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괄
거리는 사람과 문화를 연결해주는 통로이자, 길흉화복(吉凶禍福)이 드나드는 공간이다. 우리 조상들은 오래전부터 길한 것은 들어오고, 흉한 것은 들어오지 말라는 의미에서 거리제를 지냈다.
산신제와 당제가 마을 전체의 안녕과 풍농을 기원했다면, 거리제는 그 특성상 재역소멸, 역질퇴치, 우마창성 등 좀 더 구체적이고 세세한 소망이 담겨 있다. 또한 산신제와 당제가 엄숙한 분위기의 남성 중심 발복(發福)행사라면, 거리제는 마을 전체의 축제와 같은 분위기에서 남녀노소(男女老少)중심의 행사이다. 때문에 거리제는 공동체 의식의 반영이라고 해석 할 수 있다.
낭산면은 공동체 의식이 뿌리 깊게 자리 잡은 지역이다. 술멕이 행사 때 주민들은 풍장을 치며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고, 주민들의 집을 가가호호 방문하여 각 집의 안녕과 행복을 기원하였다. 아들을 낳지 못한 집의 가장은 득남을 기원하며, 마을 주민 전체가 마시는 우물을 청소하였다. 그리고 마을 주민들은 득남을 같이 기원해 주며 축제로써 술멕이 행사를 즐긴 지역이다.
낭산면의 오래된 역사는 공동체 의식과 더불어 마을의 지명에서도 찾을 수 있다. 마산마을에서 ‘창뜰’, ‘함박골’등의 지명을 확인하였는데, 이 지명의 기원은 백제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타 지역의 마을명이 대개 풍수지리(風水地理)의 혈(穴)자리에 그 기원이 있다면, 마산마을의 지명 유래는 백제의 전투지에서 유래를 찾을 수 있었다.
이렇게 공동체 의식과 오래된 역사를 갖고 있는 낭산면이 살기 좋은 고장만은 아니었다. 큰 비가 오면 낭산면은 늘 물에 잠겼고, 이에 주민들의 삶은 고단했다. “비가 와서 ‘명동’이 둥둥 뜨니까, 한기마을 주민들이 ‘도마(리)’로 도망을 갔다. 그리고 겁을 먹어서 ‘검지(마을)’이고, 겁을 먹으니 욱씬욱씬하여 ‘옥실(리)”(한기마을)라는 해학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이야기는 낭산면 주민들이 침수로 얼마나 고통을 받고 있는지 잘 보여주는 민담이다. 또한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 산다”(하한마을)라는 민담 역시 낭산면 주민들의 고단한 삶을 해학적으로 풀어내고 있다.
낭산면에서 주목할 민담은 토테미즘 서사구조를 띄고 있는 바위민담이다. 바위의 흙으로부터 노출, 방향에 따라 이웃 하고 있는 마을의 길흉이 바뀐다는 민담 구조인데, 호천마을과 삼지마을에서 채록 할 수 있었다.
이 밖에 이완용 무덤과 관련된 민담도 채록할 수 있었다. 이완용 무덤과 관련된 민담은 익산시 전역에서 채록 할 수 있는데, 낭산면 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다른 지역의 이완용 묘는 가묘이며, 진묘는 낭산면에 있었다는 증언이다.
2.채록요약
1) 지명유래
낭산면 마을유래담은 크게 지형지물(호천마을, 방교마을, 상낭마을, 중리마을)과 마을의 성질(한기마을)에 기인해서 마을 지명이 생겼다고 채록할 수 있었다.
지형지물과 관련해서 눈에 띄는 마을 유래담은 방교마을이다. 방교마을은 자연생성마을로써 마을의 들 가운데 샘이 있었는데, 그 샘에 보리를 찧던 방아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방아다리가 있었다는 뜻에서 방교마을이라고 이름 붙었다는 것이 주민들의 설명이다. 호천마을 역시 지형지물과 관련된 마을유래담을 갖고 있다. 호천마을의 옛 지명은 여수내(여우내)이다. 여수내란 이름은 하천의 물줄기가 자주 바뀌기 때문에 “여수처럼 하천 물줄기가 둔갑을 한다”해서 여수내로 불렸다는 것이 주민의 증언이다. 상낭마을은 낭산산성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상낭마을의 옛 지명은 ‘성채’이다. ‘성채’란 ‘성이 있는 재’라는 뜻으로써, 낭상마을이라고 불렸다. 그 후 도로가 생긴 뒤 ‘상낭-하낭’으로 나눠졌다고 주민들은 구술 해 주었다. 중리마을 역시 낭상면의 가운데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에서 중리라고 불렸다고 한다. 특히 중리마을에는 ‘배바위’라는 곳이 있는데, 주민들에 따르면 ‘배바위’에 배를 묶었다고 한다.
낭산면에는 마을의 성질과 관련한 마을유래담이 존재한다. 낭산면의 한기마을은 마을이 평온해서 한기(閑基)마을이라고 불렸다는 것이 주민들의 증언이다. 이렇게 마을의 성질과 관련된 마을유래담은 익산시 전체에서도 찾기 어려운 마을 유래담이다.
이밖에 낭산면에서 백제시대 전쟁과 관련된 마을유래담이 눈에 띈다. 대표적인 것이 마산마을이다. 기록에 ‘말의 형국’ 혹은 ‘성종 때 함한군이 정착하여 말을 방목하던 지역’이라는 것이 기존 마을유래담이다. 그러나 마산마을은 전쟁과 관련된 마을이라는 것이 주민들의 증언이다. 마산마을에는 ‘창뜰’의 위치가 비교적 소상히 전승되었다. 마을 주민들에 따르면 마산마을의 ‘창뜰’은 백제군이 전쟁을 준비하며 진을 치고, 창을 들고 주둔을 하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또한 마산마을의 함박골은 군인들이 밥을 해 먹던 자리이며, “그릇 대신 함지박에 밥을 담아 먹었기 때문”에 함박골이라는 것이 마을 주민의 증언이다. 주지하다시피 낭산면에는 백제시대 때 축조했을 것으로 추측되는 낭산산성이 있다. 이에 낭산면이 백제의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로 추측되며, 그 증거로 마산마을의 ‘창뜰’, ‘함박골’등이 아직도 주민들에게 구술로 전해져 오는 것이라는 것이다.
낭산면의 유래담은 다른 지역에서 보기 드문 마을의 성질과 관련된 유래담, 물과 관련된 유래담 그리고 낭산성과 관련된 유래담이 익산의 다른 지역과 그 특색을 달리한다. 특히 삼기면ㆍ황등면 등에서 많은 마을유래담이 풍수지리(風水地理)의 혈(穴)자리와 그 맥을 같이 한다면, 낭산면은 독특하게 마을의 성질, 물, 그리고 낭산성이 마을 유래에 깊이 관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2) 전설 및 민담
낭산면에서 눈에 띄는 민담은 바위와 관련된 민담이다. 이와 같은 민담의 서사는 대게 성물(聖物)과 관련된 토테미즘의 서사구조를 띄고 있다. 대표적으로 호천마을과 하북지마을에서 채록된 바위 이야기이다. 호천마을에는 개씨바위(개씨바우)라는 바위가 있다. 개의 남근(男根)을 닮았다는 이 바위는 지금은 없어졌지만, 한때 옆 마을과 신경전의 원인이 되고는 하였다. 바로 개씨바위가 흙에 묻혀 있으면 호천마을의 처녀들이 바람이 나고, 흙 밖에 드러나 있으면 제남마을의 처녀들이 바람이 난다는 민담이다. 이와 같은 민담으로 하북지마을의 ‘범바위산(범바우산) 돌’이 있다. 하북지마을의 범바위산에는 큰 바위가 있는데, 그 생김새나 크기가 마치 큰 석불을 닮았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그 돌이 쳐다보는 마을에는 과부가 생긴다는 민담이다. 그래서 그 주변의 여러 마을들이 그 돌의 방향을 서로 옮겼다는 기이한 민담이다.
하한마을의 옷다리 민담도 독특한 민담이다. 하한마을에는 ‘옷다리’라는 곳이 있다. 하한마을은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 산다’라는 이야기가 전해질 만큼 잦은 침수에 시달린 지역이다. 특히 마을에 명동이라는 곳이 있는데, 그 곳은 비만 오면 강 한가운데 섬과 같이 고립된 지역이었다. 그 곳에 높은 양반이 갈 일이 있었는데, 하인들이 옷을 벗어 다리를 만들어 주었다고 해서 ‘옷다리’라고 전해진다. 명동은 이와 관련해 속담 같은 이야기가 주민들 사이에 구술되고 있었다. “비가 와서 ‘명동’이 둥둥 뜨니까, 한기마을 주민들이 ‘도마(리)’로 도망을 갔다. 그리고 겁을 먹어서 ‘검지(마을)’이고, 겁을 먹으니 욱씬욱씬한다 해서 ‘옥실(리)’”라는 이야기이다. 이러한 우스갯소리가 구전 될 만큼 한기마을은 오래전부터 침수로 인해 마을 주민들이 고통을 받았다고 한다.
풍수지리의 혈자리와 관련된 민담 역시 채록 할 수 있었다. 호천마을의 주민들은 용이 승천했다는 논이 있으며, 정승이 두 명 태어날 명당이라는 ‘양정승골’이라는 명당이 있다고 증언해 주었다. 방교마을 역시 명당과 관련된 민담이 전해진다. 방교마을에는 ‘종자뜰’이라는 명당이 있다. 호천마을의 ‘종자뜰’은 물이 마르지 않고, 가뭄에도 유일하게 풍년 농사를 지을 수 있다는 명당이다.
이 밖에 주목할 민담은 이완용과 관련된 민담이다. 이완용과 관련된 민담은 익산 전역에서 두루 채록 할 수 있다. 특히 이완용의 무덤과 관련된 민담이 그 주를 이루는데, 낭산면의 상남마을과 삼지마을에서 이완용의 무덤과 관련된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주민들에 따르면 낭산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인 선인봉은 선녀가 춤을 춘다는 명당이라고 전해진다. 그리고 그 곳에 이완용의 묘가 있었으며, 익산 다른 지역에서 주장하는 이완용 묘는 가묘라는 것이다. 즉 낭산산 선인봉에 있는 이완용의 묘가 진묘라는 것이다. 이에 문헌 기록에 따르면 이완용의 묘는 익산시 낭산면에 있었다고 기록되고 있다. 또한 문헌 기록에서 1979년 이완용의 자손들이 파묘를 했다는 기록을 통해 이완용의 묘가 낭산면 선인봉에 있었음을 짐작 할 수 있다.
이 밖에 도깨비이야기는 낭산면 전역에서 채록 할 수 있었다. 도깨비와 관련된 민담 중에서 눈에 띄는 것은 삼지마을의 도깨비 민담이다. 삼지마을에는 ‘도깨비다리’라고 불린 다리가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다리 밑에서 물고기를 잡기 위해서는 도깨비에게 미리 제물을 바쳐야 물고기를 잡을 수 있다는 민담이다.
3) 사회민속
낭산면의 사회민속은 공동체 의식과 관련된 사회민속이 대표적이다. 우선 술멕이 행사와 관련된 채록이 눈에 띈다. 이에 해당되는 마을은 호천마을, 시명마을 그리고 소도마을이다. 이 마을들의 술멕이 행사는 칠석날(음력 7월 7일)이나 백중날(음력 7월 15일)에 행해 졌다. 술멕이 행사 때 주민들은 풍장을 치며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고 그 뒤 마을 주민들의 집을 가가호호 방문하여 각 집의 발복(發福)을 기원해 주었다. 술멕이 행사는 공동체 의식의 발현으로써 오래된 전통과 문화가 전승되는 마을에서 찾을 수 있는 대표적 마을 공동체 행사이다. 특히 주목할 점은 아들을 낳지 못한 집의 가장은 우물청소를 함으로써 득남을 기원했다는 점이다. 이는 마을 공동체를 위해 개인이 선행을 베푸는 것이다. 그리고 마을 주민들 고된 노역을 대신 시키는 것이 아니라, 득남을 같이 기원해 주며 하나의 축제 분위기로 술멕이 행사를 지낸 것이다. 이러한 공동체 행사는 술멕이 행사뿐만 아니라 호천마을과 외성마을의 당산제와 기우제에서도 찾을 수 있다.
중리마을에서는 ‘산신제’라는 공동체 민속을 채록 하였다. 특히 중리마을의 용성산은 용이 승천하는 모습을 닮았다고 한다. 용성산에는 달바위 밑에 ‘구제혈(穴)’이라는 명당이 있는데, 많은 사람들을 구제 할 수 있으며 실제 한국전쟁시에 마을 주민들 중 아무도 피해를 입은 사람이 없다고 전해진다.
낭산면 마산마을에서는 거리제를 지냈다는 구술을 채록 할 수 있었다. 다만 마산마을의 거리제는 개울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에서 다른 지역에서 그 사례를 찾기 어렵다. 거리는 사람과 문화를 연결해주는 통로이자, 길흉화복(吉凶禍福)이 드나드는 공간이다. 그렇기 때문에 길한 것만 들어오고, 흉한 것은 들어오지 말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 거리제의 목적이다. 낭산면 마산마을은 거리제가 거리의 의미가 아니라 개울의 익사사고를 방지하고, 귀신을 달래주기 위해 거리제를 지냈다는 점은 전통적 거리제가 마산마을에서 변형ㆍ계승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마산마을의 거리제는 익사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넋 달래기’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넋 달래기’는 흔히 ‘넋 건지기’로 많이 나타나는데, 큰 강이나 제방이 있는 오산면, 춘포면, 삼기면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민속이다. 낭산면 역시 외성마을에서 ‘넋 건지기’ 민속을 찾을 수 있었다.
낭산면에서는 이 밖에도 기세배 놀이(내성마을과 외성마을), 두레를 하던 두레미 방죽(상낭마을) 등과 같이 다양한 공동체 의식이 담겨 있는 사회민속을 조사할 수 있었다.
공동체 민속은 공동체의 행복과 안녕이 우선이다. 개인의 구복(求福)은 그 이후의 문제이다. 낭산면의 여러 마을은 공동체 의식이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으며, 이에 산신제, 기세배 놀이, 두레 등의 문화를 쉽게 구술 채록 할 수 있었다.
이 밖에 낭산면의 사회민속으로 하한마을에서는 여름에 붕어를 잡아 소금물에 삶은 뒤 지붕에 말려서 겨우내 먹었다고 증언해 주었다.
3. 시사점
낭산면은 익산시의 다른 지역보다 오랜 전통과 문화를 가지고 있는 지역이다. 특히 마을 주민들의 공동체 의식은 타 지역의 그것보다 더 분명하고 다양하다. 타 지역이 그 지역의 특색에 맞게 한 개의 공동체 문화를 발전ㆍ계승 했다면, 낭산면은 거리제, 산신제, 기세배, 두레놀이 등 다양하게 발전ㆍ계승 했다고 볼 수 있다.
낭산면의 이러한 공동체 의식에는 뿌리 깊은 역사가 자리 잡고 있기에 가능함은 물론이다.
다만 많은 지역에서 공동체 문화는 흐릿해지고 있다. 이는 고령화ㆍ도시화ㆍ인구의 도시 전출 등이 그 원인이다. 공동체 문화는 그 뿌리는 같지만, 지역마다 그 지역에 맞게 변형 계승되어 전해진다. 마산마을이 그 대표적 사례를 보여준다. 그러나 공동체 의식은 한 번 사라지면 복원하기 어렵다. 거리제와 같은 공동체 의식은 책이나 동영상으로 보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주민들간에 체험ㆍ놀이로써 전승ㆍ계승되기 때문이다. 이에 낭산면의 공동체 의식이 더 흐릿해지기 전에 전승ㆍ계승하는 방안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