를 비롯하여 사회민속적인 귀중한 내용들이 채록된 점은 민속학적 사료의 가치를 가진다.
웅포면의 인문지리가 발달한 것은 금강의 수운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곰개(熊浦․나루밑)마을은 곰개포구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포구가 곰의 형상을 닮아서 지어진 이름이다. 한때 ‘개도 돈을 물고 다닌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연중 파시를 이루며 흥성거렸던 곰개나루를 중심으로 한 구술채록에서는 과거 웅포면의 전성기를 보여주는 ‘조창’과 ‘용왕제’에 대한 기록이 다양하게 채록되었다.
금강은 백제시대부터 내륙수로로 이용되었다. 세곡을 운반하기 위한 창고인 조창도 이곳을 중심으로 건설되었다. 고려말 용안면에 설치된 ‘덕성창’은 조선 초엔 웅포면으로 옮겨졌다가 다시 용안면의 ‘득성창’과 성당면의 ‘성당창’으로 자리를 옮겼다.이와 관련해서 조창을 지키던 사람들이 머물던 ‘야막’이라는 지명과, 건물의 주춧돌 자리가 채록되었다.
웅포 용왕제는 고려말 진포대첩 때 희생된 이들을 위로하고 조운선의 안전운항과 풍어를 비는 전통 있는 민속행사다. 웅포면 한일 고개를 거쳐 패퇴한 왜구들이 남원의 황산벌에서 이성계에 의해 섬멸되고, 이 사건이 조선 건국의 불씨가 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웅포면의 군사적 요충지였음을 알려주는 지명유래도 다수 수집되었다. 백제시대 산성인 어래산성(御來城山)터는 당나라 장수 소정방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래산’은 ‘왕이 왔다’는 뜻. 인근 지역에는 장군대좌, 투구봉, 검바위의 지명 유래가 새롭게 채록되었다. ‘말’과 관련된 유래가 채록된 점도 군사적 유래와 연관된 것으로 생각된다. 대마 마을은 ‘말이 우는 형상’을 닮아서 지어진 이름이며, 소마마을은 새끼 말의 모양을 하고 있어서 지어진 이름이다. 또 지금의 징걸재라고 불리는 곳은 ‘마명(말 울음 소리)’이라는 지명으로 불린다.
곰개나루는 곰의 형상을 닮아서 지어진 이름. 서천군 한산면에 있었던 ‘각개장터’와 연결되는 포구다. 이 지역 사람들은 생선·소금이 집산되었으며 조선시대 5대 포구였던 곰개나루에 향수처럼 남아 있다. 순풍산(順風山)은 ‘바람이 불어 배가 잘 가는’ 것을 기원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번 구술채록을 통해 물산이 풍성했던 웅포의 사회민속과 용왕제 풍경에 대한 상세한 기록을 남길 수 있었던 점은 의의가 크다.
2. 채록 요약

1) 마을유래

웅포면 지명 유래는 금강의 조운을 중심으로 한 역사적 지역성이 반영된 점과 민속적 신앙과 관련한 유래가 채록된 점이 특징이다. 역사적 지명은 ‘덕성창’의 위치와 관련하여 기능을 담당했던 지역이 밝혀졌고 민속적 신앙은 용왕제의 영향이 풍수지리적 흔적이 지명유래로 남아있음을 알 수 있다.
웅포면의 구술사 채록에서 특이점은 기존 문헌에 남은 지명의 기록과 현지 구술내용의 상이점이 다수 발견된 점이다. 고창마을은 ‘피포’라고도 불렸다고 하나, 함열에도 같은 이름의 포구가 있어서 어느 것이 정확한 명칭인지는 알 수 없다. 또한 순풍산(順風山)은 ‘바람이 불어 배가 잘 가는’ 것을 기원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채록되었으나 용안면, 성당면에 전해지는 ‘순풍산’의 의미가 다르다.(고창)
같은 지역명칭이 마을에 따라 다르게 불리는 경우도 발견되었다. 고창마을에는 과거 서울로 향하던 길의 고개를 ‘징걸재’라고 부르고 대마 마을에서는 ‘막음재’라고 불렀다. 구룡목 마을은 두 능선 끝이 거의 마주친 낮은 곳을 뜻하는 ‘구렁목’이 변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구룡목은 고령목(高齡木)이 변한 것이며, 다른이름으로 서방동이 아닌 서항동(鼠項洞)으로 채록되었다. 이러한 차이는 ‘왕소나무 마을’이라는 별칭이 현지에서 확인 된 점과 ‘쥐혈’에 대한 민간어원설의 확인 통해 신빙성이 높은 구술로 생각된다.(구룡목)
마을의 형태와 기능에 따른 지명유래도 확인되었다. 강변마을은 금강변에 위치한 장터가 마을로 발전했다. 서울의 ‘마포’처럼 생활 환경이 지명의 유래가 된 경우다. 예전에 금강 어부들이 머물던 객주집이 강변마을의 시초가 되었다. 고창마을은 조선시대 조창이었던 ‘덕성창’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 ‘야막’은 조창을 지키던 야경꾼이 머물던 곳인데 ‘피포(皮浦)’로도 불렸다.
문헌에서 기록된 내용에 구체적인 사례를 덧붙인 구술채록으로는 대마마을의 이야길 들 수 있다. 이 마을의 옛 이름은 ‘큰 마명(말이 우는)’이다. ‘마명’은 막음재 아래에 있었던 주막이 있던 자리인데 그곳에 묶어둔 말 울음소리가 커서 마명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구술채록시에는 인근에서 ‘안장고개’, ‘말 방울 명당’, ‘말 밥그릇 터’, ‘살머리(갈기)’ 등 말과 관련된 지명유래가 다수 채록되었다.
마을의 창건에 관한 유래의 변천도 기록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새터마을의 옛 명칭은 서면인데. 이는 함열을 기준으로 한 명칭이다. 구전에 의하면 새터마을은 ‘멀은골’이라 불리는 산골에서 시작해서 새로 만들어진 마을이라는 의미다. 또한 성동 마을은 성 안에 위치한 마을이어서 붙여진 이름인데, 마을에선 유사시엔 피난처로 쓰여서 ‘피난고지’라고도 하고 ‘뒷메’라고 불린다고 했다. 상제마을의 칠성산에서 석실과 함께 옹관묘가 출토된 적이 있으며, ‘제석이 열 두 동네’라는 말이 남아 있는 걸 보아 채록을 통해 마을의 역사가 오래된 것과 그 역사적 유래를 깊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2) 전설 및 민담

웅포면의 전설은 세 가지 유형으로 남아 있다. 첫째는 군사적 요충지였음을 의미하는 이야기, 둘째는 지역의 산업적 특징에 기인한 이야기 셋째는 생활환경과 관련한 이야기다.
웅포지역은 금강에 인접하여 백제시대 산성이 널리 분포된 지역이다. 구술사 채록을 통해 군사적 요충지로서의 모습이 부각되었다. 대표적으로는 새터마을의 ‘장군대좌’를 들 수 있다. 장군대좌는 인근의 ‘궁골’, ‘투구봉’ ‘검바우’, ‘마룻뜰’과 함께 지정학적인 의미를 표시한다. 즉 이곳은 ‘궁골로 가는 길을 투구를 쓴 장군이 칼을 차고 말을 탄다’는 이야기를 내포하고 있다. 아쉽게도 이와 관련한 구체적 전설은 채록되지 않았으나 인근의 ‘입장리 고분’의 출토물과 ‘어래산(御來山)’의 명칭 유래를 생각하면 과거 백제말기의 역사적 의미가 충분히 부여될 만 하다.
구술채록에 의하면 어래산성터는 나당연합군의 대총관으로 백제를 멸망시켰던 소정방의 진터였다.(구룡목, 새터, 함라, 도청, 궁원, 관원) 웅포면이 군사요충지였음을 의미하는 민간 유래담 중 눈여겨 볼 것은 대마마을의 ‘막음재’다. ‘막음재’는 돌을 항상 쌓아두는 곳. 이 자리는 성황당이 있던 자리인데 목적은 전쟁시를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지역에서는 막음재에 돌을 쌓아 두면 대마·소마 마을이 잘 되고 돌을 치워놓으면 고창마을이 잘 된다는 속설이 있어 대마마을 사람들은 부지런히 돌을 쌓았다고 한다.
지역의 산업적 특징과 관련해선 ‘말과 관련된 지명유래’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웅포는 조창이 있었던 곳이어서, 일대의 세곡이 모였던 곳이다. 대마마을에 내려온 지명유래와 전설은 과거 우마차를 이용한 운송수단이 마을의 산업형태에 영향을 끼쳤던 것을 말해준다. 대마마을이 터를 잡은 곳은 ‘말 형’인데 ‘안장고개’를 중심으로 ‘말방울 혈’ 자리, ‘말목 혈’ 자리, ‘말 밥그릇’ 자리가 풍수적 길지로 알려져 있다. 전설에 의하면 소마마을은 충청도에 있는 말 형상의 산을 바라보고 울고 있는 새끼말의 형상이라고 했다. 대마마을 사람들은 무덤을 쓸 때 풍수적으로 상석을 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돌로 된 비석을 세우면 ‘말이 잘 뛰지 못하기’ 때문이다. ‘안장고개’에 대한 이야기는 새터 마을에서도 유사한 이야기가 채록되었다. 그 자리에 함라의 조 부자집이 묘를 써서 큰 부를 이뤘다는 것. 원대암 마을 초입에는 ‘말무덤’이라고 부르는 장소가 있다. (고창, 대마, 새터, 원대암)
금강변에 자리한 마을의 생활환경과 관련한 전설로는 공주에서 떠내려 왔다는 ‘공주산 이야기’와 원대암 마을의 장사 이야기를 들 수 있다. 웅포면사무소 아래쪽에 위치한 ‘공주산’은 큰 비가 왔을 적에 충청도 공주에서 떠 내려왔다고 알려져 있다. (고창, 대마) 원대암 마을의 장사는 명당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이야기다. 칠성산 명당자리를 차지하려고 마을끼리 다툼이 벌어졌다. 이때 원대암 장사가 떡 방아 찧는 ‘묏갱이’를 던지자 금강까지 날아갔다. 장사의 힘이 두려워서 칠산리 마을은 싸움을 끝냈다.(원대암)
웅포면의 전설의 특징은 이 지역이 군사적 요충지임과 동시에 수상 및 육상 교통의 중심지였음을 나타낸다. 특히 ‘장군대좌’와 관련된 전설에 대해 구체적인 이야기를 찾지 못한 것은 다음의 과제로 남길 필요가 있다. 이 기회에 지역의 역사문화 콘텐츠 발굴에 대한 가능성을 발견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웅포면에 전해지는 민담의 특징은 풍수적 믿음과 금강변에 위치한 환경적인 영향에 기인한다. 구룡목 마을의 ‘쥐혈’과 상제마을의 ‘상제봉조’, 진소마을의 ‘참빗 명당’은 마을의 형태와 관련해 생긴 이야기다. 명당의 발복에 대한 믿음은 암장이나 투장이 성행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고, 때론 비석을 없애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러한 현상의 원인은 묏자리 주인의 자격에 대한 지역민의 여론이 반영된 결과인데, 성동마을의 명당에는 효자비는 건재한 반면, 을사오적과 관련된 묏자리는 수난을 당하게 된 것이다.(구룡복, 상제, 성동, 송천)
풍수적 영향과 관련된 이야기는 웅포면의 거의 전 지역에서 채록되었다. 가장 많은 유형은 해양문화적 특징으로 생각된다. 고창마을은 배 모양을 닮았다고 전해진다. 마을의 제일 높은 곳이 돛대가 되고, 배의 창고에 해당하는 부분에 과거 조창이 있었다. 이 장소를 중심으로 마을의 부자들이 모여 살았는데, 부자는 기와집을 올리지 않는 금기가 있었다. 그것은 마을이 배 모양이라 무거운 기와를 올리면 가라앉는다.(망한다)는 속설 때문이다.(고창) 웅포중학교 뒤쪽에는 ‘수기맥’이라는 곳이 있다. 오래 전 한 풍수가가 일대가 고기 잡는 그물 형태가 되어야 마을이 흥할 것이라고 하여. 풍어를 위한 비보풍수의 성격으로 인공조림을 하였다. 수기맥은 이후 경지정리를 하는 과정에서 지금은 두 그루의 소나무만 남았다.(대마) 대맹마을의 ‘용미촐’은 ‘용꼬리’를 뜻한다. 금강농조에서 양수한 물이 ‘용미촐’을 지나서 마을을 휘감고 지나가는 그때부터 마을사람의 살림이 풍족해졌다고 믿는다. 용두마을에는 용의 머리를 비껴 양수장을 지었는데 그것은 풍수적 영향이다.(대맹, 상제)
풍수에 대한 지역민의 의식은 자연에 대한 두려움이 금기와 연결된 측면이 크다. 즉 지역의 원형성을 파괴할 경우, 해를 입게 된다는 믿음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식을 보여주는 것이 ‘노적바위’와 ‘웅포바위’ 이야기다. 고창마을 한재골의 ‘노적바위’에는 농구공만한 돌이 얹어 있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그 돌이 자주 굴러 내려 와 있곤 했다. 장정들이 원래 자리로 돌려놓아도 자주 굴러 떨어지는 ‘신기한 돌’과 부처 비슷하게 생긴 ‘부처독’은 지금은 소실되거나 잊혀지고 말았다.(고창) 또 곰개나루에는 ‘곰이 물 먹는 혀’의 형국인 바위가 있었는데 지금의 선착장을 만들면서 바위가 잘라지고 말았다. 구술에 의하면 이 공사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안 좋은 일들이 생겼다고 한다.(구룡목)
‘용, 이무기 이야기’는 금강과 인접한 생태적 의식에서 생겨났을 것으로 생각된다. 웅포 지역민들은 주기적으로 일어나는 홍수에 대한 예측을 용오름(물기둥)현상의 파악한 것이다. 금강에 사는 용이 승천할 때는 물기둥(물오름) 현상이 보인다. 한 해에 여러 개가 보이면 그 해는 비가 많다는 징조다.(곰개) 이 물기둥을 금강의 이무기로 보기도 하는데 금강에 2~3년 주기로 큰 홍수가 날 때 물이 구르듯 흘러 내려오는 모습과 물기둥이 솟는 모양, 소리가 이무기의 그것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원대암 마을은 ‘용골’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으나 유래는 알 수 없다.(대맹, 상제)
여우에 관한 이야기는 대부분 술과 관련이 있다. 한 사람이 술에 취해 한뎃잠을 자는데 여우가 나타나 산길을 헤매다가 집에 왔다는 이야기(고창)는 타 지역에서도 유사한 이야기가 채록되었다. 그러나 웅포면에서는 술을 마시고 오는데 예쁜 여자(여우)가 유혹을 해서 물에 빠져서 죽거나 여우에게 홀려서 집 대문 앞에서 죽었다는(대맹) 다소 위협스러운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는 한때 술집이 70여개가 있었다는 환경적인 영향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민담을 통해 알아본 지역민의 의식은 원시적 무의식이 반영돼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자연환경에 순응하고자 한 지역민의 순수함을 보여주는 한 사례다.

3) 사회 민속

웅포면의 사회 민속과 관련한 구술사 채록은 풍부한 풍속학적 내용이 채록되었다. 그중 첫째가 곰개나루에서 벌어지던 용왕제이며, 둘째가 덕성창과 관련한 구술이었다. 용왕제 이야기는 성황당 등 민속신앙과 더불어 구체적인 사례가 채록되었고 덕성창과 관련해선 과거의 인문지리적인 구술이 채록되었다.
곰개나루는 한때 ‘5 곰개’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큰 나루터였다. 이 말은 조선에서 가장 큰 나루터를 뜻하는 말로 1원산, 2강경, 3법성, 4줄포, 5곰개를 의미한다. 익산군 세금의 삼분의 일이 걷힐 정도로 경제규모가 커서 술집만 70여 호가 있었다. 곰개장에서는 주로 생선과 소금이 거래되었는데 객주는 생선과 소금을 위탁판매하여 부를 축적했다. 특히 소금시세가 좋아서 ‘쌀 한 말하고 소금 한 말을 안 바꾼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곰개, 새터, 진소, 송천)
웅포 용왕제는 웅포면 일대의 9개 마을이 음력 정월 대보름 날에 금강변의 용왕사(지금의 덕양정 자리)와 곰개나루터에 모여 벌였던 큰 굿이다. 이 행사는 진포대첩 때 희생된 이들을 위로하고 이웃 조창(덕성창)을 배경으로 조운선의 안전운항, 풍어와 마을의 안녕을 비는 것을 목적으로 시작되어 객주와 선주 등이 비용을 추렴하여 당골과 풍물꾼을 불렀다. 용왕제는 불과 3~4년 전까지 지속되었는데, 용왕제를 지낼 쯤이면 “웅포로 돈 벌러 간다”며 큰 만신들이 자진해서 찾아 올 정도로 크고 화려하게 펼쳐졌다.(강변, 곰개, 교동)
웅포면 사람들의 무의식에는 민간신앙이 배어 있었다. 한재골의 성황당 고개를 지날 때에 돌을 올려 통행의 안녕을 빌었고, 초사흘에는 떡을 해서 빌었다. 또 칠월칠석날이면 목욕재개를 하고 마을의 샘에서 제사를 지냈는데 ‘샘 제’를 지내다 낳은 아들이 군대를 가면 제물을 바치고 빌기도 했다.(고창, 송천)
덕성창과 관련한 구술은 이 지역의 역사성을 증거한다. 조창은 고려시대부터 조운을 위해 조세를 모아두었던 창고를 의미한다. 웅포의 덕성창은 조선 초기에 운영됐다. 조창을 관리하기 위한 이들이 파견되어 살았던 곳을 ‘야막’이라고 불렀다. 조창과 관련된 명칭과 주춧돌이 고창마을의 중심부에 남아 있어 과거의 모습을 추측해 볼 수 있다.(고창)
지역민이 가진 금기사항도 채록되었다. 곰개마을 사람들은 음력 12월이면 인근 마을 사람들과 말을 안 했다. 그 이유는 기세배 놀이의 결과에 따라 그해 풍년의 유무가 결정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곰개)
이상과 같이 마을 주민의 의식에서 민속의식 뿌리 내려 있음을 알 수 있다.


3. 시사점

웅포면 구술채록에서 주목할 점은 집성촌의 성격이 짙은 지역일수록 민속의식에 대한 뿌리가 강하다는 점이다. 상제마을과 제석마을은 보를 막고 트는 일을 도맡아 하는 일을 결정하는 씨름대회를 했는데 상제마을에 엄장군이라는 씨름꾼이 있어서 제석마을에서 보를 막는 일이 많았다는 이야기(상제)와 대보름날이면 길을 보수하는 일들을 자발적으로 했다는 이야기는 지역의 특성을 잘 보여준다.(대맹, 상제)
구술사 채록은 지역의 인문지리적 환경을 통해 역사문화 환경 복원의 기준점이 된다. 예를 들어 ‘덕양정’에 대한 구술사 채록은 지금 곰개나루에 있던 덕양정은 원래 웅포 보건소 자리에 위치한 사정터에 있었던 정자였다. (곰개, 새터, 진소) 구술사 채록을 통해 웅포면의 과거를 확인하고 지역의 정체성을 찾는 기회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