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명 : 춘포면 > 담월마을

구술 기본정보

구분 내용
마을명 춘포면 > 담월마을
구술자 신동헌(1959)남자
구술자 신형묵(1928)남자
구술자 최한규(1936)남자
구술자 김도수(1932)남자
면담자 이동혁, 이호형
구술요지 마을유래담
지명유래담
전설 및 민담
창건 설화
구술일시 2012-08-26
비고 면담장소 : 담월마을 마을회관
면담시간 : 2012년 8월 26일 10시 50분
내용 : 지명유래 및 담월마을에 대한 인터뷰 진행.
키워드  

문헌내용

1. 담월사(潭月祠)
◦연혁 : 담월사는 춘포면 천서리 담월부락 뒷산 기슭 대숲 속에 동남향으로 위치하고 있다. 사당 1동3간, 3문1동이 담으로 둘러 있다. 이 사당은 1909년(고종 13년)에 신경진(辛慶晋)의 후손 신민집(辛旼集)이 선조의 학덕을 기리는 뜻에서 설단(設壇) 향사를 하다가 1926년 병인에 현재의 사당을 건립하였다. 처음에는 선조를 향사하는 가묘로 세운 것이 뒤에 율곡 이이 선생을 주벽으로 모시고 신경진, 신영경 두 선생을 배향, 1947년부터 지방 유림들이 향사를 모시는 향사가 된 것이다. 향사는 년 1회 봄 2월 중정(음)에 거행한다.
소재지 : 춘포면 천서리 담월마을
규 모 : 사당 : 전면 3칸, 강당 : 전면 3칸.
담월사는 춘포면 천서리 담월부락 뒷산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원래 이 사우는 1909년 신경진(辛慶晋)의 후손 신민집(辛旼集)이 선조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단만을 세우고 제사를 지내던 것으로 시작되었는데, 1873년(고종 13) 사당건물이 세워졌다. 따라서 처음에는 단순히 자신의 선조를 제사하는 집안의 묘당으로 시작된 것이라 하겠으나, 뒤에 율곡 이이 선생을 중심으로 신경진과 신경준 등을 모시게 되어 1947년부터는 이 지방의 유림들에 의한 지방 사원으로 바뀌게 되었다. 제사는 매년 음력 2월 중정에 행한다.
신경진(1554년 ~ 1619년)의 호는 아호, 본관은 영월이다. 그는 율곡 이이의 문하에서 공부하여 1584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병조좌랑, 강릉부사, 이조참의, 대사헌 등 여러 중책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를 호위하여 평양으로 모시고 간 공을 세워 호성공신에 올랐다. 관직에 있는 동안 청렴결백하여 청백리(淸白吏)에 뽑히기도 하였다.
신경준(申慶俊)은 1628년(인조 6)에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병자호란에 공을 세워 공신의 작위를 받았다. 그는 죽은 뒤 숭정대부(崇政大夫) 오위도총관판중추부사(五衛都官判中樞府使)의 벼슬을 받았으며 영원군(寧原君)의 봉작을 받기도 하였다. 임금으로부터 그가 국가에 큰 공훈을 남겼다 하여 그의 후손에게 묘당을 짓고 그의 위패를 봉안하게 하라는 명령을 받아 세운 강원도 원주에 그의 묘당이 있다.

담월(潭月, 다멀)․상다(上多, 윗다멀)․하다(下多, 아랫다멀) : ‘다멀’은 전에 마을 앞에 ‘왕달배미’라는 반달처럼 생긴 큰 논이 있어 달배미 마을이라는 뜻으로 ‘달말’이라 하던 것이 ‘다멀’이 되었다고 한다.
『익산시사』

구술요지

1) 새로 채록 된 내용 :
- 지명유래: 담월 마을이 생기기전에 기와집 골이라는 부자촌이 있었는데 익산천이 생기면서 '기와집' 골이 바다가 되어버렸다고 한다. 그래서 현재의 담월마을에 살게 되었는데 그래서 담월(潭月)이라고 한다. 또한 옛날에는 '지와집골'이라는 표현을 썻는데 사람들이 물건 물자를 써서 "다물다물"했다고 한다. 왕달배미라는 지명은 달빛이 비춘다고 해서 '달월'마을이였다고 담월로 바뀌었다고 함
2) 유적, 터 및 기타지명
- 양정고개: 양 정승이 살았다고 하기도 하고 양 정승이 지나갔다고 하기도 한다.
- 딸촌: 대장촌의 옛 별명으로 딸이 많아서 딸촌이 아닌 여자들이 기차를 많이 이용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3) 전설 및 민담
- 해방바람: 해방바람이 크게 불어서 느티나무가지가 부러졌다고 한다.
- 마한시대 부족: 마을이 마한시대의 한 일족이 이루었다고 한다.
- 두촌면: 춘포면의 옛 지명이다.
- 통골: 통골이라는 곳은 와우혈이라고 해서 소가 누운 혈자리이다.
- 지와집골: 옛날에 사람이 살았다고 함 땅을 파보면 가끔 기와가 나온다.
- 구명산: 아홉개의 명당이 있다고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기우제를 지내기도 했다.
- 느티나무1: 마을에서 느티나무를 신성시 여겨서 제사도 지내고 풍물도 쳤다.
- 느티나무2: 느티나무 밑에서부터 잎사귀가 피면 봄에 비가 많이 오고, 위에서부터 잎사귀가 피면 가을에 비가 많이 오고, 잎사귀가 한번에 피면 풍년이 든다는 민담이 있다.
- 사엄: 일제시대 때 사엄을 했던 조선사람들은 해방 후 모두 몰락했다.
- 도깨비 방죽: 따번지라고 하는 곳에 물이 고여있는데 날이 흐리고 그러면 도깨비 불이 생긴다고 한다. 거기서 고기를 잡으려고 물을 빼내면 물고기가 싹 다 없어지고 봉개산에 썩은 물고기들이 생겨난다고 한다.
- 도깨비 씨름: 도깨비와 씨름을 하고 밧줄로 묶어 놓으면 피 묻은 빗자루로 변해 있다고 한다.
- 여우: 여우의 꼬리 끝에 하얀 털이 있는데 그것을 가지고 사람들을 홀린다고 한다.

4) 창건 설화
- 도솔암: 오산마을에 있는 절로 옛날에 어느 할머니가 이상한 꿈을 꾼 후에 비가 많이 와서 홍수가 일어났다고 한다. 그 모든 벼들이 그 할머니 집으로 떠내려가 그 부자가 되었고 그 돈으로 절을 지었다고 한다.

구술채록

A1: 신동헌 (54) 1959년
A2: 신형묵 (85) 1928년
A3: 최한규 (77) 1936년
A4: 김도수 (81) 1932년


B1 이동혁
B2 이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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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2: ‘담월’마을이 왜 ‘담월’마을이라고 불렀습니까?

A3: 그 내용이 여 비문에 가면 거그다가 딱 적어 놓았어 왜 그러는 고니 인자 우리도 들은 풍월이지 그전에 천서초등학교에 이일원 선생이라고 있었어 근디 작고 하셨는데 그 양반이 이 향토에 대해서 많이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혔어 해가지고 그 향토지를 발간 한 것이 있어 또 익산 시청에 가며는 그 거시기가 나와 있더라고 그 고놈 참고하고 그 분이 향토지에서 한 것 참고하고 해가지고 내가 이 비문을 내가 지었어 애초에는 이‘담월’마을 생기기 전에 그 정미소 뒤에 가면 ‘기와집 골’이라는 디가 있어 아주 부촌이었디야 부촌이었는디 ‘익산천’ 생기기 전에 ‘춘포’에서부터 내려오는 ‘익산천’이 안 생기기 전에는 여그가 바다였었디야 근디 인자 여그서 ‘쌍정리’라는 동네를 갈려면 배를 타고 댕겼어 옛날에는? 막 물이 항상 쟁겨 있으니까 그러다가 ‘익산천’이 생겼어 아 ‘익산천’생기기 전에 ‘기와집 골’에서 그렇게 인자 여기 바다가 되어 버린 게 살던 사람들이 몇 대를 살았는가는 모르겠어 아무튼 다 없어지고 그 흔적이 밭을 갈거나 논을 갈거나 하며는 옛날 기와 부스러기가 나오고 그랬었어 몇 년 전만 해도 ‘기와집 골’이라는 그런 동네가 있었는 디 그러다가 ‘익산천’이 생기고 우리 부락이 여기 안주하게 되었어 그래서 못 담자 달 월자 해서 ‘담월’이여 근게 그랬는디 인자 여기서 여 커드란 조그마한 저 저수지 같이 그런 둠벙이 있었디야 그래가지고 인자 물을 가두었다가 밑에 사람들이 농사짓고 할 적에 인자 물이 어느 빠지면 우렁이 그렇게 많았디야 그래 가꼬 우렁으로 식용 대용을 하고 그렇게 살았다는 그런 전설이 있드라고 그래서 내용은 내가 익산 시청에서 이일원 선생 향토지에서 간추리고 간추리고 해놓은 것이 여 비문에 자세히 적혀있어 근게 고놈을 딱 촬영해가면 되지.

B2: 바닷물이 빠지고 강이 생긴 뒤에 이 마을이 생겼다는 말씀이시죠?

A3: 어 그렇지.

A4: 뚝 쌓고 맨 들었은 게.

A1: 뻘이 었겠지 그전에는 물이 왔다면 수로 쪽으로만 바닷물이 들어오지 뻘이 높아 진곳은 바닷물이 못 들어 오자나 그러다 보니까 일제시대 때 이곳 사람들이 ‘익산천’을 그 수로에 따라서 조금 바꿔서 만들다 보니까 그 물을 빼는 배수로가 제대로 완비로 되니까 여그가 인자 농지로 전환이 된 것이지 그래가지고 농사를 지어먹기 시작하다 보니까 사람들이 와서 사는 거야.

B2: 뚝이 생기고 생긴 마을이네요?

A1: 그전에도 살기는 살았는 데 많이는 안 살았지 가지고 조금씩 일구어서 짓다가 또 함물지고 하니까 비가 오면 다 써낼려가고 그랬는 데 그 ‘익산천’이 생기면서 인제 농사 짓기가 수월해지고 수해 피해가 적어지니까 많이 들어와서 살아가지고 번성하게 되었지.

A2: 여 ‘담월’이라는 곳이 옛날에 ‘지와집 골’이라고 했었는 디 그 뒤에 ‘익산천’ 막으면서 여그 보를 막으면서 사람들이 많이 살고 그랬는 디 표현으로 ‘다물다물’ 해가지고 많을 다자 물건 물자를 써서 ‘다물다물’했다고 표현대로 해서 그리고 저 밑에는 ‘통골통골’했어 그렇게 있었는데 왜정 때 ‘상다’라고 있었어 그리고 저 ‘통골’은 ‘하다’ 이렇게 해가지고 했었는데 그 뒤도 어떻게 되었는 고니 ‘상하다’라고 합병이 되었어 인자 해방 이후에 ‘상하다’라고 해가지고 저기 했는 데다시 또 인자 왜정 때 이름을 지은 데는 개명을 바꿀 수 있다 해서 에 인제 우리 동네 총회를 해가지고 혀서 ‘담월’로 다시 고쳤지 그래서 지금은 ‘상하다’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담월’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A1: 인자 위쪽에 많이 산다고 해서 ‘상다’ 아래쪽에 조금 산다 해서 ‘하다’ 이랬지.

A2: 인제 표현대로 해서 많을 다자 물건 물자 해서 ‘다물다물’했다고 인제 그것을 왜정 때 ‘상다’ ‘하다’ 했어 많을 다자 써서 ‘상다’ ‘하다’ 이렇게 해서 한 것이고 또 인제 여기에 뭐가 있는 고니 에 오래된 느티나무가 있어 몇 백년 된 느티나무가 있는데 거기에는 뭐가 있는 고니 옛날에 무당들이 와가지고 막 그냥 굿을 하고 거기서 저기하고 빌고 인제 우리 동네 섣달 그믐달 정월 보름날 이럴 때는 거기가 당산이라고 해서 거그가서 풍물놀이 풍을 치고 그러고 샴굿 치고 당산 굿으로 들어갔어 말하자면 각 집집 마다 가서 풍물을 치면 얼마씩 보조를 해주고 에- 그렇게도 했고 저 짝 위에가면 ‘양정고개’라는 디가 있고 양 정승이 살았다는 말도 있고 양 정승이 지나 갔다는 말도 있고 하는 ‘양정고개’가 있고 또 우리 동네가 뭐가 있는 고니 ‘담월’이라는 것이 어떻게 유래가 되었는 고니 에- ‘배마촌배미’ ‘왕달배미’ ‘버수렁배미’ 논이 있었어 그런 곳도 있었고 그 ‘새규배미’ ‘두간논’ 이런 명칭이 논에 대한 명칭이 있었는 디 경지 정리가 되어서 싹 없어졌지.

A1: 거기에 농사짓기 위해서 큰 호수 같이 생겼어 거기에 인제 달이 비추면 뭐 해가지고 달 월자 쓰죠?

A3: 달월.

A1: 그런 게 ‘왕달배미’에 달빛이 비춘다고 해서 ‘달월’마을이 된 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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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2: 근디 느티나무는 해방 바람 불었을 적에? 이렇게 크-은 가지가 끊어 졌어 그게 앙상하게 조금 남아 있어 가지고 거기 와서 사는 사람이 잘 보관해서 지금 순만 나서 시방 앙상하게 되어있어 거기 느티나무가.

A4: 그 느티나무가 한 두 아름 세 아름 되었지.

A3: 그 지방문화재에 등록 되어있어.

A2: 그 중앙 수목원에 ‘두골’이라고 해가지고 ‘두골면 두골촌’이라고 해서 저기 뭐야 거시기가 있더라 느티나무가.

A3: 여그가 마한시대 때 한 일족 부족이 살았는데 살았었는데 애초에는 여기가 이게 ‘춘포’ 봄 춘자 개 포자해서 ‘춘포면’이여 현재는? 옛날에는 ‘두촌면’이여 콩두 자 마디 촌자 해서 ‘두촌면’이 었어 ‘두촌면’ 그래 가꼬 인자 여그 ‘통골’이라는 디가 와우 지형이라고 소가 누운 지형이다 이 말이여 소 죽통 같다고 해서 ‘통골’이라고 했어 그래가꼬 거그가 있고 여그가 우리 부락 중앙에 보면 ‘하나구탱’

A2: 하나 구탱이.

A3: 그래 가꼬는 하나 밖에 없는 터가 있더랴 그래서 거기가 하나 구탱이가 되었어 살어 거그가 사람들이 살고 있어.

A2: 옛날에 어른들한테 듣고 한 문제지 그런 흔적은 하나도 없어.

A4: 전설이지 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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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2: 우리 있을 적에만 해도 여그 인자 뚝을 보를 막어 봄에 이른 봄에 일찍 감치 보를 막아가지고 물을 싹 하니 가둬 그러면 ‘익산천’에서 물이 내려와서 물을 괴야 샘에 그러면 막 이 앞에가 양 막 그 바다 같이 호수가 되었어 그래가지고 저 짝 동네에서 우렁 잡으로 와가지고 여자들이 막 여그까지 와가지고 여자들이 우렁 잡고서 송아치도 사고 돼지 새끼도 사고 그랬디야.

B2: 어디서요?

A2: 저 ‘학연’이라는 동네에서 우리도 그런 것은 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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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2: 마을에 샘도 있었나요?

A3: 아모 샘이 있었지.

A2: ‘가운데’샴 우리 동네가 배 형국이라 해서 울 안에 다가 샴을 우물을 파며는 그 집이 안된다 해가지고 그런 전설이 있어 그래가지고는 에- 들샴을 먹었어 들샴을 먹었는 디 다 없어졌어 인자 ‘가운데샴’ ‘붕골샴’ ‘석걸샴’ ‘풍골샴’ 이렇게 네 군데가 있었어 샘이.

B2: 예전에 강이 많이 범람 했으면 농사짓기도 힘들었을 텐데요?

A3: 여그가 저 앞 동네가고 여그 저 댕길 때는 배가 있었디야 쪽배.

A2: 높은 디만 지어가지고 ‘지와집 골’이라는 데 가서 집이 3채 있다는 소리도 있고 5채 있다는 소리도 있는데 농사를 지어 지으면 화적 때들이 와서는 가져가 버리고 그래서 폐쇄 되고 했다는 말이 있고 지금 현재 ‘지와집 골’에 가면 지금도 기와장이 나온다고 땅을 파면 현재로는 안 나올지 모르겠지만 그런다고 그랬어.

A1: 지금은 다 산이고 밭인 데 쉽게 이야기해서 여러 가지 시설이 안 되었을 때는 여그는 농사를 못 지으니까 뒤쪽에 있는 데서 농사를 지어서 먹고 살았었자나 그러다 보니까 아무래도 그 쪽을 경작하는 사람들이 부자고 이 쪽은 인제 힘든 사람들이 와서 바깥쪽에서 조금 이루어서 근데 또 짓다가 비 오면 싹 널러가고 또 봄 되면 또 계속 지어먹고 그러다가 일제 때 와서 뚝을 쌓았지.

A3: 이 동네가 뚝 막기 전에는 동네가 별로 안 생겼었어 막은 뒤에 인제 마을이 생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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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2: 강물 넘치지 말라고 제사도 지내고 그랬나요?

A1: 그런 것은 없었고.

B2: 그러면 기우제는요?

A3: 기우제는 흉년들면 여기 학교 뒤에 ‘안천’이라고 있어 ‘안천’부락이라고 우리 바로 뒤에.

A1: ‘안수’ ‘안수’

A3: 기러기 안자에 내천 자해서 ‘안천’ ‘안천’부락 뒤에 ‘구명산’이라는 디 가서 기우제도 지냈다고 그려.

A2: 저 옆에 동네가 ‘안천’인데 ‘수랑동’이라는 동네하고 합쳐서 ‘안수’라고해서 지금은 ‘안수’라고 그려.

B2: 기우제는 ‘구명산’에서 하는 것이고요?

A3: 어 ‘구명산’ 아홉 구자 밝을 명자 해서 ‘구명산’ 그래서 명당이 아홉 개가 있다고 해서 ‘구명산’이라고 지었다고 하드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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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2: 마을에서 아까 말씀 해주신 느티나무를 신성시 여기고 그랬나요?

A3: 암만 그랬디야.

A4: 아 무당들이 굿도 하고 그랬는디.

A2: 풍물도 치고 다 저기를 했지 그런데 지금은 허덜 못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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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2: 일정시대 때 이야기 들으신 것 있으신지요.

A3: 사엄이라고 있었어.

A4: ‘대장촌’ 사엄.

A3: 사엄이라는 것이 말하자면 도졸을 받아다가 말하자면 이 동네 이게 ‘춘포’ 들이 일본 ‘호소가와’ 농장이 있디야 그래 가꼬 역전도 창탈해가느라고 지여놓은 역전이고 근디 인자 각 마을에 사엄이라고 일본놈들 심부름 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일개 부락에 하나씩 주둔하고 살았어 긍게 우리 농민들 쉽게 말하자면 피 빨다가 갔다 바치는 역할을 했지.

A2: 옛날 사엄 들이 논을 띠고 붙이고 다 했어 이 사람 주고 저 사람 줄 수가 있었어.

A4: 아 그런 게 옛날에는 지주는 곳간에서 고기가 썩어나가고 사엄도 하는 그 집은 곳간에 갈비짝이 썩어서 나간다 이거여 그만치 사기 처 먹었어 조선 놈이 조선 땅을.

A3: 근게 일정 때 사엄 한 사람들 사엄 한 사람들이 그 대가 잘 사냐면 못 살아 다 망해서 뿔뿔이 흩어지고 없어.

A4: 최-고 악질이 사엄이여 최고 악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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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2: ‘도깨비 방죽’이라고 들어보셨나요?

A2: 지금 ‘도깨비 방죽’에가 저그 저 뭐야 ‘따번지’라고 있었어 ‘따번지’라고 있는 디 거기는 인자 또랑만 있어 물이 괴어 있었어 근데 날이 흐리고 그러면 도깨비 불이 거기서 가면 하나 가다가 두 개도 생겼다가 세 개도 생겼다가 날이 흐릴 때는 그렇게 하고 전설로 그전에 거기서 괴기를 잡어 물을 막 품어가지고는 괴기를 잡는 단 말이여 잡으면 괴기가 하나도 없어 저 ‘구명산’에 다가 도깨비가 가서는 싹 ‘봉개산’ 다 가따가 다 묻어 놓았다고 냄새가 썩은 내 난다고 그런 전설도 있고 그랬어 그전에는 괴기가 하나도 없으면 도깨비가 싹 가져갔다 거기다 묻었다 이런 이야기가 있었지.

B2: 도깨비하고 씨름한 이야기 들어 보셨어요?

A4: 그런 이야기는 있었지.

A2: 그런 것은 별 소리고 도깨비하고 항시 밤새도록 씨름을 하고서는 꽁꽁 자기가 묶어 놓았디야 묶어 놓고 와서 보았더니 나중에 피 묻은 빗자루가 있더랴 그것만 들어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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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 혹시 그럼 여우에 대한 이야기도 들어보신 적 있으신지요?

A4: 여우가 사람을 많이 취한 사람들을 유인 해가지고 가까운 똘에 대리고 가서 빠치고 그랬다고 했지 왜 그러냐 긍게 우리 보통 어른들이 하는 말이 백여우 같은 놈이 와가지고 여우 꼬랑지에 가서 끝어리에 가면 흰 털이 달려 있어 흰 털이 고놈을 술먹은 사람을 둘러 먹는 거여 고게 꼬랑지를 막 내두르며는 길 같이 허-연하게 앞에서 내두른 게 엉뚱한 디로 가서 논밭으로 막 가 그냥 그랬는 디 그전에 우리 아버님께서 기양 모시러 가서 술 한 잔씩 잡숴서 취해서 오는 디 저 ‘삼포’라고 있어 ‘춘포면 삼포’ 옛날에는 기양을 모시면 12시 닭을 울어야 기양을 철상을 혀 상을 걷어 지방도 다 태우고 지금은 안 그러지만 옛날에는 닭 울어야 혀 그러니까 술을 먹고 오는 디 아 오실 때 되었는데 안 오시더라 이거야 하하 밤새도록 이 양반이 욕을 봤다는 이야기여 그래서 말하기를 개 짖는 소리를 들어야 겠더랴 딱 앉아서 그래 가꼬는 개 짖는 데만 가 가꼬 서는 넋두리 한 게 인제 도망 가버렸어 개가 짖고 그러니까 그런 게 여우가 사람을 혼동을 시켜 그래서 끌고 댕겨서 고생을 시켰어 여우가 그런 게 지금 하는 이야기가 그러지 저놈 자식 또 백여우한테 홀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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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 어르신 ‘오산사’에 대한 이야기 들어보신 적 있으신 지요?

A2: ‘오산사’ 허허 옛날 여그가 이렇게 이 저 ‘익산천’ 생기기 전에 물 빠진 곳에 물을 심어 놓으면 거둬 논 놈을 논에다가 세워 놓자너? 말리기 위해서? 그러면 그놈을 딱 가져 다가 그 절 하나가 있어 그거가 무슨 절이라고 하나 아무튼 거기다가 해가지고 무슨 절이 생겼다고 그러드만... 미륵사던 가.

B1: 절이 어떻게 생겼다는 말씀이신가요?

A2: 그 인자 요세 그 수확 해놓아서 홍수가 나서 싹 물에 의해서 전부 다 쓸어가 버리면 거그 가서 걸려 그래가지고 거기서 수확을 했다고 그런 말이 있어.

A1: 할머니가 잠을 자는 나를 꺼내주면 쌀 50석을 먹게 해주더랴 꿈 속에서 절을 지은 할머니가 선녀라고 했는디 그때는 땅만 3마지기 땅만 있었는데 그래서 하도 신기해서 인부들 데리고 와서 그 가르켜 준 곳을 삽으로 파보니까 그 커-다란 돌이 나오더래 거기다가 캐가지고 옮겨 놓은 게 있어 그래서 꺼내서 올려놓았는데 그 해에 나락을 손으로 베어 가지고 단을 지어 놓자나? 근디 엄청난 장마가 지었데 그래가지고 그것이 떠내려가 가지고 그쪽에 나락이 쌓이니까 우리 나락이다 니네 나락이다 서로 싸울 것 아니여? 근데 판결나기를 누가 어떻게 그걸 니 것 네 것인 줄 알 것어 그러니까 자기 땅에 있는 것은 자기 것으로 한다 라고 판결이 나가지고 그 집 것이 되 때 그래가지고 그놈을 찢으니까 쉰 석 삼인가 나오더랴 그래서 거기가 ‘쉰섬배미’랴 그래가지고 그 할머니가 신 끼가 들어가지고 그놈을 가지고 그 돌을 섬겼다는 고만? 얘 못 낳는 사람도 가서 그렇게 치성도 지내고 그랬다고 그러드먼 그래가지고 인제 절을 지었어 그것이 ‘도솔암’이라고 ‘오산’마을에 있는 절이야.

B2: 그 바위 이름이 무엇이라고 하던가요?

A1: 모르지 나는 어렸을 때 한 번인가 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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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A2: 아 하나 빠졌네 여기 느티나무가 있자나 여 느티나무를 보고는 부락 사람들이 점을 쳤어 옛날에 ‘밑에서부터 잎사귀가 피면 봄에 비가 많이 오고 위에서부터 잎사귀가 피면 가을에 비가 많고 또 인자 잎사귀가 한 번에 싹 피면 올해 풍년 들겄다’ 이런 이야기가 있었어 해서 옛날에는 점을 치고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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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 혹시 ‘딸촌’이라고 들어 보셨나요?

A3: ‘딸촌’?

A1: ‘대장촌’ 거그가 인자 딸이 많이 살아서 그래서 그런 게 아니고 근대화 들어서면서 익산에 인제 제 1공단이 생겼자나? 생기다보니까 인제 쌍방울이 막 커지고 하다보니까 여자들이 회사를 다닐 일이 많았자나 거의 수공업 상태니까 그 다보니까 아가씨들이 중학교 고등학교 졸업만 하면 공장을 다녔거든 근데 그쪽은 아무래도 사람들이 많이 살고 하다보니까 공장가는 어린 여자들이 그 시간 되면 출근 시간 그리고 퇴근 시간 되면 타고 그러니까 ‘딸촌’ ‘딸촌’했지.

B1: ‘담월’마을에서는 철도와 관련된 이야기가 없을 까요?

A1: 거의 이쪽 사람들은 이용을 안 했지 거기까지 걸어서 가느니 시내 가고 원래는 철도가 이쪽으로 그런 말도 아직 있었자나요? ‘문덕리’쪽으로 원래 역사가 오기로 했는데 계획은 그 여그 사람들은 양반 무슨 그 그런 고지식하던 사람들 때문에 반대 해가지고 ‘대장촌’으로 갔다는 말도 있고 그랬었거든 그리고 ‘대장촌’은 막 여그저그서 고산이나 이쪽에서 그냥 타승바지 들이 많이 거기는 이제 전통 있는 집들이 거의 없지 일본이 그 천을 ‘만경강’을 막고 어쩌고 하면서 되니까 농토가 많이 지니까 먹고 살기 위해서 몰려 들은 곳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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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2: 어르신 그러면 마지막으로 성함과 연세를 알려 주실 수 있는지요?

A2: 이름이 신형묵 85.

A3: 최한규 77.

A4: 김도수 81.

A1: 나 신동헌 54세.

B2: 정말 좋은 말씀 많이 듣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구술사진

담월마을 경로당


담월마을, 신형묵,최한규,김도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