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광대학교 대안문화 연구소 : 익산시 구술사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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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포면 해제

1. 춘포면 개괄
춘포는 수탈의 고장이다. 만경경은 농사에 필요한 농수(農水)를 풍부하게 제공했으며, 그 농수를 머금고 어전평야와 왕지평야의 곡식은 흉년을 모르고 익어갔다. 대풍(大豊)의 고장인 춘포에 세천호립(細川護立)이 세천(細川)농장, 전판좌삼랑(全坂佐三郞)이 전판(全坂)농장 그리고 금촌일차랑(今村一次郞)은 금촌(今村)농장을 설립하였다. 그리고 세 일본인 대지주는 포구와 대장촌역(현 춘포역)을 통해 곡식을 수탈했다. 이러한 수탈의 역사는 마을지명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춘포역 사진>
lead :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간이역이다. 일제는 1914년 대장촌역을 건립해 식량 반출의 거점으로 삼았다.

우선 역전동 마을의 대장촌(大場村)이라는 지명에서 수탈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대장(大場)이라는 뜻은 일본 사람들이 큰 농사를 지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세천호립(細川護立-일본명 호소카와 모리다치)은 1904년 당시 15만원을 투자하여 춘포에 자리를 잡고 그 농장을 대장촌(大場村)이라고 이름 지었다. 그것이 대장촌(大場村)이라는 지명의 효시이다. 또한 중촌마을에서도 수탈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중촌마을은 일본인들로 이루어진 마을인데, 대장촌의 중심지라 해서 중촌마을이라고 불렸다. 그리고 구담마을의 구술채록에 따르면 일제가 춘포면에서 수탈한 쌀을 대장촌역(현 춘포역)을 통해 군산항으로 옮겼다고 한다.

<일본인 농장 가옥 사진>
lead : 대장촌 농장은 전 일본총리 세천호희(細川護熙-일본명 호소카와 모리히로)의 아버지 세천호립(細川護立-일본명 호소카와 모리다치)의 농장이었다. 사진은 일본인 농장주의 가옥이다.

춘포에서 조사된 민담 역시 일제 강점기 수탈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조선인 사엄(당월마을, 입석마을, 화평마을, 삼포마을)과 해방(담월마을, 쌍정마을)에 대한 이야기이다. 조선인 사엄이란 일본인들의 심부름을 하던 조선인을 뜻한다. 이들 마을 주민의 증언에 따르면 조선인 사엄이 해방 이후 동네 주민들에게 몰매를 맞거나 그 후손이 몰락했다고 한다. 해방에 대한 이야기는 해방이 되던 해 느티나무가 부러지거나, 꽃이 피었다는 등의 이야기이다. 마지막으로 이완용에 대한 민담이 노적마을에서 조사되어 일제 강점기 수탈의 기억을 춘포의 주민들이 기억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 밖에 풍수지리적 명당 자리와 여우, 도깨비, 구렁이에 대한 민담도 구술채록 할 수 있었다.
제사, 농사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는 사회민속도 구술채록 할 수 있었다. 궁월마을과 심암마을은 마을 주민들이 신성시하는 돌이나 우물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마지막으로 만경강과 포구에 대한 주민들의 생생한 증언도 채록 하였다. 반도마을은 만경강 밀물이 들어왔다 빠지는 5월에 주민들이 모래찜질을 하며 관절염 치료를 하였다고 한다. 장연마을은 만경강의 철분 때문에 우물을 숯과 자갈로 정수하여 식용하였다고 조사되었다. 포구에 대한 증언은 심암마을, 창평마을, 화평마을 등에서 구술채록 하였다. 이 마을들은 예전에 마을 앞까지 배가 들어올 수 있는 포구였다고 한다. 그래서 배를 정박한 지명이 아직도 남아 있는 마을들이다.

추가 : <만경강 사진>
lead 만경강은 농토를 만들고 쌀을 만들었다. 드넓은 평야를 키우며 흐르는 만경강 덕분에 춘포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인 동시에 수탈의 고장이 된 것이다.

2. 채록 요지
1) 마을유래
이번 구술사 조사로 새로운 마을 지명 유래담을 밝혀낸 마을은 담월마을, 노적마을, 심암마을, 안수마을이다. 대표적으로 담월마을과 심암마을이 있다. 담월마을은 마을이 생기기전에 ‘기와집 골’이라는 부자촌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익산천이 생기며 ‘기와집 골’이 물에 잠겨 ‘기와집 골’주민들이 현재 담월마을로 이주했다고 한다. 그래서 담월(潭月)마을이라는 마을 지명 유래담을 밝혀냈다. 심암마을은 ‘믿음골’이라는 옛 지명을 갖고 있다. 이러한 옛 지명을 갖게 된 이유는 99개의 생수(生水)처가 있어서 물이 풍부했다고 한다. 때문에 물이 풍족해 ‘믿고 살 수 있는 마을’ 즉 믿음골에서 심암(心岩)마을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마을 주민들은 이 근거로 ‘국논’과 ‘숭늉 밥 그릇’을 예로 들었는데, ‘국논’은 물이 풍족해 가뭄이 없고 쌀의 품질이 우수해 임금에게 진상한 쌀을 재배한 논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물 맛이 좋아 ‘숭늉 밥 그릇’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을 정도로 물과 관련된 마을이라는 것이다.
춘포의 마을 지명 유래담은 몇 가지 키워드로 나눠 볼 수 있다. 우선 일제 강점기와 관련된 마을 지명 유래담이다. 신촌마을, 역전동마을, 중촌마을이 그에 해당된다. 역전동마을은 대장촌역(현 춘포역)이 생긴 뒤 역 주변 마을에 붙여진 이름이다. 신촌마을과 중촌마을은 대장촌(大場村)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물길과 관련된 마을 지명 유래담도 눈에 띈다. 삼포마을, 장연마을 그리고 회화마을이 이에 해당된다. 삼포마을은 물길이 세 갈래로 갈라진다고 해서 삼포마을이다. 장연마을은 긴 연못이 있다고 해서 장연(長淵)이라는 마을 지명 유래담을 갖고 있다. 회화마을의 옛 지명은 ‘웃새터’인데, 둑이 건설 되기 전 마을에 배가 들어와 ‘웃새터’라고 불렸다 한다.
농사와 관련된 마을 지명 유래담은 노적마을, 심암마을, 원신동마을이 있다. 노적마을은 지대가 낮은 곳에 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그런데 비가 오면 한해 농사를 망칠 수 있기 때문에 수확물을 산 위에 올려놨다고 한다. 그래서 노적(露積)마을이라는 유래담을 갖고 있었다. 심암마을은 ‘믿음골’이라고 불렸었는데, 물이 많아 농사를 짓기 적합해 ‘믿음골’이라는 지명으로 불렸다고 한다. 원신동마을 역시 심암마을과 같은 마을 유래담을 갖고 있다.
민속이나 풍속과 관련된 마을 지명 유래담도 눈에 띈다. 안수마을의 마을 지명 유래담은 풍수와 관련되어 있는데 마을 뒤 귀명산이 기러기 아홉 마리가 날아가는 형상이라서 마을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오동나무에 봉황에 내려 앉아 원오산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원오산 마을의 마을 유래담도 눈에 띈다. 또한 마을 이름이 터부시 되어 지명으로 굳어진 경우도 발견되었다. 쌍정마을이 대표적이다.
마지막으로 마한백제 영향권에 놓여 있는 창평마을의 마을 지명 유래담이 있다. 창평마을은 마한 지증왕시절 창고가 있던 지역이라는 뜻에서 창평마을이라는 유래담을 갖고 있었다.

추가 : <심암마을의 국논>
물이 많아 농사짓기 적합하다는 심암마을의 ‘국논’은 임금에게 진상하던 쌀을 재배한 논이라고 전해진다.

2) 민담
춘포의 민담을 정리하자면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춘포의 민담이 일제 강점기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이는 춘포가 수탈의 고장이기 때문으로 해석 할 수 있다. 실제로 춘포는 익옥수리조합(益沃水利組合)이 있던 오산면과 더불어 일본인들의 전북 내륙침탈의 거점이었다. 이와 같은 수탈의 기억이 아직 춘포주민들의 의식에 강력히 작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둘째, 춘포의 민담의 서사구조가 한국의 발복(發福) 관념 구조와 그 궤를 같이 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발복(發福) 관념 구조는 성물(聖物)에 대한 토테미즘, 풍수, 집큼이 등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발복(發福) 관념 구조는 재물, 건강, 장수, 자손 등 삶에 있어 두루두루 넉넉하게 갖추면 좋은 것들을 기원하는 구조를 갖고 있다. 또한 이 기원이 개인적 차원을 뛰어넘어 집단적 관념으로 발전시킨 모습으로 나타난다.
춘포의 민담 중 일제 강점기와 밀접한 관련을 맺는 민담의 서사 구조는 해방과 이완용 민담이다. 해방에 관한 민담으로는 담월마을의 ‘해방바람’이 있다. 해방이 되던 해 큰 바람이 불어 담월마을 느티나무의 큰 가지가 부러졌다고 한다. 쌍정마을엔 왕궁 온수마을의 해방꽃 민담이 전해지고 있다. 해방이 되던 해 왕궁 온수마을 샘에 꽃이 피었는데, 그 해방꽃 민담이 춘포 쌍정마을에서 전해지고 있다. 이완용에 대한 민담은 노적마을에서 구술채록 할 수 있었다. 임금이 한양에서 전주로 행차하던 중 이완용이 기세 좋게 길을 막았다고 한다. 그리고 이완용이 임금의 눈에 들었고, 벼슬까지 얻었다는 민담이다. 이렇듯 춘포는 해방이나 일제 강점기때 민담이 아직도 전해지고 있다.


<사진 : 춘포 봉개산 전경>
lead : 춘포 주민들은 장례를 치룬 뒤 ‘봄개산에 깨를 팔러 갔다’고 한다.

산과 관련된 민담으로는 구명산과 봉개산에 대한 민담이 있다. 구명산은 아홉 개의 명당이 있다는 민담이 전해진다. 구명산에 대한 민담은 담월마을, 신촌마을, 안수마을에서 전해지고 있다. 특히 안수마을에서는 구명산을 규명산이라고 부르는데, 옥바둑판이 묻혀진 것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규명하지 못했기 때문에-규명산이라고 부르고 있다. 봄개산에 대한 민담은 신촌마을과 장연마을에서 조사되었다. 이는 춘포의 주민들이 장례를 치른 뒤 봄개산에 시신을 안치했다는 민담이다. 신촌마을에서는 사람이 사망하면 ‘봄개산에 깨를 팔러 갔다’라고 표현했다.
도깨비, 여우, 구렁이에 대한 민담도 춘포 전역에서 조사되었다. 도깨비 민담의 서사구조는 다음과 같다. 피가 묻은 빗자루가 밤에 도깨비가 되는데, 방죽이나 무덤 주변에서 많이 나타난다. 도깨비는 대게 술을 마신 사람들에게 시비를 걸고 밤새 씨름을 한다. 그리고 아침에 정신을 차리고 난 뒤 살펴보면 빗자루였다는 민담이다. 다만 궁월마을과 원오산마을의 도깨비민담은 다른 마을의 서사구조와 약간 다른 구조를 갖고 있다. 예전엔 도깨비 방죽의 물을 퍼내고 물고기를 잡았는데, 물을 퍼내기 전 도깨비에게 제를 지내지 않으면 물을 다 퍼내도 물고기가 한 마리도 없다는 민담이다. 원오산마을의 도깨비 민담은 정양원이라는 상이용사 막사가 마을에 있었는데, 그 막사의 지붕이 기와였다고 한다. 그런데 아침에 자고 깨면 막사 지붕 위에 돌이 수북이 쌓여 있고, 이 돌을 도깨비가 옮겼다는 민담이다. 여우민담은 낮선 여자기 밤늦게 길을 걷는 남자를 홀린다는 민담이다. 담월마을과 중촌마을에서 채록 할 수 있었다. 구렁이민담도 구술채록 할 수 있었다. 구렁이민담의 서사구조는 다음과 같다. 구렁이를 ‘집큼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집을 지키는 구렁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이 ‘집큼이’가 사람 눈에 띄면 그 집에는 꼭 흉사가 생기고, 특히 ‘집큼이’를 잡거나 죽이면 반드시 해코지를 당한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집큼이’를 목격하면 조용히 못 본 척 지나가거나, 흰 쌀죽 등을 대접해 달래준다고 한다. 이러한 구렁민담은 심암마을, 쌍정마을, 원신동마을, 중촌마을, 화평마을에서 조사할 수 있었다.
성물(聖物)이나 지명과 관련된 민담들도 채록하였다. 성물(聖物)에 대한 민담은 대게 돌, 나무, 우물등을 신성시 하는 토테미즘의 서사구조를 띄고 있다. 이러한 성물(聖物)에 대한 대표적 민담으로는 노적마을, 심암마을, 신동마을, 원신동마을에서 채록한 돌박제 민담이다. 돌박제 민담은 금마의 장수가 돌을 짊어지고 길을 걷다 돌박제에서 돌을 내려놓고 떠났다고 한다. 그 후 돌이 흙 위로 드러나면 흉사가 생기고, 흙으로 잘 덮으면 마을에 화가 없다는 민담이다. 돌에 관한 또 다른 민담은 궁월마을에서 구술채록 할 수 있었다. 궁월마을은 오래전부터 신성시 하는 ‘들독’이라는 검은 돌이 있는데, 다른 마을에서 그 돌을 훔치면 궁월마을 주민들이 꼭 다시 찾았다고 한다. 그 후 돌을 온전히 보전하기 위해서 지금의 마을 표지석에 돌을 박았다고 한다. 이밖에 용이 승천한 못이 있다는 구담마을의 용당수 민담을 채록 할 수 있었다. 풍수지리와 관련된 지명민담은 안수마을이 대표적이다. 오래전 한 성인이 현재 천서초등학교 앞을 지나며 덩실덩실 춤을 췄다고 한다. 그래서 마을 주민들이 성인에게 그 이유를 물으니, ‘여기가 명당이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사진 : 궁월마을 표지석>
lead : 궁월마을 박혀 있는 검은 돌은 마을 주민들이 신성시 했던 돌이다.


3) 춘포의 철도
이번 조사에서 타 지역과 다른 춘포의 특징은 ‘철도’에 관한 조사채록이었다. 특히 ‘수탈’과 ‘딸촌’은 타 지역의 철도 관련 조사와 확연히 구분된다.
수탈에 관한 철도의 조사채록은 구담마을과 쌍정마을에서 채록 할 수 있었다. 구담마을의 조사에 따르면 일제는 수탈한 쌀을 대장촌역(현 춘포역)을 이용해 군산으로 옮겼다고 한다. 장연마을에서도 일본인이 쌀 수탈의 용이함을 위해 대장촌역(현 춘포역)을 만들었다고 조사되었다. 이와 같은 내용은 춘포 전역에서 공통적으로 조사채록 할 수 있었다.
딸촌에 관한 조사채록은 담월마을, 신촌마을, 중촌마을 등에서 조사 채록 할 수 있었다. 우선 담월마을의 조사에 따르면 대장촌에 딸이 많고, 여자들이 공장에 출퇴근하며 대장촌역(현 춘포역)을 이용했기 때문에 ‘딸촌’이라는 지명 명칭이 생겼다고 한다. 중촌마을의 구술채록도 비슷하다. 여자들이 대장촌역(현 춘포역)을 많이 이용해서 딸촌이라는 명칭이 생겼다고 조사되었다. 신촌마을의 조사내용은 조금 다르다. 신촌마을의 조사에 따르면 춘포는 부자가 많아서 오래전부터 여자도 학교에 보내줬다고 한다. 그래서 아침에 여학생들이 대장촌역(춘포역)을 많이 이용했기 때문에 ‘딸촌’이라는 명칭이 생겼다고 구술채록 되었다.

4) 사회민속
춘포의 사회민속은 두레풍습과 발복(發福)을 기원하는 제사에 관한 구술조사가 눈에 띈다.
우선 두레풍습의 대표적 예는 술멕이와 기세배(旗歲拜)를 들 수 있다. 술멕이와 기세배(旗歲拜)에 관한 구술채록은 춘포 전역에서 조사할 수 있었다. 특히 반도마을, 창평마을, 원신동마을, 중촌마을의 구술채록에 따르면 술멕이는 백중(음력 7월 15일) 혹은 칠석(음력 7월 7일)에 행해졌다. 이 날 마을 주민들 모두 모여 우물청소와 같은 마을 청소를 하고, 마을 잔치를 행하였다. 기세배(旗歲拜)도 이날 하는데, 춘포의 각 마을의 기(旗)가 서로에게 세배(歲拜)를 하며 마을간의 유대와 화합을 강화하였다.
발복(發福)을 기원하는 제사는 삼포마을에서 구술채록 되었다. 삼포마을 앞 삼포교라는 다리 위에서 제사를 지내는데 가정에 안 좋은 일이 생겼을 때 개인이 제사를 준비하고, 마을 주민들이 제사를 도와줬다고 한다. 역전마을, 궁월마을의 구술채록에 따르면 이 마을 주민들은 도깨비 방죽에서 제사를 지냈는데, 제사를 지내지 않으면 물고기가 안 잡혔다고 한다. 그래서 물고기를 잡기 전 도깨비 방죽에서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추가 삼포교<전라북도 익산시 춘포면 삼포리 942>
삼포마을 주민들은 삼포교에서 발복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곤 했다.

3. 시사점
이번 구술사 조사를 통해 마을 유래담과 춘포의 민담, 철도에 관한 증언 그리고 사회민속 등에 대한 구술채록을 조사 하였다. 특히 마을 유래담은 새로운 담월마을과 심암마을과 같이 새로운 마을 유래담을 찾아 낼 수 있었다. 그리고 춘포의 마을 유래담이 대게 일제 강점기, 물길, 농사 등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밝혀내었다.
민담은 일제 강점기와 발복(發福)에 관련된 민담이 가장 눈에 띈다. 특히 일제 강점기와 맞닿아 있는 민담들은 춘포가 수탈의 고장이었음을 명백히 증명한다. 발복(發福)에 관한 민담은 성물에 대한 토테미즘, 풍수, 집큼이 등으로 나타난다.
춘포는 익산의 다른 지역과 다르게 철도에 대한 생생한 증언도 구술채록 할 수 있었다. 수탈의 도구로서 대장촌역(현 춘포역)에 대한 증언과 ‘딸촌’이라는 독특한 지명담이 그것이다.
이 밖에 춘포의 사회민속에 대한 조사도 이루어졌다. 두레풍습인 술멕이와 기세배(旗歲拜)가 그것이다.
춘포는 수탈의 아픈 역사를 지니고 있다. 주민들은 아직도 세천호립(細川護立)의 세천(細川)농장, 즉 대장촌(大場村)이라는 지명을 낯설어 하지 않는다. 만경강의 농수를 머금고 드넓은 논에서 익어간 곡식은 대장촌역(현 춘포역)과 포구를 통해 군산으로, 다시 군산에서 일본으로 옮겨졌다. 그래서 춘포 주민들은 아직도 기억엔 아직도 일제 강점기 수탈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이번 구술사 조사를 통해 춘포의 굴곡진 역사를 고스란히 채록 조사 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