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광대학교 대안문화 연구소 : 익산시 구술사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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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등면 해제

1. 면 개괄
황등면 동쪽 황등산.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황등산은 일제 강점기 때부터 돌을 캐는 정소리가 끊임없이 나던 산이었다. 다른 지역의 돌에 비해 입자가 고르고 작은 황등산의 화강암은 일찍이 ‘황등석’이라는 고유 이름을 갖게 되었다.
나훈아의 노래 <고향역>의 배경으로 알려진 황등역 앞에는 황등석과 황등고구마가 적재되어 기차에 실려 전국으로 퍼졌다. 화차가 고구마의 집하물량을 소화하지 못해 황등역 앞에서 아우성을 쳤다는 화주(貨主)들의 이야기는 아직도 황등 주민들에게 무용담처럼 전해지고 있다. 뿐만 아니다. 임금에게 진상이 되었다는 황등의 용산엿 역시 황등역의 기차를 타고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황등면에서는 황등역과 황등석에 대한 구술ㆍ채록이 아닌 민담과 사회민속을 더 다양하게 채록 할 수 있었다. 특히 혈(穴)자리를 중심으로 풍수지리(風水地理)와 관련한 민담과 발복(發福)과 관련된 거리제 등의 민속을 채록 할 수 있었다. 이러한 원인은 석산개발로 인한 황등면의 급격한 도시화에서 찾을 수 있다. 황등역과 석산개발을 중심으로 한 급격한 도시화는 외부인구의 유입을 낳았다. 그러한 외부유입 주민들에게 황등면의 문화와 전통에 대한 구술채록은 어려움이 많았다. 그에 반면 오래전부터 황등면에서 정주(定住)한 황등면 외곽의 주민들은 황등면에 대한 정주성(定住性)을 갖고 있었다.
황등면에 대한 구술ㆍ채록은 지명 유래담, 전설 및 민담, 황등역과 관련한 철도 그리고 사회민속에 대한 조사가 진행되었다. 황등면 구술ㆍ채록 조사에서 눈에 띄는 것은 혈자리와 풍수지리에 대한 채록이다. 명당을 뜻하는 혈자리 구술ㆍ채록은 비단 지명 유래담뿐만 아니라 전설 및 민담과 사회민속에 대한 조사에서도 구술ㆍ채록 할 수 있었다.
지명 유래담에서 눈에 띄는 지명 유래담은 무동마을이다. 무동(舞洞)이라는 뜻에서 알 수 있듯이 무동마을은 마을 지형이 춤추는 신선을 닮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러한 지형을 풍수지리에서는 선인무수혈(仙人舞袖穴)이라고 하여, 신선이 옷소매를 펼치고 춤을 추는 혈이라고 하여 최고의 명당으로 손꼽는 혈자리이다.
전설과 민담에 대한 구술채록에서도 풍수지리와 관련된 혈자리 민담을 많이 구술ㆍ채록 할 수 있었다. 이 같은 풍수지리 민담은 도촌마을, 도선마을, 무동마을, 신석마을 등에서 채록 할 수 있었다. 이와 별도로 동냥아치 민담을 채록 할 수 있었는데, 신성마을과 화농마을에서 공통된 민담이 채록 되었다.
철도와 관련된 구술ㆍ채록 내용은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함라 부자들이 반대해 철도의 노선이 황등면으로 바뀌었다는 채록이다. 두 번째는 황등고구마가 사실 삼기에서 재배된 고구마이며, 황등역을 통해 전국으로 퍼져나가다 보니, 황등고구마가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사회민속과 관련된 구술ㆍ채록은 발복민속을 다양하게 채록 할 수 있었다. 도촌마을과 무동마을에서는 거리제민속을 채록 할 수 있었다. 이밖에 임금에게 진상하였다는 황등 용산엿에 대한 민속도 채록 할 수 있었는데, 황등 용산엿에 대한 민속은 대동마을에서 구술ㆍ채록 할 수 있었다.

2.채록요약
1) 지명유래
황등면의 옛 지명은 한등이다. 정사에 따르면 한등은 ‘큰 구렁의 등성이’라는 뜻으로, 황등면 주변이 넓은 평야를 이루고 있는 가운데 황등면의 주산(主山)이라 할 수 있는 황등산이 제법 큰 산이었기 때문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도선마을 주민들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도선마을 주민들에 따르면 황등의 옛 지명 한등은 한이 많기 때문에 한등이라고 이름 붙었다는 것이다. 주민들은 그 근거로 저수지, 토탄, 황등석을 들었다. 주민들에 따르면 황등면에는 요교호라는 큰 호수가 있었다고 기억한다. 문헌에 따르면 주민들이 말하는 요교호는 황등제라고 추측이 가능하다. 이와 관련된 마을 유래담은 백길마을이 대표적이다. 백길마을은 본래 ‘뱃길’이라고 불리던 마을이었으며, 이는 마을에 큰 배가 드나들었기 때문에 뱃길마을이라는 것이 주민들의 증언이다.
황등제는 김제의 벽골제, 고부의 눌제와 더불어 국중삼호(國中三浩)라고 불렸다. 일제는 요교호를 논ㆍ밭으로 개간하였는데, 개간의 목적이 수탈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또한 일제는 품질이 우수한 황등석을 눈여겨보고 자신들의 다양한 건축물에 황등석을 수탈ㆍ이용 했다고 구술ㆍ채록 하였다. 이에 황등의 옛 이름 ‘한등’은 ‘원한이 많아서’라는 것이 주민들의 설명이다. 한등 유래담에서 주민들의 일제 수탈 기억을 구술ㆍ채록 할 수 있었다.
황등면에서는 익산(益山)에 대한 유래담도 채록 할 수 있었다. 도촌마을 주민에 따르면 익산의 뜻은 산을 이용해 큰 이익을 얻는 다는 뜻인데, 황등산의 황등석이 익산 경제에 큰 역할을 하였다는 것이다.
황등면의 마을 유래담 중 눈에 띄는 것은 무동마을이다. 무동마을은 풍수지리에서 최고의 명당 중 하나로 손꼽히는 선인무수혈(仙人舞袖穴)의 혈자리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선인무수혈(仙人舞袖穴)이란 신선이 옷소매를 펼치고 춤을 추는 형국을 뜻한다. 그래서 무동(舞洞)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는 것이 주민들의 설명이다. 또한 명당과 관련한 다른 지명은 신성마을에서 찾을 수 있다. 신성마을은 대성마을에서 분리된 마을인데, 대성마을이 대장군좌(大將軍座)의 혈자리를 뜻한다는 것이 주민들의 설명이다. 그리고 대장군좌(大將軍座)의 북쪽에 갈제라는 제방이 있는데, 이 갈제라는 제방이 ‘가랑축방죽’이라 부르며, 이는 풍수지리(風水地理)에서 갈마음수형(渴馬飮水形) 혈(穴)자리라는 것이 주민들의 설명이다. 그래서 마을명이 대성마을이 되었으며, 대성마을에서 분리된 마을을 뜻하는 신성마을이 되었다는 것이 주민들의 설명이다. 이와 같이 황등면은 풍수지리(風水地理)와 관련된 혈(穴)자리 지명 유래담을 많이 채록 할 수 있었다.
2) 전설 및 민담
황등면에서 주로 채록된 전설과 민담은 발복(發福)과 관련된 민담이다. 발복과 관련된 민담은 풍수지리 민담과 선행(善行)민담으로 나눌 수 있다. 풍수지리(風水地理)민담은 기본적으로 길흉화복(吉凶禍福) 사상에 바탕하는데, 좋은 혈자리나 나쁜 혈자리와 관련된 민담들이 여기에 속한다. 또 다른 민담은 선행(善行)민담이다. 이러한 선행민담은 남에게 베풀어서 복을 받거나, 그 반대로 남에게 야박하게 굴어 벌을 받는다는 내용이다. 풍수지리 민담이나 선행 민담 모두 발복과 관련된 민담이라고 할 수 있다.
우선 풍수지리와 관련된 민담으로 도촌마을의 명당과 관련한 민담을 구술ㆍ채록 하였다. 도촌마을에는 오래전부터 ‘와룡’이라는 명당이 전해지고 있다. 용이 누워있는 형국인 이 ‘와룡’ 명당은 용이 누워 있어서 큰 인물이 날 수 있는 명당인데, 일본인들이 그 맥을 끊으려고 쇠말뚝을 박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러한 쇠말뚝 때문에 큰 인물이 아직도 못 나온다는 민담이었다. 대동마을 역시 혈자리와 관련된 민담이 전해지는데, 대동마을에는 ‘각시골’이라는 골짜기가 있다. 그 골짜기는 각시의 머리를 닮아 ‘각시골’이라고 불리는데, 각시 낭자에 돌을 얹히면 가족들이 번창을 못한다고 하여 돌 한 개도 그 골짜기에 놓지 말라는 민담이 전해진다고 한다. 신성마을 역시 ‘돼지막지기’ 혈자리 민담이 전해진다. 그곳은 황새가 날아가는 혈자리인데, 비석을 세우거나 큰 돌을 갖다 놓으면 황새가 못 날아간다고 해서 마을 주민들이 그 곳에 묘를 쓰지 않는다는 민담이다. 대장군좌(大將軍座)에 비석을 세우면 장군의 기가 죽을 까봐 대장군좌에도 묘를 쓰지 않는다는 민담을 신성마을에서 구술ㆍ채록 할 수 있었다.
혈자리 민담과 더불어 선행(善行)민담도 채록 할 수 있었다. 선행(善行)과 관련된 민담은 신성마을과 화농마을에서 구술ㆍ채록 할 수 있었다. 옛날에 부자가 있었는데, 손님(신성마을 : 동냥아치)이 끊임없이 왔다고 한다. 손님들이 올 때마다 밥과 같은 음식을 대접 했는데, 이 부자의 아내가 손님들이 안 오는 방법이 없느냐고 스님에게 의뢰를 했다고 한다. 그러자 스님이 집 옆을 삽으로 파라고 시켰고, 삽으로 집 옆을 파니 땅에서 피가 주르륵 나왔다고 한다. 그 이후 부잣집에 손님은 끊겼으나, 부자 역시 망했다는 민담이다.
풍수지리(風水地理)민담과 선행(善行)민담은 둘 다 발복(發福)과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 이러한 민담은 금기시 되거나 권장해야 할 내용들을 담고 있다. 이러한 민담들은 길흉(吉凶) 감응(感應)의 사상이며, 이는 발복(發福)의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밖에 황등면의 여러 마을에서 도깨비 민담, 여우 민담을 구술ㆍ채록 할 수 있었다. 특히 백길마을에서는 도깨비불이 많으면 농사가 풍년이 들 것이며, 도깨비불이 적으면 흉년이 든다는 민담을 민담을 구술ㆍ채록 할 수 있었다.
또한 화농마을의 옛 지명은 수렁고지인데, 마을 밖에서 마을로 들어오는 길이 수렁과 같다고 해서 수렁고지라 불렀다 한다. 특히 이와 관련해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없이는 못산다’라는 말이 오래전부터 마을에서 전해졌다고 설명하였다.

3) 사회 민속
황등면 주민들이 지칭하는 요교호는 황등제라고 추측이 가능하다. 황등제는 우리나라 3대 호수 중 하나로 전라도를 뜻하는 호남(湖南)이라는 명칭이 이 황등제 이남을 뜻한다는 설도 존재한다. 황등면의 사회민속 중 호수와 관련된 민담이 눈에 띄는 것도 이 요교호 때문이라고 추측된다. 황등면은 배와 관련된 사회민속을 구술ㆍ채록 할 수 있었다. 우선 신석마을과 화농마을에서 구술ㆍ채록한 ‘짚신’과 관련된 사회민속이 그것이다. 황등면의 대표 상품 중 하나를 손꼽아 달라고 부탁하니 주민들이 ‘짚신’을 지목하였는데, ‘짚신’을 많이 만들어 팔았다는 것이 주민들의 증언이다. 그리고 이 ‘짚신’을 뱃사람들이 배 위에서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구입했다는 것이 주민들의 증언이다.
도촌마을과 무동마을에서는 거리제를 지냈다는 민속을 구술ㆍ채록 할 수 있었다. 특히 도촌마을 주민들은 상여가 마을에 지나갈 때 거리제를 지냈다고 증언해 주었다. 무동마을 역시 거리제를 지냈는데, 무동마을의 경우 거리제를 지낸 뒤 음식을 버리고 왔다고 증언해 주었다. 음식을 귀신이 먹고 풍년과 무병장수를 기원했다는 것이 마을 주민들의 증언이다. 거리제는 산신제나 당제와는 그 성격이 확연히 다르다. 산신제와 당제가 마을 공동체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했다면, 거리제는 재역소멸, 역질퇴치, 우마창성 등 좀 더 구체적인 성격을 갖는다. 특히 거리제는 마을에 닥칠 재앙을 막아내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이 같은 성격상 거리제는 전염병과 괴질의 창궐로 인해 인명적 손실이 컸던 열악했던 지난날의 사정이 반영된 것으로 풀이 된다. 또한 산신제나 당제가 남성 중심의 엄숙한 분위기에서 진행되는 반면 거리제는 남녀노소 누구나 참여하는 가운데 축제 분위기 속에서 치러진다. 거리라는 의미가 상징하듯이 복이 들어오고 나가는 통로이자 온갖 재앙과 부정이 깃드는 곳이 바로 거리이다. 이 같은 거리제는 마을 공동체가 보존되는 지역에서만 나타나는데, 황등면의 거리제는 황등역을 중심으로 한 도시화 진행과 반대로 아직도 마을 공동체가 잘 유지 되고 있다는 하나의 증거이다.
거리제와 그 성격이 비슷한 것이 바로 ‘금줄’문화이다. 이 ‘금줄’에 대해 무동마을에서 구술ㆍ채록 할 수 있었다. 무동마을의 주민들은 전염병이 돌면 금줄을 매달아 놓고 전염병이 들어오는 것이 막았다고 증언해 주었다. 거리제가 공동체적 의식이라면 ‘금줄’은 개개인이 전염병에 대항하는 수단인 것이다.
대동마을에서는 임금에게 진상을 하였다는 황등 용산엿에 관한 민속을 채록 할 수 있었다. 황등 용산엿은 그 맛이 일품이어서 임금이 자주 찾는 주전부리였다고 전해진다. 그 황등 용산엿을 대동마을 주민들은 아직도 생산하고 있으며, 그 맛의 비결이 마을의 좋은 샘물 덕분이라고 믿고 있다. 또한 대동마을에서는 마을에 있는 도깨비 비석이 쓰러지면 사람이 죽는다고 해서 비석을 늘 소중히 다뤘다는 민속도 채록 할 수 있었다. 이 밖에 신랑 길들이기에 대해서도 대동마을에서 채록 할 수 있었다.
황등면에서 철도와 관련된 구술ㆍ채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황등고구마와 관련된 구술ㆍ채록이다. 현재 황등고구마는 전국 생산량의 약 60%를 차지하고 있을 정도로 인기와 상품성이 높다. 그러나 황등고구마는 사실 황등에서 재배ㆍ수확하는 고구마가 아니라, 주변 삼기면나 낭산면에서 재배ㆍ수확하는 고구마라고 구술ㆍ채록 하였다. 삼기면과 낭산면은 그 지리적ㆍ교통적 한계 때문에 수도권이나 영남권으로 유통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그러나 삼기면과 낭산면에 비교적 가까운 황등면에는 황등역이 있었으며, 이 황등역을 통해 전국으로 유통하기 수월했다고 한다. 때문에 삼기면과 낭산면의 고구마가 황등역을 통해 전국으로 유통되었고, 이에 따라 자연스럽게 황등고구마라는 명칭이 생겼다는 이야기이다.
두 번째는 철도 선로 개설과 관련된 이야기이다. 원래 일제가 호남선을 만들 때 철도 선로는 용안면을 거쳐 함라면으로 개설되도록 설계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함라면에는 오래전부터 향교가 있는 등 양반들이 많이 거주 했는데, 함라 양반들이 철도 개설에 반대해서 황등면 쪽으로 철도 선로가 바뀌었다는 이야기이다.

3. 시사점
황등 주민들은 익산(益山)의 뜻이 ‘산을 이용해 큰 이익을 얻는다’라고 설명하였다. 그리고 그 큰 이익을 주는 산(山)중 대표적 산을 ‘황등산’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황등산’의 ‘황등석’ 개발은 익산 전체 경제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다는 것이 황등면 주민들의 설명이다.
황등면은 황등역과 석산개발로 인해 빠르게 도시화로 진입한 지역이다. 황등면의 석산은 황등석이라는 고유한 이름을 갖고 있으며, 이 황등석을 따라 외지 사람들이 많이 황등에 몰렸다는 것이 황등면 주민들의 설명이다. 또한 무거운 돌을 캐고 옮기는 일꾼들을 위해 황등면은 값싸고 맛있는 음식문화를 꽃피운 지역이다. 그러나 외부인구의 유입은 황등면 중심의 구술사 구술ㆍ채록 조사에 어려움을 뜻한다. 실제 황등면 중심지의 구술ㆍ채록은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였는데, 이는 황등면 중심지의 공동체 해체와 정주(定住)의식의 약화가 그 원인이라고 분석된다. 이와 반대로 황등면 외곽의 구술사는 익산시의 그 어떤 지역보다 공동체 의식이 잘 보존ㆍ계승 되고 있었다. 발복민담과 발복민속은 익산의 그 어떤 지역보다 더 보존ㆍ계승 되고 있었으며, 풍수지리와 관련된 혈자리 지명 역시 다양하게 구술ㆍ채록 할 수 있었다. 다만 황등면 외곽의 주민들에게 황등역과 황등석에 대한 구술ㆍ채록은 단편적일 수밖에 없었다. 황등역과 황등석에 대해 오랜시간 전통을 지키고 보존해 오던 주민들은 같은 생활권이라는 의식이 크게 작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