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명 : 여산면 > 남산마을

구술 기본정보

구분 내용
마을명 여산면 > 남산마을
구술자 박천규(1932)남자
구술자 백남봉(1960)남자
면담자 하정일,장윤준,이순영
구술요지 마을 유래담
지명 유래담
전설 및 민담
철도
구술일시 2012-09-09
비고 면담장소 : 남산마을 박천규씨 자택
면담시간 : 오후 2시
내용 : 지명유래 및 전설과 민담에 대한 인터뷰 진행.
키워드  

문헌내용

남산(南山, 남살매)․감나무골 : ‘남산’은 전에 여산군 행정 중심지의 남쪽 산 옆 마을이므로 붙은 이름.‘감나무골’은 감나무가 많았다고 한다.
『익산시사』

구술요지

1) 마을유래담 :
- 남실메 : 남산을 옛날에 남실메라고 그랬다. 남실메는 남쪽에 있는 산이다.

2) 유적, 터 및 기타지명 :
- 석교 : 독다리골이라고 했다.
- 감나무골 : 감나무가 많은 건 아니고 있어서 감나무 골이다. 신씨들 종답 져먹고 사는 사람들이 산다고 한다.
- 뒷산 : 소산이라고 한다. 그 이유는 소의 혈이라서 그런데 신씨들의 묘가 소의 유방혈에 있다고 한다.

3) 전설 및 민담 :
- 남원사 : 부처님이 솟은 걸 보고서 남원사라 이름을 지었다.
- 이완용의 묘 : 묘가 이쪽에 있는 것은 맞지만 이쪽 사람은 아니라고 한다.

4) 철도 :
- 철도의 생성 : 철도를 원래 이 곳을 지나게 하려 했지만 양반들의 반대로 돌렸다고 한다.

구술채록

A1 : 박천규 1932
A2 : 백남봉 1960

B1 :하정일
B2 : 장윤준
B3 : 이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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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2 : 표지석을 보니 남실매라고 써 있던데 그것이 무슨 뜻입니까?

A1 : 그 전에 첫번에 동네 생길 적에는 이 경주 김씨허고 밀양 박씨허고 에 전주 이씨 이 맻 사람이 맻 분이 말하자믄 남산에 아마 이 시작 시초에 동네 만드는 사람 아마 그렇게 될꺼여. 전주 이씨. 밀양 박씨. 경주 김씨. 그 일차로 그 세 성바지가 이 창설자. 그 다음 이차서는 인자 또 이 평산 신씨허고 그 다음에 이 전주 유씨라고 있어. 에. 그 담이 인자 삼차 이차 허는 그때서부터는 모야등게 말하자믄 수원 백씨. 인제 이차 삼차 이렇게 들왔지. 그래가꼬서나 아마 호층으로는 한 사십호에서 됐을거여.

B2 : 그럼 각성바지에서 타성바지 마을로 옮겨간 것입니까?

A1 : 그렁게 저 그 때 당시 세 성바지가 이 창설잔디 그 다음에 이차 삼차 오차 많이 성씨들이 고루고루 모야들었었어. 그래서 한 사십호 이상 됐었을꺼여.

B3 : 그럼 그게 언제적부터 입니까?

A1 : 지금으로 말하면은 그게 내가 우리 증조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싱게 아마 오십사 이백년은 넘어. 이백 오십년 정도 그 전에 인자 그 그 그 전에는 인자 몰르고. 그 전에는 인자 몰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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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2 : 여산에서 마을이 좀 깊습니다.

A1 : 지금은 인자 교통 수단이 많이 좋아졌지만 그 전에는 여산 한번 갈라면 논틀이고 밭틀이고 이 하천 뚝이 있었는데 이 뚝은 말하자믄 왜정때 막은거여. (여산 재로 갈라믄) 심들었어. 그래 이 논틀 밭틀 이렇게 해 가꼬서난 거리가 멀었죠. 그러다 인자 왜정때 인자 일본 사람들이 홍수가 많이 징게 이 뚝을 만들었다고. 이 뚝을 저기서부터 맡들었당게 아니라 워낙에 많이 심헌대만 막고 그냥 논두덕이 이렇게 있으면은 아직은 거기 뚝을 못맨들었어. 긍게 그 때 당시에는 지금은 한 삼십분이면 간다 해도 그 때 가면은 한시간 이상. 이렇게 이렇게. 그리고 여기서도 말하자믄 저 다리있는 데 있잖여. 석교다리. 석교다리. 그 때는 석교 다리도 없었는디 산업도로에 큰 놈 시방 놨잖여. 거기를 한번 갈라면은 지금은 이렇게 뚝이 있응게 이렇게 되는디 거기도 마찬가지여. 기냥. 논 두덕 길, 밭 두덕 길로 그렇게 댕겼었어요.
B2 : 그러면 이 옆에 석교 마을은 오래 되지 않았습니까?

A1 : 석교 마을이나 우리 동네가 거진 마찬가지. 그렁게 왜 그러냐면 그것은 석교 마을을 독다리 굴이라고 그랬어. 그게 왜 독다리 굴이냐면 냇가를 건더는디 독 여기 돌로 그 전에는 징검다리 맹글었잖여. 돌로 이렇게. 우리 동네도 여 마찬가지. 그리서 밤낮 생기는디 그 도교마을에서 독다리골이라고 했는디.

B2 : 그럼 이름이 석교라 붙은 것은 얼마 되지 않았겠습니다.

A1 : 석교라는 것은 인자 독다리골이라고 했지만 그것도 행정 들어온 다음에 석교라고 됐고 남살메라는 것은 왜인고니 그 전부텀 그 때 시작 할전부텀 이 부락 이림이 남살메여 기냥. 남살메. 여산서 보면 남쪽에 있다고 해서 남살메. 남살메. 여산서 보면 여그가 남쪽이잖아서. 그래서 남살메.

A2 : 남쪽에 산이 있어 산 밑여서 남살메라고. 그렇게.

A1 : 뒷말이 말하자면 종산인디 긍게 말여 거기서 저기서 볼적에는 남쪽에가 XX지. 남살메가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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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2 : 지도를 보니 감나무골이라는 곳이 있는데 우리 마을에 감나무가 많습니까?

A1 : 거기 감나무 골이라고 하는디는 이짝에서 저쪽으로 돌아서 산으로 건너 가면은 거기가 신씨네 종답이 있는디 거기서 말하자믄 신씨들 종답 져먹고 사는 사람들이 있고 산판에 산 말하자믄 인자 지키기 위해서 신씨들이 둔 말하자믄 그 사람들이 둣집 있었어요. 근디 감나무가 있었어. 지금도 있어. 지금도 있는디 그렁게 그 전에는 배고픈 시절이고 먹을 거 없었잉게 쪼금마한 학생들이나 쪼금만했었지. 그래서 감을 주서서 댕긴다고. 그러면은 이 이 여가 여 이렇게 있는데 저 아래는 흘러서 저 밑이가는디 저 마당에서 있다가 감이 툭 떨어지면 저걸 줏으러 간다고. 빨리 가는 사람이 줏어. 그래서 말하자면 감나무골. 그래서 이름 져진거지 감나무 골. 그렇가 (감나무가) 많든 안했어. 이렇게 큰 감나무가 세그룬가 네그룬가 되야. 고목 아마 없어지들 않았을꺼여. 지금가도 있을거여.

A2 : 아니여. 없어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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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2 : 우리 마을이 뒷산을 끼고 앞에 쭉 늘어져 있습니다. 뒷 산이 용화산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A1 : 그 날줄이지. 미륵산. 응. 미륵. 여기 그렁게 시방 문화재로 찍혀가꼬 산에가서 함부로 일도 못 혀. 시청에서 해서 허가 해주면은 허고 예를 들어서 묘 쓴다고 보면은 그냥 아직은 그냥 하는디 그렇게 심들진 않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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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2 : 우리 마을에 그럼 우리 마을에 좋은 자리나 혈자리 같은 것은 있습니까?

A1 : 그렁게 산이 이 뒷산이 소산이라 그랬어. 소 처럼 생겼어. 나오면 여그가 공동묘지를 냈는디 여가 이렇게 발 두개가 나오고.

A2 : 저 앞에서 보면은 형상이 그래.

A1 : 그래서 신씨들이 말하자믄 묘 쓴자리가 유방암이여. 그렁게 그 사람들이 말하자믄 거기 거가 또 그렇게 생겼어. 여기서 쳐다보면은. 긍게 유방암이면 남자 아니 여자들이나 살아 인생은 가심이 가서 유방이 있는디 소는 다리에. 다리 밑이가서 있잖여.

B2 : 그럼 저 소의 형상이 있어서 마을이 잘되거나 하지 않았습니까?

A1 : 신씨들도 그 전에 과거에는 부사나 뭐 그런 정도고 뭐 큰 배실헌 사람도 없고. 우리가 알적에는 약방아들이라고 왜정 때 농림대학 익산 농림대학 나와가꼬서는 아마 내가 알 적 아마 아는 것은 아마 시방 농수산부라고 농수산부 아마 거가서 과장 근무 하다가 익산에 와서 뭔 사업헌다고 하더니 쫄딱 망해가꼬 지금은 미국가서 살아. 오도 않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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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2 : 마을 앞에 공동묘지에 마을 분들이 묻히시고 하십니까?

A1 : 지금은 공동묘지도 지정해서 혀잖여. 근데 그 때 당시에는 왜정때 일본 사람들이 공등으로 맹글어 농거여. 긍게 그전에도 말하자믄 죽는애들이 많았거든. 제일간에 낳아가지고서는 세살 네 살 못설고서난 죽는 그거 많앴어. 홍역. 근디 태어난 사람은 홍역을 치뤄야 하지 안치루면 언제 병나서 낫거던. 긍게 홍역 그것이 제일 열병이었어. 걸렸다 하면은 살아나는 사람 별로 없어. 그렁게 지금 사람은 사흘만에 가서 출생신고 허지만 그 때는 삼년 이년 보통 기다렸다고. 그래가꼬서난 인자 뭐시 허면은 니살먹었는지 가서 출생신고 허고 시살먹고 가서 출생신고 허고 그랬어. 지금은 암껏도 아니지만은 홍역이 그렇게 무셨었어. 긍게 갈 때가 없응게 지정해 놔서 에 공동묘지에. 죽었으면 내상이 있거나 없거나 파고서난 가따 묻어. 그때는 여수가 으뜨케 심헌가 갖다 묻으면 파냉고 그렁게 그래도 뭣 좀 헌사람 있으면은 돈 있는 사람은 그래도 동이. 이. 거 보고 동이라 그려. 동이를 갖다가 맞붙혀서 묻으면 구녕 못뚫거든. 그래서 갖다 묻은 묻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빼먹거나 말거나 갖다 묻고 그랬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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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 : 도깨비에 얽힌 이야기는 없습니까?

A1 : 이 동네 사람도 말하자믄 글케 해서도 술먹고서나 댕기기가 불편해도. 그전에는 또 술 금했잖여. 못먹게 이 왜정때는. 그렁게 인자 여기서 술을 모실려면은 거 시방 길 일케 내려오는데 거가 술창가 집이 있었어. 주막이 많응 게 아니라 한집 딸랑 있었어. 그리고 그 위는 또 있고. 이 저 XX마을. 거기가 도로까시 아녀. 거기서 인자 술먹고서도 인자 아 저 뭣이 여름같은대는 비오고 뭣허고 허면은 뭐 그 도깨비 얘기라고 있잉게 그것 때문에 그러는거여. 거기서 술먹고 가다가 이 담뱃불이나 담뱃불 붙이라고 하멶은 반짝 하잖여. 그래서 도깨비 봤다고서는. 어디서 도깨비를 봤다고. 어디서 왔다고. 동네가서도 그런 얘길 허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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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2 : 아까 말씀드린 도로가 일번국도입니까?

A1 : 그때는 왜정 때 도로를 냈잉게 그때는 익산 갈라믄 큰 길이지. 익산이나 대전이나. 전 아니 논산으로 갈라믄 전부다 그길로 댕깄잉게. 그 전에는 일번국도지. 왜정 때는.

B2 : 제가 공부하다가 보니 춘향전에서도 그 길에 대한 얘기가 나왔습니다.

A1 : 그 남원골도 그 길 그 길로 갔어 인자. 지금은 팔차선잉게 저리도 가고 그랬는디 천상 전주를 가던 아래로 갈라믄 이 도로를 거쳐서 갔어.

B2 : 그러고보니 남원사는 왜 남원사입니까? 남원은 저 밑에 있지 않습니까?

A1 : 근디 그게 우리는 눈으로 못봤지만 남원사가 그 전이서부터 있었는가봐요. 긍게 뭣이 인자 부처님이 저기서 솟았다고 허고 그래가꼬서난 남원사를 거기다가 일이지 말하자믄 남원사여 남원사. 남원사라고 그렇게 집을 진지가 얼매 안되요. 집 진지. 우리가 알응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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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2 : 우리 여산은 종교가 많은데 우리 여산이 왜 이렇게 종교가 많이 들어왔는지 알고 계십니까?

A1 : 원래 천주교는 성지가 거기서 말하자믄 목 뱄다나 어찠다나 그런 소리가 있고. 천호 성지는 그게 완주군. 여기 여기 여산 아녀. 익산 아녀. 그게 그 사람들도 여기 먼날이면은 걸어와. 차도 안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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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2 : 일번국도가 이 앞에 있었는데 왜 철도는 솜리쪽으로 돌아갔습니까?

A1 : 그것은 여산 여기보단 저리 오면 함열 있잖여. 그리가 더 크잖어. 황등쪽에도. 그러니까 발전이 많응게 그리 도로를 낸 거 같여.

A2 : 아녀 그것은 틀린 얘기 같어. 이 나오더라고. 옛날 IC에 인제 뭐 원인가 있었다믄서요. 그 함열 거쪽보다 이 원이 있어가지고 시끄러워가지고 돌아왔다고 그러더라고. 내가 들으니까. 저 그짝으로 가니까 낭산쪽으로 가니까 그런 얘길 하더라구 또. 뭐 원이 있어가지고 시끄럽다고 돌아가버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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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3 : 이완용이 이쪽 사람이라 하던데 들어 본 적 있으십니까?

A1 : 이게 저 이완용이가 두봉이씨거든. 두봉이씬디 이 여산이 아니라 여산에 가서 누왕가서 일가들이 있어. 긍게 있자 누왕이씨 집안 인자. 그래서 말하자믄 여산이라고 그랬는디 이완용이는 여그가 고향이 아녀. 고향이 아니고. 두봉이씨 말하자믄 일가들이 이 누왕가서 맻 사람 살고 있어요.

B2 : 묘가 있다고 하는 것은 진짜입니까?

A1 : 저 거가 여 거가 금마면이여. 금마면.

A2 : 기양리 얘기하는거여?

A1 : 아니 이완용 묘쓴디.

A2 : 낭산 여기 거기 내산동 거기?

A1 : 응 내산동. 내산동에 가서 인자 말하자믄 거기다가 묘를 썼는디. 큼직하게 나도 가봤는디 잘 썼더라고. 그렁게 말하자면 식민지 아니이. 인자 이완용 손자되는 사람이 파서 없애버렸어. 파묘해버렸어. 이완용이 직접 손자되는 사람이. 아니 저 할아버지 일본놈 앞잽이서 그랬다고 좋것어. 기분 나쁘지. (사람들이) 나쁜짓도 했지. 사람들이 없앨라 하는디 그것도 못파게 허고 손자가 넘부끄렁게 파서 없애버렸어 말하자믄. 저 할아버지. 일본 사람들인 충신이라고 하지만 한국 사람들은 역적아녀. 스파이 역적. 그게 몇 년 됐어. 한 십년 이십년. 그 뒤론 나도 거기 가보던 않고.

구술사진

남산마을 표지석


남산마을, 박천규, 백남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