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광대학교 대안문화 연구소 : 익산시 구술사 DB

TEL 063-850-5275
FAX 063-850-7311

> 익산시 구술사 디지털아카이브

망성면 해제

1. 개괄
망성면은 금강과 접해 있고, 논산과 강경을 지척에 두고 있는 전라도의 관문이다. 수로정리가 되기 전 망성면은 지대가 낮고 금강의 범람이 잦아 늘 수해를 입던 지역이었다. 또한 후삼국의 격전지 논산벌을 지척에 두고 있는 망성면은 당시 전투의 흔적을 손쉽게 채록 할 수 있었다.
수로정리가 되기 전 낭성면은 “여산 아가씨가 소변만 봐도 마을이 침수”(교항마을)가 될 정도로 지대가 낮은 지역이었다. 낭성면 침수피해의 역사는 마을 유래담으로 나타난다. 내촌마을을 ‘기푸내’, ‘심천’으로 불렸다는 마을 유래담에서 낭성면 주민들의 삶을 유추할 수 있다.
침수는 잦았지만, 농수가 풍족한 것은 아니었다. 망성면의 여러 마을에서 기우제와 관련된 민속을 채록 할 수 있었다.(내촌마을, 반곡마을, 신덕마을) 특히 내촌마을의 기우제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내촌마을의 주민들은 허수아비를 만들고 춤을 춘 뒤 허수아비를 태움으로써 기우제 의식을 치뤘다고 증언해 주었다. 이러한 기우제는 기우제의 여러 의식 중 폭로의례(暴露儀禮)에 속하는 기우제 의식이다. 폭로의례는 기후재변의 원인제공자인 왕이나 무당에게 벌을 줌으로써 하늘의 노여움을 푸는 의시이다. 그런데 내촌마을은 왕이나 무당을 대신해 허수아비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자연재해의 잦은 피해를 입은 망성면 주민들은 금강의 물을 농수로 이용하기 위해 쑥을 심었다.(금지마을) 금지마을 주민들에 의하면 쑥을 심어, 낭성면의 가난함을 공무원들에게 어필 했고 이에 생긴 것이 금강양수장이라는 것이다.
망성면에서는 강경장에 대한 다양한 구술내용도 채록 할 수 있었다. 조선말 대구장, 평양장과 함께 조선 3대 시장이라 불렸던 강경장을 지척에 두고 있는 망성면 주민들은 음식이나 생필품을 만들어 강경장에 내다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고 증언해 주었다. 또한 전라도의 관문이자 강경장을 이용하는 사람들을 상대로 하는 주막이 망성면에는 다수 있었다는 것이 주민들의 증언이다.(교항마을)
이 밖에 망성면에서는 공출 독려반의 소동으로 마을의 이름을 바꾼 내촌마을, 우암 송시열이 뱃놀이를 즐기다 직접 이름을 지어줬다는 화산(華山), “가뭄에 호미로 모를 심었다”고 증언해준 신덕마을의 구술을 채록 할 수 있었다.

2.채록요약
1) 지명유래
새롭게 채록된 망성면의 마을 유래담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지형지물과 관련된 마을유래담(내촌마을, 반곡마을, 교항마을)이다. 두 번째는 민담과 관련된 마을유래담(신덕마을, 어남마을) 등이 있다.
우선 지형지물과 관련된 마을 유래담으로는 내촌마을의 마을유래담이 있다. 내촌마을은 예전부터 ‘기푸내’ 혹은 ‘심천’이라고 불렸다 한다. 내촌마을은 마을의 지대가 낮고 마을이 침수가 될 정도로 지대가 낮아서 ‘기푸내’라고 불렸다 한다. 마을 주민들은 아직도 장마철에 마을 옆 ‘내촌 방죽’의 둑이 터져 마을이 침수 되던 시절을 기억 하고 있다. ‘기푸내’라는 옛 지명은 내촌마을 뿐만 아니라 교항마을에서도 찾을 수 있단. 교항마을은 “여산의 아가씨가 소변을 봐도 마을에 물이 찰 정도”로 지대가 낮아서 ‘기푸내’라는 옛 지명을 갖고 있다는 것이 마을 주민들의 증언이다. 반곡마을의 경우 두 개의 유래담을 갖고 있다. 우선 소반(小盤)의 모습을 닮았기 때문에 반곡(盤谷)이라는 지명이 생겼다는 설과 솥을 걸어놓은 형상을 닮았기 때문에 반곡이라는 지명이 생겼다는 설이 존재한다.
망성면의 마을유래담 중 민담과 관련된 마을유래담 중 눈에 띄는 마을은 신덕마을의 유래담이다. 신덕마을은 본디 사람이 살지 않은 곳이었다. 그런데 서씨 형제가 마을에 처음 터를 잡은 것이 이 마을의 시초이다. 신덕마을의 옛 지명은 ‘독골’인데, 서씨 형제만 외롭게 산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 후 일제 강점기 때 ‘독’을 ‘덕(德)’으로 해석하여 ‘덕골’이라고 이름이 붙여졌다고 채록하였다. 어남마을은 해방 이후 공출과 관련된 민담이 마을의 지명 유래담이다. 어남마을은 어량리의 서쪽에 있기 때문에 본디 어서마을이라는 지명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해방 이후 ‘공출 독려반’이 운용될 정도로 공출이 심했다고 한다. ‘공출 독려반’은 각 마을을 돌며 ‘공출’을 독려하던 면에 소속되어 있는 단체였다고 한다. 어느 날 ‘공출 독려반’이 아침 회의 도중 ‘어서 가자’라는 말을 했고, 이 말을 들은 마을 주민이 ‘어서마을’에 방문 하는 것으로 착각하여 마을 주민들에게 알려 주민들 모두 대피를 하였다고 한다. 그 이후 이와 같은 일이 또 발생하지 않도록 마을 지명을 ‘어남’으로 바꿨다는 것이 마을 주민들의 증언이다.
이 밖에 내촌마을에는 여산과 논산이 전쟁터의 흔적이었음을 알려주는 지명을 찾을 수 있다. 대표적으로 미동(군량미를 보관하던 곳), 화정(불을 피운 곳), 갑옷골 등이 있다.
이상 마을의 유래담은 고문헌의 자료와 상이한 지명 유래담이다. 마을의 지명을 알면 지역의 역사를 알 수 있다. 수로정리가 되기 전 망성면은 지대가 낮고 금강의 범람이 잦아 늘 수해를 입던 지역이었다. 이러한 망성면 주민들의 삶이 마을 유래담에 녹아 있다.

2) 전설 및 민담
망성면의 전설 및 민담은 혈(穴)자리 민담, 망성면 주민들의 삶과 관련된 민담 그리고 교통의 요충지로써 그와 관련된 민담이 눈에 띈다.
우선 혈자리 민담은 내촌마을의 나비혈 민담이 눈에 띈다. 내촌마을에는 ‘뒷뫼산소’라는 ‘나비혈’이라는 명당이 있다. 주민들에 따르면 특히 이 ‘나비혈’이 명당인 이유가 연무대에 있는 ‘용꽃 혈자리’와 ‘배꽃 혈자리’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명당이라는 증언이다. 그런데 오래전 나비혈 명당에 큰 비석을 세워놨다고 한다. 그래서 나비가 춤을 못 춘다는 이유로 마을 주민들이 망부석을 다른 곳으로 옮겼고, 그 이후에도 한동안 성물이나 비석을 세우지 않았다고 한다.
망성면 주민들의 삶과 관련된 민담은 모스크바 민담(교항마을)과 금강양수장 민담(금지마을)이 있다. 교항마을은 여산과 강경을 연결하는 도로 옆에 있는 마을이다. 그 때문에 교항마을의 입구 양쪽에는 두 개의 주막이 있었는데, 이 두 주막을 ‘모스크바’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두 주막에 술꾼과 노름꾼들과 크고 작은 사건들이 끊이질 않았기 때문에 “흉학한 곳”이라는 뜻에서 모스크바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금강양수장 민담은 그 시기가 비교적 최근의 것으로써 금강의 강물을 농수로 이용하기 위해 주민들이 쑥을 심었다는 민담이다. 주민들은 쑥을 심어 낭성면이 가난하다는 것을 공무원들에게 어필하였으며, 이에 금강양수장을 만들어 농사에 필요한 농수를 풍족하게 확보할 수 있었다는 것이 금지마을 주민들의 증언이다.
이 밖에 망성면의 화산(華山)과 관련된 민담(신덕마을)을 채록 할 수 있었다. 우암 송시열이 부여에서부터 금강을 타고 뱃놀이를 하는데, 망성면에 이르러 산 하나를 보고 그 절경에 감탄을 마지않았다고 한다. 특히 여러 나무가 울긋불긋하게 뒤 섞여 마치 꽃이 만발한 산과 같이 보인다 하여 화산(華山)이라고 이름을 직접 지었다고 구술 해 주었다.

3) 사회민속
망성면의 사회민속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기우제(내촌마을, 반곡마을, 신덕마을)나 거리제(제남마을)와 같이 발복(發福)민속과 강경과 관련된 사회민속이 그것이다. 특히 망성면은 익산-강경-논산을 연결하는 중요한 교통의 요충지였다. 또한 주민들 대다수가 강경을 자신들의 생활권으로 생각하며, 금마장-여산장-함열장은 잘 이용 하지 않았다는 데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우선 기우제와 관련된 사회민속은 내촌마을의 기우제가 대표적이다. 내촌마을의 주민들은 당산나무에서 기우제를 지냈다고 증언해 주었다. 특이한 것은 허수아비를 만들고 춤을 춘 뒤 허수아비를 태움으로써 기우제 의식을 치뤘다는 것이다. 신덕마을의 주민들은 ‘술무재산’에서 기우제를 지냈다고 증언해 주었다. 술무재산은 나평마을 뒤에 있는 산으로써 “호미로 모를 심을 정도로 가물 때” 신덕마을의 주민들은 술무재산에서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반곡마을 주민들 역시 사절리에서 제일 높은 곳인 ‘기우제 땅’이라는 곳에서 기우제를 지냈다고 증언해 주었다.
망성면의 기우제 의식 중 눈에 띄는 것은 내촌마을의 기우제 의식이다. 내촌마을의 기우제 의식은 기우제의 여러 의례 중 폭로의례(暴露儀禮)에 속한다. 폭로의례란 기후재변의 원인제공자인 왕이나 무당등을 뜨거운 햇볕에 폭로시키고 고통을 줌으로써 비가 내리기를 비는 의식이다. 다만 내촌마을의 기우제는 왕이나 무당이 직접 그 고통을 받는 것이 아니라 허수아비를 내세운 것이다.
망성면의 발복민속 중 거리제와 관련된 의식도 찾을 수 있었다. 제남마을 주민들은 교통사고가 많이 발생해 거리제를 지냈다고 증언해 주었다. 제남마을 주민들은 삼색나물, 밥 세 공기, 팥 시루떡을 준비하여 거리제를 지내며 귀신을 달래주었다고 한다. 이러한 거리제는 변사로 죽은 귀신과 객귀(客鬼)의 한을 달래주고, 마을에 들어오는 것을 막으려는 의식이다. 이러한 의식은 발복(發福)의 성격과 일맥상통 한다고 볼 수 있다.
망성면에서는 강경과 관련된 많은 사회민속도 채록 할 수 있었다. 음식(신덕마을)이나 생필품(어남마을)을 만들어 강경장에 내다팔았다는 증언이다. 신덕마을의 주민들은 녹두로 묵을 만들어 강경장에 내다 팔았으며, 어남마을의 주민들 역시 소쿠리와 같은 죽세공품을 만들어 강경장에 내다팔았다고 증언해 주었다. 특히 어남마을의 경우 마을 주민이 100호에 이를 정도로 큰 마을이었으나, 논은 턱 없이 부족한 마을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죽세공품을 만들어 팔면서 “망성면에서 가장 돈이 많은 마을”이라고 소문이 났다고 한다.
강경장은 19세기 초에 편찬된 『만기요람(萬機要覽』에 전국 15개 장시 중 하나로 기록되어 있으며, 조선 말기에는 대구장·평양장과 함께 전국 3대 시장으로 불리었다. 이러한 강경장이 지척에 있으며, 익산-강경-논산을 연결하는 교통적 요충지에 있던 망성면 주민들의 생활권이 강경에 있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또한 지대가 낮고 금강이 자주 범람하던 망성면에서 강경장은 타 지역의 시장이 아니라 망성면 주민들의 생활 터전인 것이다. 이에 망성면 주민들은 강경(장)과 관련된 다양한 증언들을 구술해 주었다.
이 밖에 내촌마을에는 말무덤이 있는데, 내촌마을 주민들은 학질에 걸리면 말무덤에서 재주를 넘었다고 한다.

3. 시사점
망성면은 지대가 낮고 잦은 금강의 침수로 주민들의 고단한 삶이 담겨 있는 고장이다. 공출과 관련해서 마을 지명을 바꿨다는 것은 망성면 주민들의 고단한 삶을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또한 침수에 비해 농수는 늘 부족해서 주민들이 공무원들의 감성을 자극하기 위해 쑥을 심었다는 민담 역시 망성면 주민들의 삶이 얼마나 고단했는지 보여준다.
문화적으로는 망성면은 익산의 타 지역과 구별되는 문화적 독창성을 갖고 있다. 독특한 기우제 의식, 강경에 대한 기억담은 망성면만의 독창성이다. 이러한 독창성은 망성면이 금강과 강경을 지척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후삼국시대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논산벌을 지척에 두고 있는 망성면에서 그 전투의 흔적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망성면의 많은 마을에서 전투와 관련된 마을 유래담을 찾을 수 있었으며, 그와 관련한 유적의 위치를 망성면 주민들은 비교적 소상히 기억하고 있었다. 다만 망성면의 다양한 유적들이 아직 발굴되지 못한 상황인데, 이번 구술사 조사를 통해 망성면의 유적들이 주목 받을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