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헌내용
관연은 ‘가뿌내’의 한문자 표기다.‘사리밭골’은 싸리가 많아서 싸리밭골이라는 뜻. 싸리의 옛말은 ‘리’이니 ‘사리’로 변음된 것이다.
『익산시사』
구술요지
1) 새로 채록 된 내용 :
- 지명유래: 원래는 '갑부네'였다고 한다. 산을 넘어올 때 숨이 가쁘다고 해서 붙여졌다는 설과 동네가 부유해서 부자가 많이 살아 붙여졌다는 설이 있다. 또 다른 설로는 물이 가물지 않아 가무네에서 갑부네라고 붙여졌다고 한다.
2) 유적, 터 및 기타지명
- 자갈바위: 자갈이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 이화구자리: 배꽃이 많이 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 문드르미재: 일제 강점기 때 생긴 길이라고 한다.
- 수박골: 수박이 많이 자란다고 해서 붙여진 명칭이다.
- 가리울: 옛 노동마을에 이름이다.
- 돌 선거리: 여산의 기가 서쪽으로 빠진다고해서 돌을 세워 놓았다고 함 그 돌을 빼서 만든 마을이 입석 마을이라고 한다.
3) 전설 및 민담
- 도둑놈잔치골: 도둑들이 소나 돼지를 잡아서 잔치를 벌린 곳이라고 한다.
- 우미혈: 소의 꼬리 형상이라고 함 유독 묘가 많이 분포되어 있다고 한다.
- 장수굴: 장수가 동굴을 나오면서 무릎을 대고 나온 자리가 있다고 한다. 말 발자국도 있다고 한다.
- 용초굴: 마치 삿갈을 엎어 논 모양으로 아무리 물이 많이 와도 물이 고이지 않는 곳이라고 한다.
- 천호산: 전라감사 '이서구'라는 사람이 천호산을 만호산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 소바구수: 소 밥그릇 형상이라고 함 유독 물이 잘나온다고 한다.
- 소유방혈: 소의 유방과 비슷하다고 함 항상 딱 집 두채만 산다고 한다.
- 닭재골: 견훤이 지렁이의 화신인데 그 견훤이 죽었다고 하는 곳 '장대산' 밑에 있다고 한다.
- 진터: 후백제를 침공하기 위해 왕건이 진을 쳤다고 하는 장소이다.
- 갑옷터: 갑옷을 갈아 입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 두덕실: 풍수가들이 15호를 넘지 말라고 예언 했다고 함 그래서 지금 현재 부자들이 많이 산다고 한다.
- 숯고개: 왕건과 후백제가 마지막으로 끝까지 격전을 벌인 곳이라고 한다.
- 사직제와 치명터: 치명터는 사람을 사형시키는 곳인데 그 길목에 넘어가는 고개를 사직제라고 했다고 한다.
- 배다리: 원래는 배가 들어와서 배다리가 아니라 사람을 물에 빠지게 해서 사형시켰다고 한다. 또한 배다리는 배를 묶어 놓은 곳이 아니라 배와 배를 연결해서 다리를 만들어 이용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해진다.
4) 민속
- 원태마을: 원태마을과 항상 같이 잔치를 했다고 한다.
구술채록
A1: 신승식 (58) 1955년
B1 박태건
B2 이동혁
B3 이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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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1: 원래 이 동네 이름은 ‘갑부네’입니다 그 ‘갑부네’인데 일제 어- 일제 강점기 시절에 그 일인들에 의해서 ‘관연’이라고 개명이 되었어요 개명이 된 이유는 여기는 연못 연못이 있어요 그것이 꼭 갓 모양 같이 생겼어요 그래서 갓관 자에다 못 연자에다 ‘관연’이라고 개명을 했어요 그래서 ‘갑부네’가 맞아요.
A1: ‘갑부네’라고 하면 3가지 설이 있어요 왜 ‘갑부네’ 이냐 첫 번째는 어- 이 앞에 말을 앞에 저기 도로가 없었습니다 산 넘어 도로가 없었고 이 길로 해서 다 통행을 했어요 그 통행을 했는데 , ‘경천면’, ‘화산면’, ‘운주면’, ‘고산면’ 그 다섯면 사람이 이 길을 통행을 했어요 굉장히 큰 도로였어요 오솔길이었지만 그래가지고 여기 보면 여 ‘큰재’ 여기는 ‘작은재’ 그러거든요? 그 재를 넘으려면 숨이 가뻐요 그래서 ‘갑부네’라는 설이 있었고 숨이 가쁘니까 두 번째는 이 동네가 옛날에는 부유 했습니다 부유해가지고 그 옆에 보며는 ‘호월’ ‘중말’ 거기가 일명 ‘중말’이라고 그 밑에는 ‘삭골’ 지금은 ‘외사’로 개명을 했더만 ‘삭골’ 그 사이골에 그 원래는 ‘사이골’이었는데 그 ‘사이골’이 발음이 나오다보니까 ‘삭골- 삭골’ 하는데 거기가 조금 전답이 없었어요 그래서 옛날에는 이 고지라고 있었죠 “고지 먹는다고” 그 고지라는 것은 내년도 품삯을 미리 주는 거에요 농사를 지어서 그러면 내년 치 품삯을 미리 가져가고 내년에 와서 일을 해주는 거에요 가을에 먹고 살기가 좀 힘드니까 그래서 이 동네에서 고지를 엄-청 많이 줬어요 이 ‘중말’사람 ‘삭골’사람들한테 그래서 이 앞에 길이 반질반질 했어요 오솔길이 그 쌀 가지가고 일 해주느라고 긍게 동네가 좀 부유 했죠 그래서 부자가 산다고 해서 ‘갑부네’ 세 번째는 네자가 원래 그 냇갈 할 때 내에요 저- 밑에 가면 ‘현천’이라는 부락이 있어요 거기도 원래는 ‘가무네’가 맞습니다 거기도 개명이 되어서 그러는데 ‘가무네’인데 거기가 가물어요 근데 물은 제일 많아요 이 ‘태성리’에서 온 물이 그 ‘가무네’로 다 빠져요 이 여기에서 그 골짜기를 통해서 근데 물은 없어요 비만 그치면 물이 하나도 없어요 그래서 가물어요 그래서 ‘가무네’에요 물은 많은 데 가물다 이거여 가물은 냇갈이다 그래서 ‘가무네’거든요? 근데 여기가 ‘갑부네’라는 것은 땅이 점토질이라 물이 안 말라요 한번 내려가면 물이 고여 있어요 그래서 농사짓기가 아주 좋아요 옛날에는 관정시설이나 이런 것이 없기 때문에 거-의 그 하늘에 의존해서 농사를 지었는데 물이 한번 딱 고이면 논에 물이 안 빠져요 그래서 부자집 냇갈 갑부 내 즉 부자집에 냇갈이다 말이죠 그래서 ‘갑부네’ 거기는 ‘가무네’ 그렇게 세 가지 설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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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1: 그리고 여기서 좀 저위로 한 1키로 한 2키로 정도 올라가면 ‘도둑놈 잔치골’이라는 데가 있어요 도둑놈! 잔치골! 골이 이렇게 패여 있으니까 근데 거기서 옛날에 그 도둑들이 소 돼지를 잡아다가 잔치를 벌렸데요 도둑 잔치를 근데 그 세가 어찌나 컸든 지 ‘여산’관아에서도 어쩌지를 못하고 그 저쪽 ‘고산’관아나 ‘화산’관아나 원채 멀기 때문에 아주 뭐 신경도 못 쓰고 삼 일간을 했데요 근데 지금도 흔적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깊이 파여져 가지고 거기 가면 그래서 도둑들이 잔치를 한다고 해서 ‘도둑놈 잔치골’ 그런 골짜기가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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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 다른 이야기도 있나요?
A1: 다른 데는 뭐 이 앞산을 보며는 또 저 앞산을 이렇게 보며는 지금은 나무가 있어서 그러는데 소허리 같았어요 살-짝 휘어가지고 그 다음에 이쪽으로 쭉-보면 소꼬리 같으죠 그래서 ‘우미혈’이라고 해가지고 풍수가들이 이 앞산이 ‘우미혈’ 소꼬리 혈이라고 해가지고 묘가 굉장히 분포 되어있어요 소꼬리 쪽에 다가 묘가 많이 분포 되었는데 또 저쪽 앞에가면 감나무 있는데 그 옹달샘이 하나 있습니다 마르지 않아요. 항-시 약수라해서 동네사람들이 장 담글 때나 이런 때 물을 떠오거든요? 근데 거기가 집안들이 말 하며는 소의 밥구수 형상이라는 거요 밥 먹는 그릇 “소 바구수 바구수” 그러죠 그래서 밥구수에 형상이라고 지금도 물이 계속 나오고 있습니다 여기 보면 또 집이 두 채가 있을 겁니다 집 딱 두 채에요 그전에는 거기에 집이 몇 채있었어요 거기가 ‘소젖 유방혈’이에요 유방 그래가지고 집이 여러 채 있었는데 다 없어지고 결국에는 소젖 꼭지가 두 개죠잉? 두 집만 남았어 허허허 그래서 거기를 탐을 내는 풍수가들이 있어요 탐을 냈던 그런 자리에요 하여튼 대부분 이 동네가 그렇습니다 그 외에 뭐 조그마한 지명은 있지마는 특별한 뭐 유래는 내려오지는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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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 주변에 재미난 지명들이 있습니까?
A1: 여그 뭐 저기를 뭐 ‘호꼬베기’ 그게 무슨 이름이 있는 가.. 이게 ‘호꼬베기’라는 지명을 저도 여러 군데에서 봤습니다 그 지명을 여러 군데에서 봤었는데 저도 이렇다한 뭐 때문에 ‘호꼬베기’인가 이것은 알지를 못하고 또 저 ‘운주’에 가면 ‘호꼬베기’라는 지명이 있어요 또 이쪽으로 가면 ‘자갈바위’ 거기에 자갈이 많아가지고 ‘자갈바위’ 또 이쪽으로 내려가면 논이 있는데 거기가 ‘이화구자리’ 배꽃이 많-이 핀다고 그래 가꼬 그 농사를 그 그냥 산 둘레에 뺑- 둘러서 그 배꽃이 많이 폈다고 ‘이화구자리’ 뭐 그런 등등에 여러 전설들이 있는데 그걸 일일이 나열하기는 좀 그렇고 그러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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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 또 마을에서 내려오는 전설이 있나요?
A1: 이 마을에 특-별한 그런 뭐 전설은 없고 저- 뒤 이 넘어가면 이 ‘성치’ 앞에 가면 ‘장수굴’이라는 디가 있어요 ‘장수굴’ 지금은 아마 찾기가 조금 힘들 꺼여 옛날에는 길이 있었는데 거기 가면 커-다란 그 굴이 있어요 이쪽으로 들어가서 저쪽으로 나올 수 있는 장수가 옛날에 거기서 나왔다고 해가지고 ‘장수굴’인데 근데 거기 가보면 꼭 사람 무릎으로 딱 대면 무릎이 딱 들어갑니다 장수가 무릎을 꿇고 나왔다는 거여 거기서 그 옆에는 말 발자국처럼 장수가 말을 타가지고 말 발자국이라고 그 흔적이 있습니다.
B1: 말 발자국 바위가 있습니까?
A1: 아니 말 발자국처럼 파여 가지고 말 발자국이 있고 무릎 자국이 있고 그런 그 ‘장수굴’ 현재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가 지금은 찾기가 조금 산 속으로 길이 없어져가지고 그리고 석산에서 석회석을 하면서 조금 훼손이 되었을 거에요 그래도 아마 원형은 살아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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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 상당히 신기하네요.
A1: 그리고 거기가 ‘용초굴’이라는 데가 있어요 그 거기를 가면 이 모든지 삿갓을 엎어 놓은 것 같아요 들이 그러면 물이 당연히 물이 괴야죠? 이렇게 엎어지니까 아-무리 큰 비가 와도 물이 없어요 다-삼켜 버려요 거기를 땅 속으로 그래가지고 그것이 ‘천호동굴’해서 직통으로 뚫려버렸어요.
B1: 아- 그쪽으로 스며드는 것 같네요?
A1: 네 그래요 ‘용초굴’거기를 한참 개발한다고 그러다가 위험성이 많아가지고 못 했습니다 그 물이 아-무리 큰 비가 와도 한 방울도 없이 다- 스며들어요 그 위에 그 ‘장수굴’이라는 데가 있는 거여 그 ‘용초굴’ 위에 그 그 ‘성치’에 있거든요? 그 속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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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 저 뒷산이 ‘천호산’이죠 왜 그렇게 불렀을 까요?
A1: 글쎄요 그건 나 ‘천호산’은 내가 그 잘 모르겠고 뭐 이런 얘기는 하나 있습디다 그 저 전라감사 ‘이서구’라는 분이 ‘여산현’에서 출발을 할 때 “저 산이 무슨 산이냐”, “천호산입니다” 그러니까 “아니다! 저건 만호산이다 저 산 밑에서 만(萬)집이 먹고 살 수 있는 산이다 그래서 만호산이지 천호산이아니다” 그랬다고 허허허허.
B3: 아까 숨이 가쁘다고 말씀하신 길이 ‘천호산’을 넘어오는 길인 가요?
A1: 아니 ‘천호산’을 비켜서 어- 그쪽으로 쭉 가며는 ‘운주면’, ‘화산면’, ‘경천면’, ‘고산면’ 거기를 다- 갈 수 가있어요 이리 넘어서 이리 다 다녔어요 사실상 다른 길이 없었고 유일한 통로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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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3: 그러면 이 마을에서 사람들이 많이 휴식을 취하고 했을 것 같은데요?
A1: 아- 여그가 엄청 많이 쉬었죠 여기에서 여기에 옛날에 그래가지고 주막이 하나 있었어요 저-쪽 위에 있었는데 거기를 갈려면 저 재를 넘을 라면 막걸리는 먹어야지 못 올라가요 힘이 들어서 그래서 주막에서 막걸리를 먹고 여기를 걸어서 넘어 다녔어요 그 굉장히 컸었죠 이 도로가 그전에는 그쪽에서 사람이 원채 많이 통행을 하다 보니까 에- ‘고산’하면 감이 유명하죠 홍시 감을 다라로 하-나씩 그 아줌마들이 이고 갔어요 홍시를 다라로 저-쪽에서 이렇게 돌아가지고 ‘여산장’을 보기 위해서 ‘여산장’에서 유일하게 팔아야하니까 그러면 인제 우리 어렸을 때만 해도 “감 하나 주세요 주세요” 하면 아줌마들이 뭐 거기까지 이고 왔는데 좀 아깝죠 안 주면 쪼-금 저 실망스러운 아이들은 그 줄은 이렇게 매어 놓아요 길에 다가 그러면 홀딱 넘어져요 허허허 그러면 또 그놈을 주어 주었습니다 하하하하 깨진 건 먹고 “깨진 건 먹어도 되죠?” 허구 허허허 “그래 먹어라 먹어라” 그러고 먹고 그러던 기억이 있어요 소도 ‘여산장’에 소를 팔려고 소를 많이 끌고 왔어요 근데 이리 다녔거든 바로 이 앞에 지금이야 광장이었지만 그전에는 유일하게 조그만한 도로였어요 그러며는 여기 있는 사람들이 물을 길러 저쪽으로 가요 저- 샘으로 그래서 소 끌고 오면 거기를 못 지나가요 소 지나갈 때까지 길을 끊는 것이 아니라고 해가지고 여자가 길을 끊으면 재수 없다고 막 그래가지고 소를 끌고 지나갈 때까지 물동이를 지고 있어야되요 거기를 못 건너고 건너면 막 어-우 대단한 난리가 났어요 그 소 팔러 가는 사람들 소 끌고 오면 여자가 재수 없이 길 끊는 다고 해가지고 아-무리 무거운 물동이라도 지고 있어야지 통과를 못해요 그 소가 지나간 다음에 그 통과를 해야 되요 우리 어렸을 때만 해도 그랬습니다 근데 그게 굉장히 심했습니다 그런 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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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 주막이 언제까지 있었습니까?
A1: 거기가- 한 60년대.. 60년대까지 있었어요 그러다가 저 길이 이 형성이 되면서 없어 졌어요 왕래하는 사람이 없으니까 이쪽으로 저 길은 70년대 그때 그 저희가 굉장히 오지 마을이라고 ‘누황성치’가 ‘누황’ 그게 쉬어 목이에요 물이 쉰다 이 말이에요 쉬는 목이다 거기도 물은 많은데 물이 없어요 흘러가지고 다 스며들어서 그래서 쉬어 목입니다 ‘누황’ 물이 샌다 이 말이에요 그래서 ‘누황’ ‘성치’는 거기에 성이 있습니다 저쪽에 그 ‘천호산’ 꼭대기에 봉화대가 있었데요 그 성이 있는 치 성이 있는 고개 고개 치자 ‘성치’ 그래서 ‘누황성치’
B1: ‘누황성치’ 사람들이 무엇을 했다는 말씀이시죠.
A1: 거기에서 주로 이리 거기를 경유해서 ‘화산면’이나 ‘운주’ 뭐 ‘고산면’ 이 사람들이 그 동네를 경유를 또 해야 되요 그래서 여기까지 와요 근데 거기가 아-주 이 오지 마을이라고 해가지고 70년대 군사 도로로 낸 거에요 원래는 그 도로가 나면서 여기 주막이 없어 졌지요 그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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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 여기에 성이 있었으면 무슨 장군이나 전쟁과 같은 전설이 있을 법한데요?
A1: 그--런 것은 못 들었고 뭐 ‘여산’에 오다가 ‘닭재골’이라는 이야기 못 들었습니까? ‘장대산’ 옆에 그 ‘여산’에 오면 ‘동촌’마을 그 옆에 ‘닭재골’이라는 데가 있어요 ‘닭잡골’, ‘닭재골’ 그 말을 들어보면 ‘견훤’이 거기서 죽었다고 그래요 ‘닭재골’에서 그 ‘견훤’이 지렁이 화신이라 그 닭하고 아주 상극이라는 거에요 그래서 그 ‘닭재골’이라는 그 골짜기가 있어요 ‘장대산’ 밑에 거기가 그리고 나 그렇게만 함 들은 적이 있어요 어 거기가 조금 뭐 이런 사람이 보더라도 그 ‘장대산’ ‘장제산’이죠 그 제를 지내던 산이니까 근데 그 ‘여산현’ 그 동원해서 조금 가면 거기에 있거든요 그 ‘닭재골’이라는 데가 거기- 밑에 보며는 또 그 지금이야 그런 이야기가 없어 졌을 것입니다 우리 60년대 학교 다닐 때만 해도 그 폭포 같은 바위에서 있어요 물이 항시 안 떨어지고 거기서 그 ‘여산현’들이 그 풍물을 즐겼다고 해요 그 ‘새천동’이라고 그러드라고 근데 지금은 아마 그 흔적이 거의 없을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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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 옛날에 부자가 많이 살면 동네 사람들이 따로 놀고 그럴만한 곳이 있었을 것 같은 데요?
A1: 그-럴 정도로 정자 같은 곳은 없고 뭐 옛날에 그런 식으로 뭐 그냥 여기 동네 사람들이 일을 많이 했어요 비교적 그- 다른 부락에 비해서 일을 많이 한 동네에요 이 동네가 그래서 겨울에도 지금은 이나 그러지 그 지금정도 되것네요. 그러면 산에 가서 풀을 베어 놓아요 소 겨울 먹이라고 해가지고 짚하고 섞어 가지고 그것 보고 ‘새초 새초’ 그러거든요? 그거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어요 그래서 이 동네 사람들이 일을 많-이 했어요 다른 동네에 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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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 이 산 넘어서 ‘중말’하고 ‘삭골’이라고 마을이 있다고 하셨는데 왜 그렇게 불린지 아시는지요?
A1: 여기 말로는 거기가 진짜 가난한 사람들이었어요. 농토가 거의 없다 시피 해요 그래 가꼬 돌 돌 일을 해서 먹고 살았어요 석회석을 때서 다듬이 돌을 맨들고 멧돌을 맨들고 거의 그-런 것이, 그게 생활기반이 그것이었죠 그래가지고 죽만 먹고 사는 동네라고 해가지고 ‘죽말 죽말’ 그래 가지고 ‘죽말 죽말’ 하다가 이것이 발음이 편하게 ‘중말 중말’ 인자 그렇게 또 ‘삭골’은 절을 갈려면 그 사이 그 ‘유점’이라는 마을이 있자나요? 유기점을 팔던 곳이라고 해서 ‘유점’ ‘삭골’ 위에 가 거기는 이제 유기점이 절을 갈려면 유기를 사 가꼬 가야 할 것 아니에요? 그래서 유기점이 많이 되었던 모양이에요 장사도 하고 그래서 ‘유점 유점’ 하는데 거기를 거칠라면 ‘삭골’을 지나 가야 되요 사잇길 근게 사이에 있다는 말이죠 사잇길 사이사이로 지나가는 그래서 ‘삭골’ 뭐 그 외에 저-쪽 부사관학교 지나가지고 ‘진터’라는 쪽 한 번 가따 오셨나요? ‘진터’라는 것은 그 마지막 후백제 그 ‘전주’에 있는 후백제를 침공 하기위해서 거기 ‘왕건’이 진을 쳤다는 데에요 그래서 ‘진터’라는 곳이에요 그 밑에 ‘진터’ 그리고 그 옆에 가면 ‘갑옷터’라는 데가 또 있습니다 그래서 갑옷을 갈아입었다고 해서 ‘갑옷터’
B1: 현재 지명도 ‘진터’입니까?
A1: 예 그렇습니다 현재 거기가 ‘진기’마을입니다 근데 지금도 ‘진터 진터’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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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3: 혹시 ‘매제미 고개’ 이야기는 들어보셨나요?
A1: ‘매제미’는 못 들었고 나는 못 들었고 저쪽 그 ‘천호산’ 넘어가는 거 아디야 그 ‘고산’넘어가는 고개를 ‘문드르미재’라고 그래요 그런데 거기가 굉장히 가파른데 그것도 일제 강점기 때 길을 냈어요 찻길을 그전에는 다- 넘어 다녔죠 ‘학동’이라는 동네를 경유해서 거기를 넘어 다녔어요 거기 가면 ‘천호성지’가 있고 그뭐 ‘천호성지’ 유래야 많이들 알고 계실 것이고 그 외에도 뭐 여러 지명들이 저- 저 ‘태성리 가무네’ 옆에 가면 ‘밑마리통’이라는 동네가 있어요 ‘밑마리통’이라는 데가 있고 그 옆에 보며는 그 바로 앞 마을이 지금은 ‘덕사 덕사’ 그래가지고 합쳤는데 거그도 ‘사작골’이에요 ‘사작골’ 참새 작자를 쓰는 것 같아요 그리고 그 옆에가 ‘두덕실’ ‘두덕실’은 아마 이정표가 있을 겁니다 ‘두덕 두덕’해가지고 그래가지고 풍수가들이 이야기 하는데 ‘두덕실’이라는 데는 15호를 넘지를 말아라 열다섯 호가 넘으면 여기 그릇이 넘친다 동네 망한다 15호 미만만 살아아라 그래가지고 열다섯 호 이상 되며는 이 동네는 망하는 동네다 이 ‘두덕실’이라는 동네는 아닌 게 아니라 15호 미만입니다 지금도 사람들이 부유해요 거기도 다 부잣집들만 살고 있어요.
B3: ‘벼락박골창’이라고 들어보셨는지요?
A1: 그건 못 들어 봤고 ‘수박골’ 수박이 많이 났나 봐요 ‘수박골 수박골’ 그러거든 ‘가리울’, ‘가리울’은 ‘노동’이라고 했거든 ‘노동’마을 거기가 옛날이름은 ‘가리울’ 그 옆에가 ‘무중골’ 근데 뭐 뚜렷한 그건 모르겠습니다 나도 그 옆에 가면 또 뭐 ‘운동골’ 골짜기 이름이 다 있거든요 쪼그만 해도 이름이 다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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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3: 아까 말씀하신 ‘도둑놈 잔치골’에서 특별한 도둑에 대한 들어보셨나요?
A1: 그런 건 못 들어 봤고 그 하여간 이 ‘큰재’ 중간에 있어요 그 ‘도둑놈 잔치골’이라는 데가 근데 거기가 유달리 폭 파였어요 깊게 거기가 조금 사람들이 꺼려 했어요 골짜기라 거기 가기가 지금이야 뭐 다 다니고 그러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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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 도깨비나 여우한테 홀린 이야기도 있나요?
A1: 여-우는 여우한테 홀린다고 해가지고 그 저쪽 ‘태성’ 그쪽에서 밤에 제사를 지내로 와요 이쪽 동네가 큰집이니까 그전에 제사는 닭이 울어야 제사를 지내자나요? 닭이 울어야 제사를 지내는데 그분이 여기 오다가 여우한테 홀려가지고 아마 새벽녘에 돌아오신 모양이에요 그런데 여우한테 홀려가지고 여우가 뭐 이쁜처녀로 변해가지고 유인을 해가지고 쫓아갔는데 이 까시에 걸리고 그래 가지고 가도 가도 바로 넘어가도 집인데 그것이 안 나오길래 정신을 바짝 차리고 봤더니 ‘천호산’ 꼭대기더라 이거여.
B1: 그 이야기는 언제 들으셨나요?
A1: 아주 오래 내가 어렸을 적에 그래가지고 까시도 막 이런데 찔리고 그분이 그랬다고 그러드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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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3: 다른 마을하고 함께 공동으로 잔치 같은 것도 하고 그랬나요?
A1: 아 여기 보면 ‘태성’이라는 동네가 있어요 ‘원태’ 거기하고 이 동네는 아마 최근 까지도 서로 청첩을 안 보냈어요 한 마을이라고 해가지고 뭐 거기에 큰일이 있으면 여기서 가고 여기에 큰일이 있으면 그 사람들 오고 그래가지고 한 동네라고 그래가지고 그 옆 동네하고 특별하게 뭐 청첩이나 이런 걸 하지도 않았어요 한 동네라고 해서 그렇게 지냈어요.
B1: 옛날에 ‘원태’마을이 컸다고 하던데요?
A1: 제일 컸죠 ‘태성’ 산이 크다 이 말이죠 ‘태성’도 ‘원태성’이다 이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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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3: ‘여산’에서 어느 마을이 좀 옛날이야기를 듣기 좋을까요?
A1: ‘학동’을 가따 오셨다며 ‘상양’ 쪽으로 하면 거기가 있음 직 하거든 거기가 마지막 그 후백제 군의 마지막 보류라고 그래서 ‘상양’ 위에 ‘숯고개’가 거기에서 마지막으로 최-후까지 그 ‘왕건’의 군과 최후까지 격전을 벌인 곳이 거기 인데 ‘숯고개’인데.
B1: 그 이야기는 어느 분한테 들으셨나요?
A1: 아 뭐 옛날부터 내려 왔죠 그 굉장히 거기가 무서운 고개였어요 도로는 있었어도 사람이 걷기가 조금 두려워가지고 여기 사람들도 ‘익산’ 갔다 오다가 거기서 고개 넘어오다가 말하자면 귀신 귀신 봤다고 그래가지고 상당히 거기가 왕래을 안 했던 곳이에요 사람이 많이 죽었던 곳이라 6.25때도 많이 죽고 그때도 많이 죽고 그래가지고 거기가 음침했어요 한 마디로 거기가 그 고개가 ‘숯고개’가 거기가면 또 뭔 이야기가 나올지 모르겠네요 거기 넘어가 또 ‘괴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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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3: 또 다른 곳은 없나요?
A1: 아마 없을 겁니다 어- 저쪽에도 ‘입석’ 아 ‘후석 후석’ 원래 ‘후석’ 밑에가 ‘입석’이라고 했습니다 돌이 섰다고 이 말이에요 그래서 옛날에는 ‘제남리 후석’ 지나서 그 ‘입석’이라고 했을 겁니다 그런데 거기에 옛날에는 커-다란 돌이 세워져 있었던 거에요 ‘여산’에 기가 서쪽으로 빠진다고 그래서 기를 막기 위해서 그래서 거기 마을을 ‘돌 선거리’ 돌이 섰다고 해서 돌이 선 거리 그것을 인제 나중에 발음이 조금 변해 가지고 ‘독선거리 독선거리’ 그랬죠 원래는 돌이 선 거리 인데 그러다가 이제 그것을 한자음으로 ‘입석’마을 근데 그 돌이 뭐 몇 십 년 전까지만 해도 있었다는 거에요 근데 뭐 그 도로 내면서 그걸 수로를 만든 모양이에요 그 돌을 빼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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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 직접 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A1: 아뇨 듣기만 했죠 아마 거기 나이 드신 분들한테 물어보면 알 꺼에요 돌 위치까지도 그 외도 인제 뭐 ‘사월’ 가는데 ‘사직제’ 여산 ‘배다리’에서 그 ‘사월’가는 그 고개가 ‘사직제’라고 하고 거기가 ‘치명터’가 있었거든요 거기가 사람을 참수하는 ‘치명터’였었데요 ‘사직제’는 거-기를 넘으면 죽는다 이고죠 근게 ‘배다리’도 원래 그 사형터에요 거기다 빠쳐 죽여가지고 천주교 순교자들이 거그서 났어요 ‘여산’에 가면 많이 있자나요 그리고 ‘치명터’에 큰 나무가 있을 거에요 아마 거기 지금도? 거기가 그 참수하는 그 참수형 그 나무 밑에서 거기가 그런 걸로 제가 알고 있는데요? 제가 어른들 한테 그렇게 들었어요 거기가 참수를 시킨 목을 벤 곳 그 ‘여산’이라는 데가 ‘고산’, ‘화산’ 이런 데가 천주교 신자가 많았자나요 산골로 도망을 가서 그러면 ‘고산’현아나 이런 데에서 잡습니다 체포를 해가지고 거기서는 사형을 시킬 수가 없어요 유일하게 사형을 시킬 수 있는 곳이 ‘여산현’이었어요 그래서 ‘여산’에 와서 다 참형을 시킨 것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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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 그 ‘배다리’는 ‘강경’에 있는 물줄기가 이곳으로...
A1: 그렇죠 ‘배다리’가 배가 물론 드나들어서도 ‘배다리’지만 옛날에는 다리가 없었자나요 물을 건너기는 건너야 할 것 아니여? ‘여산현’을 올라면 ‘강경’에서 그러면 배와 배를 놓고 다리를 놓았다고 해서 ‘배다리’라고 하는 거에요 배와 배를 정박을 해놓고 그렇게 건넜기 때문에 배와 배를 세워 놓고 거기에다 연결을 하며는 통행이 될 수 있자나요 그런 식으로 해서 다녔다고 그래서 ‘배다리’가 원래 그래서 ‘배다리’이지 배가 드나들기도 물론 했겠지요 그런데 거기가 물은 많고 수심은 깊고 그래가지고 유일하게 드나들 수 있는 방법이 그 방법 밖에 없었던 모양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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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3: ‘여산’관아와 관련된 이야기 아시는 게 있으신지요?
A1: 저기 ‘천호성지’가면 일곱 분을 묻어 논 데가 있어요 지금은 아마 그걸 다 각각 그 신원이 파악이 되가지고 이렇게 나누어 놓은 모양인데 그 ‘고산’ 그쪽에서 믿던 천주교 신자들을 여기서 참형을 시킨 거에요 참수를 근데 그것을 시신을 못 건들자나요 그전만 해도 근데 그 용감한 교우 한분이 그 섬에 다가 일곱 구를 다 넣었데요 섬이라고 해서 가마에 다가 이렇게 큰-게 있어요 옛날에 짚으로 이렇게 해가지고 그걸 일곱 구를 지고 넘어 갔다는 거에요 저 ‘문드르미재’를 한 번도 안 쉬고 넘어 갔데요 거기서 그것은 좀 불가사이 한데 신적인 뭔 영적인 뭔가가 있어서 이렇게 짊어지고 가지 않았겠느냐 그런 이야기는 제가 한 번 들어 봤네요 옛날에 거기 사람들한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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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3: 어르신 그러면 마지막으로 연세와 성함을 알려 주실 수 있는지요?
A1: 신승식 55년생입니다.
B3: 좋은 말씀 정말 감사합니다.
구술사진
관연마을
관연마을 신승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