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명 : 오산면 > 북신석마을

구술 기본정보

구분 내용
마을명 오산면 > 북신석마을
구술자 김의철(1933)남자
구술자 채규관(1941)남자
구술자 최광열(1951)남자
구술자 문동석(1947)남자
면담자 하정일, 장윤준, 이순영
구술요지 마을 유래담
전설 및 민담
민속
철도
구술일시 2013-07-04
비고 면담장소 : 오산 북신석마을 마을회관
면담시간 : 2013년 7월 4일 11시
내용 : 마을 유래담, 전설 및 민담, 민속, 철도에 대한 인터뷰 진행
키워드  

문헌내용

신석(新石) 북신석(北新石) : 신석의 북편에 위치했기에 붙인 이름.

『익산시사』

구술요지

1) 마을유래담 :
- 북신석마을 : 신석에서 분리된 마을.

2) 전설 및 민담 :
- 당산나무 민담 : 당산나무를 훼손한 사람이 즉사했다는 민담.


3) 민속 :
- 일본인 지주 : 일본인 3명이 거주하였음.
- 전군도로 : 일제가 수탈한 곡식을 군산으로 이동하기 위해 건설했음.
- 우물 : 만경강 때문에 우물이 짰다고 함.
- 농수 : 완주 대아리 저수지에서 농수를 끌어다 썼지만, 지금은 탑천을 통해 금강에서 농수를 얻고 있음.
- 애장 : 만경강둑에 애장을 하였음.

4) 철도 :
- 오산역 : 주로 학생들이 통학하기 위해 이용했음.

구술채록

A1 : 김의철(81)-1933년
A2 : 채규관(73)-1941년
A3 : 최광열(63)-1951년
A4 : 문동석(67)-1947년

B1 : 장윤준
B2 : 이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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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 : 안녕하십니까. 오산면 북신석 마을에 마을 조사를 하러 왔습니다. 혹시 신석마을에 대한 이름의 유례를 알고 계신가요?

A1 : 원래 그냥 신석이에요.

B1 : 혹시 신석 말고 다른 이름은 없었나요? 마을 지명이름 같은거요.

A1 : 그냥 우리 마을은 신석 마을이여.

B1 : 신석마을의 역사는 알고 계신가요?

A1 : 내가 81살인데, 그 이전부터 내력은 사실 잘 몰라요. 그냥 신석마을이었어요.

B1 : 그럼 신석마을과 무슨 관계인가요?

A1 : 1993년도에 분리가 되었어요. 그 전까지는 한 마을이었고요.

B1 : 그럼 신석과 북신석은 한 마을이었나요?

A1 : 그럼요. 원래는 하나였죠. 예전에는 마을 문화도 같았어요. 그런데 예전에 박대통령때 마을 안길을 확정되어서 넓잖아요. 그런데 그때는 오솔길이었어요. 그래서 사건이 나면 범인을 못 잡았어요. 왜냐면 마을이 워낙 컸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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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 : 오산면이 논이 참 큰데요, 우리 마을은 농사짓는 분들이 많으신가요?

A1 : 그럼요. 그런데 실제로 논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불과 7~8명이고, 나머지는 임대차로 논을 지어 먹는거에요.

B1 : 그럼 우리 마을은 혹시 집성촌 마을인가요?

A1 : 우리 마을은 타성받이라고 봐야되요.

B1 : 예전엔 각성받이었나요?

A1 : 예전엔 각성받이죠. 김씨가 주로 많았고, 이씨도 많았고.

A2 : 부안김씨, 전주이씨가 참 많았죠. 해방과 동시에 부락이 오산면에서 제일 많은 경작 면적이었어요. 쉽게 이야기하면, 지어 먹을 논이 많으니 사람들이 많이 들어왔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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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 : 신석이 돌석자를 쓰는데 논이 많은데 왜 신석인가요?

A1 : 사실 왜 신석인가는 잘 몰라요. 그냥 계속 신석으로 부른거죠.

A2 : 일제부터 그냥 신석으로 되어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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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 : 일제 이야기가 나와서 그러는데요, 오산면은 일본인들이 많이 있었나요?

A2 :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했지. 일본인들이 3명 정도 거주도 했고, 식량약탈도 했죠.

A1 : 우리가 농사를 지으면 생산성이 아주 미약했다고. 그런데 그걸 뺏기면 우리가 굶잖아요. 그래서 많이 숨기고 그랬어요. 볏짚에 다 숨겼는데, 장대로 다 찔러 보면서 막 뺏고 그랬어요.

B1 : 조선인 사엄은 없었나요?

A2 : 조선인 사엄 이야기는 잘 못 들어봤어요.

B2 : 일본인들이 이 마을에 회사를 세웠다고 하던데요.

A3 : 있다고 봐야죠. 쌀을 수탈하려면 일본 회사나 조선인 앞잡이가 있었죠.

B2 : 일본인 이름은 잘 모르시나요?

A2 : 잘 몰라요. 하여튼 일본 사람 밑에서 통역 비슷하게 해주는 조선인은 분명 있었어요.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도박이랑 술을 많이 했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도박이나 술을 막 시켜주고 우리나라 사람들 논을 뺏은 거에요. 사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돈에 대한 개념이 별로 없었거든. 그래서 그렇게 일본인들이 심부름꾼 시켜서 도박이랑 술을 막 권했다고. 그래서 만약 논 한필지에 100만원 한다 하면, 막 300만원에 일본인이 샀다고. 그럼 너도나도 막 일본 사람에 다 논을 팔았어.

A1 : 개풍이랑 쭈구랭이 있죠? 그런거를 일본인이 받아갔데. 개풍이랑 쭈구랭이는 잘 자라지 못한 쌀을 말하는겨.

A2 : 하여튼 그 쭈구랭이까지 막 가져가니까 우리 사람들은 쭈구랭이도 없이 먹고사는게 참 고되었다고.

B2 : 그러니까 부실한 벼를….

A1 : 그렇지. 그런 쌀을 다 쓸어갔지.

B1 : 그럼 그 쌀을 어디로….

A1 : 그렇지. 그래서 전군도로가 생긴 거야. 당시엔 우마차였잖여? 그러다 보니까 전군도로를 만든거야. 익산이 사실 교통도시잖여. 그러다 보니까 일본인들이 나락까지 다 쓸어갔다고. 일본인들이 나락까지 다 가져가니까 조선인들은 참 고되었어.

A3 : 그러니까 이 땅을 다 자기껄로 하고 싶은데 일본인들이 나쁜 쌀도 다 사면 사람들이 팔꺼 아녀. 낮은 품종의 쌀도 다 일본인들이 사갔다고. 조선인들은 그럼 참 먹을께 없죠. 이해가 되죠?

B1 : 그럼 쉽게 이야기해서, 일본인들에게 쌀을 다 팔고, 논도 팔고.

A3 : 그렇지. 땅 가진 사람들이 다 파니까 일본인들이 싹 사가고, 우리 조선인들은 이제 소작인으로 된 거지. 그래서 공출을 당한거고.

B1 : 그럼 우리 어르신들은 일본인에 안 뺏기려고 숨겨놓고 그러셨겠어요.

A1 : 그렇지. 막 숨겨놨지.

A2 : 사실은 일본인들이 억압적으로 한것도 있지만, 사실 해방과 동시에 우리 정부에서 재정을 확보하려고 그랬다고. 농지세를 막 걷었다고. 그러다 보니까 먹고 살게 없으니까 감춰놓고 살았다고. 사실은 우리나라 정치가 잘못 된것도 있는겨. 이조시대에 양반 쌍놈 계급이 있었잖어. 쌍놈이라 하면 밥만 먹고 일만 한거여. 그래서 사실은 지주라고 하는 사람은 옛날에 탐관오리처럼 벼슬을 사서. 지금 쉽게 이야기 하면 면장이라던가 시장을 하게 되면 자기가 쓴 돈이 있으니까 서민, 쌍놈들에게 다 뺏었을꺼 아녀.

A3 : 그러니까 예전에 쌍놈들은 밥만 주면 고맙게 생각한 사람들이여. 그러니 노동력은 있고 밥만 줘도 고맙게 생각하니까 그걸 막 착취를 한거지.

A1 : 사실 어렵게 산건 양놈 쌍놈 계급 때문에 그렇게 된 거고. 일본인들 착취는 나는 이렇게 생각혀. 맨 처음엔 불을 나무로 지폈잖여. 그런데 일본인들은 석유. 석유 하나만 있으면 몇 식구가 살고 그랬다고. 일본인들이 상권을 가지고 있는데, 한국 사람에게는 고무신발. 이것도 아주 인기가 높았다고. 그러니까 석유, 고무신, 광목 옷. 이런게 인기가 많았다고. 이런 상권을 한국 사람들에게 안줬어요. 그럼 일본인들이 도매를 하고, 한국 사람들은 소매. 참 성냥도 있네. 여튼 그래서 살았다는건데. 사실은 그게 다 서민들만 일만 시켜 놓고 지네들은 편하게 먹고 산거여. 잘 못 된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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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2 : 오산역이 있었잖아요. 그게 언제 없어졌나요?

A1 : 오산역? 그거 몇 년 전에 없어졌어요. 삼년 되었나?

B2 : 일본인들이 오산역도 이용했나요?

A3 : 오산역은 그 당시에 학생들이 통학하는데 많이 타고 그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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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 : 오산은 밑에 만경강이 흐르고 그러더라구요. 만경강에서 물을 품어서 농사 물 걱정은 없었나요?

A1 : 아니죠. 만경강은 바닷물이었어요. 농사 짓는데는 완주군 대아리 댐에서 물 받아서 농사 지었지, 만경강 물로 농사 짓진 않았지. 그건 짠물이여.

B1 : 물이 짜니까 샘물도….

A1 : 내가 알기로는 미륵산 중턱까지 바닷물이 들어갔다고 하거든. 그래서 우리 마을도 지금 간수가 나와서 지하수 물을 못 먹어요.

B1 : 그럼 우리 마을은 샘은 어떻게 사용 했나요?

A1 : 그러니까 여과를 해서 먹고 마셨지. 예전 물은 먹질 못했어요. 어릴때는 건건해도 그냥 막 먹을 수밖에 없었지. 그때 당시엔 물도 귀했고, 의료에 대해서 잘 모르니까. 샘 때문에 병이 생겨도 사실 잘 몰랐죠.

B1 : 샘을 파려고 하다 보면 뻘이 나오고 했나요?

A1 : 그럼요. 지금도 뻘도 나오고 모래도 나오고 그래요. 그래서 여기가 바다였다고.

A3 : 목천포 있죠? 거기가 포구였어요. 거기까지 배가 들어왔어요.

B2 : 그럼 완주 대아리에서 물이 들어오기 전엔 어떻게 논물을 대셨나요?

A1 : 그건 잘 모르죠. 나 어릴때에도 거기 댐에서 물이 왔다고.

B1 : 만경강 바다고기도 잡히고 그랬나요?

A1 : 그럼요. 지금이야 그렇지만. 옛날에는 다 바닷물고기였다고.

B1 : 고기 잡던 추억은 없으신가요.

A3 : 그래서 목천포가 밀물과 짠물이 섞이는 곳이거든요. 그래서 장어가 거기에 많이 살아요. 목천장어가 아주 유명하잖아요. 그게 그래서 유명한거에요. 장어가 꽉 쩔어 있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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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 : 우리 마을엔 산이 없고 들판만 있네요.

A1 : 들판만 있죠. 그래서 우리 마을엔 혈자리나 풍수지리 같은 거는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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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 : 오산역이 어디로 연결이 되나요?

A1 : 임피, 대아, 오산, 이리역, 동이리역, 춘포, 전주 이렇게 연결이 되었죠.

B1 : 그럼 군산이 종점이네요.

A1 : 그전엔 그랬죠.

B1 : 일본인들이 그걸 왜 만들었을까요.

A1 : 사실 잘 몰라요.

B1 : 춘포 오산은 논농사를 많이 지으셔서, 춘포는 일본인들이 춘포역에서 많이 쌀을 걷어 갔다고 하더라구요. 혹시 오산도 그랬나 싶어서.

A1 : 우리 오산은 그러지 않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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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2 : 그러면 우리 마을은 시장을 어디로 다니셨나요?

A1 : 익산 이리장이랑 일부는 대아장으로 다녔죠. 거리는 비슷한데, 이리장이 훨씬 크니까 거기로 많이 다녔죠.

B1 : 혹시 이리역 폭파사고 기억하시나요?

A1 : 그럼요. 우리 마을에서도 느껴졌죠. 그게 79년 12월인가 그래요. 우리 마을에도 막 울리고 그랬다니까.

B2 : 그때 상황을 좀 알려주세요.

A3 : 그때 우리 처가댁이 면 사무소 앞에 있는데, 처가댁 유리문이 그 진동으로 깨지고 그랬어요.

B1 : 면사무소에서 이리역까지 거리가 얼마나 되죠?

A1 : 한 삼키로? 직선거리로. 그리고 사고 나고 직접 가보진 않았는데, 그때 내가 볏집을 쌓아 놨는데, 막 사고 나서 헬기 와서 촬영하고 그랬다고.

B1 : 그 범인은 어떻게 되었나요?

A2 : 그 사람 때문에 피해가 컸지. 그런데 그 사람 때문에 이리시가 30년을 발전했다~고 하지.

A1 : 원래 익산역 앞 그 동네가 창인동이여. 창인동. 그 동네가 원래 순전히 판자촌이었어. 판자촌. 사실 그때 화류계… 그 사람들이 많이 살았는데, 정부가 어떻게 할 수가 없는데 폭발 때문에 그 곳이 쑥대밭이 되니까 그때를 기준으로 아파트를 짓고 그랬지. 그리고 그 전에는 원대까지 길이 넓지 않았어요. 그런데 그때 길도 확 뚫어버린거여. 그전에는 오솔길이었어. 그래서 그 사고로 30년이 발전했다. 하는거여.

B1 : 그래서 익산시 도로가 바둑판처럼 반듯 하군요.

A1 : 그게 그때 신무일 때문에 발전했어. 그래서 신무일 동상을 하나 세워주자는 이야기도 나왔어. 30년을 앞당겼다니까.

B1 : 그럼 한화는 어떤 책임을 졌나요?

A1 : 한화는 큰 책임 안 졌지. 그건 잘 모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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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 : 우리 마을에 탑천 줄기가 있다고 하는데요.

A1 : 지금은 그 물을 쓰긴 하죠. 금강물을 끌어서 탑천강에서 양수해서 쓰고 있죠. 예전엔 전주 대아리 물을 썼는데, 지금은 탑천 물을 썼지. 옥포 금강물을 탑천강으로 양수해서 품어서 이 물을 쓰는거지. 만경강은 짠물이라서 안 쓰고. 지금도 대아리 물이 만수가 되어서 비가 많이 오면 내려오긴 해. 그런데 그게 군산 비행기장으로 공급이 되고, 여기는 탑천. 탑천에서 물을 쓰지.

B1 : 오산면엔 신자 들어가는 마을이 참 많은데, 그럼 다 새로 만든 마을인가요?

A1 : 여기가 신지리에요. 그래서 리에서 이름을 따서 신자를 많이 쓰나 싶어요.

A2 : 행정에 신지리니까 신자를 딴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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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 : 애장은 어디로 하셨나요.

A1 : 도로 옆 하천이 있어요. 그 하천 저쪽 뚝에 많이 묻었죠. 밤에 가서. 그때만 해도 옷이 귀했으니까. 가마니 있죠. 가마니에 싸서 묻었다고.

B1 : 우리 마을은 강변가에?

A1 : 그렇지. 여우나 이런게 없으니까 독에 묻을 필요는 없지.

B2 : 어르신들은 어디에?

A1 : 장신리가 있어요. 오산 넘어서. 그 장신리에 많이 모셨지.

A2 : 공동묘지니까. 임자 없는 묘가 꽉차 있어요. 지금도 마을에서 부정탄다고 해서 샘 앞이나 이런건 상여가 못 당겨요. 상여를 매고 임피나 장신까지 그냥 막 가는 거지. 다른 마을에서 못 가게 하면 돈도 좀 주고, 그래도 못 가게 하면 돌아서 가고. 텃세가 심했지. 못 가게 인분도 막 뿌리고 그랬어. 텃세가 아주 심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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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 : 샘은 몇 개나 있었나요?

A1 : 공동샘이 세 개는 있었죠.

B1 : 그럼 샘 청소는 어떻게 하셨나요?

A1 : 칠석날 청소를 하죠. 당시엔 동네 사람들이 다 모여서 그랬죠.

B1 : 모래나 뻘 때문에 샘을 깊게 파진 못했죠.

A2 : 내가 우리 집 앞에 70미터를 파봤는데, 그래도 짠물이 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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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2 : 오산은 산이 있어서 오산인가요?

A1 : 그게 익산에 다섯 개 산이 있어요. 여산, 낭산, 오산 그래서 그 산을 끼고 이름이 붙었다고. 익산에 다섯 개 산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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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 : 철도에 대한 추억은 있으신가요.

A1 : 철도? 그게 학생들 통학했지. 일반인들은 돈이 아까워 걸어 다니고, 학생들은 시간이 없으니까 통학 때문에 기차 타고 다녔지. 익산에서 여기까지 한 8키로가 넘어. 그래서 걸어 다녔다고.

A2 : 오산역에서 사람들이 꽉 차서 매달려갔다는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그때는 학생들이 다 그 기차를 타고 다녔어요. 위험했죠. 이리역 폭발사고 이후에는 기차를 안타고 버스를 타니까 별로 이용 안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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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 : 도깨비 불은 보신적 있으신가요?

A1 : 만경강 따라서 그 뚝을 따라 도깨비 불이 있었지. 애장도 했잖여. 그리고 말 무덤 같은 것도 있었고. 그래서 도깨비 불이 있었지.

B1 : 말이요?

A2 : 그럼 예전엔 말고기를 먹었다고. 일본인들이 많이 키웠는데, 일본사람들이 가고 나서 그 말을 한국 사람들이 키웠는데, 죽으면 고기 먹고 뼈는 버리고. 그래서 만경강에 도깨비물이 많이 놀았다고 그래.

B2 : 혹시 귀신 이야기는 없었나요?

A2 : 우리 마을에서도 예전엔 지붕을 볏짚으로 했잖어. 그래서 뱀이 처가에 들어가 살았어요. 뱀이고 새고. 그 새를 잡아먹으려고 뱀이 살은거여. 장마철에는 뱀이 막 많아. 그리고 참개도 널려 있고. 논에서 올라온 참개.

A1 : 예전에는 비 많이 오면 참 많았어. 뱀이랑 참개 미꾸라지 민물장어. 이런게 많았어. 낚시하러 가서 재수 없으면 장어야. 장어 잡히면 재수 없다고 했어. 그 정도로 참 많았어. 장어가.

B1 : 그 구렁이가 집큼이인가요?

A1 : 아니. 집큼이는 따로 있어. 집큼이에는 귀가 달려 있어. 참 크기도 크고. 그게 집큼이지. 집큼이는 안 잡고 연기를 피워서 그냥 보냈어. 사람 머리카락 이런거 태워서. 안잡고 그랬어.

A2 : 그게 쉽게 이야기해서 집의 신이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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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 : 당산나무는 어디에 있었나요?

A1 : 예전엔 고물상. 거기 앞에 있었어. 그런데 지금은 없어졌고. 그때는 세 그루나 있었어.

B1 : 당산나무 자르면 벌 받는다고 하던데요.

A1 : 세 그루 중에 하나를 해방 이후 누가 잘랐다고. 그랬다가 즉사했어. 벌 받은 이야기야.

A2 : 해방과 동시에 면에서 지적도를 만들었어. 그 전에는 누구 땅인지도 잘 모르고. 그런데 그 등기를 낸 사람이 자기 권리를 찾으려고 베었어. 하여간 그래서 그걸 베어버린거여.

구술사진

왼쪽부터 최광열, 김의철


왼쪽부터 문동석, 채규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