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광대학교 대안문화 연구소 : 익산시 구술사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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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면 해제

1. 개괄

성당면은 구술사 채록을 통해 문화콘텐츠 개발의 다양한 가능성이 발굴된 지역이다. 대표적으로 성당마을 당산나무에 얽힌 전설과 비보풍수에 의한 지명유래담을 들 수 있다. 기록에 의하면 마한시대는 감해국의 영토였으며 백제시대에는 감물아현(甘勿阿縣), 신라시대는 함열현, 조선시대는 함열현과 용안현이 합한 안열현에 속하게 되었다. 성당면의 명칭은 금강가에 있던 성당창(聖堂倉)에서 유래한 것으로 ‘번성한 포구’라는 뜻으로 성(盛)으로 썼다가 지금의 성(聖)자로 바뀌었다.
성당면은 인문지리적인 위치는 다음과 같다. 함라산맥을 줄기로 금강변에 위치한 익산의 3개 면(용안, 성당, 웅포)의 하나다. 익산시의 북부 평야지대(웅포, 성당, 용안, 용동, 망성)에 속하며, 조선시대에 조세미의 수송을 위한 조창인 성당창이 있던 곳이다. 성당리와 웅포면 대붕암리 경계에 있는 당집산은 제사를 지내는 당이 있어서 생긴 명칭이다.
성당면 구술사 채록 결과 다음과 같은 성과가 도출되었다. 첫째, 풍수와 관련하여 성당면 사람들의 전통적 공간인식을 확인했다. 둘째, 백제와 나당연합군의 전투와 관련한 유래가 채록되었다. 셋째, 사회민속의 광범위한 구술채록을 통해 성당면의 인문지리적 위치가 확인되었다.
첫째, 전통 지리학과 관련한 지역민의 공간인식은 풍수적 사고로 소급된다. 이와 관련한 사례로는 장전마을의 ‘스님이 도포를 입고 춤추는 혈’에 자리한 남궁찬 묘의 일화가 대표적이다. 지역민들은 남궁찬 묘의 이국적인 석상에 대해 ‘명당의 지기를 누르기 위해’ 중국에서 보낸 것으로 생각한다. 그 외 대기, 성당 마을 등지에서 묏자리와 관련된 이야기가 다양하게 채록되었다.
둘째, 성당면의 지정학적 위치를 가늠할 수 있는 역사적 기록이 채록되었다. 성당마을에선 청룡산을 배경으로 한 ‘백제의 마지막 전투’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 구술은 ‘의자왕이 당나라로 끌려가던 정황’, 백제 멸망 후, ‘백제의 승려가 심은 은행나무의 전설’을 통해 기존 문헌에서 기록되지 않은 새로운 이야기를 발굴했다.
셋째, 사회 민속에 반영된 성당면의 인문지리학적 지도를 그릴 수 있었다. 이와 관련한 사례로는 기존 문헌에 밝혀진 조창의 이동경로를 지역민의 구체적 삶의 구술을 통해 확인한 점과, 명성황후의 오라비인 민경호의 송덕비의 훼손을 통해 밝혀진 역사적 정황이 파악된 점을 들 수 있다.
성당면 구술사 채록은 기존의 인문지리적 공간인식을 확대했다. 인간 행위의 바탕이 되는 것은 공간에 대한 인식이다. 특히 백제의 마지막 전투에 대한 구술은 성당면의 지정학적 위치와 지역민의 정서를 확인할 수 있었다. 지역민들의 의식에는 전통 지리학적 개념인 풍수사상이 강하게 반영되어 있다. 특히 성당창과 옛 지형에 대한 유래가 다수 채록되었다는 점이 구술사 채록의 의미를 더한다.


2. 채록 요약

1) 지명유래

성당의 지명 유래담으로 마을의 기능적 유래담과 식생 및 형태와 관련된 유래가 다수 채록되었다. 기능적 유래로는 교항, 내난, 상와마을을 들 수 있으며 생태와 관련된 유래로는 내난, 대기, 장전 마을이 포함된다.
교항마을의 옛 이름은 ‘다리목’으로 인근에 나무다리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다리는 남포마을 사람들이 교항마을에서 식수 공급을 하기 위해 놓은 것. 마을 뒤에 도당산이 있어서 ‘도당매’라고도 불린다. 마을의 앞들을 ‘가장매’라고 부르는 데 그 연유는 알 수 없으며, 인근의 구억마을은 구석마을이라는 뜻이 와전된 것이다. 상와마을은 ‘상와’와 ‘중와’ 마을이 통합된 이름으로 과거 기와를 굽던 마을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성당(聖堂)마을은 별신제를 모시는 당이 있어서 유래했다. 조선시대 세곡을 운반하기 위해 만든 조창(성당창)이 있어서 성포라고도 불린다. 구술자에 의하면 이곳에 터를 잡은 은성당(隱聖堂)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생태와 관련된 지명 유래는 과거 주민생활의 식생지도를 그려보는 근거가 된다. 내난(內蘭)마을은 과거 남포, 안다래, 밭다래로 불렸으며 과거 ‘난포(薍浦)’를 구분하여 쓰던 명칭이다. 이 지역에 갈대가 많았던 것이 유래한 것이다. 대기마을은 ‘큰 들’의 한자 이름인 ‘대기(大機)’를 위치에 따라 구분한 명칭. 마을 앞 들이 큰 벼틀처럼 넓은 들이기에 ‘한틀마을’로 불렸다. ‘배나무 꼬쟁이’는 금강물이 넘칠 때 마을의 가장 높은 곳에 배를 묶었던 곳을 일컫는다. 장전마을은 며느리와 시어머니가 밭을 매다가 상대를 잃어버릴 정도로 밭이 길어서 유래했다고 한다. 이 마을은 매화가 많이 피어서 ‘또매’라는 재미있는 지명도 있다. ‘당사’는 뱀이 많아서 생긴 이름이다.
구술사 채록으로 문헌과 다른 유래도 채록되었다. 두동(杜洞)마을은 길이 막혀 있다고 하여 ‘막골·망골’로 부른다. 지형이 삼면이 막히고 한 면만 터져 있어서 그렇게 불리게 된 것이다. 그런데 지역민의 말로는 ‘두동’의 유래가 단종 폐위사건 이후 이주해온 박 씨들이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고 하여 두문 분출 ‘두동’으로 불렸다고 한다.(두동) 부곡(富谷) 마을은 도평부곡(桃坪部谷)이라 불렸으나, 고을 원님이 풍수적으로 ‘부자가 나올 형상’이라 하여 부곡(富谷)으로 개칭하게 되었다. 이 마을에는 ‘옥논’이라 불리는 곳이 있는데 과거에 ‘옥터’가 있었다. 외두마을의 옛 이름은 ‘어르매’인데 과거 응골과 강 사이 중간(어름)에 마을이 형성되어 유래된 이름이다. 지역민들은 ‘어르매’, 혹은 어연(漁鳶)이 변한 이름으로 알고 있다. 그것은 생선이 풍족하고 솔개가 많아서 붙여졌다고 한다.


2) 전설 및 민담

성당면의 전설 민담은 크게 풍수설화와 효자설화, 그리고 도깨비 이야기로 채록되었다. 풍수는 장풍득수(藏風得水)를 줄인 말이다. ‘바람은 가두고 물을 얻는다.’는 뜻은 자연에 대한 적극적인 태도를 낳았다. 비보풍수(裨補風水)는 부족함을 채워 보완하려는 실천이다.
성당마을 당산나무 이야기는 성당면 사람들의 비보풍수적 사고를 잘 보여준다. 성당마을의 청룡산은 나당연합군의 공세를 막기 위해 백제 수비군이 활을 쐈던 곳. 황산벌 전투가 벌어질 무렵, 성당면에선 나당연합군의 수군을 저지하기 위한 전투가 치열하게 벌어졌다. 그러나 황산벌에서 백제군이 패퇴하자 어쩔 수 없이 성당의 수비군도 항복하고 말았다. 전쟁이 끝나고 당나라로 끌려가게 된 의자왕이 마침 마을 앞을 지나갔다. 시간이 흐른 후 이 마을에 부상을 입은 백제의 도승이 찾아왔다. 그는 요양을 하며 나무를 한 그루 심었다. 그 자리는 성당 전투의 광경을 지켜봤으며, 패주가 된 의자왕이 끌려가던 자리다. 그리고 그때 이후 천년이 넘었을 그 자리에 성당마을의 당산나무가 서 있다.
성당면의 당산나무 전설은 결사항전을 했으나 결국 패전하고 만, 백제군과 비장하게 끌려가는 의자왕의 이야기에서 지역민들의 상실을 드러낸다. 그리고 이 상실을 감싸는(비보) 나무(풍수)의 주제자로서 ‘부상을 입은 백제의 도승’을 등장시킨다.(성당, 대기) 이 당산나무 전설에는 명당과 관련한 외전(外傳)이 전해진다. 명당은 곧 성속(聖俗)의 관점에서 볼 때, ‘성’에 속하지만 ‘속’에 존재하는 곳이다. 성당면의 민속과 풍수는 ‘속’의 결핍에 대한 ‘성’의 비보적 성격을 갖는다. 즉, 백제 멸망과 같은 현실의 비유로서 풍수설화가 탄생했다고 볼 수 있다.
전쟁과 관련한 풍수설화는 다음과 같다. 함라산의 닭 바위와 지네 혈 이야기가 있다. 닭과 지네가 함라산에 만나서 싸워서 닭이 이겼으나 지네의 독이 워낙 강해서 결국 모두 죽어서 바위가 되었다.(대기, 두동) 매봉산에 ‘당사’라는 곳에는 ‘뱀산’과 ‘두껍산’있다. 이 명칭이 만들어 진 것은 ‘뱀이 두꺼비를 쫓다가 그 앞에 독뱀이 있는 것을 보고 고개를 돌리고 있는 형상이라고도 하고 입을 벌린 뱀을 두꺼비가 버티는 형국이라고도 한다.(부곡, 장전) 또한 내난 마을은 풍수적으로 ‘말 안장 혈’에 속하여 ‘말을 타기 위해 디디는 곳’과 ‘말 궁뎅이’라고 부르는 바위가 있다.(내난)
명당과 관련된 풍수설화는 장전마을의 ‘남궁찬 묘’와 관련된 이야기를 들 수 있다. 이 묘는 ‘선인이 도포를 입고 춤을 추는 형상’인데 이 명당의 혈을 누르기 위해 중국에서 무거운 석상을 보내온 것이라 한다.(장전, 성당) 이 설화는 용안면에서 채록된 ‘남궁도령’ 설화와 유사하다. 또한 대기마을은 신선이 베를 짜는 선녀직금형(仙女織錦形)이며 외두마을은 ‘까마귀 밥통’(오사곡 烏士谷)과 ‘솔개가 날개를 펴는 혈’이 있다.(내난, 외두) 이상 세 가지 풍수설화는 모두 하늘과 연관이 있다. 신선, 까마귀, 솔개는 지상과 하늘의 중간에 존재하며 신성의 표현이다.
도깨비와 이무기 이야기처럼 초자연적인 이야기도 채록되었다. 성당면의 도깨비 이야기는 경험성에 의한 풍수적 금기의 사례를 보여준다. 대기마을에서는 도깨비가 나타나면 맑은 밤하늘에 먹구름을 몰려온다고 생각하며 빗자루와 부지깽이에 피가 묻으면 도깨비가 생긴다고 믿는다. 이는 여성적 금기가 작용했음을 의미한다. 또한 외장마을과 상와마을에서는 새 도로가 난 뒤에 도깨비불이 사라지고 교통사고가 빈번히 일어난다.(외장, 상와) 내난마을에서 채록된 이무기 이야기는 개인적 경험성이 집단의 서사적 언술로 이어진 경우다. 해방 무렵에 큰 비가 내렸는데 이무기가 나타나 물길을 막는 바람에 홍수가 났다는 사연은 초자연적 현상이 주민의 삶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3) 사회 민속

성당면 사회 민속 구술사는 성당 별신제로 대표되는 민속의식과 성당창의 존재로 인한 사회사적 조명을 가능하게 한다. 정월 보름에 열리던 성당포 별신제는 ‘용골’에서 열린 기우제와 함께 민속신앙이 고착한 사례다. 별신제는 황룡산의 순풍당(順風堂)에서 조운의 안녕과 풍어를 기원하기 위해 지냈으며 기우제는 ‘용이 사는 골짜기’에서 지냈다. (성당, 외두, 장전) 두동교회와 관련한 구술은 타문화의 수용과정이 흡수나 잠식이 아닌 수용과 융합의 형태가 됨을 보여준다. 두동교회를 건축한 것은 박재신이라는 3천석 부자였다. 그는 ‘예수를 믿으면 자손이 번창한다’는 말을 듣고 아내를 이웃 마을 교회에 다니게 했는데 회임을 하자 예배당 건축을 주도하게 된다. 이때 성당포구에 안면도산 소나무가 떠 내려와서 자재의 수급이 원활해졌다. 그리고 교회에서 집회를 하는데 들보에서 ‘물이 떨어지다가 뚝 그치는’ 현상이 일어나자 사람들이 신비한 일이라고 했다. 두동교회가 생기기 전에는 감나무아래 각시귀신, 신랑 귀신이 출현했는데, 교회가 지어진 후에는 나타나지 않았다.(두동) 두동교회 이야기는 지역민의 민속적 지향을 말해준다. 즉 민속적 신앙의 연장선에서 볼 때 기독교 포교에 초자연적 현상이 영향을 끼친 것이다. 기독교와 민간신앙 의식이 결부된 또하나의 사례로 부곡마을을 들 수 있다. 예전에 바다였다는 마을의 옛 지명은 자라밭이다. 이 마을에 부곡교회가 생겼는데 그 앞에 바위가 드러나면 풍기가 문란해진다고 하여 흙으로 덮어 두었다(부곡) 부곡교회 이야기 역시 풍수의식이 반영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성당면에서는 마을에 아픈 사람이 생기면 산신령에게 못 할 일을 해서 ‘동토났다’고 생각했다. 이때 ‘주상방아를 찧는다.’ 멍석위에 아픈 환자를 눕히고 복숭아 나무를 두들기면서 무당이 장단에 맞춰 소리를 한다. 주상방아는 멍석 위의 환자를 이리저리 돌리면서 위의 행위를 반복한다. 환자의 병이 다 낳으면 멍석을 불살라버리고 농악을 치고 끝낸다. 부곡마을의 오래된 나무를 베었다가 자손이 화를 당했다는 이야기와 상와마을에선 나무를 베자 나무에서 피가 흘렀고 참가한 사람이 절명했다는 이야기도 무속의식을 보여주는 일화다.(장전, 부곡, 상와, 성당)
성당창의 존재는 지역의 사회의식을 높이게 되었다. 성당창은 웅포의 조세창이 옮겨온 것으로 19세기 말에 폐창될 때까지 조선 9개 조창 중 규모가 가장 컸다고 한다. 인근 고을의 세곡들이 성당창으로 모이기 위해선 외두 마을의 좁은 길목을 지나야 했는데, 지역민들은 길가에 삿대를 꽂아서 가마니에서 흘린 나락을 줍곤 했다. 장전마을에서는 성당포구에 쌓아 두었던 노적(공출미)를 전라도와 충청도 장사가 높이 쌓는 경합을 벌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장전) 사람들이 모이게 되면 민도 또한 높아지기 마련이다. 동학혁명때 성당마을의 비석거리가 파괴된 이야기와 이완용 집안의 묘에 관한 이야기는 지역민의 민중의식을 나타낸다. 성당마을에는 명성황후의 오라비인 민경호의 송덕비가 있었다. 동학도가 일어났을 때, 성당창을 풀어 지역민에게 나눠주고 민경호의 송덕비는 마을 논의 물코 막는데 사용했다.(성당) 성당마을에는 을사오적인 이완용 집안의 묘가 있다. 이완용의 세도가 한창 있을 때의 일이다. 하루는 이완용 집안사람들이 성당마을에 와서 묘자리를 간곡히 청해서 허락을 받았다. 그곳은 예전에 조창이 있던 자리. 이씨 집안 사람들은 묘를 쓴 후에 마을의 행사가 있으면 음식을 후하게 내는 등 사후에도 각별하게 관리했다.(성당)

3. 시사점


성당면 사람들은 풍수의식과 인문지리적 의식이 강하게 남아 있다. 지명과 전설에 나타난 의식은 명당의 발복을 기원하는 전통적인 충효사상으로 맥을 같이한다. 대기마을에서는 파묘를 하자 땅에서 김이 올랐다. 그게 소문이 나서 인근의 20여리 밖에 사는 사람들도 그 흙을 가져다 약을 해먹었다.(대기) 또 장전마을의 ‘효자 남궁관’ 이야기도 자신의 허벅지 살을 떼어서 부모의 병간호를 했으며, 3년간 시묘살이를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장전)
두동교회와 관련한 구술은 기독교가 지역의 민속의식과 결부되어 나타난 사례이며 장전마을에 내려오는 ‘노적 쌓기 이야기’는 성당창이 일제 강점기까지 조운의 중심지였음을 드러낸다.

<리드>
“백제가 망한 뒤, 의자왕이 끌려간 길 가에 백제의 고승은 나무를 심었다.”
“정월 보름에 당산제에 올라 안전한 조운을 빌며 별신제을 벌였다.”
“동학도들은 성당창를 풀어서 곡식을 나눠주고 명성황후 오라비의 송덕비를 파괴해서 물막이 돌로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