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명 : 황등면 > 도선마을

구술 기본정보

구분 내용
마을명 황등면 > 도선마을
구술자 진상영(1934)남자
구술자 이정석(1964)남자
구술자 우상열(1931)남자
면담자 이동혁, 이호형
구술요지 마을 유래담
전설 및 민담
철도
구술일시 2013-02-24
비고 면담장소 : 황등 도선마을 마을회관
면담시간 : 2013년 2월 24일 16시
내용 : 마을 유래담, 전설 및 민담, 철도에 대한 인터뷰 진행
키워드  

문헌내용

도선(渡船․뱃나들이) : 본 이름은 ‘뱃나들이’다. 1914년 황등저수지(요교제=腰橋堤)가 생겨 팔봉면과 황등면 사이를 나룻배가 왕래하게 됨으로써 생긴 이름. 1937년 요교호가 간척됨으로써 뱃나들이(渡船場)가 없어짐.
『익산시사』

구술요지

1) 마을유래담 :
- 배나들이 : ‘도선마을’의 옛 지명. 배가 들어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 한등 : ‘황등리’의 옛 명칭, 한(恨)과 관련이 있다고 함.

2) 전설 및 민담 :
- 황등산의 예언가 : ‘황등산’이 개발되기 이전에 그것을 예견 했다고 함.

3) 철도 :
- 황등고구마 : 주변 면(面)의 고구마를 ‘황등역’에서 각지로 보냈기 때문에 ‘황등고구마’가 유명해 졌다고 함.

구술채록

A1 : 진상영(80)-1934년
A2 : 이정석(50)-1964년
A3 : 우상열(83)-1931년

B1 : 이호형
B2 : 이동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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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2 : 여기가 어떻게 배가 ‘뱃나들이’라고 해서 ‘뱃나들이’인가 거기에 대해서 아시면 설명 좀 해주세요.

A1 : 이 마을이 생긴 역사가 음- 1910년 때 한일 합방 때 고때 쯤 생겼다고 봐. 부락 이 마을이? 왜냐면 이 동네에서 제일 오래 사시는 분이 지금 여든 두 살인데, 그분이 3살 때 여그가 개간이 된 거여, ‘미륵산’에서 요리 ‘허리다리’로 내려가는 ‘탄천’ 요 ‘미륵산’에서 ‘허리다리’로 내려가는 물이 있거든? 개울 요 ‘탄천’이 원래 있었던 것이 아니고 서해 바다에서 밀물 썰물이 올라 온 거여, 밀물 썰물이 올라오다 보니까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집이 배를 맸던 자리여. 그래서 밀물 때는 배가 들어오니까 썰물 때는 배가 같이 따라서 나가야하니까? 배가 나가고 들어왔다 해서 ‘배-나들이’여. 근게 ‘도선마을’이라는 얘기는 건널 도자 배 선자 거든? 배가 건너 다녔다는 얘기지. 그래서 한문으로는 ‘도선마을’이라고 만들고 옛날 구명에는 ‘배나들이’라고 되어있어. 그래서 역사가 그거 인데 일본 놈들이 와서 이것을 개간을 한거여 말하자면 저렇게 ‘탄천’으로 이 물이 나가고 들어갈 수 있게 코롬 요렇게만 해놓 코롬 놨기 때문에 1930년 때 그 친구가 3살 먹었을 때라는 거야. 친구가 3살 먹었을 때 여그 일본 놈들이 개간을 하드라는 거야. 여그가 한 2미터50센티 파면 그 갈밭이 있어 가꼬 배가 드나들던 바다에 그놈을 메꾸니까 토탄이 된 거야. 나무가 그래서 한- 40년 가까이 그때는 그것을 캐서 나무로 땐 거야. ‘배나들이’의 역사는 고정도 일 거야.

(앞에서 한 이야기를 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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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2 : 옛날에 여기가 ‘요교호’라는 호수가 있었다고 하드만, 그래서 저 마을에서 사람들이 배를 타고 와서 여기 산 밑 옆에 다가 배를 매놓고 ‘황등’에 가서 시장을 보고 또 와서 배를 타고 또 건너가고 그랬다고 그러드라고.

A1 : ‘삼림면(?) 용연리’같은 데서 우리 큰 아버지가 37에 배타고 가다가 배에서 빠져 가지고 돌아가신 거거든. 여기서 ‘황등’장을 와서 갔다가 가면서 배질을 그렇게 하고 댕겼어. 나룻배로 옛날로 말하자면 ‘섬진강’처럼 이렇게 건너 댕긴 거여.

A2 : 여기가 ‘황등리’거든? ‘황등리’에 그 여기가 원래 ‘황등’이 아니고 ‘한등’이었디야. ‘한등’이었는데 무슨 원한이 있어가지고 ‘한등’이라고 이렇게 이름을 지었었나 보댜. 근디 일제시대 때 이놈을 퍼버렸다는, 일본 놈들이 와가지고 저수지를 없애버리고 논으로 만들어 버렸디야. 그래가지고 논이 진거여. 그 후에 또 토탄을 또 많이 캤디야. 그리고 ‘황등’이라는 것은 왜 ‘황등’이라고 했는 고니 그 구릉이 그 ‘황등산’이 옛날에 크게 있었다고 하드라고 그래가지고 ‘황등’이라는 산이 이렇게 크게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는, 모습이 있었다는 거야 그래서 ‘한등’이라고 했디야. 그리고 이 산을 개발을 해가지고, 석산을 개발해가지고 화강암을 많이 캤어. 이 산에서 ‘황등산’이라는 곳에서 옛날에는 큰 산이었는데. ‘황등산’을 다 파헤쳐가지고 화강암을 채취했기 때문에 ‘황등산’이 없어진 상태야.

A1 : 근게 1910때 한일합방이 되기 전부터도 여기가 밀물 썰물이 있었다고.

(해방 이후 논에 소유권에 대한 이야기 & 전반부의 이야기 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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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 : 그러면 고기잡이배도 들어오고 그랬나요?

A1 : 그런 배 말고 돛단배처럼 쪼끔쓱 옛날에는 그런 걸로 다 들어왔자녀.

A2 : 조금씩 한 배로다가 사람들이 건너다니기 위해서 그랬지 고깃배 같은 건 안 들어 왔지. 그니까 바다가 아니라 ‘황등호’였다는 거야 저수지처럼.

B1 : 그럼 배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은 주로 어느 동네 사람들이 타고 다녔나요?

A2 : ‘월송동 외야마을’이지.

B2 : 언제부터 ‘황등호’가 있었나요?

A2 : 근게 그전부터 옛날부터 있나본데, 일제시대 때 일본 놈들이 와가지고 ‘완주 경천’ 그 저수지를 막고 이 저수지를 터버렸디야. 농지를 만들기 위해서 그래 가지고 그 저수지 안에 살던 사람들이 이 ‘월송동’에 이민을 와서, 이 여기 있는 이 양반들도 거기 살던 분들이여 ‘완주군 경천면’이라고 거기 저수지를 그때 막고서는, 그 저수지를 막고 이걸 텄다. 이거여 농지를 만들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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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 : 옛날에 ‘황등산’ 풍경은 어땠나요?

A1 : ‘황등산’이 그전에 굉장히 아름다웠데. 그래 가지고 학교 학생들이 소풍을 갈 때 면 ‘황등산’으로 갔다고 하드만.

B1 : 예전에 어렸을 적에 들으셨던 전설이나 귀신이야기 아시는 것이 있으신가요?

A3 : 옛날 얘기로 ‘황등산’을 가따 가 인자 지리적으로 하는 사람이 ‘황등산’ 말랭이에서 낚시질을 하고 있드래 대나무를 해놓고. ‘황등산’ 말랭이에서 낚시질에서 하고 있으니까 보는 사람이 “저 사람 미친 사람.”이라고 그럴 것 아니여? 산 말랭이에서 낚시질을 하고 있으니까. 그런디 그걸 같다가 몰르고 있었는디. 그 사람이 “나중에 여기 물이 괼 것”이라고, 그걸 같다가 몰르고 있었는디. 지금에 와서는 그것이 인자 확실해. 지금 돌을 가따 파놓고 있으니까. 돌을 가따 파내니까 산이 없어져버리고 그래가지고 거기가 깊이 들어가고 있으니까. 지금 수 십 미터 지금 들어가지고 있거든 땅속으로 나중으로 거기가 폐지가 되면 거기에 물이 괼 거란 말이여. 그러니까 낚시질 하는 사람보고 미친 사람이라고 했는디 그것이 아니더래 이것이여.

B2 : 도깨비한테 홀린 이야기 들어보신 적 있으세요?

A2 : 도깨비한테 많이 돌리고 막 홀려 가꼬 서는 따라 댕기고 그랬다고. 그런디 잘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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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2 : ‘황등’에서 나오는 고구마가 유명했다고 하던데요?

A3 : 그전에는 없었고 해방 후에 고구마를 가따 심어가지고 ‘황등역’에서 기차에다 싣고 어디로 갔냐하면 부산으로 싣고 갔어. 그 고구마가 유명한 것이 여그서 수입을 해가지고 ‘황등역’으로 싣고 갔기 때문에 그 기차로 싣고 나가 가지고 하기 때문에 해방되고 그것이 한참 유명했었지.

B1 : 좋은 말씀 감사드립니다.

구술사진




우상열


이정석(이장님)


진상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