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광대학교 대안문화 연구소 : 익산시 구술사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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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산면 해제

1. 개괄

여산은 전라도 초입(初入)에 위치하고 있는 ‘호남의 문’같은 지역이다. 금마면이 전주, 논산으로 이어지는 세로축과 익산, 봉동으로 이어지는 가로축의 결절점이라면 여산면은 일주문인 셈이다. 여산면 원수리 신막(新幕)마을은 새술막의 한자 표기다. ‘큰 길가에 새로 생긴 술집’이라는 뜻인 새술막은 교통의 요충지 여산의 대표적 마을이다. 이곳은 금마로 넘어가는 쑥고개의 초입마을로 과거 나그네의 쉼터였던 곳. 강경 상권이 번창했던 일제 강점기까지 말을 관리해 주던 곳이 있었다. 춘향전에도 어사또가 된 이몽룡이 “전라도라 양계(揚鷄)역마(驛馬) 가라 타고 여산읍에 들어갈제”라는 대목이 나올 정도다.
여산은 노령산맥의 줄기인 용화산(龍華山)과 천호산(千壺山)을 머리로 한다. 택리지에 의하면 “주졸(珠卒)산의 지맥(支脈) 탄현(炭峴) 용화(龍華)산이 되었는데 그곳에 여산 등 다섯 읍이 있다.”고 전한다. 여산천은 용화산에서 발원하여 북쪽으로 흘러 강경읍을 돌아 금강과 합류한다. 이곳에 마한의 54개국 중 ‘여래비리국’이 있었다. 백제에 복속된 후에는 조선시대까지 사형장이 있을 정도로 관의 역할이 컸다. 여산현의 나암창(羅巖倉)은 인근의 곡식을 모아 금강을 통해 한양으로 보냈던 곳이다. 예전에 큰 우시장이 열렸던 여산에는 유독 소와 관련된 민담이 많이 채록되었다.
또한 풍수며 산제가 지금껏 지속된 것도 한 특징이다. 여산에 천주교 성지가 생긴 것은 교통 입지가 편리했기 때문이다. 인근에 천주교 최초 전래지인 나바위가 있고 인적, 물적 자원이 풍부해서 태성리에는 천주교 교우촌이 형성될 정도였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의 박해가 시작되자. 여산읍내에 백지사형터가 생겼고 쫓겨난 신자들은 화산 너머 산골에서 화전과 항아리 장사를 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2. 채록 요약

1) 마을유래
고문헌과 다른 유래
외사마을과 관련한 기록에 의하면 이웃 마을의 사이에 있어서 ‘삿골’이라고 전한다. 그러나 채록결과 인근 절에 들어가기 전, 삭발했다고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고 한다. 또한 현재의 외사(外沙)마을은 외사(外寺)가 맞는 말이며, 어원은 절에 인근에 위치했다고 유래한 것이다. 이 일대의 주민들은 절과 관련한 유래를 많이 기억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중들이 장을 보던 ‘중계장(징계장)’, ‘중말’(호월마을의 옛 이름) 등이 있다. 이중 ‘중말’은 기록상 ‘가운데 마을’이라는 뜻과 다르다는 점에서 내용의 진위가 궁금하다.(외사, 호월)
한편, 원태마을의 유래는 마을 뒤의 ‘상여봉’이 대(臺)나 성 같이 우뚝 서 있어 생긴 명칭이라고 하나 주민들은 원님이 다녀갔다고 하여 지어졌다고 믿고 있다.
노동마을의 옛 이름은 ‘가리울’에서 유래했다. ‘가리’는 갈라졌다는 말이니 인근의 원태마을이나 ‘중굴’에서 갈려 나온 것을 추측할 수 있다. 그런데 채록중에 ‘가리울’이라는 이름은 가난한 사람들이 살아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문헌 기록을 보강하는 구체적인 실례로 금곡(金谷) 마을의 예가 있다. 이곳의 옛 이름은 ‘쇠목’이라 전한다. 채록결과 과거 사금 채취장이 있어서 ‘금곡’으로 불렸다고 하는데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또한 관연 마을의 원 이름은 '갑부네'다. 이와 관련한 유래는 세 가지다. 이 마을로 들어서는 고개를 넘을 때 숨이 가쁘다고 해서 붙여졌다는 유래와 부자가 많이 살아서 붙여졌다는 유래, 그리고 물이 부족해서 ‘가무네’라고 불리는 인근의 현천 마을에 비해 물이 고여 있어서 ‘부자집 냇갈’이라는 의미로 붙여졌다. 그러나 관연마을 주민들이 구술한 내용을 현천마을에서확인 한 결과 ‘물이 부족하지 않아서’ 가무내라고 불렸다고 전해진다. 또 문헌을 확인해 보니 현천(玄川)의 유래는 ‘숨겨져 있는 내’라는 뜻이다.
입석마을의 유래는 풍수와 연관이 있다. 마을 초입을 ‘돌 선거리’라고도 부르는데 일설에 의하면 여산의 기가 서쪽으로 빠진다고 해서 옛사람이 돌을 세워 놓았다. 그런데 그 돌을 빼서 만든 마을이 입석 마을이다.
행정구역 개편으로 사라진 지명을 확인하는 경우도 있다. 사월마을은 사현과 설월이 1972년 통합되며 지어진 이름이라고 하였는데 채록 결과 ‘후이’라는 마을까지 원래 세 개로 나뉘어 있던 동네가 합쳐졌음을 알 수 있었다. 같은 해 신평과 부흥이 통합된 신부마을의 경우, 마을이름의 유래를 찾을 수 없다. 신평은 과거 ‘즛절’이었고 부흥은 부엉골이었다. 아마도 ‘절’과 관련된 지명으로 생각된다. 이를 확인해주는 것이 이곳을 ‘사당모퉁이’라고도 불렀다는 증언이다.

2) 전설
여산면의 대표적인 전설은 견훤과 장수굴 전설이다. 견훤과 관련된 전설은 주로 이곳에 큰 싸움이 있었음을 암시한다. 역사적으로 여산은 백제 최후의 전투가 이 일어났던 곳이기도 하다. 진기마을은 견훤의 전쟁터인 ‘진터’로도 불렸다. 인근에는 ‘갑옷터’가 있는데 이곳에서 쇠로 갑옷을 만들어 입었다고도 하고(금곡, 관연, 진기, 용기, 수은) 전쟁에 져서 갑옷을 묻은 곳이라고도 한다.(가재골) 원두마을에서는 갑옷터에서 전투가 벌어져 피가 강처럼 흘렀다고 전한다. 용기마을의 ‘창평’이라는 지명도 견훤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관연마을의 ‘닭재골’은 지렁이의 화신인 견훤이 죽었다고 하는 장소이며 ‘숯고개’는 왕건이 최후의 일격을 가한 곳이라고 전한다.
장수굴과 관련해선 용과, 장수에 대한 전설이 전한다. 용과 관련된 이야기의 첫번째는 천호산 굴에 사는 용을 잡기 위해서 장수가 화살을 쐈는데, 화살 맞은 용이 용화산 생양 쪽의 굴로 들어가 버렸다고 한다.(신부) 두 번째는 용이 되려다 실패한 이무기가 천호동굴에 살았다고 전한다.(외사) 장수와 관련된 이야기의 첫번째는 천호산 장수가 미륵산 장수에게 화살을 쏘기 위해 무릎을 꿇은 자리와 말굽 자국이 있다는 것과(호월, 관연) 장수굴의 ‘자국’은 장수가 굴에서 기어 나올 때 짚었다는 ‘손바닥 자국’과 ‘무릎 꿇은 자리’라는 것(누항)으로 나뉜다.
신막마을에는 상주가 죽임을 당하는 무서운 명당이 있다. 예전에 정씨 성을 가진 큰 부자가 죽어 신막마을 명당자리에 묘를 쓰려고 하자 어떤 스님이 상주가 호랑이에게 죽을 자리라며 반대했다. 그때 한 머슴이 상주를 대신하겠으니 그 명당자리 밑에 묻어 달라 했다. 이윽고 상여가 묘 쓸 자리에 도착하자 호랑이가 나타나 머슴을 물어갔는데 사람들이 머슴의 머리만 찾아내어 정씨 묘 밑에 묻어주었다. 그래서 지금도 정씨 묘 밑에는 머슴의 무덤이라 불리는 작은 무덤이 있다고 한다.(상양)

3) 민담
금곡마을에서는 거지가 된 천석꾼 이야기가 전한다. 이건우라는 부자가 살았는데 쌀을 쥐면 손이 빠지지 않는 함지로 가난한 사람들을 조롱했다. 한 스님이 벌을 주려고 그에게 어떤 곳을 개간하라고 알려주었다. 그곳은 쇠목혈이었는데 그 혈을 끊어 버린 후, 그의 집안은 거지가 되었다고 한다. 비슷한 이야기가 누항마을에도 전한다. 상세골에 인색한 천석꾼 부자가 살았는데 스님이 시주를 청하자 되레 모욕을 당하고 쫓겨났다. 두 번째 찾아가서도 부자의 태도가 변하질 않자 스님이 ‘저 주령을 잘라내면 이 자리가 만석꾼 자리가 될 것이다’라며 부자를 속였다. 욕심대로 산 줄기를 자르자 부자는 망해버렸다. 그곳을 후세 사람들은 상사터라고 부른다.
가재골 마을에서는 고을 원이 처음 부임을 해 와서 남원사에서 들러 죽었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사월마을에 전해지는 남원사에 대한 이야기는 고을 원이 꿈속에서 절을 보고 건립을 명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상양마을 위의 도승사는 얼마나 컸는지 쌀 씻을 때가 되면 뿌연 물이 마을까지도 내려왔을 정도였다. 그러나 빈대가 극심하여 지금은 그 절이 망하고 터만 남았다. 천호산은 호남의 8대 명당에 들어갈 정도로 세가 좋다. 그런데 그 기가 세서 그걸 누르기 위해 백 채의 절을 지었다고 한다.
전라감사 이서구에 대한 이야기도 이 지역에 많이 전한다. 이야기에 의하면 그는 앞날을 내다 볼 정도로 도력이 높은 수령이었다. 상양마을의 생양동바위는 일명 생동바위라고도 한다. 이곳에는 당시 전라감사였던 그가 ‘만 명이 살 수 있는 곳’이라고 쓴 글씨가 있다. 또한 '이서구'는 천호산이 아닌 만호산이라고 불렀다는 말이 전한다.(관연, 상양,신부)
여산출신인 이완용과 관련된 이야기도 채록되었다. 이완용은 조선 영조때 노론파로 몰려 죽임을 당한 이만성의 후손이다. 이만성은 복권된 후에 ‘불천지조(不遷之祧)’로 제사를 영원히 지내는 명예를 얻을 정도로 유력한 선비다. 이런 조상을 둔 이완용은 여산에서 태어나 서울로 양자를 간 후, 을사오적이 되었다. 그가 1925년 사망한 후 익산시 낭산면 내산에 묻혔다가 1979년 파묘하면서 그의 무덤이 세상에 알려졌는데 아직도 남산마을의 감나무 골과 금마 사이에 그의 묘가 있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교창, 남산) 그런데 일설에 의하면 가묘일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여산면 사람들은 구렁이를 영물로 생각했다. 누항마을에서는 돼지밥을 해놓을 때마다 솥뚜껑을 열고 밥을 훔쳐먹는 영리한 구렁이가 있었다. 주인이 그걸 잡았더니 그 집이 곧 망했다고 한다. 연봉리의 어떤 집에 구렁이가 2, 3년을 울다가 집을 나가기 전 문턱에 고개를 올려놓았다. 그 구렁이를 다시 집안으로 들이기 위해 사람들이 정성을 쏟아도 반응하지 않다가 세 살 먹은 애기한테 고개를 들었다 한다. 이후 그 애기한테 운이 남아있었다고 한다.(누항)
상양마을의 구렁이 또한 집 지킴이로 인식된다. 예전에 구렁이를 잔인하게 죽인 사람은 앓다가 죽었으며, 구렁이를 보고 시루떡을 넣어주자 시루떡이 칼로 자른 것처럼 쓱 잘린 것을 보았다고 한다. 또한 목천포 다리를 새로 지을 적에 포크레인 공사를 하시는 분 꿈에 "내일 일을 쉬어야만 한다"라는 꿈을 꾸었다. 그럼에도 돈을 벌기 위해 일을 나갔는데 그만 포크레인으로 구렁이의 목을 쳐 죽인 일이 생겼다. 그리고 그 날 밤 그 남자도 집에서 급사를 하게 되었다.
옛날 누항마을이 물에 잠겨있었다. 한 번은 대추를 실은 배가 제를 넘어오는데 높은 봉우리 옆에서 배가 흔들려 대추가 떨어졌다. 그때 배에서 떨어진 대추가 자라 지금의 대추나무가 되었다. 원두마을에는 예전에 굴을 따던 바위라 해서 굴바위라 불리는 바위가 있고 수은마을에도 굴을 캔 곳(굴바우 모탱이)와 조기를 잡은 곳(조기배미)이 있다고 한다.

4 ) 사회 민속
관연마을의 ‘배다리’라는 지명은 배와 배를 연결해서 다리를 만들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예전에 이곳에서 천주교 신자 7명을 참형 시켰는데 어떤 신도가 와서 7구의 시체를 짊어지고 문드르미재를 넘어 지금의 천호성지에 묻어주었다고 한다. 금곡마을과 신부마을에는 상짓말(상을 지내는 마을)이라고 하여 고려장을 지낸 곳이 있었다.
여산면에서는 큰 소시장이 열렸다. 고산, 비봉, 임실지역까지 소를 사고 팔려고 이곳에 모였는데 소를 팔러 가는 사람 앞에서 아낙네가 지나가면 재수가 없다고 부녀자들은 조심을 했다. 이런 연유로 여산읍내에는 예로부터 소국밥집이 많았다.(관연, 수은, 신부) 관연마을의 ‘도둑놈잔치골’이라는 지명은 도둑들이 소를 훔쳐다가 먹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관연, 노동) 이곳에는 소의 꼬리 형상처럼 생긴 ‘우미혈’이 있으며 ‘함소바구수’는 소 밥그릇 형상처럼 유독 물이 잘 나오는 곳이다. 또한 ‘소유방혈’ 모양의 산이 있는 데, 재미있는 것은 예전부타 두 집만 산다고 한다.
호랑이와 관련된 이야기는 진사마을 인근과 학동마을에서 채록되었다. 진사마을 앞 산의 모양은 엎드린 개를 닮아 개산이라 불린다. 그 앞에 범(범혈)이 있어 개를 노리는 형국인데 그 반대편에 ‘총남뿌리’라 하여 기다란 언덕이 호랭이 산을 겨누고 있는 모양이라 범이 꼼짝 못한다. 외사마을 범덕골은 범이 잠자는 모양이다. 범이 자기 위해서는 수풀이 우거져 있어야 하는데 한 번은 나무를 전부 베어내 버렸다. 그 후로 범이 잠을 잘 수가 없어 호월마을 남자들의 수명이 줄었다고 한다. 학동마을에는 ‘벼락박골창’이라는 곳이 있다. 예전에 신행가마가 이 고개를 넘다가 호랑이를 만났는데 가마꾼들이 큰절을 해서 무사히 지나 갈 수 있었다고 한다. 또한 마을에서 쌍봉이 뵈는 집은 항상 쌍둥이가 태어나 문드르미제에서 여우가 울면 초상이 난다고 믿고 있다.
태성리에 있는 당제산의 산제는 이 지역의 종교적 구심체 역할을 하고 있다. 누항마을에서는 성태봉에서 며칠씩 무제를 지냈다. 이때 여자들은 삼박골에 가서 치로 물을 까불렸는데 이것 또한 무제의 한 종류였으며 다른 동네의 두들방아를 몰래 가져와 마을에 세워놓고 풍장을 치면 전염병이 마을로 들어오지 않는다고 믿었다. 상양마을에서는 지금도 8월 14일이 되면 음식을 장만 해서 산제를 지낸다. 이후 7일간은 사람들을 못 올라오게 한다. 외사마을에서는 오래된 고목을 수호신으로 여기며 정월달에는 마을의 평안을 비는 고목제를 지낸다. 원태마을에서는 우물에 빠져죽은 사람이 생기면 무당을 불러 넋을 건진다.
그 외 여산면에서 고려시대부터 왕비를 많이 배출했다. 여산 송씨는 단종비가 되었는데 이때 천호산을 왕에게 하사 받아서 송씨산이라고 불리게 되었다.(신부, 현천)용기마을에는 비석을 세우면 용이 승천하지 못한다 하여 지금도 마을에 비석이 없고. 교창마을에서는 철도가 지네 모양이기에 철도부설을 반대했다고 한다.
3. 시사점

인류의 상징체계는 언어, 기호, 이미지로 나타나는데 메시지는 주로 ‘서사’를 통해 표현된다. 여산면은 호남 교통의 요충지였으며 그것은 곧 전투의 요지이기도 하다. ‘견훤의 갑옷터’에서 ‘피가 수일이나 흘렀다’는 갑옷터의 서사와 장수굴 이야기는 미완의 장수 설화와 관련 있을 것이다.
사회문화적으로는 여산읍내에 우시장과 천주교 교우촌의 흥망에 대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으며 용화산의 중계장이 열릴 정도로 컸던 사찰과 읍내에 큰 배가 자유롭게 왕래했다는 역사적 내용 또한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