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명 : 왕궁면 > 가좌마을

구술 기본정보

구분 내용
마을명 왕궁면 > 가좌마을
구술자 양기호(1935)남자
구술자 최갑규(1947)남자
구술자 최석규(1927)남자
면담자 장윤준, 이순영
구술요지 마을유래담
유적 등 지명유래
민속
기타 조사
구술일시 2012-08-21
비고 면담장소 : 가좌마을 최석규씨 자택.
면담시간 : 오전 11시
내용 : 지명유래, 민담, 민속 등에 대한 인터뷰 진행.
키워드  

문헌내용

가좌(加佐, 가좌동) : 이웃 마을인 동면이나 도화동에서 가직한 마을이라는 뜻에서 ‘가작골’이라 부르던 것이 가좌골이 되었다.

『익산시사』

구술요지

1) 새로 채록된 내용
- 마을 유래담 : 加坐. 즉 더 있어라라는 의미. 옛날에 전쟁이 일어났을 때 이 마을로 사람들이 피난을 왔다고 한다. 그런데 전쟁이 끝나고 사람들이 이제 마을 밖으로 나가려고 했는데, 마을 밖으로 나간 사람들이 화를 입어서 '더 있지 왜 나갔느냐' 그래서 가좌마을이 됐다고 한다. 현재는 타성바지지만 최씨가 많았다고 한다.

2) 유적, 터 및 기타지명 :
- 나무1 : 마을 주변에 탱자나무하고 정자나무가 엄청 크게 열댓그루 있어서 다른 주민 사람들은 마을 밖에서 여기가 안보였고, 모르는 사람들은 여기에 그냥 방죽이 있나보다 하고 생각했다고 한다.
- 우제봉 : 근처에 시대산이 있는데 우제봉이 있었다고 한다. 한번은 비가 오길 빌고서 내려오는데 내려오는 도중에 비가 와서 흠뻑 젖었다고도 한다.
- 일번국도 : 일번국도까진 2키로나 되므로 일번국도의 이야기하고는 상관관계를 찾기 힘들었다.


3) 전설 및 민담 :
-나무1 : 어렸을 때 나무 위에 어떤 사람 올라가서 놀다보니 나무 끝에서 흰 소복 입은 할아버지가 불렀다고 한다. 그래서 그 할아버지한테 갔다가 나무줄기가 뿌러져셔 그만 다쳤다.
-나무2 : 마을에 있는 탱자나무랑 정자나무는 절대 그 나무 가지를 꺽지 않았다고 한다. 그 이유는 나무를 꺾어나 땔감으로 쓰면 흉사가 생긴다는 마을 금기가 있어서이다.

4) 민속 :
- 상권 : 상권은 왕궁 중간부터 윗지역은 금마, 중간 아랫부분은 삼례라고 한다.

구술채록

마을의 편안함과 가좌라는 이름의 상관성 - A3은 625참전용사라고 한다. 그의 말에 의하면 이 마을에 있으면서 현역으로 군대에 끌려가도 죽은 사람은 없지만 이 마을에 살다가 이사간 사람들은 전쟁에서 죽고 그랬다고 한다.

● ● ●


A1 : 양기호1935
A2 : 최갑규1947
A3 : 최석규1927

B1 : 장윤준
B2 : 이순영
● ● ●



B1 : 가좌마을은 타성바지입니까?

A3 : 현재 현재는 전부 각성바지가 많애. 옛날에는 최씨가 많이 살았었어. 전주 최씨.

B2 : 그럼 마을엔 주민분들이 많이 계셨습니까?

A2 : 최고 많았을 때가 37,8호 한 40호 됐어. 그 중 3분의 1정도가 최씨였어. 어떻게 보면 집성촌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아까도 내가 말씀 드렸지만 지금 이 조사가 늦은 감이 없잖아 있어요. 당연히 전통적인 마을의 형성 과정이나 지금까지 해 내려온 그 과정들이 참 미담으로 전해내려옴으로써 아까 사회자께서 말씀 드린대로 좋은 이야기꺼리들이 그 노인들이 많이 인제 작고허시다 보니까 이제는 그런 것들이 젊은 사람들이 들어봐야 에 머릿속에 깊게 남아있지를 않기 때문에 좀 늦은감이 없지를 않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빨리 발굴이라도 해서 향토사에 참 좋은 이미지가 만들어졌으면 하는 생각이 있어 적극적으로 나도 한다고 했고. 어쨌든 옛날이 형성서부터 저 말씀을 해주셔요. 어쨌든 가좌마을이라는 것이 옛이름이란 말여. 부산에 가도 있고 서울에 가도 있어. 가좌 가좌라는 데가. 그런 과정속에서부터 얘기 해 주시고 저 말씀해주시죠.

● ● ●


B2 : 가좌라는 게 무슨 의미입니까?

A1 : 가좌라는 것이 더할가자 있을 좌자거든 이것이? 더할 가좌 있을좌자. 그런 전설에만 어떻게 나와있는고 허니 옛날에 그 무슨 전쟁이 큰 전쟁이 있었디야. 아 그래가지고 우리 이 마을이 그 XX로 해가지고 이 앞에가 큰 정자나무가 몇 개가 있었었어.

A2 : 한 열댓그루가 있었었어. 몇 백년도 더된.

A1 : 그리고 탱자나무로 여길 막아버렸었는디.

A2 : 탱자나무도 몇 백년 된 탱자나무도 같이.

A1 : 그래서 우리 마을에 와가지고 피난을 했는데 여기 전쟁이 끝나고 낭게 인제 고만 세상으로 나갈려고 항게 조금만 더 있다 나가지 왜 나갈려고 그러냐. 긍게 뿌리쳐버리고 더 나가가지고서는 죽었어.

A2 : 피해를 많이 봤다.

A1 : 그래서 더 있다 가면 살았을 텐디 왜 나가서 죽었냐. 그래서 가좌동이여.

A2 : 아 그런거하면은 지금 여러분들이 이미 우리가 농경지화되고 이렇게 개발되서 저거 하지만 실지 마을은 이 앞 지금 형성되어 있는 곳이 아니라 뒷쪽이었어.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아까 얘기대로 정자나무가 지금도 한주가 남아있는데 다 고목되서 지금 남아 있는 것은 4분의 1 5분의 1도 안돼. 크기에 다 쭐어들어서 고목져가꼬 죽어가꼬. 그리고 여기가 10여그루 이상이 그런 큰 나무들이 있었다고. 우리 어렸을 때만 해도. 그리고 이 밑으로 해서 탱자나무도 구성이 돼 있었어. 그래가지고 옛날에 지금부터 한 4,50년 전에는 지금 저 길이 있잖아. 길에서 여길 보면 마을이 있는가 없는가 보이질 않았어. 마을이 저 밑에서 보면 마을이 있는가 없는가 할 정도로 나무만 우거져 있었던 곳이고. 뒷 쪽에 가면은 어른들 말씀으로는 시장터라고 그런 말도 있는데 그런데 시장터가 아니고 우리가 볼 때는 절이나 어떤 그런 것이 있었기 때문에 기와가 굉장히 많이 나와요. 그렇게 허고 저쪽에 보면 말구수라고 해가꼬 이렇게 있었던 것도 있었고. 그리고 저쪽에 가면은 그 기와를 굽던 자린가 뭐인가 해서 막 파면은 우리가 예비군 방공호 파고 초소 파면서 봐서 아는데 폐기와가 엄청 나오고 했던 지역도 있고 그래.

● ● ●


B2 : 확실히 나무때문에 잘 안보였습니다.

A2 : 옛날엔 더 했었어. 요 앞에가 정나나무가 우리그걸로 네아람 다섯아람 되는 정자나무가
한 열 그루가 있었다니까. 누가 심어놨는지는 모르지. 모르지만은.

● ● ●


B2 : 그럼 우리 마을에 신기한 이야기나 전설같은 건 있습니까?

A1 : 마을에 저 뒤 가서 사태난 자리가 있고 그 때는 그랬었어. 그 그 그것이 전주에서도 뵈얐었는디 인자 세월이 간게 수목이 참 우거져가지고 그것이 없어졌어. 그래서 옛날 어른분들 말씀은 전장시대에 여그가 피난처였었다. 그렇게 얘기를 들었어요. 산사태가 났었을 때 인자 나무가 우거져 있을 적에는 뿌리들이 이렇게 있어서 안나는데 나무를 비고 보닝게 힘이 없어가꼬 산사태가 났어. 그 전 말로는 벼락 됐다고 그러는디 벼락맞았는지 그랬는지는 몰라도 하여튼 산사태 난 자리가 전주에서도 뵈얐었어.

A2 : 그리고 지금 이 시대산이 이 실지 알고보면 시대산부터 호남평야가 열리는거야. 산은 노지 않지만 한 200메타 250메타밖에 안되는데. 실지가 저기 운장산으로 해서 대둔산으로 해가지고 천호산으로 해서 시대산을 거쳐서 용화산을 저 미륵산을 건너가면서 그 줄기가 저쪽 옹포에 그 산까지도 다 연결되거든 여기서? 응 이렇게해서 연결되는데 실질적으로 용화산이나 미륵산의 모산은 시대산이고 시대산의 모산은 천호산이고 이렇게 올라가. 그래가꼬 뺑 돌아서 지리산으로 들어가지. 그래서 금강이 북쪽에서 시작해가꼬 뺑잡아서 돌아가서 공주까지 올라갔다가 군산으로 빠지잖여. 그래서 이 태조 무슨 그 양반이 누구여 지질학자 이씨 조선이 창건이 되면서 호남 삼남지방이 역모땅이라는 말이 어디서 나왔냐면 금강이 서울로 들어갈 듯 하면서 싹 빼내가꼬 나와버렸잖여. 그래서 활 시위와 같다. 서울을 향해서 댕기를 놓는다. 그래서 계룡산이여. 계룡산. 계룡산도 같은 줄맥이여. 저쪽에서 빠져 나가서 그렇지 천호산에서 저쪽으로 빠져나갔거든.

● ● ●


B1 : 그러면 우리 마을에 혈자리 같은 건 있습니까?

A2 : 그건 잘 모르는데 군사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자리여. 아니 군인들이 여기 주둔하고 있으면서 지금도 매번 공수부대에서 훈련허고 이 뭐 미륵산 용화산 시대산 그리고 저기 가면 봉실매산 있어. 석묘산으로 해서 봉실매산으로 들어가는데 그것이서부터 평야가 열린다니까. 이 산서부터.

● ● ●


B1 : 그럼 백제시대에나 조선시대에 여기에 평야를 지키거나 그런 군인들에 대해서 들어보셨습니까?

A2 : 그런 것들은 잘 모르는데 우리 시대산에 우제봉이라고 있어요. 딴 데는 없습니다잉. 우제봉이 비 안올 때 비 오게 헐라고 온 주민들이 산신한테 비는 산이 여기여. 딴 데 없어요. 저 미륵산도 없고 높아도 미륵산도 없고 용화산도 없고 하지만 시대산만 우제봉이 있습니다.

● ● ●


B2 ; 그럼 시대산이 바로 앞에 있으니까 시대산 전설이나 민담좀 들러주십시오.

A3 : 그 전이 비가 하도 안와서 우제봉이라고 비를 비는 봉이 있어. 그거를 비를 빌라고 올라갔다가 비를 만나가꼬 옷이 젖어서 내려왔다는 그런 전설도 있어. 올라가서 비를 빌고 내려오면서 비가 와. 와서 비를 흠씬 젖고 내려왔다는 그런 전설이 있어.

● ● ●


B1 : 귀신에 홀렸다는 얘기는 못들어보셨습니까?

A1 : 아니 저 지금 작고하셨지만은 한 분이 지금부터 한 40년 30몇 년 전에 지금잉게 여가 막 차가 다니고 저그 혀가꼬 IC도 생기고 그랬는데 여그 가면 사거리 지금 공단생겼어요. 거기 올라오면 굉장히 무서운 자리야. 굉장히 무서운 자린데 이분에 사신 분 김용기(?)라는 분이 그 앞에 사곡이라는 동네에서 술을 만취가 되서 밤 늦게 오시다가 그 저 옛날에 자네들 모르지만 땅까시. 땅까시라고 쭉 뻗어가는 그게 있어. 아니 넘어졌든가 술 잔뜩 먹고 넘어졌든가 저거헝게 뒤에 무서워서 쳐다보더도 못허고 귀신이 다리 감는 줄 알고 발버둥쳤다가 아침에 깨 봉게. 그러다가 술취해서 잤을꺼 아녀. 깨봉게 땅까시가 잡고서 못가게 했다 그거여. 무서워서 뒤는 못쳐다보고.

B2 : 무서운 고개가 있었던겁니까?

A1 : 아이 옛날에는 굉장히 무서웠지. 지금부터 고개를 세 개를 넘어가야 사곡이라는 동네를 가. 사곡이라는 동네를 가는데 거기서 인제 샛길로 오는 길이 있었다고. 이거는 지방도고. 그런데 거기 너덕바지에 옛날에는 거가 차도 없고 있어봐야 손수레 아니면 소구루마. 그러다보니까 땅까시가 막.

● ● ●


B1 : 우리 마을에 있었던 오래된 나무에 함부로 했다가 화를 당하신 분도 계십니까?

A1 : 고목 올라갔다가 행일이 그랬던가 누가 그랬던가 고목 올라갔는데 가지에서 가지 끄터리서 노인양반이 이리오리야 이리오리야 그러더리야. 고목나무를 올라갔는디 가지가 큰 가지가 하나 있는디 가지 끄터리서 노인이 하얀한 소복을 입은 노인이 이리오리야 이리오리야 하더리야. 그래서 괜찮은 줄 알고 가다가 떨어졌어. 떨어져서 죽들 안했는디.

A2 : 골병이 들어가지고 폣병으로 죽었어. 아니 뭐냐면은 우리가 어렸을 때 큰 나무가 있으면 새들이 저기다가 고목속에 알을 낳았어. 알을 낳고 그러면은 새 알을 내고 쪼아먹고 그러니라고 저 많이 노인들은 어른들은 일허고 찌름찌름하면 저 정자나무 밑에서 자리 피고 주무실때여. 점심식사하고 어쩌고 하면은 더우니까. 그래서 어른들이 막 나무에 올라가서 못올라가게 어쨌는가 몰라도 우리는 삭다리 삭다리라고 죽은 가지 있잖아. 그거 끊어다가 밑이다 불피워가지고 개구리 잡아다가 구워먹고 말야 이렇게 하는데 어른들이 저 아니다 그럴까 밑에서 주무시는디 삭다리 하나라도 떨어지면 귀찮은지 그런지 어쩠는지는 몰라도 그 나무를 집에다가 그 나무가 그렇게 없었어도 여 삭다리 끊어다가 집에다 뗀 사람이 없어. 동티난다고. 동티가 뭔지는 모르는지 해를 받는다고.

● ● ●


B2 : 참 흥미로운 얘기입니다.

A1 : 아 이 근방에 이런 나무가 몇 개 없었어. 그리고 거기서 사람들이 이렇게 아까 얘기대로 여름 돌아오면 쉬고 놀고 정자식으로 쓰다보니까 모종도 없앴는데 이 나무가 없어지면서 모종을 지었지. 원채 오래된 나무야.

● ● ●


B1 : 우리 마을은 시장을 어디로 다녔습니까?

A2 : 금마로 다녔지. 우리가 상권은 금마였지. 몰라 왕궁에 중간 윗녁은 상권이 금마였어. 그리고 아랫역은 삼례가 있고. 왕궁에는 시장이 없지. 지금도 경제권을 그쪽으로 갖고 있는데 앞으로 식품클러스터를 짓고 있는데 그러면 이쪽으로 올거라고 나는 보고 있다.

● ● ●


B1 : 일번국도는 우리 마을과 멉니까?

A2 : 일번국도가 여기서 한 2키로 가야대야. 근디 일번국도가 뭐냐면 목포에서 신의주까지가 일번국도 아녀? 전주거쳐서 논산거쳐서 공주거쳐서 올라가는 것이니까. 여기서 가까운데는 삼례에서 금마 금마에서 여산이니까 여기서 한 2키로정도지.

● ● ●


B1 : 우리 마을은 큰 길가에서 들어와 있기 때문에 안보입니다.

A1 : 저 앞에서 보면은 몰르는 사람은 여그가 방죽이라 했었어. 방죽이라 했었어. 왜냐면 나무가 우거져 있고 마을은 안뵈고 그렁게 틀림없이 방죽인가보다.

A2 : 이 피난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녀. 그런가하면은 실질상으로 옛날에는 이런데가 삶의 터전이 됐었는가봐. 교통수단이 없고 전부다 걸어다니고 원시에 가까운 시대는 여그가 먼저 마을이 형성될 수 밖에 없는 것이 그 때만해도 농경화 된 게 아니고 그 사냥한다든가 과일을 따먹고 살 던 시절에는 여그가 좋은 자리라고 봐야대. 지금 우리가 옛날 어른들 얘기 들어보면 바닷물이 저쪽에 가면 봉동에 가면 배매산이라는 대가 있더라고. 배를 맸다고 해서 배매산이고 아 금마까지 여가 다 바닷물이 들왔다는거여. 여 궁뜰도 역시 바닷물. 긍게 바로 앞에가 섬들이여. 그리고 이쪽에가 궁뜰인데 궁뜰 마을인데 거기 제석사지 있는 마을이 궁뜰이라고. 거기까지 배가 들어왔다는 얘기야. 그랬다고 보면은 실질상으로 그 농경기에 그 생산에서 먹고 사는 세상이 아닐 때는 여기가 주 마을이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지. 인구 몇 도 안되고 산과일 따먹고. 이게 굉장히 오래된 마을이다. 대부분이 가좌라는 동네가 내가 부산에도 가봤고 연세대학교 앞에 이쪽에 거기도 다 산골짜기야. 긍게 가좌라는 이름이 원채 오래된 이름이다.

● ● ●


B2 : 마을이 굉장히 조용하고 편안했겠습니다.

A1 : 우리 마을에 있는 사람은 XX해가지고 하나 전사한 사람도 없고. 근데 우리 마을서 살다가 이사간 사람은 전사했어라.

A3 : 이사간 사람은 전사했어도 여그서 살으면서 현역에 있는 사람은 전장때도 하나도 희생된 사람도 없어.

A1 : 여그 이 양반이 625때 저 참전유공자여. 일등상사로써 그 때 이렇게 있었거든.

구술사진

가좌마을


가좌마을 왼쪽부터 양기호, 최갑규, 최석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