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기면 해제

1. 개괄

“어떤 사람 팔자 좋아 호위호식 잘~ 사는디,
콩꺽자~ 콩꺽자~ 두렁넘어~ 콩꺽자~
이내 일신 어이하여 지게목발을 못 면하나,
콩꺽자~ 콩꺽자~ 두렁넘어~ 콩꺽자~”

이 민요는 삼기면 검지마을에서 채록한 ‘익산 지게목발 노래’의 일부이다. 고단한 농민의 삶을 해학적으로 표현한 이 민요는 전(前) 전북무형문화제 1호로써 삼기면의 주민들 삶을 직ㆍ간접적으로 표현해 주고 있다. 그러나 2005년도에 ‘익산 지게목발 노래’의 전수자의 타개 이후 문화재 등록이 취소되는 수모를 겪었다.
삼기면은 농사의 고장이다. 익산의 다른 지역도 마찬가지지만 삼기면은 농업에 뿌리를 두고 있는 지역이라 할 수 있다. 다만 그 땅이 척박하고, 천수답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삼기면 주민들은 삼기면이 빈촌(貧村)이었다 칭하며, 자신들의 살아온 인생을 덤덤히 반추하며 구술을 진행해 주었다.
삼기면은 주민들의 구술대로 비록 빈촌(貧村)이었으나, 역사는 오래된 지역이다. 삼기면은 본디 마한땅이다. 백제 시조 온조왕이 합병하여 금마저(金馬渚)라 하였다가 신라 경덕왕 때 금마군(金馬郡)으로 고쳤다. 이렇게 오래된 역사와 전통이 숨쉬는 삼기면은 많은 전설과 민담을 품고 있다.
우선 삼기면의 대표적 민담은 풍수지리(風水地理) 민담이다.(구정마을, 원서두마을) 대표적으로 구정마을의 오룡쟁주(五龍爭珠) 혈(穴)자리 민담이다. 특히 오룡쟁주는 풍수지리에서 최고의 명당 중 하나로 손 꼽는 명당이다. 이러한 오룡쟁주 혈(穴)자리 민담을 삼기 구정마을에서 채록할 수 있었다. 원서두마을은 쥐의 혈(穴)자리를 닮았다고 한다. 쥐는 재물을 모으는 습성을 가지고 있는데, 이 때문에 원서두마을에는 부자들을 많이 배출했다고 전해진다. 이밖에 눈에 띄는 전설은 많이 알려진 석불여래좌상에 얽혀 있는 전설이다.(석불마을) 임진왜란 때 왜군의 행군을 안개로 막아내고, 나라가 어지러울 때 땀을 흘린다는 전설이다.
삼기면에서는 많은 마을 지명 유래담을 구술 채록 할 수 있었다. 특히 혈(穴)자리와 관련한 지명 유래담이 눈에 띈다. 채산마을과 궁교마을이 대표적이다. 채산마을은 왕비의 비녀를 닮았다 하여 채산(釵山)이라는 지명이 붙었다 한다. 궁교의 경우 ‘활다리’라는 옛 지명을 갖고 있는데, 마을이 마치 활과 같이 휘어져 있다 해서 궁교(弓橋)라는 지명을 갖고 있다고 구술 채록 할 수 있었다. 또한 농사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마을 지명 유래담과 사회민속에 관한 내용을 구술 채록 할 수 있었다. 서두마을은 ‘방죽 서(西)쪽의 콩(豆)을 심던 땅’이라는 지명 유래담을 갖고 있다. 현동마을은 가뭄골이라는 옛 지명을 가지고 있었다. 농사를 짓기 어려울 정도로 땅이 가물었다 해서 ‘가뭄골’이다. 그리고 검지마을을 비롯한 모든 마을에서 술멕이와 기우제에 대한 내용을 구술 채록 할 수 있었다.

2. 채록요약
1) 지명유래
삼기면의 대표적 마을 지명 유래담은 혈(穴)자리와 관련된 민담이 눈에 띈다. 우선 채산마을의 지명 유래담은 금비녀와 관련되어 있다. 채산마을이 풍수지리적으로 왕비의 금비녀를 닮았으며, 이에 금비녀 혈자리라는 뜻에서 채산(釵山)이라고 붙었다는 것이다. 궁교마을은 지관들이 무력으로 마을을 만들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미륵산이 수원지(水源池)인 마을 앞 하천에 지관들이 활처럼 휘어 있는 다리를 만들고 마을의 터를 잡았다는 전설이 있다. 그래서 활다리라는 지명과 함께 궁교(弓橋)라 불렀다는 이야기이다. 또한 궁교 마을에는 다른 지명 유래담도 전해져 오는데, 바로 궁터라는 전설이다. 지관들이 궁터의 혈(穴)자리를 갖고 있기 때문에 강제로 마을을 만들었다는 마을 지명 유래담이다.
원서두마을 역시 두 개의 마을 지명 유래담을 갖고 있다. 첫 번째 지명 유래담은 혈(穴)자리와 관련을 맺고 있다. 이는 마을이 쥐의 모습을 닮았다고 해서 서두(鼠頭)이다. 상정마을과 원촌마을 주민들 역시 원서두마을이 쥐의 혈을 닮아서 서두(鼠頭)라 불렀다고 구술 채록 해 주었다. 그리고 두 번째 지명 유래담은 농사와 관련을 맺고 있다. 삼기면에는 방죽이 있는데, ‘방죽 서쪽 콩을 재배하는 마을’이라고 해서 ‘서두(西豆)’가 되었다는 유래담이다. 또한 서두 마을에는 매봉제라는 봉우리가 있는데, 마을 주민들에 의하면 매봉제는 봉화터였다고 한다.
이 밖에 검지 마을의 경우 한때 모스크바라는 지명으로 불렸는데, 마을 주민 중 사회주의자가 많아서 모스크바라고 불렸다 한다. 원촌마을의 경우 원님이 길을 지나다 마을에서 잠시 머물러 쉬고 갔다는 민담이 전해진다. 이 민담과 관련해서 원촌마을이라고 마을 지명 유래를 구술 채록 할 수 있었다.

2) 전설 및 민담
삼기면의 대표 민담은 풍수지리 민담이 있다. 풍수지리 민담 중 눈에 띄는 것은 ‘용(龍)’과 관련된 민담이다. 이 민담은 검지마을과 구정마을에서 구술 채록 할 수 있었다. 구정마을에 따르면 오룡쟁주(五龍爭珠) 명당은 풍수지리에서 명당 중에 최고의 명당 중 하나라고 전해진다. 오룡쟁주(五龍爭珠) 혈(穴)자리는 다섯 마리의 용이 하나의 여의주를 차지하기 위해 모이는 형국이다. 이 때문에 견제로 균형을 이루고, 끊임없는 경쟁으로 발전 추구하는 최고의 명당 혈(穴)자리이다. 구정마을 주민에 따르면 지금의 익산 삼기면 일반산업단지 자리가 오룡쟁주상(五龍爭珠像)의 혈(穴)자리라는 것이다.
원서두마을에서도 동물의 혈(穴)자리와 관련된 이야기를 구술 채록 할 수 있었다. 주민들에 의하면 쥐는 재물을 모으는 습성을 갖고 있는데, 이러한 쥐의 혈을 닮은 원서두마을은 부자를 많이 배출하였다고 한다. 하갈 마을은 개(犬)의 형상을 닮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특히 주민들은 개가 누워 있는 모습인데, 마을의 중심부가 개 꼬리를 닮아서 자손들을 많이 낳았다고 구술 채록 해 주었다. 삼기산의 풍수지리 민담은 상정마을과 원서두마을에서 채록 할 수 있었는데, 삼기산이 소를 닮았다는 풍수지리 민담이다. 소가 누워있는 형국이며, 소꼬리 자리에 묘를 쓸 경우 자손이 번창한다 해서, 많은 사람들이 삼기산 명당을 찾아 묘를 썼다는 민담이다. 이와 견롼해서 삼기산에는 아홉 개의 명당이 있다는 이야기를 황등면 백길마을 주민들에게서 채록 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미륵산으로 향하는 대재마을과 소재마을 중간의 도로를 만들 때 땅에서 피가 솟앗다는 민담도 전해진다.
이렇게 삼기면에서는 풍수지리와 관련한 명당 혈(穴)자리 민담을 많이 구술 채록 할 수 있었다. 풍수지리는 터를 잡는 술법이다. 풍수지리는 지형, 지질, 기후, 온도 등 다양한 자연적 조건을 고려해서 터를 잡는다. 풍수지리는 오래전부터 농경문화가 뿌리 깊게 자리 잡은 곳에서 더 쉽게, 더 많이 찾을 수 있다. 농업의 조건, 기후의 조건을 고려한 터를 잡기 위해 풍수지리를 이용했기 때문이다. 삼기에서 많이 찾을 수 있는 풍수지리 혈(穴)자리 역시 이와 같은 맥락으로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삼기는 익산에서 손에 꼽힐 정도로 오랜 역사를 지닌 지역이다. 그리고 그 역사만큼 농경문화가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농경문화가 뿌리 깊게 자리 잡은 역사를 지닌 지역에서 풍수지리와 관련한 혈(穴)자리 민담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3) 사회민속
삼기의 사회민속은 농업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대표적으로 검지마을의 ‘익산 지게목발 노래’를 들 수 있다. ‘익산 지게목발 노래’는 농민의 고단한 삶을 해학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노래이다.
‘익산 지게목발 노래’는 농민의 삶을 해학적으로 표현한다. 한 명이 농사일의 고단함을 앞소리로 선창하면, 여러 사람이 뒷소리로 ‘콩꺽자, 콩꺾자, 두렁너머 콩꺾자’라고 후창을 한다. 이때 앞 선창자는 딱히 정해진 가사대로 부르는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 즉흥적으로 가사를 붙이기도 한다. 다만 여러 사람의 후창 ‘콩꺾자, 콩꺾자’는 즉흥적인 가사가 아니다. ‘익산 지게목발 노래’는 마을 주민 고(故) 박근갑씨의 노력 덕분에 타 지역의 농요와 같이 사라지지 않고 맥을 이어오고 있다. ‘익산 지게목발 노래’는 1973년 전라북도 무형문화제 제 1호로 지정되었다. 이밖에 두례, 술멕이, 기우제와 같이 농사와 관련된 민속을 삼기면 전 지역에서 골고루 구술 채록 할 수 있었다.
이 밖에 삼기면의 사회민속은 방죽과 관련한 구술 채록에서 찾을 수 있다. 일제는 삼기면에 금은조제라는 방죽을 만들었다. 금은조제는 방죽을 만든 일본인의 이름으로 이 방죽을 통해 천수답이었던 삼기는 비로소 논물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 것이다. 이 방죽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구술 채록 할 수 있었다. 방죽에서 사람들이 많이 빠져 죽었는데, 이 때 ‘넋 건지기’를 했다고 전해진다. ‘넋 건지기’는 물에 빠진 사람의 넋을 건지는 행위인데, 삼기면 방죽에 사람이 빠져 죽으면 무당이 밥그릇에 쌀을 담고 삼베로 감싼 뒤 방죽에 담근다. 그 뒤 무당은 굿을 하는 등 넋을 달래주고, 물에 담근 밥그릇을 꺼내봐서 머리카락이 있으면 넋을 건졌다고 한다. 만약 밥그릇에 머리카락이 없으면 머리카락이 나올 때 까지 ‘넋 건지기’를 계속한다. 또한 사람이 물에 빠져 죽었는데, ‘넋 건지기’를 안하면 같은 곳에서 또 사고가 난다고 한다. 이러한 ‘넋 건지기’는 무속 신앙 중 사령숭배(死靈崇拜)의 영향이 크다고 할 수 있다. ‘넋 건지기’ 역시 또 다른 의미에서 발복(發福)민속 이라 할 수 있는데, ‘사령(死靈)’이 살아 있는 사람을 지켜주고, 맺힌 넋을 풀어 산 사람을 헤치는 원귀(寃鬼)와 원령(怨靈)으로 발전되는 것을 막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또 다른 의미에서 ‘넋 건지기’는 ‘발복(發福) 민속’이라 할 수 있다.
익산의 자랑거리 중 하나인 황등 고구마는 전국 고구마 물량의 60%를 차지하고 있을 만큼 전 국민들에게 사랑을 받는 익산의 대표적 농작물이다. 그러나 이 황등 고구마에는 기구한 사연이 있다. 원래 황등 고구마의 원산지는 삼기 황토 고구마다. 그런데 삼기엔 철도가 없어서 전국으로 수송하기 어려움이 많았다. 그래서 삼기면 주민들은 고구마를 수확하면 황등역으로 고구마를 실어 날랐다. 이에 삼기면의 고구마는 황등역을 통해 기차를 타고 전국으로 퍼져나간 것이다. 그러나 고구마의 적재(積載)장소가 황등역이기 까닭에 삼기 고구마라 퍼지지 않고, 황등 고구마라고 널리 퍼진 것이다. 이에 여러 주민들을 통해 삼기의 자랑 중 하나인 삼기 고구마가 기차 때문에 황등 고구마로 되었다고 구술 채록 할 수 있었다.


3. 시사점
삼기면은 농업에 뿌리를 두고 있는 지역이다. 또한 익산시에서 오랜 전통과 역사를 가지고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다만 일제 강점기 이전까지 천수답이었던 까닭에 삼기면 농민의 삶은 그리 넉넉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고된 농민의 삶은 ‘익산 지게목발 노래’에서 찾을 수 있다.
오랜 전통과 역사를 가진 삼기면에서 풍수지리와 관련된 혈자리 민담은 여러 마을에서 쉽게 채록 할 수 있었다. 특히 풍수지리에서 최고의 명당으로 손꼽는 오룡쟁주 명당 민담이 눈에 띈다.
삼기의 민속은 ‘넋 건지기’가 눈에 띈다. 억울한 넋을 건져줘 원귀(寃鬼)와 원령(怨靈)으로 발전됨을 막고, 그 한을 풀어줘 오히려 산자의 발복(發福)을 기원하는 민속이라 할 수 있다.
익산시는 미래 익산 경제를 주도할 제 3 산업단지를 삼기면에 완공하고 본격적인 기업 유치에 모든 힘을 쏟고 있다. 이에 따라 삼기면은 익산의 그 어떤 지역보다 산업화ㆍ도시화가 예상되는 지역이라 할 수 있다. 급격한 산업화ㆍ도시화는 공동체의 유지, 사회민속의 전통과 계승에 방해가 되는 제일 큰 요소이다. 특히 농민의 고단한 삶을 해학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삼기 지게목발 노래는 전라북도 무형문화제 1호로써 그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았으나, 계승자가 없다는 이유로 무형문화제 등록을 취소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그리고 아직도 재등록에 실패하고 있다는 점은 앞으로 생각해 볼 문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