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광대학교 대안문화 연구소 : 익산시 구술사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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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안면 해제

1. 개괄

용안면은 금강변에 위치한 익산의 3개 면(용안, 성당, 웅포)의 하나이며 향교가 있었던 익산의 4개 면(금마․여산․용안․함라)의 하나다. 과거 용동면과 분리되기 전에는 익산 17개 면 중에서 가장 큰 면이었다. 『동국여지승람』에 ‘비옥한 들이 바다와 잇닿았다’고 표현 될 만큼, 비옥한 평야지대가 금강을 젖줄기로 펼쳐져 있다.
용안(龍安)이라는 지명은 조선 태종 때 함열현과 분리되면서 지형적으로 ‘용이 편안히 누워 있는 형상’에서 유래됐다.(교동, 용두, 자라, 칠목) 그러나 이 명칭은 지역에 따라 ‘용안(龍顔)’으로 해석하기도 하고 ‘안평’과 ‘용성’이라는 지명이 합해서 용안(龍安)이 되었다고도 한다.(성치)
용안면 사람들은 타 지역은 흉년이 들어도 이 지역만큼은 풍년이 든다고 하여 순풍(順豊)이라는 지명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교동, 부억, 성치) 풍요로운 물산은 유교문화의 정착으로 이어졌는데 이는 용안향교에서 개최한 기로연과 임란시 삼세오충렬사로 대표되는 충효의 고장으로 자리매김 했다.
용안면 구술사 채록에서 주목할 점은 민간신앙의 투사가 주민들의 무의식에 깊고 광범위하게 투사되어 있는 점이다. 대표적으로 용에 대한 의식을 들 수 있다. 용안면은 지명에서 나타나듯 용과 관련이 깊다. 용은 풍수의 오대 요소인 용(龍), 혈(穴), 사(砂), 수(水), 향(向)에서 풍수가들이 으뜸으로 꼽는다. 용은 정서적으로 왕을 의미하며 현실 생활에서는 비를 몰고 오는 주체 즉 풍요를 뜻한다. 이 점에서 용안면 사람들의 생활과 정서에 용의 무의식이 파고든 점은 비유적 의미에서 산(용두산)과 강(금강)에 인접한 지리적 영향으로 생각된다.
용두산(龍頭山)은 금강 연안에 바로 맞닿아 있는 산이다. 산의 형상이 높고 길게 굽어 있기에 이 모양이 물 깊은 데로 빠져 들어가는 용의 머리와 같다 하여 용두산이라 불렸으며 인접한 용두마을도 여기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무학산 앞에 위치한 용두산은 ‘용의 머리’에 해당한다. 용의 배 부분에 해당하는 무학산(舞鶴山․모산)은 ‘학이 춤추는 산’으로 불렸다. 용안면이 조용하고 평안한 것은 ‘용의 배 자리’ 덕분이라고 알려져 있다. 배 부위는 숨을 들이쉴 때마다 오르내리니 이러한 복(기운)을 받아 향교나 학교, 관공서가 있는 것이라고 전한다. ‘용의 꼬리’에 해당하는 곳은 용산리다.(용두, 성치, 법성) 이상에서 용두산의 형태와 방향에 따라 인간에게 미칠 길흉을 점치는 것은 풍수지리학적으로 오래된 개념이다. 용안면 사람들은 ‘용의 영토’의 백성으로 살아 온 셈이다.
2. 채록 요약

1) 마을유래

용안면의 지명은 기능적인 유래와 형태적 유래로 구분된다. 기능적인 유래는 정치·행정의 기능적 역할을 수행한 지역으로 교동마을과 성치마을이며, 마을의 지형적 특성으로 명칭이 정해진 경우로는 자라마을과 용두마을, 궁형마을. 그 외 생활 환경적 요소가 마을의 지명이 된 경우로 법성마을과 송산마을을 들 수 있다.
교동 마을은 과거 향교가 있어서 ‘향교골’이라 불렸던 곳이며, 연동마을은 과거에 연 밭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성치마을은 고려시대의 성터가 있던 자리인데 옛 이름은 ‘성재’다. 이 마을의 ‘궁원’이라는 지명은 과거 수령이 살았던 곳. 지금도 ‘군장터’라고 불리는 자리에 탄곡이 나온다.(교동, 성치) 마을 명칭이 기능적인 유래인 경우, 지명유래와 관련된 유적을 찾아 볼 수 있다.
마을 지명의 형태적 유래로는 용의 머리 부분에 위치한 용두마을, 자라가 엎드린 형국인 자라마을, 지형이 활모양으로 생겨서 붙여진 ‘궁형’마을을 들 수 있다. 마을의 형태에 따른 지명유래인 경우, 지명과 관련된 전설 민담을 채록 할 수 있었다.
그 외 민간 어원설로 불려진 마을도 있다. 법성마을은 인근의 자명사에서 이 지역을 법성리라고 부름으로써 생긴 명칭으로 알려져 있다. 곰이 살았을 정도로 소나무 숲이 울창했던 ‘웅동(熊洞)’은 소나무 숲이 깊어 송산마을로 개칭됐다. 부억(富億)마을은 마을을 이룬 사람이 ‘억만부를 누리라’ 해서 지은 마을로 기록되어 있다. 채록결과 주민들은 ‘부곡마을’과 ‘구억마을’이 통합 되면서 얻은 이름이라고 한다. ‘구억말’이라는 이름도 “여기서 살면 고생하며 안 살 것이다.”라는 말이 있어서 불렸다고 하는데, 그 마을에 부자들이 많았다고 하니 결과적으로 전승된 유래라 하겠다.
구술사 채록을 통해 마을의 지명 유래가 기존 문헌과 상이하게 남아 있는 경우도 채록되었다. ‘신은’, ‘중신’, ‘칠목’, ‘부억’ 마을이 이에 해당한다. 신은마을은 신리(新里)와 은입산리(銀入山里)의 합친 이름이다. 주민들은 은이 매장돼 있다는 전설을 마을의 유래로 알고 있으나, 은입산은 조선조 이재의 시에서 ‘산세가 마치 여자의 손길처럼 부드럽게 펼쳐져 있다.’는 뜻으로 묘사된 바, 종래의 어원설이 사라진 경우다. 중신마을은 용안면의 중심이라는 의미로 기록되었으나 채록에 의하면 고려 말 이주한 고려말 귀족(重臣)이 이곳에 정착해서 살면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칠목(七牧) 마을의 유래는 옷나무가 많아서 칠목(柒木)이라고도 하고 질목(길목)에 위치해서 지어진 이름이라고 한다. 또 지형이 북두칠성처럼 생긴 형국이어서 유해한 것이라는 등 다앙한 설이 등장한다. 구술자에 의하면 칠목(七牧)은 작물이나 가축이 잘 자라는 살기 좋은 지역이라고 한다.


2) 전설 및 민담

용안면의 전설·민담은 풍수적 영향이 크다. 이것은 금강변에 위치한 생태적 무의식이 ‘용이 길게 누워있는 형’이라는 지형적 의식이 반영된 것이다. 민속적 무의식의 반영은 묏자리에 석물을 세우지 않는 독특한 매장 문화를 만들었다. 그 이유는 무거운 돌(상석)이 ‘용의 승천’을 방해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대표적인 것이 ‘남궁도령 이야기’다. 옛날에 ‘스님이 춤추는 혈’에 누군가 묘를 썼다. 그 자리의 기운이 심상치 않아 중국 황제가 사람을 보냈다. 예언에 따라 이 묏자리의 기운을 받은 석 자 세 치의 아이가 태어나면 죽이려 했던 것. 얼마 후, 꼭 석자 세치의 남궁도령이 태어났다. 중국의 황제는 사람을 보내 남궁도령을 불렀다. 이때 도령은 두꺼운 버선을 싣고 황제를 알현했다. 황제가 키를 재보니 ‘석자 네치’가 되어 살게 되었다. 그 후 중국 황제는 ‘스님이 춤추는 혈’에 위협할 만한 기운이 있으니 묘 앞에 망부석을 세워두라고 하였다. 하여 중국황제의 비석을 운반해 오던 배가 웅포에서 뒤집어지는 상황이 벌어졌으나, 결국 망부석을 무덤 앞에 세우게 되었고 그후 도령은 힘을 잃고 말았다.(교동) 이와 비슷한 혈맥의 훼손과 관련된 이야기가 부억마을에 전해진다. 무학산 줄기 중 하나인 ‘와룡산’은 우리나라 8대 명당 중 하나에 들 정도로 길지였다. 그런데 중국의 ‘이효선’이라는 이가 위협이 되는 인물이 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산 혈맥을 화약으로 끊어 놓았다.(부억) 또 일제 강점기 때 ‘다목’이라는 일본인이 용 머리에 해당하는 바위를 파괴했는데 그 후 벌을 받았다고 한다.(교동) 이상은 ‘금기의 파기’는 무서운 결과를 불러 오고 있음을 보여주는 풍수적 신앙이 반영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용안면의 풍수적 사고는 금기와 관련이 있다. 용안면의 북쪽은 상을 당해도 비석을 세우는 것이 쉽지 않았다. 구설에 의하면 신은마을에서 용두마을까지가 풍수적으로 ‘기러기 혈’에 해당하는데 이곳에 비석을 쓰면 기러기가 날개를 펴지 못한다는 속설이 있기 때문이다.(교동, 법성) 지맥을 중시한 용안면 사람들은 일제강점기 철도 부설 계획도 바꾸게 되었다. 원 계획은 용안면으로 철도가 부설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기차가 지나가면 마을의 맥이 끊긴다고 하여 기차길을 용동으로 돌렸다. 또 하나의 사례도 있다. 용두리에 금강물을 끌여 들여 양수시설을 만들려고 했던 계획이 역시 지맥이 끊기는 것을 반대한 여론에 의하여 다른 곳에 양수장이 지어진 것이다.(교동, 법성)

용안면 전설․민담의 특징 중 하나는 전통적 질서에 순응하는 것이다. 이는 용안면 향교에서 전해지는 기로연과 삼세오충렬로 대표되는 충효사상을 예로 들 수 있는데궁항마을 비롯하여 인근의 덕용리와 용동면 신왕부락에도 효자문이 있다. 궁항마을 효자는 ‘한겨울에 물고기를 구해 왔다.’ 오랜 병치레를 하던 여자가 한겨울에 물고기가 먹고 싶었다. 물고기를 구할 방법이 궁했던 효자는 연못 앞에서 하소연을 했다. 그러자 연못의 얼음이 깨지면서 물고기가 튀어 나왔다. 또 중신마을의 효자 임성희는 부친의 생명이 위독하자 자신의 손에서 피를 내어 부친에 먹여서 살렸다. (궁항, 중신)
도깨비와 귀신이야기도 사회민속적 입장에서 보면 사회구조, 혈연관습의 차원에서 해석될 수 있다. 용안면에서 채록된 도깨비 이야기의 경우 고립형 마을보다는 개방형 마을에서 발견됨을 알 수 있었다. 교동마을에선 빗자루와 절구대에 피가 묻으면 도깨비불로 변하며. 자라마을의 도깨비는 밤마다 방아를 찧는다. 부억마을의 도깨비와 씨름을 한 후 묶어놓고 나면 다음날 빗자루로 변하곤 했다. 사람이 죽을 무렵엔 도깨비불이 나타나는데 지역민들은 ‘도깨비 불에 맞으면 귀신에 씌인다’고 하여 피한다. 교동마을의 순풍제와 자라마을의 각골제에선 귀신이 나타난다. 순풍제의 한 무덤에선 여자귀신이 출몰했고, 각골제의 한 노인은 귀신과 씨름을 하다가 날이 샌 후에야 돌아 올 수 있었다고 한다. (교동, 부억, 자라)
용안면의 전설과 사회적 의식에 대해 살펴 본 결과, 지역민들은 지형과 삶이 서로 연결된 사고를 하고 있음이 판명되었다. 한 예로 송산마을의 오룡골에서는 용 다섯 마리가 승천했다는 전설이 있었다. 학교를 짓기 위해 터를 다듬던 도중 범상치 않은 관이 여러 부장품과 함께 출토된 적도 있었다. 지역민들은 학교에서 훌륭한 인물이 나올 것으로 믿고 있다. 이 또한 지맥과 연결된 사고의 결과라 하겠다.

3) 사회 민속

용안면의 사회적 민속관습은 생활문화의 역사성과 더불어 사회적 경향을 살펴보는데 시사점을 갖는다. 거의 전 지역에 걸쳐 거리제와 산신제를 지냈으며 ‘공동 우물’과 ‘매장 금기’에 대한 구술 채록이 이뤄졌다. 이것은 지역 공동체의 정체성을 공고히 하는 공동체 구성원의 의지가 높은 것을 의미한다. 한 예로 ‘보름다리 놓기’를 들 수 있다. 보름다리는 대개 정월보름이나 초사흗날에 행했던 마을길을 보수해주는 일종의 세시풍속이다. 생활에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짚과 흙을 이용해 만든 보름다리는 일반 사람들의 통행에 도움을 주었다. 용안면의 대부분 지역에서 행해진 사회적 기부행위를 통해 개개인의 사회적 의식이 성숙했음을 알 수 있다.
용안면에 이주해온 이들 중에는 ‘이렇게 논이 많은 디, 여기서 내 논을 어떻게 찾냐?’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어디든 곳간이 넘쳐야 인심이 나는 법. 동학과 6.25등 큰 난이 일어났지만 이 지역 사람들이 크게 상하지 않은 것도 풍수 덕택으로 생각한다. 지역에서 떠도는 말로는 “용안부자 열이 함라부자 하나 당하고, 함라 부자 열이 옥구부자 하나다.”라는 말이 있다. 용안면 보다 함라면이 함라면 보다 옥구읖의 지역세가 컸다는 뜻이다. 그러나 가진 것으로 보면 임피의 깨 만석군보다 함라의 쌀 만석꾼이, 함라의 만석군보다 용안의 천석군의 위세가 적겠지만 인심과 정서적 넉넉함은 그보다 더하다는 자부심이 용안면 사람들에게 있다. (교동, 성치, 대기) 따라서 살기 좋은 용안 고을에 부임하는 원님은 ‘울면서 들어와 울면서 나간다’는 이야기가 복수의 마을에서 채록되었다. 부임시에는 고을이 작아서 울고, 나갈 적에는 인심에 감동해서 운다는 이 말은 용안면 사람들이 가진 지역에 대한 자부심을 상징하는 말일 것이다.(교동, 법성, 부억, 성치, 중신)
무학산엔 ‘당터(당산터)’라고 불리는 곳이 있었다. 이곳은 산제와 무제(기우제)를 지내는 곳. 용안면에선 거리제도 정기적으로 지내곤 했다. 거리제에는 당골네가 자주 불려다니곤 했다. (교동, 자라, 용두). 특히 용두 마을 사람들이 놀 적에는 큰 바위에 자국을 내어 고니(장기의 일종)를 두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흔적이 없다.
‘공동 우물을 청소하면 아들을 낳는다’는 이야기도 채록되었다. 법성마을에서는 ‘아들 생산’의 전통을 잇기 위해 우물 청소는 꼭 아들을 낳은 사람이 했다. 교동마을의 젊은 남자들은 아들을 낳는다고 하여 우물 청소를 다투어 했다. 그러나 상여 매는 것은 기피했다. 총각이 상여를 매면 장가를 늦게 간다는 속설이 있기 때문이다.(교동, 법성, 성치, 자라) 또한 상여에 대한 터부도 존재했는데 성치마을에서는 마을 당산을 넘지 못하고 우물 옆을 지나가지 못하게 했으며 법성마을은 더 엄격해서 마을 사람이라도 밖에서 사망한 경우 마을 안으로 상여를 못 들여오게 했다. 그 이유는 마을 앞에 상여가 지나가면 마을에 우환이 생긴다는 설 때문이다. 교동마을의 ‘아죽가터’에 묘를 쓰면 마을에 흉한 일이 생긴다고 하여 묘를 못 쓰게 했다. 그래서 지금도 무학산 앞으로는 묘가 없다고 한다.(교동, 법성, 성치)

이상의 채록에서 용안면 전체가 ‘공간의 민속학’의 대상이 될 만큼 사회의식이 표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금강이 가까운 법성마을에서 어부들이 우어를 잡아서 나눠주는 것도 일상다반사였고(법성) 인근의 자명사에 불공을 들이면 득남한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었다. 한 사람이 실제로 아들을 낳은 후, 그 이름을 ‘자명’으로 지었다고도 하고 홍자명이라는 이가 불사를 해서 이름이 바뀌었다고도 한다.(부억, 송산)

성치마을에는 한 집안에서 삼대에 걸쳐 다섯 충신이 나온 것을 기려 해마다 ‘삼세(삼대) 오충렬사’에서 제사를 지낸다. 법성 마을에는 조선시대 문객인 서거정의 정자 ‘삼송정’이 있었는데 지금을 헐리고 없다. 정자에 걸렸던 현판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로 구술자가 보관하고 있다. 이 마을은 법성마을은 용안면에서 전기시설이 가장 빨리 설치된 곳이다.(법성)
‘물 넘어 고개’라는 지명이 성당면과 웅포면 사이에 있다. 예전엔 지역민들의 보행로로 ‘물너고개’라고도 불렸다. 용두리의 금강물을 웅포로 보내는 물길이 생긴 후에 옛 지명이 그렇게 된 것을 지역민들은 신기해 했다.(부억)
일제강점기 때 금강에 둑을 쌓기 전에는 용안, 함열 지역에 홍수가 잦아, 그걸 보고 용안, 함열 땅이 꺼질 것이라는 말이 있었다.(송산)
용안 고도리 : 용안에 제일 처음 정착한 ‘제주 고씨’, ‘성주 도씨’, ‘용안 이씨’를 가리켜 용안 고도리라고 한다. 용처럼 길게 이어진 산세를 따라 고씨, 도씨, 이씨가 마을을 형성했는데 입산마을의 ‘도손천’이라는 사람이 처음으로 배의 ‘삿대(상앗대)’를 만들었다.

3. 시사점

전통적인 한국인의 일상생활은 ‘터잡기 논리’가 영향력을 발휘했다. ‘터’는 삶의 영역을 넘어서 다른 세계로의 부활을 꿈꾸는 안주처임과 동시에 자손의 번영을 좌우할 수 있는 미래지향적 논리였다. 용안면 일대에서 보여지는 풍수에 대한 무의식은 기존의 신앙과 사상, 신화와 윤리가 포함된 전통적 지리학의 유산이라 할 것이다. 따라서 유교적 전통이 강한 지역일수록 터잡기 논리는 강하게 나타난다. 지맥의 특성에 따라 옛 지형의 훼손을 금기시한 용안면 사람들의 무의식은 민속신앙과 강하게 결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풍수적 무의식과 연관된 지명의 생성과, 변화, 소멸은 지표상의 공간에 대해 당대 현상의 의미가 재구성되는 것을 살펴보는 하나의 수단이 된다.
마을지명에서 용두마을과 자라마을의 경우 풍수상 ‘양’의 의미를 띄고 있으며 송산마을의 옛 지명인 ‘웅동’도 양의 기운을 가진다. 이것은 용안면의 장소적 명명이 개인 차원의 음택보다 마을 공동체 차원의 양기풍수가 주종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전설·민담에서 주목할 점은 ‘남궁도령 이야기’다. 용안면의 영웅이 중국황제의 견제를 받아 풍수적 금기인 망부석을 혈자리에 세운 이야기다. 남궁도령이 자신의 키를 속인 일이나, 망부석을 곰개나루에 빠트린 것은 혈의 지향점에 대해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행위다. 풍수설화에서 지형을 바꾸지 않고 보위해야 명당의 효력이 지속된다는 믿음은 ‘단혈’과 ‘단맥’을 피하기 위해 일제강점기 철도의 방향을 틀게 한 용안면 사람들의 기대 가치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