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광대학교 대안문화 연구소 : 익산시 구술사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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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산면 해제

1. 개괄
네 명의 선비가 있었다. 선비들은 종종 만나 술을 마시며 시를 읊는 등 풍류를 함께 즐긴 사이었다. 그런 그들이 어느 날은 배산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 봤다. 배가 정박하던 다가포와 목천포가 보이고, 그 너머로 넓은 갈대밭이 보였다. 만경강이 범람하던 드넓은 갈대밭. 네 명의 선비는 그 갈대밭이 만석꾼이 나올 터라고 예언했다. 그리고 후손들을 위해 그 갈태밭에 터를 닦고, 거주하기로 의기투합했다. 그 곳이 지금 오산면의 만석리(현 영만리 일대)이다.
한일강제병합 이후 오산면은 수탈의 고장으로 전락했다. 일본인은 만경강에 둑을 쌓아 밀물 시 강의 범람에 대비했다. 그리고 땅의 염분을 없애기 위해 대나무를 깔고 그 위에 새 흙을 덮었다. 비싼 값에 땅을 매입하고, 조선인 땅주인들에게 적은 임대료를 받고 소작을 주었다. 쭉정이도 공출로 받았다. 또 도박과 술을 권장했다. 조선인들은 그렇게 일본인들에게 땅을 팔았다. 오산면 땅의 대부분이 불이(不二)흥업주식회사의 소유가 되던 해에 일본인 지주는 공출료를 올리고, 깨끗한 쌀만 공출로 받았다.
이렇게 빼앗긴 들과 땅에 조선인들의 울분이 쌓여갔다. 때마침 천도교가 주도하던 3ㆍ1운동이 전국 각지에서 불꽃처럼 일어났다. 그러나 익산에서는 천도교 주도의 만세운동이 수포로 돌아갔다. 오산면은 일제의 수탈이 그 어느 지역 못지않게 심했던 고장이다. 이에 익산 오산면 남전교회 교인들이 불꽃처럼 일어났다. 익산의 4ㆍ4만세 운동은 오산면 주민들의 주도하에 일어난 사건인 것이다.
오산면은 원래 농사를 짓기 적합한 땅이 아니라고 한다. 아직도 오산면 주민들은 만경강이 범람하고, 오산면의 땅이 바다였다는 흔적을 구술해 주었다. 샘의 물은 짜고 맛이 없었다. 그래서 주민들은 아직도 콜레라(호열자)에 대한 기억을 떠올린다. 그리고 황등면 구술과 마찬가지로 ‘땅이 질척거려서, 여자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 산다’라는 말이 전해진다. 이런 땅에 일본인들이 만경강 둑을 쌓아 개간을 하고, 농토를 만들고, 쌀을 빼앗았다. 조선인들이 빼앗긴 쌀은 전군도로를 통해 군산으로 이동했고, 다시 배를 통해 일본 본토로 가져갔다고 한다. 그렇게 가져간 쌀은 일본 귀족들과 일왕에게 바쳐졌다고 전해진다. 이렇듯 오산면 주민들을 통해 일제 강점기 수탈의 기억을 고스란히 구술 채록 할 수 있었다. 만경강과 관련한 구술도 다수 채록 되었다. 서해 조수가 들어오던 오산면에서 만경강은 주민들의 생활 터전이자 휴양지였다. 바닷고기, 장어가 많이 잡히고, 백사장에서는 해수욕을 즐겼다. 대표적으로 옥포마을을 들 수 있다. 옥포마을은 본디 포구였으나, 지금은 그 터를 찾을 수 없다. 다만 주민들의 기억에서 그 흔적을 미약하게나마 발견 할 수 있는데, 오산면 주민들이 김제를 가기 위해 옥포에서 배를 탔다는 기억이다.
새로운 마을 유래담도 발굴 할 수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북참마을과 남참마을이다. 본디 이 지역은 ‘참문’이라는 지명으로 알려져 있다. ‘참문’의 어원은 물이 차다해서 참문이다. 그러나 북참마을 주민들은 지금의 차관보에 해당되는 참의(參議)가 마을에 거주 했다고 증언한다. 그래서 북참마을이라는 명칭이 붙었다는 구술을 채록 되었다.

2.채록요약
1) 마을유래
마을 유래담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북참마을과 남참마을이다. 북참마을은 본디 ‘물이 찬 마을’이라는 ‘참의’라고 알려져 있었다. 이는 북참마을과 남참마을이 만경강가에 있는 마을이기 때문이라고 알려졌다. 그러나 마을 주민들에 의하면 북참마을과 남참마을에는 참의(參議)가 거주한 마을이라고 주장한다. 이에 주민들은 영조 13년(1789년)에 기록된 호구총서를 그 근거로 들고 있다. 호구총서에 의하면 북참과 남참이라는 지명이 나오는데, 거기에 ‘북참의 리-남참의 리’라고 기록 되어 있다고 한다. 그래서 그 근거를 찾아보니 참의(參議)가 마을에 살았다고 한다. 그리고 또 다른 증거로 마을에 있는 효열문을 들었다.
효열문에는 조선의 호조참의 김안성의 처를 기린다고 명시되어 있다. 참의가 살지 않았다면, 북참마을에 연고와 상관없은 효열문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주민들의 주장이다. 또한 효열문이 계유년 5월에 건축되어 있다고 명시되어 있는데, 1789년 영조 13년과 1753년 계유년을 비교한다면 ‘북참의 리’라고 명시되어 있는 호구총서가 정확한 기록이라는 것이 주민들의 생각이다.
또한 만석리에 대한 새로운 지명유례도 구술채록 할 수 있었다. 만석리는 본디 萬石里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 유례에 대해서 자세히 알려진 바는 없다. 연평마을 주민들의 구술채록에 따르면 전주최씨, 전주이씨, 나주정씨, 밀양손씨의 성을 가진 네 명의 선비가 배산에서 드넓은 갈대밭을 바라보며 만석꾼이 나올 땅이라고 예언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후손들을 위해 갈대밭을 개간하여 터를 잡고 거주하기로 의기투합 했다고 한다. 갈대밭은 원래 바닷물과 민물이 교차하는 지역에서만 자랄 수 있다. 당시 그런 환경의 지역을 만석꾼의 터라고 예언을 했고, 그 후손들이 아직도 만석리에 넓게 퍼져서 생활하고 있다.
이밖에 혈(穴)자리와 관련된 마을 유례담도 눈에 띈다. 우선 오산마을과 장항마을이 대표적이다. 목천포에서 오산마을을 바라보면 자라의 형상이 보인다고 한다. 목천포에서 바라보면 오산마을은 자라의 머리에 해당되며 원오산마을은 자라의 알에 해당된다고 한다. 그래서 오산(鼇山)이라는 지명을 갖게 되었는데, 표기의 편의성을 위해 오산(五山)으로 명칭을 바꾸었다고 한다. 장항마을은 주민들에 따르면 오산면에서 제일 먼저 생긴 마을이라고 한다. 장항마을은 노루의 목에 해당되며, 장항마을 옆 장후리는 노루 꼬리에 해당된다고 한다. 또한 장항마을은 청수동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오산면 대다수 마을이 물 때문에 고생을 했지만, 장항마을은 비교적 물이 좋아서 청수(淸水)동이라고 불렸다고 전해진다.
절과 관련된 지명유례담도 눈에 띈다. 광지마을의 옛 지명은 광절리이다. 광절리라는 지명은 절이 있는 마을이라는 뜻에서 광절리라고 불렸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은 광지(光地)라는 지명 이름을 갖게 되었다.

2) 전설 및 민담
오산면의 민담은 크게 수탈과 관련된 민담과 명당과 관련된 민담으로 나눌 수 있다.
오산마을의 구술 채록에 따르면 일제 강점기 때 오산면을 ‘생선 가운데 토막’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당시 조선에서 미곡을 제일 다량 생산을 했기 때문이다. 즉 오산면은 전국에서 알아주는 미곡생산의 요지였다. 오산면은 일제 강점기 제 2의 동양척식회사라 불렸던 불이흥업(不二興業)의 기착지였다. 불이농장은 군산, 평북 서선, 강원도 철원 등지로 농장사업을 확장하였다. 그리고 아직도 오산면에는 불이농장의 사택이 남아 있다. 오산면의 불이농장을 기반으로 불이상업, 불이광산 등 그 사세를 확장 할 정도였으니, 오산면의 미곡수탈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는 짐작하고도 남는다. 요컨대 조선을 상대로 한 불이흥업(不二興業)의 막대한 착취의 기반엔 오산면 미곡수탈이 깔려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오산면의 쌀은 전군도로를 통해 군산으로 이동했다고 한다. 이 쌀들은 배에 실려 일본으로 전달되었다. 그리고 일본으로 전달된 오산면의 쌀을 일왕과 귀족들이 먹었다고 전해진다. 요컨대 오산면에서 수탈한 미곡이 일왕과 일본 귀족들에게 전해진 것이다.
명당과 관련된 민담은 장항마을에서 찾을 수 있다. 장항마을에는 공동묘지가 있는데, 이 장항마을 공동묘지는 오산면의 많은 주민들이 이용한 공동묘지 터(基) 중 한 곳이다. 이 공동묘지에 대한 명당 민담이 장항마을에서 구술 채록 할 수 있었다. 좋은 혈(穴)자리를 찾는 풍수가가 옥구에서 장항마을을 바라보면 명당자리가 눈에 띈다고 한다. 그래서 그 혈(穴)자리를 바라보며 장항마을에 도착하면 혈(穴)자리를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멀리서 바라보면 분명 좋은 묘 자리가 보이는데, 막상 찾아오면 그 묘 자리를 찾을 수 없어서 포기하고 돌아간 풍수가가 오래전부터 꽤 많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장항마을에는 공동묘지가 생겼다는 것이 장항마을 주민들의 증언이다.
이 밖에 스님과 관련된 민담도 구술 채록 할 수 있었다. 오산면에서는 콜레라(호열자)와 관련된 민담을 많이 채록 할 수 있었는데, 그 이유는 오산면이 만경강의 영향 때문에 샘물이 깨끗하지 못한 까닭이다. 언젠가 신중마을에 콜레라가 유행했다고 한다. 그런데 팔등사라는 절의 스님이 주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콜레라로 죽은 사람의 장사를 치러 줬다. 이에 주민들은 콜레라가 번질까 두려워 스님을 절에 가두고 밖에 못나오게 했다고 한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난 뒤 절을 찾아 갔더니 스님이 살아 있었다고 전해진다.

3) 사회민속
오산면은 만경강을 통해 서해의 조수가 범람한 지역이다. 오산면의 주민들에게 만경강은 생활터전이었다.
우선 만경강을 통해 바닷고기와 민물고기를 풍요롭게 잡을 수 있었다는 증언을 오산면 전 지역에서 채록할 수 있었다. 특히 북신석마을과 옥포마을에서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는데, 북신석마을의 구술 채록에 따르면 목천장어가 전국적으로 유명하게 된 이유는 바닷물과 민물이 교차하던 만경강의 특성 때문에 전국적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실제로 목천장어라고 이름 붙은 전북 만경강의 참장어는 1979년 12월 27일자 동아일보에 소개될 정도로 전국의 미식가들에게 유명한 익산의 대표 음식이었다. 이에 주민들 역시 그 장어가 얼마나 많이 잡혔는지, ‘낚시를 나가서 장어를 잡으면 재수 없는 날이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러한 이야기는 옥포마을에서도 구술채록 할 수 있었다. 옥포마을 역시 흔한게 장어와 망둥이었다고 기억하고 있다.
만경강에는 낚시의 추억만 있는 것이 아니다. 여러 마을에서 채록된 바로는 애장(葬)을 만경강가에 했다고 전해진다. 예전에는 천연두로 인해 유아사망률이 높았는데, 이렇게 사망한 아이들을 만경강 둑에 묻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만경강 둑에는 아직도 그 시체의 흔적이 종종 발견된다고 구술 채록 해 주었다. 또한 날씨가 궂은 날에는 만경강가에서 도깨비불을 흔히 볼 수 있었는데, 이 또한 만경강 둑에 애장(葬)을 했기 때문이라고 구술 채록 해 주었다.
만경강은 민물과 바닷물이 교차하던 강이었다. 그 때문에 주민들은 먹는 물을 늘 걱정 하였다. 오산은 유독 콜레라(호열자)가 많이 발생하였으며, 이 때문에 북신석마을과 옥포마을 주민들은 샘물을 여과하지 않고는 물을 먹을 수 없다고 증언해 주었다. 또한 샘물 역시 너무 짰다고 구술 채록 해 주었다. 샘물이 짜서 김장을 담구거나 국을 끓일 때 소금간을 하지 않을 정도로 샘물이 짰다고 한다. 특히 옥포마을 주민에 의하면 샘물이 짤 뿐만 아니라 파란색을 띈다고 전해주었다. 그렇기 때문에 밥을 하거나 옷을 세탁하면 파란색으로 탈색이 된다고 전해주었다.
이렇게 만경강의 범람은 주민들의 생활습관도 바꿔 놓았다. 신후마을과 옥포마을의 주민들에 따르면 ‘여자는 없어도, 장화 없이는 못 산다’라는 말이 오래전부터 전해오는데, 이는 만경강의 범람과 더불어 땅이 질척거리는 것을 익살스럽게 빗대어 표현한 것이다.
이 밖에 당산나무에 대한 민속을 들을 수 있었다. 농흥마을과 북신석마을에서는 당산나무를 함부로 대할 경우 벌을 받는다고 하여 늘 신성하게 다뤘다고 구술 채록 해 주었다. 장항마을 역시 당산나무에 대한 구술채록을 할 수 있었다. 장항마을 주민들의 구술에 따르면 장항마을 당산나무가 고사(枯死)했을 때 주민들이 뜻을 모아 당산나무를 위로하기 위해 제사를 지내 줬다고 한다.
오산면의 철도는 해방 이후 학생들이 통학으로 많이 이용했다고 한다. 오산면에서 수탈한 미곡을 불이농장은 오산역이 아닌 전군도로를 군산으로 옮겼다. 그리고 그 미곡은 다시 배를 타고 일본으로 이동하였다.
오산면의 주민들은 이리역 폭발사고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오산면은 이리역(현 익산역)과 지리적으로 비교적 가깝다. 그래서 이리역 폭발사고 때 직ㆍ간접적으로 피해를 본 주민들이 아직도 생존하고 있다. 주민들은 주택의 유리창이 깨지거나 하는 등 피해를 입었다고 구술 채록 해 주었다. 그리고 이리역 폭발사고의 처리작업까지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다만 이리역 폭발사고 주범에 대해서는 의외로 호의적인 입장이었는데, 주범 때문에 익산의 발전이 30년 앞당겼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또한 당시 익산시 여론 중 주범의 동상을 세워줘야 한다는 소리도 있었다고 구술 채록 해 주었다.

3. 시사점
이번 구술사 조사를 통해 오산면에 대한 전반적인 이야기를 구술 채록 할 수 있었다. 우선 마을 유례담의 경우 북참마을과 남참마을에 대한 새로운 지명유례를 채록 할 수 있었다. 참의(參議)가 거주한 마을이라는 북참마을과 남참마을은 그 역사적 근거를 주민들이 꽤 자세하게 설명 해 주었다.
오산면은 익산의 춘포면과 더불어 일제 수탈의 고장이다. 특히 오산면은 불이흥업의 기착지로써 일제 전북 수탈의 중심 지역이다. 그리고 오산면의 쌀은 전군도로를 통해 군산으로, 군산에서 배를 통해 일본으로, 일본에서 다시 일왕과 일본의 귀족의 밥상으로 이동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해방이후 사엄이라 불렀던 일본인들 통역등을 담당했던 조선인들은 일본인들이 떠난 자리를 차지하여 해방 이후에도 오랫동안 오산면의 지주로 지냈다고 한다.
만경강은 오산면 주민들에게 풍요와 동시에 고난의 상징이었다. 민물과 바닷물이 교차하던 오산면의 만경강은 주민들에게 식수의 어려움을 주었지만, 민물고기와 바닷물고기를 선물해 주었다. 그리고 천연두로 사망한 자식들을 딱히 묻을 곳이 없었던 오산면의 서민들은 만경강 둑에 자식을 묻고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다고 전해진다.
각기 다른 성을 가진 네 명의 선비가 배산에 올라 다가포와 목천포 너머 갈대밭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그 갈대밭이 만석꾼이 나올 자리라 예언을 하고, 그곳에서 터를 잡고 살았다. 그들은 그들의 예언대로 만석(萬石)리라고 이름을 붙였다. 아직도 그들의 후손들이 살고 있는 고장. 그곳이 바로 오산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