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광대학교 대안문화 연구소 : 익산시 구술사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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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궁면 해제

1. 개괄

왕궁면은 익산시의 동쪽에 자리 잡은 노령산맥의 줄기에 자리하고 있다. 금마면 일대가 청동기문화의 중심지였다면 왕궁면은 철기문화가 유입된 마한 시대에 번창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마한의 54개국 중 왕궁의 불사분야국은 금마의 건마국, 여산의 여래비리국과 함께 금마 일대의 맹주였다. 4세기 근초고왕에 의해 백제에 복속된 이후 이 지역은 백제 무왕의 궁이 자리한 곳으로 알려졌으며 일대를 중심으로 백제문화 유적들이 조성되었다. 그 중 왕궁탑은 금마의 미륵탑과 함께 대표적인 백제 유산으로 꼽힌다. 왕궁탑은 궁터 앞에 있는 석탑이다. 일설에는 도선이 완산의 지리가 웅크린 개의 모습으로 꼬리에 해당하는 이곳에 탑을 세워 견훤을 경계했다고 한다. 현지에서 도선의 이야기는 알 없고 다만 풍수지리와 관련된 유사한 이야기들을 채록할 수 있었다.
왕궁면은 용화산(龍華山)과 도순산(都巡山)을 머리로 한다. 도순산은 시대산이라도 불리는데 시대산이라는 이름은 도순리의 ‘시대(始大)마을’과 연관이 있다. 용화산은 금마․왕궁․여산면에 걸쳐 있는 해발307M의 큰 산이다. 옛 문헌에 의하면 용화산은 기준왕의 옛 서울로 성궐의 자취가 있으며 백제 의자왕이 산 위에서 잔치를 베풀고 놀았다고 한다.
왕궁면의 대표적 하천은 왕궁저수시에서 발원한 익산천(益山川)과 봉화제에서 발원한 부상내(扶桑川)다. 두 하천 모두 옥룡천과 합류하여 만경강으로 들어간다. 수상교통의 관점에서 볼 때 익산천이 왕궁의 직선 도로라면 부상내는 우회도로인 셈이다.


2. 채록 요약

1) 마을유래

왕궁면은 이름에서 상징되는 과거의 영화를 지명으로 간직한다. 왕궁면의 남쪽은 왕궁터와 관련된 지명이, 여산면과 인접한 북쪽은 숯고개 일대를 중심으로 후백제 때 전투지였음이 다수 채록되었다. 옛 왕궁터였음을 증명하는 구체적 지명으로는 궁평마을과 신정마을이 있다. 이름은 각각 궁녀와 신하들이 살았던 데서 유래했는데 인근의 ‘창뜰’이라는 지명은 무기고 자리를 뜻한다.(궁평, 근남, 탑)
후백제 시절 전쟁과 관련된 지명은 여산과 인접한 숯고개 인근의 신탄마을에서 다수 채록되었다. 이 마을의 옛 이름은 탄곡(炭谷), 혹은 수실이며 탄현(炭峴)이라고도 한다. 기록에 의하면 “왕건의 군대가 이곳에서 주둔(수실) 했다.”고 전한다. 채록 결과 마을주민들은 ‘텃골’, ‘수실’, ‘제실’이라는 옛 지명은 알고 있되 유래는 알지 못했다. 반면, 연정마을에서는 과거 전투가 벌어졌음을 의미하는 지명유래가 다수 전승되었다. ‘기따배기(깃발)’, ‘투구봉’, ‘도가뜸(칼)’, ‘사솥골(솥)’이 그것. 용남마을에서는 성터와 관련된 지명인 ‘성묘산’과 ‘투구봉’, 말을 매었다는 ‘말매산’ 이야기가 채록되었다.
문헌기록과 다른 유래가 전해진 경우도 많았다. 가좌마을은 문헌에 기록된 가좌(加佐)가 아닌 가좌(加坐)라고 하여 ‘마을에 더 머물러 있으라’는 의미에서 유래되었다고 전한다. 이 유래는 다음과 같다. 큰 전쟁을 피해 타지 사람들이 가좌 마을로 다수 피난을 왔다. 이윽고 전쟁이 끝났다는 소문이 나자 마을 밖으로 나간 사람들이 화를 입게 되었다. 그래서 '더 있지 왜 나갔느냐'는 아쉬움에 ‘가좌 마을’로 불렸다는 것이다. 아마도 지역민이 자신의 마을을 긍정적으로 해석하려는 낭만적 해석으로 보인다. 비슷한 예로 이탄마을이 있다. 이 마을은 무연탄이 많이 출토되어 유래된 이탄(二坦)이 아닌, 탄식을 두 번 하는 마을(이탄二嘆)로 구전 채록되었다. 그 이유는 아름다워서 한 번, 가난해서 또 한 번 탄식이 나온다는 것이다. 이탄 마을 사례처럼 해당 지역민들은 지명과 마을의 운명을 연관지어 사유했다. 온수리의 송장골은 나병환자가 거주하기 이전부터 그렇게 불렸으며, 앵금마을은 행금(杏金)이라는 기록을 알지 못하고 ‘앵금(앵무새 모양의 금)’이 출토되자 마을이 쇠락했다고 믿어진다.(앵금, 사덕) 또한 기록의 내용과 출처가 다른 경우도 있다. 부상마을은 사람들은 기록과는 반대로 마을 지명이 부상(附桑)천에서 유래했다고 믿고 있다.
문헌에서 기록된 내용에 구체적인 사례를 덧붙인 증언으로는 발산마을의 경우를 들 수 있다. ‘발산’은 불가에서 쓰는 바리때의 모양의 지형에서 유래되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주민들은 옥으로 만든 바르태(바리때)가 실제 마을의 뒷산에 묻혀 있다고 믿고 있다. 또한 장중마을처럼 1972년 행정구역 통합시 각각의 이름이 통합되어(장암, 중리) 유래의 의미가 사라진 경우 과거 장암(마당바우)에서 곡식을 말리거나 놀았다는 증언이 채록되었다.


2) 전설

왕궁면의 대표적인 전설은 왕궁탑 전설과 서동전설이다. 서동전설은 익히 알려진 바, 백제 무왕과 선화공주에 대한 이야기다. 왕비는 꿈에 미륵삼불을 만난 후, 왕과 탑을 세울 것을 의논하여 노상리에 둘, 왕궁면 왕궁리(탑리)에 하나를 세웠다.(부상, 사덕, 앵금) 왕궁탑 전설은 오누이의 탑 쌓기 내기다. 남녀대결의 공통점은 남자는 왕궁탑을 쌓고 여자는 미륵탑을 쌓았다는 점에선 일치한다.(사덕, 탑, 앵금)
‘오누이의 탑 쌓기 내기’는 두 가지 버전이 있다. 하나는 남매가 내기를 했는데, “누이는 미륵탑을 꼼꼼히 쌓느라고 시간 안에 다 쌓지 못하고 오빠는 적은 규모로 건성건성 쌓아서 먼저 쌓고 말았다. 그래서 누이는 오빠에게 지고 말았다.”는 것. 두 번째는 오누이의 어머니가 등장한다. 탑 쌓기 내기에서 진 사람은 집을 나가야 한다는 가혹한 조건이 있다. 딸은 큰 탑(미륵탑)을 맡아서 열심히 쌓았고 아들은 작은 탑(왕궁탑)을 맡아서 엉성하게 쌓았다. 결과는 동시에 끝나게 되어 아무도 내쫓기지 않았다. 현지에서 채록된 내용은 두 번째 이야기에 가깝다. 다만 아들이 이기는 것을 바란 엄마의 적극적인 관여가 강조된다. 탑마을에전승된 이야기는 내기에 진 쪽이 죽는다는 극적인 버전이다. 그래서 아들을 살리기 위해 어머니가 더 큰 미륵탑을 딸에게 쌓게 하고서 또 자주 쉬게 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앵금마을에서 오누이 내기가 아닌 남녀 장수로 변형되어 전승된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여자장수가 미륵탑을 쌓고 남자장수가 왕궁탑을 쌓았는데 여자장수는 치마폭에 돌을 담아 옮겼기 때문에 남자장수보다 탑을 크게 쌓았다.” 왕궁탑 전설은 미륵탑을 쌓은 쪽(여자)이 왕궁탑을 쌓은 쪽(남자)을 이긴 것으로 결론짓는다.
학계에서는 왕궁탑 건립을 비보풍수의 영향으로 보고 있다. 왕궁면에 있는 왕궁리 5층석탑과 제석사지, 고도리 입상은 보존이 잘 되어있을 뿐 아니라 비보풍수적 성격이 있다고 한다. “금마, 왕궁일대의 흠은 청룡과 백호에 해당되는 산줄기가 평행선을 그어 수구(水口)를 제대로 막아주지 못하는 부분이다. 마치 여자가 두 다리를 벌리고 있는 형상이다.”(익산시사) 따라서 풍수상 결함을 보충해 주기 위해서 쌍석불(고도리 입상)을 세워 빠져나가는 기를 막으려 했다는 것이다. 또한 도선국사가 견훤에게 “후백제가 영성하려면 개꼬리 부분에 해당되는 곳에 탑을 세우면 된다.”고 하여 왕궁탑이 세워졌다는 설도 있다.
이상으로 왕궁탑과 관련된 세 가지 이야기를 살펴보았다. 왕궁탑이 왕비의 꿈에 의해 건립한 것인지, 오누이의 내기에 의한 것인지, 비보풍수의 영향이던지 지역민의 의식속에 왕궁탑은 미륵탑과 연관 되어 있다. 그러나 신왕도 건설의 시각으로 살펴보면 아마도 신왕도로서의 완벽한 땅을 만들려 했던 조상들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3) 민담

민담의 형성은 대부분 마을의 입지와 관련돼 있다. 산자락에 가까운 마을에는 여우 이야기가, 샘 마을에서는 빨래하는 귀신 이야기가 전해오는 식이다. 왕궁면에서 채록한 민담은 동족촌의 특성 때문인지 사회질서와 관련된 터부의 이야기가 많았으며 도깨비 이야기와 풍수지리와 관련된 이야기도 채록되었다.
여우는 길흉의 조짐을 알려주거나 아이의 시신을 훼손하는 존재로 인식되었다.(가좌, 근남, 부상, 발산, 탑) 따라서 이 지역에서 예전에 아이가 죽으면 시체를 포갠 항아리 안에 넣어 매장했다. 그 이유는 여우에게 해를 입지 않기 위해서다. 왕궁면 사람들은 술을 먹고 집에 돌아오다가 여우에게 홀렸다던가 여우 우는 장소에 따라서 마을의 길흉이 달라진다고 믿었다. 벌샘으로 유명한 온수마을에는 빨래하는 귀신이야기가, 절이 있었던 장중마을의 중리에서는 싸우는 귀신 이야기가, 군부대 인근에 자리한 시대마을에서는 군복입은 귀신 이야기가 전해진다. (가좌, 시대, 양동, 온수, 용남, 장중)
도깨비 이야기는 전반적으로 채록되었다. 도깨비와 씨름을 하고 났더니 빗자루로 변했다거나, 비가 올 적엔 유난히 도깨비 불이 많이 나타나는데, 여자의 생리혈이 빗자루에 묻으면 도깨비 불이 된다고 믿겨졌다(궁평, 근남, 부상, 발산, 연정, 오포, 장암, 탑) 오포마을에서는 장례식을 치르던 도중 관 속의 망자가 다시 살아났다는 기이한 이야기가 채록되었고 혼불과 관련한 이야기는 궁평 마을에서도 전하고 있다.
풍수지리와 관련된 이야기는 이서구라는 인물과 관련되어 있다.(금광) 그가 일대에 유명한 전라감사인지 동명이인인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그러나 길을 내거나 땅을 파자 길에서 피가 흘렀다는 신비한 길 이야기가 전한다. (부상, 시대, 장암, 이탄) 일제 강점기 '개의 혈‘ 자리에 신작로를 내자 갑자기 피가 솟구치고 마을이 망했다‘는 이야기는 풍수에 대한 주민들의 신뢰를 보여주는 일화다.
집지킴이로서 구렁이에 대한 이야기도 채록되었다. 내용은 집이 망하려고 하니 구렁이가 나왔다거나 구렁이를 죽였더니 그 집 가장이 죽었다는 등 집 지킴이로 인식되고 있었다. (궁평, 근남, 금광, 장암)


4 )사회 민속적인 부분

왕궁면은 동족촌이 발달항 보통 일반 촌락보다 단결심이 강하고 규모가 크며 엄격한 공동체적 질서가 유지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따라서 지역사회에서 불문율처럼 내려오는 금기와 관련된 이야기도 다수 채록되었다. 대표적인 것이 ‘귀목’ 혹은 ‘신목’으로 불리는 나무의 벌목 금지 이야기다. 당산나무에 대한 경외심은 물론 나무에 해꼬지를 하는 사람은 반드시 해를 당한다고 믿어졌다. 그래서 땔감이 없어도 그 나무의 나뭇가지 하나 줍지 않았으며 상여를 맬 때는 나무 근처로는 다니지 않았다는 것이다. (가좌, 궁평, 부상, 시대)
한편 왕궁면의 대표적인 민속놀이는 기세배놀이다. 이 놀이는 “정월 세배절기를 맞이하여 여러 마을 농군들이 농기를 앞세우고 형마을부터 차례로 찾아가 기세배를 교환하고, 한 곳에 모여 풍물과 기놀이 등을 즐기며, 한 해 풍년을 기원하는 놀이다.” 금마면과 왕궁면 일대에 전래된 기세배 놀이는 익산의 서쪽인 함열지방에는 농기뺏기 형태로 전승된다. 왕궁면 채록시 기세배의 전통이 강하게 남아 있던 마을은 (궁뜰, 금광, 부상, 발산, 용남)을 꼽을 수 있다. 또한 기우제 혹은 산신제를 지낸 마을은 (가좌, 궁뜰, 사덕, 발산, 신탄)을 아직도 삼신받기 등의 전통 민속이 남은 마을은 (부상)이 있다.
용남마을은 유독 우물을 신성시한다. 다른 마을에서 새신랑이 오면 신부가 먹던 샘에 절을 시키며 길들였고, 해마다 우물을 청소할 때는 마지막으로 물을 푸는 사람이 아들을 낳는다는 말이 있어서 우물관리에 정성을 다했다.
주목할 점은 왕궁 궁터 앞으로 큰 강이 흘렀다는 주장이 다음의 마을에서 채록되었다. (근남, 부상, 신정, 오포, 탑 ) 특히 ‘섬드리’라는 명칭과 왕궁면의 사태골이 모래가 많이 쌓이는 사태(沙汰)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과거에 마방집이라 하여 역이 있었던 곳이 금광마을과 부상마을에 전한다. 특히 시대마을 앞의 역터주유소는 과거 역터가 있었던 장소였는데 일제강점기 시절 길을 넓히면서 ‘개 혈’을 잘랐다고 전한다. 또한 나병환자에 대한 미신도 전해지고 있었다. (오포)

3. 시사점

왕궁면도 지역민의 도시 이주가 활발해지면서 과거 농촌사회의 근간을 이루었던 동족촌의 모습은 희미해지고 있다. 그러나 타 지역에 비해 전통에 대한 긍지가 비교적 많이 나타남을 알 수 있다. 왕궁면의 남쪽은 왕궁터와 관련된 지명이, 여산면과 인접한 북쪽은 숯고개 일대를 중심으로 후백제 때 전투지였음이 다수 채록되었다. 특히 왕궁터 앞에 큰 강이 흘렀다는 주장은 금마면에서 채록된 ‘물 길’에 대한 주장과 일치한다.
시대와 이탄마을에서 채록된 ‘새 길을 내자 개 혈 자리에서 피가 흘렀다’는 이야기는 왕궁탑을 세울 때 도선이 완산의 ‘개혈’지기를 누르기 위해서였다는 것과 상통한다. 기록에 의하면 ‘왕궁탑이 완성된 날에는 3일 동안 낮이 캄캄했다’고 한다.(금마지) 그러나 현지에서 채록된 왕궁탑 전설은 미륵탑 건립과 연관되어 탑쌓기 내기의 이야기로 전승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