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동면 해제

1. 개괄

용동면은 인접한 용안면의 타자이자 오래된 미래다. 용동면의 인문지리는 해양문화와 평야문화의 복합적 성격을 띤다. 지리적으로는 금강계와 미륵산계 사이에 위치해 있으며 역사적으로는 마한시대와 신라시대의 흔적이 남아 있다.
용동면은 용안면의 문화적 타자(他者)다. 1986년 용안면의 일부가 용동면으로 분리되면서 동일 문화생활권이 행정적으로 분화되었다. 그러나 용동면의 명칭이 ‘용 모양의 산줄기 동쪽’을 의미하듯, 용동면은 여전히 용안면의 문화적 동일성을 갖는다.
용동면의 현재는 용안면의 오래된 미래다. 용동면의 지명유래에서 조운과 관련된 명칭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고창과 창목은 과거 관창이 있던 자리를 의미한다. 그 밖에 마한시대에 유물인 ‘광두원’과 신라시대의 ‘풍제현’의 존재를 볼 때, 용동면은 인근의 조창이 있었던 지역보다, 오래 전에 공동체의 역사가 지속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것은 지정학적으로 마한·백제의 중심인 미륵산계의 문화지형적 구도로 볼 때 현재 용안면의 문화 원형을 간직한 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용동면의 구술사 채록에서 의미있는 것은 과거의 인문지리 환경이 기록된 점이다. 구산마을의 ‘다리목’이라는 지명은 인근의 세 개의 길이 모이는 곳이다. 홍수가 나면 인근 평야가 물에 잠기는 일이 반복되자 일제 강점기 때엔 만든 보에서 지명유래가 되었다. 용성마을의 당재는 1398년 용안면 교동으로 옮겨간 향교와 관련이 있다. 기록에 의하면 마을 앞산에 명륜당(明倫堂)을 기준으로 하여 ‘당재’, ‘당하’로 불린다고 한다. ‘
용동면 사람들은 용안면과 행정적으로 분리되었어도 하나의 문화 공동체적 의식을 갖고 있다. 이 문화적 정체성은 한 마디로 표현하면 ‘용두산의 기운’이다. 용성마을의 칠성바위에 얽힌 이야기는 용동면 사람들이 정체성을 어떻게 지켜가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어느 날 용성마을의 칠성바위가 사라졌다. 그후 그 바위가 있던 땅주인과 마을에 안 좋은 일이 생겼다. 칠성바위는 자연돌이 아닌 마을의 상징이었다. 이후 이웃마을에서 바위를 찾아 제자리를 돌려놓자 마을의 우환이 사라졌다.
용동면의 구술사 채록은 문화적 감수성은 행정적으로 구분할 수 없으며, 인문지리의 경계는 심리적, 생태적 문화지도에 따라 만들어 진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2. 채록 요약

1) 지명유래

용안면의 지명 유래는 마을의 기능적 특징, 인문지리적 특징, 임의적으로 부여된 명칭으로 나눌 수 있다. 기능적 유래는 마을의 지정학적 의미를 나타낸다. 조창이 있었던 고창, 창신 마을과 농소마을이 이에 해당한다. 인문 지리적 유래는 마을의 생태 환경적 특징을 담고 있다. 봉화산 봉수대 불빛에 유래한 연화마을, 용마전설에서 유래한 용성마을, 풍수에서 유래한 화실 마을이 이에 해당한다. 행정적으로 마을 이름이 바뀐 경우에는 구산마을과 다산마을이 해당한다. 마을의 지명은 역사문화적 자산이다. 이 점에서 지명이 변경된 마을에 대한 이번 구술사 채록 사업은 역설적으로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겠다.
지명에서 마을의 역사성을 살펴볼 수 있는 사례는 다음과 같다. ‘고창(古倉)마을’은 금강변에 위치한 관창(官倉)이 있던 곳이다. 조선시대의 조세제도는 대부분 관선 또는 사선을 통해 서울로 조운(漕運)되었는데, 고창마을은 조창이 마을 지명으로 남은 것. 이 마을에서는 ‘창밧재’(창고가 있던 자리)가 있다. 창신(倉新)마을은 병합된 창목(倉木)과 신화(新花) 마을이 현지명의 흔적으로 남아 있다. ‘창목’은 관창(官倉)의 좁은 목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과거 ‘창목’옆에는 온천수가 나와서 온수동이라 불렸다.(창신) 농소마을의 옛 지명은 농막이다. 들 가운데 있는 마을로 농사철에만 이용하는 임시거처(농소農所)가 있어서 지어진 이름이다. 한편 이 마을의 ‘문안이’라는 지명은 이문(里門)안에 형성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현지에선 ‘물문 안’의 오기로 알고 있다.
지명유래에서 마을의 인문지리적 특성을 살펴볼 수 있는 사례는 다음과 같다. 용성(龍城)마을의 옛 이름은 용성(龍星)이다. 용마전설과 칠성바위의 민담이 유래가 된 것으로 현재의 지명으로는 구체적인 마을 이야기를 추측하기 힘들다. 다만 이 마을의 ‘용두코쟁이’는 ‘용 아홉 마리가 달려 간다’ 해서 지어진 이름이다.(용성)
연화(蓮花)마을은 익산시에서 제일 예쁜 이름을 가진 마을에 속한다. 마을 인근에 연못이 있는데 봉화산에서 올린 봉화불빛이 연못에 비쳐보여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고 또 꽃이 많이 피어서 붙여졌다고 하는데 모두 낭만적인 지명유래다. 이 마을의 ‘처당골’은 절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며 신기(새터)는 금강 하구둑이 생기기 전 포구가 있었던 곳을 일컫는다.
용성(龍城) 마을의 옛 이름은 용성(龍星)이다. 이름의 유래는 말무덤과 칠성바위의 전설에서 기인한다. 말무덤은 전설속의 아기장수가 타려던 용마가 묻힌 곳이며, 칠성바위는 마을 동북 편에 있는 일곱 개의 바위인데 현재는 네 개만이 남아있다. 바위 중에는 ‘금바위’나 ‘은바위’처럼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것도 있다. 이 마을을 ‘당하 마을’이라고도 불렀는데 그 이유는 명륜당의 아래쪽 마을이어서 당하(堂下), ‘당후(堂後)’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그런데 채록결과 흥학당(興學堂)과 관련 있는 지명이라는 설과 성황당 뒤편 마을이어서 ‘당후’라고 붙여졌다는 구술이 분분하다. 화실(花實)마을은 마한시대부터 설치돼 있었던 관리의 숙소인 광두원(廣頭院)이 있던 곳이다. ‘매화낙지혈(梅花落池血)’의 열매가 맺는 자리에 마을이 자리잡았다고 하여 지금의 이름이 붙여졌다. 대조(大鳥)마을의 다른 이름은 ‘행정(杏亭)마을’이다. ‘대조’는 마을의 지형이 큰 새의 형국이라 해서 일컫게 된 이름이며, 행정은 오래된 은행나무가 있었다 하여 불렸던 이름. 그 은행나무는 낙뢰를 맞아 본래 모습은 사라졌지만 마을의 지표목으로 남아 있다.
구산마을은 행정등록시 마을의 이름이 바뀐 경우다. 마을 주산이 거북이를 닮은 생긴 산이 있어 원 이름은 구산(龜山)마을이었다. 그러나 쓰기 쉬운 한자를 쓰려다 보니 행정 등록시엔 구산(九山)으로 바뀌었다. 따라서 마을의 정체성도 희미해지게 되었다. ‘운교’는 여지도서(輿地圖書)에도 표기된 큰 돌다리다. 이곳에선 구루매(雲橋)라고 부른다. ‘왜막재(왜박재)’는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진을 친 자리로 알려졌다. 산이 섬처럼 군데군데 아홉 개가 있어 ‘구산’이라고 전하는 이도 있다.(용성) 다산(多山)마을은 돈다산 마을이라고도 한다는데 과거 돈산(敦山)과 다산(多山) 마을의 병합된 마을이므로 돈다산으로 해야 옳을 듯 하다. 돈다산의 다른 이름은 돛대산이다. 지형적으로 넓은 평야지대에서 이곳만 돛대처럼 높아서 불렸던 이름. 예전엔 마을까지 바다가 닿아 있어서 배를 매었다는 ‘바거리제’라는 곳이 있다. 이 마을의 부정(浮井)은 수량이 넘칠 정도로 풍부했던 ‘뜬샘’에서 유래한 것이다.(다산)


2) 전설 및 민담

용동면 사람들은 ‘용’과 관련된 영웅신화의 비장함을 무의식으로 간직하고 있다.용은 우리문화에서 입신출세, 제왕, 우사(雨師), 풍농신, 수신, 호국신, 예시자를 상징한다. 이것은 용이 가진 권능을 은유이며, 조화의 상징이다. 뭇 동물의 우두머리요 힘과 조화의 상징세계를 표현하는 용의 기운을 가진 ‘말무덤과 아기장수’ 전설은 용동면 사람들의 사상적 지향을 잘 보여준다.
용성마을 앞에는 인근 지형보다 조금 높은 둔덕이 있는데 이곳은 ‘말무덤’, 또는 ‘용마무덤’ 이라 불린다. 지금은 조금씩 낮아지는 ‘말무덤’은 ‘아기장수’ 전설과 연결된다. 옛날에 ‘용두코쟁이’라는 곳에 장수의 기질을 지닌 아이가 태어났다. 신통력이 있었던지라 돌도 되지 않아서 시렁위에 올라서 콩나물을 병사처럼 부렸다. 한 번은 콩나물이 군사로 변하여 들이닥치자 아기 장수가 칼을 빼들고 목을 치니 콩나물 대가리가 되어 우수수 떨어졌다. 나중에 부모가 이 사실을 알고 두려워했다. 부모의 생각에 ‘이 아이가 장수가 되지 못하면 역적이 되어 삼대가 멸족당하겠다’ 싶어 자는 아이를 다듬돌로 눌러 죽였다. 그런데 아이가 장수로 성장하는 걸 기다리는 ‘용마’가 있었다. 그 용마는 아기 장수가 죽자 용두리에서 부터 크게 울부짖으며 마구 내달려서 용성마을 앞에서 죽었다. 이를 애통히 여긴 사람들은 그 말을 묻어주고 ‘말무덤’이라 불렀다.(구산, 농소, 용성, 부억)
아기장수 이야기와 관련된 이야기는 ‘객명산’과 ‘구렁목’ 이야기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객명산’은 원래 산이 아니었는데 장수들이 흙을 쌓아서 만들었으며 ‘구렁목’은 큰 장수가 날 자리라서 일본인이 혈을 끊어버렸다는 것이다.(용성) 이처럼 용동면에선 큰 뜻을 펴지 못한 불우한 영웅의 이야기가 다양하게 채록되어 있다. 지역민들은 ‘장수의 꿈’이 사라진 걸 슬퍼하며 죽은 용마의 말무덤을 지역의 모습에 투사한 것으로 보인다.
용동면에서 채록된 용과 관련된 이야기들은 대부분 용안면의 그것과 유사하다. 이것은 용안면과 용동면이 상상의 공동체였음을 반증한다. 예를 들면 용의 머리 부분은 용두마을인데 이곳에선 비석을 쓰지 않는다. 그 이유는 용을 돌(비석)으로 누르면 승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대조, 연화) 사절리에 있는 사절방죽에는 용이 승천했다고 알려져 있다.(농소, 다산) 용과 관련되어 채록된 이야기 중 인용문은 이야기의 생성원리를 확인해준다. “용안면은 용이 편안하게 앉아 있는 형상이라서 비가 자주 내리고, 용동지역은 비가 오다가도 행사를 하려고 하면 비가 뚝 그친다”는 속설이 그것이다. 이 이야기는 용안면과 행정적분리가 심리적 분화로 이어지는 하나의 사례다.
마을 인근에 산자락에 위치한 곳과 마찬가지로 큰 강 근처의 주민들은 풍수지리에 관심이 많다. 대조마을에는 세 정승이 나온다는 명당자리가 있다. 율사와 교사들이 마을에서 많이 나온 것은 그 덕택이라고 믿는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대조마을은 대붕포란형(大鵬抱卵形)의 목 부분이라서 새의 머리를 누르지 않기 위해 마을에서는 상석을 놓지 않는 풍습이 있다.
풍수는 금기를 갖는다. 화배리의 ‘꾀꼬리혈’의 날개 부분에 비석을 쓴 바람에 문중이 망했다고 믿는 지역민들은 대조마을 인근에도 수로가 나면서 다른 마을이 잘되고 마을은 쇠퇴하고 있다고 믿는다.(대조) 연화마을에서 ‘개미허리’를 지킨 것도 풍수에 대한 믿음에 의한 것. 석산 개발이 한창이었을 무렵, 이 마을에도 개발의 열풍이 불었다. 그러나 마을에 큰 해가 될 것이라는 한 스님의 말에 개발업자는 주민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히게 된다. 연화마을 사람들은 일제 강점기에 봉화산에서 석축용 돌을 떼어 간 후, 그 마을이 망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지금 ‘개미허리’라고 불리는 곳이 조금 깍여 나간 모습으로 남아 있는 이유다.(연화) 창목마을에는 ‘객망산’ 혹은 손님을 바라는 산이라는 뜻의 ‘객명산’이라 불리는 산이 있다. 이 산은 일제 강점기 때 혈자리가 끊겼다고 한다.(창목) 이상과 같이 용동면은 혈자리의 훼손과 관련된 전설·민담이 많이 채록되었다. 이것은 지정학적 중심이 용안면과 익산시로 점차 이동하게 된 것과 결부지어 생각할 수 있다.
용동면에서 채록된 여우, 도깨비, 집큼이(구렁이) 이야기는 전통사회에서 교훈을 담은 설화의 형태가 많다. 이는 술을 마시거나, 집안의 물건 단속을 하지 않는 것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는 사회적 목적이 있다. 고창마을의 한 사람은 한밤중에 여우를 만났다. 여우는 하얀 꼬리를 흔들며 그를 유인했는데 여우 꼬리가 당사자에게는 꼭 환한 길처럼 보여서 따라갔단다. 또 농소마을 주민도 문상을 다녀오다가 여우의 농간으로 수로에서 밤새 헤매었다고 한다.(고창, 농소) 이처럼 여우와 만난 시간은 저녁이거나 한 밤중이며, 공간적으로는 집과 떨어진 길이 등장한다. 용동면의 도깨비는 물질적 존재와 주술적 존재의 복합적 형태로 인식된다. 물질적 존재로 인식되는 도깨비설화는 ‘사람의 손때가 묻어 있는 것을 소홀히 해선 안 된다.’는 교훈을 갖는데 다산, 용성마을에 채록한 ‘술을 먹고 밤새 씨름을 한 도깨비가 깨어보니 대나무 비였다.’는 이야기가 여기에 해당한다. 또한 대상이 술을 마셔서 벌어진 상황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정신이 허탈하면 도깨비놀음에 당한다’는 교훈이 포함되어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민담이 만들어지게 된 연유를 살펴보면 ‘각씨번지’라는 기생이 있었던 술집에 대한 여염집의 적대적 인식이 자리했을 가능성이 있다.(다산) 농촌사회에서 기생이 있던 술집은 가정의 평화와 더불어 유교사회에서 풍기를 위협하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한편 다산마을의 ‘쪽다리’에 나타난 도깨비는 주술적 의미가 강하다. 이 마을은 정월에 도깨비를 달래느라 떡을 놓고 제사를 지낸다. 인근 지역에 내려오는 귀신이야기나 구렁이를 상징화한 지킴이(집큼이) 이야기는 용동면 사람들의 주술적 경향을 보여준다. 집큼이(수호뱀)를 먹자 그 집에 흉사가 생겼다는 이야기, 농사를 짓다가 구렁이가 나와 죽였는데 흉사가 생겼다는 이야기(화실)는 지역의 민속학적 의식이 투영된 사례라 할 것이다.


3) 사회 민속
용동면의 사회 민속적 특징은 유교적 질서와 주술적 효과를 통한 사회통합적 의미가 강하게 나타난다. 이는 마한·백제부터 시작된 공동체적 질서의 수호와 지리적 특성에 기인한다. 기우제와, 성황당 이야기는 기복신앙이 기초가 되는 원시무속의 주술성을 빌려 공동체 구성원의 시공간적 통합을 의도한 것이며, 대조마을과 화실마을의 공회당을 중심으로 이뤄진 향악은 공동체적 질서를 수호하고자 했던 사회 제도라고 할 수 있다.
대조마을은 경주 김씨의 집성촌이다. 이 마을의 ‘공회당’은 집성촌 내에서의 어른들이 모여 상벌을 주는 곳이었다. 또한 화실마을의 젊은이들은 칠월칠석날이 가장 두려운 날이다. 마을의 공좌상과 좌상이라는 어른이 행실이 바르지 못한 젊은이들을 꾸짖었기 때문이다.(화실) 상여가 마을을 통과하지 못하게 하는 것도 여느 마을에서나 볼 수 있는 금기다. (연화, 용소) 이러한 사회적 규약이 충실히 지켜진 것은 용동면의 공동체가 견고하게 지탱하고 있다는 사례다. 용안면에서도 채록된 ‘발령받은 원님이 외지라서 울고, 떠날 때는 주민들의 인심이 그리워서 울었다’는 민담 또한 ‘살기 좋은 마을’을 유지하고자 한 의지가 반영된 것이다.(농소)
용성마을의 성황당을 지날 때마다 주민들은 돌을 쌓았다. 성황당은 이 마을 무속신앙의 심장부에 해당하여 ‘아기를 낳지 못하는 여자들이 기복’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용성) 고창마을은 마을 뒷산인 ‘둥굿재’에서 다산마을은 봉화산에서 기우제(무재)를 지냈는데, 무제를 지낼 때 여자는 집밖으로 나오지 못했다.(고창, 다산) 용소마을엔 거리제와 넋 건지기 풍습이 있는데 이것도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사회통합적 의례다.(용소)


3. 시사점

용동면 행정구역의 변천사는 지역민에게 주변부적 무의식을 심화시켰다. 백제시대는 함열현, 조선시대는 용안현, 해방후에는 용동면으로 불리다가 지금의 이름이 되었다. 용안면의 주변부로서의 무의식은 일제강점기에는 철도 부설과, 임진왜란 시기의 ‘삼정리의 구렁목’에 대한 이야기로 추측할 수 있다.
용동면의 문화생태적 의식은 용안면과 일란성 쌍둥이의 정체성을 갖는다. 익산시의 금강에 인접한 지역 중, 용동면은 오래된 미래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지명은 과거의 삶과 현재의 의미가 공존하며 새롭게 만들어내는 문화적 자산이다. 구술사 채록 과정 중 “용안면 잔치 날은 비가 내리고, 용동면은 마을 운동회엔 비가 그친다.”는 지역민의 이야기는 ‘용의 영토의 백성’이었던 문화 정체성을 잘 드러낸 일화다.
지리, 역사, 민속, 문화적 실체로서 용동면의 역사는 마한·백제에서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익산시의 해양문화의 거점지의 역할을 감당해 왔다. 그러나 현재의 적은 인구로 자생적 문화 거점지를 확보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따라서 지역민의 역사문화적 관심을 환기시킬 계기가 필요하다. 현 구술사 채록에서 누락된 마을을 중심으로한 고지명 유래의 전수 조사가 필요한 이유다. 고지명과 현재 지명에 대한 종합적 자료 구축이 이뤄진다면 고대의 해양문화와 미륵사 지역과의 문화사적 기획이 재조명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