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명 : 여산면 > 교창마을

구술 기본정보

구분 내용
마을명 여산면 > 교창마을
구술자 김병일(1932)남자
구술자 박성쾌(1962)남자
면담자 장윤준, 이순영
구술요지 마을 유래담
지명 유래담
전설 및 민담
구술일시 2012-09-08
비고 면담장소 : 교창마을 김병일씨 자택.
면담시간 : 오후 2시
내용 : 마을 유래담, 전설 및 민담 등에 대한 인터뷰 진행.
키워드  

문헌내용

교창(校倉)․교동(校洞, 생교골)․창전(倉前, 社倉, 사창앞) : ‘교창’은 1972년 ‘교동’과 ‘창전’을 합쳐 지어 붙인 분리명. ‘교동’은 향교가 있어 생긴 이름.‘창전, 사창’등은 여산군 때 사창이 있던 앞마을이므로 일컫던 이름.
『익산시사』
여산향교(礪山鄕校)
◦ 소재지 : 익산시 여산면 여산리 101번지
◦ 대성전 : 지정번호 : 지방문화재 자료 83호
여산향교는 여산 인근의 유림들이 힘을 모아서 1403년(조선 태종 3)에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창건 당시에는 대성전, 동무, 서무, 명륜당, 동재, 서재, 사마재, 양사재, 전사청 등을 갖추고 있으며, 향교 소속의 유림만 해도 교장 1인, 장의 1인, 제임 2인, 교생 50인에다가 노비 5명이 딸린 매우 큰 향교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 향교도 익산향교와 마찬가지로 지금은 퇴락하여 대부분의 건물이 없어지고 다만 대성전과 동무, 서무, 명륜당 그리고 내․외삼문만이 남아 겨우 명맥만 잇고 있는 상태이다.
대성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 반의 맞배지붕 건물로 건물 양측의 박공머리에는 방풍판을 달았다. 명륜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규모가 제법 큰 팔작지붕 건물이다.
대성전과 동․서무에 향사하는 위패는 5성, 10철, 송조 6현, 우리나라 18현으로 익산향교와 같았다. 제사는 이전에는 해마다 봄에는 음력 2월 상정(上丁)일에, 가을에는 8월 상정일에 행하였었으나 지금은 음력 8월 27일에 석전제(釋奠祭)를 행한다.
『익산시사』

구술요지

1) 마을유래담 :
- 교창마을 : 향교가 있는 교동과 창고 앞이었다는 창전이 합쳐져서 교창이 되었다.

2) 유적, 터 및 기타지명 :
- 일번국도와 철도 : 금마가 쇠말이기 때문에 금마로 철도가 가면 안좋다는 말도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풍수지리설에서 철도를 지네로 보기 때문에 철도를 반대했다고 한다.
- 사직깨 : 사형장을 뜻하는 지명이다.
- 닥잡골 : 닭 잡아먹는 동네를 이르는 말이다.
- 천호산 : 천 가호가 살 수 있는 산이라 하여 천호산이라고 불렀다.

3) 전설 및 민담 :
-천석꾼 이근호 : 천석꾼 이근호가 억울하게 죽고 , 또 그 아들 자신도 억울하게 일본 헌병정치 시절에 억울하게 당하여 반병신이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이근호가 전주 이씨이고 그의 조상의 제실이 금곡마을에 있다.

- 이완용 : 이완용 가묘가 남산마을의 감나무 골쪽과 금마 사이에 있다고 한다.

구술채록

A1 : 김병일1932
A2 : 박성쾌1951

B1 : 장윤준
B2 : 이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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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 : 원래는 교동마을이라고 하는 것이 맞지 않습니까?

A1 : 에. 원래는 교동마을. 향교 있는 데는 다 향교 교자 동동자 해서 교동이라 해요.

A2 : 긍게 그 동네이름을요 분리 시켜주세요. 그냥. 우리 동네도 원래 이름은 창구가 있어가지고 원래 사창 앞이거든요. 창전이에요 그래서. 창고 앞이라고 해서 창전이라고요. 그래서 분리를 시켜줘요. 옛날에 창구 터에요. 지금도 나무 밑에 보믄 옛날에 탄 곡물이 나오고 그랬어요. 그게 지금 XX되가지고 그러니까 동네를 분리시켜믄서 그것 좀 아예 복원시켜 주었으면.

A1 : 지금 우리 마을을 얘기헌다고 하면은 우리 어렸을 적에 국민학교 내가 1학년 때도 여기가 60세대가 됐었어. 60호라고 그랬지 왜정말엽에. 또 우리 마을이 특이한 것은 이근호라고 여산에서 천석꾼 만석꾼 하는 사람이 우리 마을에 살았어요. 이근호라고 아마 625 전 실화잡지던가. 알죠? 잡지중에서 실화라는 잡지가 나왔었어요. 거기에도 실리고 그랬는데 그런 분이 우리 마을에 살았어. 그리고 그분이 인제 아들이 이분이 인제 아들이 하나가 있는데 에. 반병신이 되야버렸지. 왜 그랬냐면은 여기가 지금 익산 시 여산군으로써 군으로써 인제 동원도 현재 그대로 남아있고 학교도 객사자리고. 세심당이라고 알랑가 모르겠어. 씻을 세 마음 심자. 마음을 씻는다는 그런 디가 인자 여산초등학교 그 대밭 있는디가 그 전에도 있었는데 근래에 와서 없어졌는데 그 객사라는 것은 무엇인가 알죠? 거 중앙에서 내려오면은 여관이 아니라 인자 각지에서 자고 그 세심당에 가서 마음을 씻고 해서 그 국민학교 자리가 객사여. 객사자리여. 그 옆에 국민학교 들어가기 좌착으로 뭐 조각공원처럼 하나 맨들어 놨는데 거기가 옛날 그 일제 말 저 초기에는 헌병 무당정치를 했거든요. 헌병 무당청치를 헐적에는 거기가 헌병자리고 그래서. 인제 그랬는데 여산 군으로써 고을 아녀? 고을으로써 문무를 겸한 고을 원이 있어가지고 여기서 사형까지 집행했거든요. 그서 지금 저 파출소 자리가 망루가 있어가지고 거 저짝에도 영전마을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그 앞에 숲쟁이라고 있어요. 거기가 뭐 천주교 성지라고 있는데 거기가 인자 음. 죄인을 직접 다루는 그러한 죄인을 다루는 데가 있고. 거기서 망나니가 칼춤을 췄지 인제. 그럼 고을 원님이 칼춤 추는 것 보고서는 바로 그 객사 아니 동원으로 들어가버렸단 말여. 근데 인제 헌병 정치를 허니깐 그 이씨들이 전주 이씨들이거든 이게. 근데 전주 이씨들이 인자 약을 먹여서 저 아버지가 죽었다. 그 헌병정치 일제 초기에 죽으니깐 그렇게 약을 맥여서 죽였다 하니까 뭐 일본놈들이야 갖다 족치면 되는 거 아니여.

B1 : 그게 무슨 말입니까?

A1 : 그렁게 자기 아버지를 독약을 맥여서 죽였다 이거여. 이근호씨가 인자 죽었는데 아들이 그렇게 죽었다고. 그러니까 뭐 헌병들이 상관있어? 잡아다 족치니까 아는 놈도 족치면 두드려 패면 혔다고 혀야지 어떡혀. 그렇게 해서 교도소에 지금은 교소도라고 하지만 그 때는 형무소라 했지. 형무소에 보내가지고 10년 15년형인가 받아가지고서는 5년은 감형되고 10년 살고 나와서 인제 나는 그 분 어떻게 해서 봤냐면 우리 아버지허고 연령이 비슷해가지고 그 사람. 그 인자 사랑채에 인자 사랑방 소를 맥이니깐 거기 와서 인자 안가는 거여. 우리 어렸을 때 보면은. 아 왜 안가냐 허니까 ‘아 놔둬라. 그 분이 아무개 아들인데 지금은 형무소 갔다 와가지고 반병신이 되얐으니깐 에 그냥 놔 두고 밥이나 자가 먹어라.’ 해가지고서는 밥 갔다 주고서는 얼굴을 봤어 나는. 했는데 저기 금곡마을에 인제 전주 이씨 제실이 있어요. 거기가 인자 자리를 잡고 있다가 언제 죽었는가는 몰르지 나도. 나도 인제 객지 돌아다니고 그러니까는. 그러니까 그 분 본각시에서 낳은 아들이 딱 하나가 있어. 이개원이라고 우리 보담 한 대여섯살 더먹었으니깐 우리 여그 저 친구가 아니지. 그래서 동촌마을에 집을 참 잘 지었거든요. 그 집을 팔으니깐 여기 부흥사는 신동수라는 그 친구가 그 집을 사가지고 뜯어서 자기를 짓고 터가 상당히 넓으니까 다른 사람이 와서 거기서 집을 짓고 살았는지 어쨌는지는 모르지만은 현재 사는 사람은 이 남이 이문완(?)이라고 긍게 우리보단 선배지 그 분이 거기서 살고 있더라고. 그래서 우리 마을이 천석꾼 만석꾼허믄 그 이근호씨가 우리 마을에 살고 현재 여기 저 이기관(?)네라고 허는 그 집 뒤가 바로 그 사람의 집터인데 우리는 다 그 집터 다 봤어. 다 보고 그 지금 이기관(?)이 할아버지가 그 집 서사로써 일을 보믄서 거기다 자리를 잡고 적은 집 큰 집 있는 그걸 다 뜯어서 다 울 안이다 맨들어 가서 터가 넓고 그렇단 거 아녀. 그래서 이근호라는 살은 아주 여산에서는 특별한 마을이 됐졔.

B1 : 그렇게나 부자였습니까?

A1 : 천석꾼이 천석을 받아서 천석꾼이라고 하는디 우리는 거기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은 그 많은 땅을 갖고 그 많은 부자가 우리 마을 아니 우리 여산에서 제일 큰 부자지. 그래서 우리가 인제 교통이 인자 강경 금강 있지. 금강까지 배가 들어오니깐. 에. 거기서 모든 것을 사다가 먹었다 그런 얘기도 듣고. 또 교통이 강경허고도 통하는 그런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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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 : 교통편이 나와서 묻는 것데 일번 국도가 여기에 있지 않습니까?

A2 : 옛날에 일번국도는 여기 지금 소재지로 가는 길 있잖아요. 그게 일번국도에요. 근데 지금은 외곽도로로 뚫려가꼬 일번국도가 4차선이 되버렸어.

B1 : 제가 듣기론 남원사도 서울에서 일번 국도를 탄다고 들었습니다.

A1 : 응. 그게 구도여. 이게 왜놈들이 와가지고 새로운 도로 허. 그래서 그 때 말로 그런 말이 있지. 쓸 만한 놈은 형무소 가고 쓸만한 논통은 길로 난다는 얘기가 그 때 나온 얘기여.

B1 : 그런데 일번국도는 여기인데 왜 철도는 솜리쪽으로 갔습니까?

A2 : 그게 저기 금마 있잖아요. 금마가 한자로 허면은 쇠말이잖아요. 철도를 그게 저게 상징하는 거라 그리 못지나게 해가지고 돌아갔다 해서.

A1 : 거기 당초 왜놈들 계획이 여기 논산에서 직접 삼례쪽으로 빠지도록 계획이 되였다가 인제 반대를 허니깐은 익산쪽으로 길을 바꾸고 그랬지.

A2 : 긍게 금마 사람들이 저 뭐야 옛날에 터가 쎘었대요. 그래서 그리 못지나간다고. 금마가 한자로 하면 쇠말이라고. 긍게 철도를 상징하는 거라 그리 못 지나가게 저리 함열로 갔다고.

A1 : 그리고 우리 나라 사람들이 풍수지리학이라는 게 발달이 되가지고 기차를 지네상으로 봤드라고 지네로. 그리고 왜놈들이 교묘헌게 뭐냐면 그 쪽에 가면 함열이 있어. 함열이 거가 함열이 아녀. 함라 그 향교 있는디가 함열이여. 그래서 이름이 쓸만 허니깐은 그냥 함열로 붙여가지고 지금도 함라에 있는 함열 향교 하면은 함라에 있거든. 그래서 향교 있는 곳이 함열이여. 그래서 이름이 쓸 만 하니까 그 철도를 내놓고는 그냥 그 철도를 내 놓고는 함열역이라고 이름을 붙여버리고. 어 여기 익산도 그렇지. 익산도 금마가 익산이여. 익산 금마라고 하는데 근데 벌판이다 철로를 깔아놓고서는 익산이라고 그짝으로 끌어갔지 이름을. 그 일본놈들 지명을 붙이는 디도 교활하게 붙여놔버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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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2 : 천석꾼 이근호 할아버지는 어떻게 천석꾼이될 만한 땅을 얻게 되었습니까?

A1 : 그 땅에 대해서 어떻게 되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못 듣고 실화 잡지에 실린 것이 우리 중학교 2학년 때인가 3학년 때인가 긍게 625전이지. 그 전에 실화잡지가 나오다가 어떻게 되가꼬 폐간이 되야버렸더만.

A2 : 조선시대는요 무슨 이런 포상헐 때 산 위로 올라간데요. 그래서 이 앞은 내땅 그런것 내면 다 줬대요. 그래서 천석꾼 만석꾼이 생긴데요. 허허(웃음)

A1 : 그래서 그걸 알아볼려고 허는 그런 것도 있었지. 왜냐하믄 관등이라고 하는 그 묘 앞에 서 있는 관등 알지. 그게 정이품인가 그게 품격으로 봐서 아무나 그 관등을 못키거든. 그래서 관등에다 불을 켜서 비치는 한 개 까지는 그 사람의 그 식솔들이 먹고 사는 그런거 한 번 배운적이 있을꺼야 아마. 식솔들이 먹고 살 수 있도록. 그렇게 허고 여산에 인제 이게 여산에 행정구역이 여산현으로 됐다 여산 군으로 되어가지고 주윽 허니 현대로 내려왔는데 내가 와서 쭉 허니 보니까 내가 와서 어 보니깐 군수 XXX한다고 하는데 브리핑을 하니까 브리핑을 자료 죽 허니 따지고 보니까 여산면 내력이 없더라고. 그래서 내력을 여기 향교허고 학교허고 전부 수집을 해가지고서는 보니까 어. 여산 천동면허고 천서면허고 옆쪽에 XX면허고 그렇게 되어있더라고. 그래서 그렇게 전부 자료를 수집 해서 여산면 내력을 맨들고 혀서 했는데. 천동면 천서면인가는 했지만 근거는 그게 확실한가는 확인을 못 했단 말여. 그래서 내가 그 후로도 계속해서 천동면 천서면을 확인을 해 본 결과 천동면이라는 근거는 나왔어. 그게 어디가 비문이 있냐면은 사자골이라는 사자동 천동면 사자골로 돼 있어. 사자동으로 돼 있더라고. 그 비문이 저 사자골로 들어가는 그 입구에 비문이 하나가 있어. 그래서 아 이쪽이 천서면 맞구나. 그래서 천서면이라는 근거는 찾았는데. 아니 천동면이라는 근거는 찾았는데 천서면이라는 근거는 찾지는 못허고 어느 근방일 것이다. 그래서 그 조사는 계속 조사를 해봤지. 저 대원군 때 척후비라는 게 있었지? 그게 그 근방에서 그 사직재라는 거기서 발견이 되가지고 양 경로당에 거따 갖다 꽂아놓고. 내가 와서 보니깐은 파출소 길을 비석 거 비석을 해놨드라고. 비석으러 다리를 놨드라고. 그래서 그 비석을 파보니까 여산 군수로 있었던 사람들 공적비 또는 선정비 그러한 비석이 깔려 있어. 그래서 그 놈 파서 어느 쪽에 모아가서는 면사무소 들어가는디 파출소 들어가는 디 다리를 놨드라고. 그래서 예산을 했으면 됐는디 예산은 전혀 없고 그래서 군수하고 얘기 해서는 그 파출소 앞이다가 인자 죽 허니 세워놨더니. 다른 데도 보니까 그렇게 세워 놨드라고. 인제 남원 같은 데도 보니까. 그래서 거기 수집 허는데로 거기 세워놨더니 후손들이 와서 들이다 보고 그걸 이 분이 우리 선조다 해서 여기 왔다 가고. 또 향교에 5송18현이라고 있어. 18현은 양 쪽이 인자 그 동제 서제에다가 모시고 XX에는 중국 공자를 모시는 5송이라고 해서 공자 맹자 또 제자들 둘허고 해가지고 5송이라고 해서 다섯분을 모시고 있는데 그서 18현을 죽허니 따져가지고 그 사람 여산 군에 와서 군 저 책임일 보던 사람들 내력을 조사를 혀보니깐 잘 안나와 잘. 그리고 또 여기 향교갸 인공때 의용군 훈련소가 되버렸어. 인공때 625때. 인민공화국 때 훈련소가 되어버려서는 뭐 그 18현 위패니 뭐니 위패가 보통 밤나무로 맨들어야 되거든. 전부 없어져버렸어. 그래서 새로 그 때는 인제 문화재 관리청으로 들어가지 않았을 적에. 그래서 전부 걷어가지고서는 위패 만들고 그 때 노인당이 그 때 몇 도인가 넘어져있어서는 다시 잡고 그래서 오늘 날 향교를 유지하게 해놨다가 문화재 관리청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문화재 정부 예산으로 관리서도 새로 짓고 면륜당 기와도 새로 올리고 대선전도 허고. 그래서 18현만 따지면 좀 괜찮을것이다 했는디 안나와. 그래서 동제 서제는 안좋아가지고 전부 대선전으로 다 옮길적에 일부에선 으른들이 그런 얘길 허더만. 왜 한국 사람은 중국 사람은 대선전에 모시고 한국 사람은 양쪽에다 모시냐. 그럼 잘 되얐다. 그러면 대선전으로 다 모시자. 그래서 마침 동제 서제가 인자 비가 새고 어쩌고 했는디 그것도 다 모셨다가 동제 서제를 보수 해놓고 밑으로 다시 모시고 해고 그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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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2 : 제가 다른 마을에 가서 이완용이 여산사람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A1 : 그렇지 지금 그 사람 묘가 여기에 있어. 지금은 해방된 후에 없어졌을 꺼여. 지금 남산마을이라고 있지. 남산마을에서 저짝으로 가면 감나무 골이라고 있어. 그러면 인제 금마 내산동하고 여산 감나무골하고 중간에가 그 이완용이 묘가 있어가지고.

B1 : 그럼 이완용은 금마사람입니까?

A1 : 아니지. 여산 사람도 아니여. 묘가 그래서 우리도 의심나서 그걸 물어봤지. 물어봤더니 이완용이 묘를 가묘래야. 전국적으로 여기만 있는게 아니라는 이야기야. 이완용이는 역적을 되어있잖여. 역적으로 되어 있지만은 왜놈들이 볼 때는 역적이 아니지. 긍게 역적으로 몰렸으니까는 해방 직전에 묘를 다 파묘를 해버렸어. 그래서 전국적으로 이완용이 묘를 가묘를 맨들어 가지고 그렇게 해놨다. 우리 어렸을 적에 거기 가보면은 우리 국민학교 소풍을 글로 가서 글로도 나가고 그려. 가보면 기와집 묘적이 기와집 하나가 있었고 비석이 하나 세워져 있고는 뺑 돌아가면 새로 해놓은 자리가 있고 그렇게 해놨더라고. 그래서 해방 직후에 파묘를 했다고는 거기 신경도 안쓰고. 아마 그 분이 인제 역적이 아니였다면은 묘 관리 뿐만 아니라 그 내력에 대해서도 자세히 인자들 지성인으로써는 알랑가 모르지만은 일체 가묘다 내가 이런 얘기만 들었지 그 외에 가묘가 있다 없다는 문헌으로써는 확인을 못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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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 : 여산에 대해서 마을에 대해서 마을 얘길 많이 해주셨으니 여산에 대한 전반적인 얘기도 들을 수 있겠습니까.

A1 : 그래서 항상 얘기할 적엔 전라도 초읍으로써 그 저 수양정에 보면 황XX나오지. 황XX에 마당 있단말여. 그럼 여기 남원사에 가보면 그대로 우리 어렸을 때 들었던 전설 그대로 써놨드만. 그 남원사라 이름 붙인게 남원 부사가 이름 붙인거여. 남원 부사가 거기 마당에 있으니까 거기 말 갈아타야 남원까지 가는 거 아녀. 그래서 거서 꿈을 꾸니까 마당. 마당엔 저 판자를 깔거든. 판자를 떠들고 부처가 나왔다. 그런 얘기가 있으니까 여기다 절을 짓고 남원사라 이름을 지어놨다. 긍게 지은 것이 남원 부사가 들었단 얘기는 들어보지도 못하고 그랬는디 지금도 거기 내력을 써놓은 것 보니까 남원 부사가 이름을 지었지 저는 짓지 않앴, 지었다는 얘기는 없더라고. 근데 그게 옛날에도 그게 사기꾼들이 많이 있었다고 그려. 그래서 콩을 물에다 담궈놓으면 이게 불으면은 그 우에다가 부처를 놓고 불으면은 얼굴 올라오잖여 그렇게 해서 인자 그 중 저 중들이 사기를 쳤단 그런 얘기도 있고 그려. 나도 인제 그런 얘기를 듣고 부처를 만져 봤지 돌인가. 허허. 왜 그러냐면은 어머니가 거기 문수사라는 절이 있어 또. 거기가기가 힘드니까 그 법당이라고 그 거기가 인자 그리 가서 저를 학교 다하고 오면은 꼭 절에 가서 인제 따라가고 그랬는데. 절을 나도 몇 백번을 했는지 몰라 나도 어머니 따라서 절을 하고 그랬으니까. 그런데 그런 얘기를 듣고 가서 부처를 만저 봤어. 만저 봤는데 돌인지 뭣인지는 몰르것어. 어렸을 적에 만졌으니까. 그런데 내가 객지가서 한 30여년 만에 와봐서 거기 가보니깐은 음. 전부 새로 대웅전도 새로 지었더라고. 대웅전 새로 짓고 그 중 살고 있는 집도 새로 짓고. 그래서 많이 저 뭐여 넓혀놓고 그랬드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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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 : 여산에 이렇게 종교 시설이 많은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A1 : 그래서 지금 여산이 문제가 인제 어떻게 되냐면 내가 지금 각 이 리별로 개신교가 다 들어가 있어. 그래서 나도 지금 일개 마을에 두 개 있는 마을도 있고 아 하나면 하나지 교회가 두개 씩이냐 있냐 일개 마을에. 근데 우리보다도 더 잘 아시겠지만 이 종파가 많으면 종교에 파벌이 많으면 그 국가의 단결이 안되나는 그런 얘기를 들었을런지 모르지만은 그게 실제로 월남전 때 그런 얘기가 많이 나왔단 말야. 근데 여산에 인제 개신교 천주교가 하나 있고 그 외에는 개신교인데 개신교 교회당이 아마 열 대여섯 개에서 열 두어 개가 될 거여 아마. 거기 있지 향교 있지. 원불교도 이번에 들왔어요. 원불교 교당도 들어왔고 절도 상당히 있고. 그게 저 1914년에 개신교 기독교가 들왔어요. 그 전에 천주교는 여쪽 산골로 다 들어가고. 그래서 산 너머에 천주교 공소가 있다가 해방 직후에 이리 나와버렸단 말여. 그런데 그래서 우리 어렸을 적에도 교회가 딱 하나 있었어. 영넘어라고. 그 후에 인제 언제부터 그게 교회가 막 지어졌냐면 918 수복 후에 여산이 빨갱이 흰딩이가 상당히 치열했어요. 그래서 기독교 신지라고 허면은 많이 봐줬어. 우리가 중학교 3학년 때 625가 났으니깐은 그 때 인제 친구 고모부가 전투경찰로 들어와 있고. 그 시절때 인자 따라댕겼단 말여. 그 따라가서 그 하얀 독산 있죠 그 넘어가면 낮이는 대한민국 저녁에는 인민공화국이여. 그래서 인제 전투경찰이나 우리 면을 방위허는 향토방위대가 전부 그 고개를 상대로 해서 배치가 되얐는데. 나는 그 친구 고모부가 가자고 해서 교회 종소리가 들리면은 아이고 살았구나. 지금 몇시지? 이렇게 나는 인자 그런 기억이 남아. 그렇게 한 몇 개월을 살았으니까. 그래서 거기를 결국 전부 소개를 시켰지 다 태워버리고. 군대 갔다왔으면 M1소총 다섯발 마다 예광탄 그게 있죠? 고게 초가지붕에다 쏘면은 불 참 잘나요. 그래서 거기 사람들을 여기 저 우리 집도 사랑채 인제 피난 와서 살게 했고. 그래서 전부 소개시켜버렸지 전부 불을 놔서. 그래서 수복 후에 그 횡포를 당하지 않은 사람은 기독교 신자가 안당했다 하는 그런. 아 기독교 그게 뭡니까 그게. 학술적으로 배우면은 어느 나라든지 점령 허면은 맨 처음에 기독교가 들어가서 그 나라의 전통을 다 없애버리고 헌거 아녀. 아주 못되 먹었잖여. 그래서 우리나라는 인자 그 전통을 때려 부신 것도 기독교란 말여. 그래서 기독교도 다른 데보단 먼저 들어와 있고 많이 확장이 된거여. 전통을 없애 버릴라고. 그래서 지금 1914년 구월 며칠날인가가 여산면에 기독교가 들어온 날짜로 보고 있거든? 그래서 지금 100주년이라고 허면 기념 행사를 헌다고 어찌고 그래서 나도 인자 기독교 신자기 때문에 난 그서 목사 만나가지고 그랬어. 아 비판은 사실대로 해야되는거 아녀. 그래서 나는 목사한테도 그랬어. 내가 지금 제일교 그 안채에서 살았을 적에 그 기독교가 들어와서 XXX까지 허는 것도 다 본사람이고. 나는 예수를 믿는다고 허는 것은 나 하느님이 있다 없다 그런 것은 얘기 거리도 안되고 윤리 도덕관을 우리 자식들도 있고 그러니까 바꿔야것다 서구화로. 그런 의미에서 내 교회를 나간다. 그 우리는 군목들이 부대에 다 있잖어요. 내가 독립대대에 있었기 때문에 군목허고 항상 비옥에서 같이 생활하고 있으면서 군목만 놀려대는거여. 어떻게 놀려대냐. 세계대전에 독일이나 연합군 측에도 기독교 다 들어가 있는 나라 아녀. 독일이나 연합군도. 그럼 군목들은 자기가 속한 그 연합군이면 연합군 이기고 적을 무찔르고 이겨야 할 거 아녀. 비행기 조종사 출전 할 적에는 다 기도할 적에는 적 가서 무찔르고 비행기 떨어지고 잘 폭격허고 돌아오라고 기도할 거 아녀. 독일도 마찬가지고 기독교고. 그럼 하느님은 어느 편이냐. 그러면 아 그런걸 다 얘기하냐고 도망가고. 도망가면 붙들고 그럼 막걸리 사면 말 안할테니까 막걸리 사라고. 그래서 군목 막걸리도 뺏어 먹었어. 그렇게 놀려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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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 : 이까 이장님께서 창전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창고는 어떤 창고입니까?

A2 : 군량미라고 했거든요 옛날에. 조선시대일테지요. 지금도 나오니까. 큰 느티나무가 있어요. 그것도 한 400년 됐는가.

B1 : 창전마을은 호수가 어떻게 됩니까?

A2 : 여기보단 크지요. 옛날엔 여기가 컸었는데 지금은 거기가 커요. 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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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2 : 아까 사형장얘기가 나왔는데 거기를 뭐라 불렀습니까?

A2 ; 사직깨. 사직깨. 긍게 사현마을이라 있었는데 사월마을로 합쳐졌어요. 남원사 그 뒤에 가 사직깨라고 옛날에 사형터에요. 그리고 이 뒤 산 넘어가면 닥잡골이라고 닭을 잡아먹는 데여. 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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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 ; 우리 마을에서 왕비도 나왔다고 들었습니다.

A1 : 어 그게 여산 송씨. 긍게 다 잊어버렸네. 인제 여산송씨 거기 저 제실에 가보면 굉장히 잘 해놨지. 긍게 천호산이 여산 송씨 천호산이야.

A2 : 긍게 천호산도 옛날에는 천 천 가호가 긍게 천 가호가 살 수 있는 산이라고 천호산이라고.

A1 : 아녀아녀. 그건 항아리 호자여.

A2 : 예? 근데 그런 게 있던데. 천 가구가 살 수 있는 산이라고.

B2 : 또 다른 신기한 얘기 뭐 없습니까?

A1 : 아 그래가지고 저기가 성치라고 해가지고 산 넘어거 성치라는 마을이 있고 그게 성터가 그대로 남아 있어 성터가 거그 가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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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 : 우리 마을에 샘은 없었습니까?

A1 : 샘. 여기가 지금 그 저 물 이름이 도루무탱이(?) 샴이여. 그래서 내가 객지 와서 보니깐은 그 우물이 없어졌어. 그게 바가지 샴으로써 물이 상당히 좋거든. 우리 어렸을 적부터 먹었던 물. 거기를 며버리고 거기를 저 새로 그 빠이쁘를 묻었더라고. 그래서 이 물을 왜 몄냐 그랬더니 그 인자 땅 주인이 몄다는 거여. 땅 주인이 어디가 있냐 이게 원래 향교고 같은 건데 이 우물은 중요한 우물이다. 이걸 만약에 내일이라도 전기 안들어오면은 어떻게 먹을라 그러냐 그리고 또 여기 가운데 샴터 웃동네 샴 해서 세 개가 있어 공동우물이. 아 이게 화재가 났다 그러면 이 우물을 써야지 이걸 왜 맸냐 그러니까 이 우물은 하루 이틀 있는 것도 아니고. 여기 밭이 한 두번 움직인 것도 아니고 한 여남은번 움직인 것으로 아는데 그 동안에 이 우물은 놔두고 지금 매매가 됐지 우물까지 우물을 뭐 빼고 늫고 혀서 매매가 된 거 아니지 않냐. 그래서 대단히 잘못 되었다. 그래서 얘기를 한 번 허고 그 마을에 젊은 사람들이 있으니깐은 말 안들어. 말 안듣고 전통이나 이런거에 대해선 뭐 생각지도 않고. 그래서 오히려 얘기 허는것도 말도 안듣는 젊은 친구들허고 얘기가 안되고 일체 젊은 친구 옆에 있음 난 옆에도 안가고.

구술사진

교창마을 표지석


구술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