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명 : 금마면 > 구룡마을1

구술 기본정보

구분 내용
마을명 금마면 > 구룡마을1
구술자 이우선(1929)남자
구술자 홍응식(1949)남자
면담자 하정일, 장윤준, 이순영
구술요지 새로 채록된 지명유래담
민속
유적, 터 및 기타지명
전설 및 민담
민속
기타
구술일시 2012-08-07
비고 면담장소 : 금마 구룡마을 모종
면담시간 : 2012년 8월 7일 오후 2시
내용 : 지명유래 및 민속 등에 대한 인터뷰 진행.
키워드  

문헌내용

구룡(九龍, 독징이-독젱이(篤亭里)․독점․국골․당내갈․범정이 : ‘구룡’은 국골의 뒤 바위에 언제 누가 생겼는지는 모르나 ‘구룡동천(龜龍洞天)’이라고 새겨져 있어 그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하나 그 지형이 구렁으로 되어 있으니 ‘구렁’을 한문자로 표기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독징이, 독점’은 전에 도자기를 굽던 곳이다. 독을 짓는다하여 ‘독진이’라는 이름이 붙은 곳이 우리나라에 수백군데 있다. ‘국골’은 전에 구곡(九曲)으로 썼는데 그 지형이 굽이굽이 굽은 곳이니 ‘굽골→국골’. ‘당내갈’은 당집이 있던 곳의 내 옆이기에 생긴 이름. ‘범정이’는 범이 내려와서 어쩌구저쩌구하나 믿을 수 없는 일.
『익산시사』

구술요지

1) 새로 채록된 내용
- 마을 유래담 : 이독진(전주 이씨)이라는 사람이 처음 마을에 자리를 잡았다. 그래서 독적마을이라고 불렸다. 그 후 홍주 홍씨들이 마을에 유입되고, 지금은 구룡마을이라고 불린다. 구룡마을이라는 뜻은 아홉 구(九)와 거북구(龜)를 같이 사용하며, 마을 주민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2) 유적, 터 및 기타지명 :
- 뜬바위 : 큰 바위 두 개가 포개져 있다. 음력 섣달그믐날 밤에 양 끝에 명주실을 잡고 두 바위 사이를 통과하면 실이 끊기지 않고 통과되었다 한다. 71년도 석산개발 때 주변 바위는 많이 깨져 없어졌으나, 뜬바위는 보존했다고 한다. 바위 천장에는 옛 어르신들이 붓글씨로 글씨를 적어놓은 흔적이 있었으나 지금은 찾을 수 없다. 아랫돌에 정으로 쪼갠 자국이 있는데, 맑은 날 아랫돌을 정으로 쪼개는데 벼락이 쳐서 돌이 쪼개졌다고 한다. 아랫돌 밑에는 은복죽개, 즉 은 밥그릇 뚜껑이 묻혀 있다고 한다.
- 독점 : 마을 산쪽으로 올라가면 독점이라는 곳이 있고, 그곳 이름을 점촌이라고 부른다. 그곳에 부대 사격장이 있었는데, 탄피를 줍는 사람들이 옛 그릇들을 많이 발견했다고 한다. 예전에 도자기를 굽던 사람들이 모여 살던 마을이다. 특히 점촌마을의 부자가 당제를 지어 자식들을 교육시켰다고 하는데, 아직도 그 곳에서는 옛 그릇들이 많이 나온다고 한다.
- 망골 : 망실이라고도 한다. 예전 기준왕 시절에 망을 보던 곳이다.
- 징골 : 기준왕 시절 징을 친 곳이다.

3) 전설 및 민담 :
- 항복골 : 미륵산 기준성 넘어에 있다. 부대를 이끌던 왕이 절벽쪽은 성벽을 쌓지 않았는데, 적이 그쪽으로 쳐들어와 준암바위쪽으로 도망을 치다 잡혔다 한다. 그리고 준암바위에서 적에게 항복을 강요받으며 주리를 틀렸는데, 결국 항복골에서 항복을 했다고 한다. 준암바위는 금마 저수지에 수장되어 있다.

4) 민속 :
- 산제 : 음력 초사흘 저녁에 용화산 산왕대신에게 산제를 지낸다. 예전에는 산제당이 있었으나 지금은 헐리고 없다. 산제에 대한 고문서가 있었으나, 전북대 교수가 연구를 목적으로 가져간 뒤로 반환이 되질 않고 있다.
- 술멕이 : 요즘에도 칠월칠석날 술멕이를 한다. 마을 주민들 모두 돈을 조금씩 걷어 3~4일동안 마을 잔치를 한다.
- 기세배 : 예전 금마 중학교에서 마한제 축제를 하였다. 그때 익산의 각 마을이 모여 기세배를 하였다. 익산이 금마와 통합되며 없어졌다.

5) 기타 :
-철도 이야기 : 일제시대때 금마에 살던 양반들이 반대를 해서 철도가 금마가 아닌 함열-익산 쪽으로 개통이 되었다고 한다.

구술채록

B1 : 장윤준
A1 : 이우선(84세) - 1929년생
A2 : 홍응식(64세) - 1949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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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 : 마을의 유래에 대해 설명 부탁드립니다.

A1 : 예전에 이독진이라는 노인이 살았는데, 마을 전체가 그 분의 땅이었다. 그 분이 나무(모종)을 심었다고 한다. 그 분이 이 마을에 처음 정착을 했다. 대밭도 그분이 만드셨다. 그 후 홍주 홍씨들이 와서 마을이 커졌다. 처음 마을의 지명은 홀로독(獨)을 사용하여 독진마을이라고 불렀어요.

B1 : 지금은 구룡마을로 이름이 바뀐 이유가 뭔가요.

A1 : 학술적으로는 잘 모릅니다. 다만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구룡마을이라고 불린 이유는 아홉구(九)자와 거북구(龜)자를 사용하여 구룡이라고 불렀어요. 지금도 아홉구(九)와 거북구(龜)에 대해 서로 왈가왈부 합니다. 또한 지금 마을 당산나무의 수령이 300년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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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 : 일정시대는 어떻게 사셨나요?

A1 : 일정시대때 농사만 짖고 살았습니다. 일정때는 내가 농사 짖고 쌀밥 한 그릇도 못먹고 다 공출 당하며 살았습니다. 그땐 우리 한국사람들이 왜놈들 밑에서 힘들었어요. 면사무소 직원들이 각 집안의 솥을 열어보며 모두 조사했어요. 그땐 너무 힘든 세상을 살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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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 : 구룡마을은 대숲, 뜬바위, 항복골이 있는데 이 동네에 내려져오는 전설이 있나요

A1 ; 예전부터 우리 부락에는 산제가 있었습니다. 음력 초사흘 저녁이면 산제당에서 산왕대신을 위해 산제를 지냈습니다. 우리는 용화산 산왕대신에게 산제를 지냈습니다. 산제에 대한 문서가 있었는데, 그 문서를 68년도경 전북대 이강훈 교수와 서독에서 오신 선생님께서 그 문서를 가져가셨습니다. 그래서 산제의 역사나 유래는 지금 남아 있지 않습니다. 나중에 서류를 만들어 가지고 있지만, 정확한 역사는 잘 알지 못해요. 산제당은 박정희 정권때 철거 당했습니다. 산제당은 다시 못 짓고 여기저기 여러곳에서 산제를 지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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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 : 뜬바위에 대해 설명 부탁드립니다.

A1 : 뜬바위가 제 개인 소유입니다. 71년도에 석산을 개발 하려고 미륵산 돌을 깼습니다. 그런데 나도 그때 석산을 개발 했는데, 뜬바위만은 깨면 안 된다는 생각에 보존 하였습니다. 그때 뜬바위만 보존하고 다른 바위는 많이 깼는데, 너무 후회가 됩니다. 뜬바위 전설은 내가 어릴떄부터 전해지던 이야기인데, 섣달 그믐날 명주실로 뜨면 바위가 뜬다고 합니다. 실이 통과된다는 이야기죠. 그리고 바위 천장에 옛날 사람들이 붓글씨로 무언가를 많이 썼습니다. 그걸 71년도에는 확인을 했어요. 지금은 찾을 수는 없어요. 그리고 뜬 바위 바닥돌에 정으로 쪼갠 자국이 있습니다. 옛날 어르신들 말씀으론 날씨가 좋은날 벼락이 쳐서 돌이 떨어졌다고 합니다. 그 돌이 지금은 묻혀 있어서 안보여요. 그리고 아랫돌 밑에는 은복죽개가 들어있다고 합니다. 은 밥그릇 뚜껑이 묻혀 있다는거죠. 아직도 무속인들은 초를 키고 그곳에서 기도를 합니다.

B1 : 이 동네에 돌이 많아서 독자갈, 즉 독진 마을이라는 이야기를 들으신 적 있으신가요

A1 : 돌이 많긴 많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독점. 즉 저 위로 올라가면 독점이라는 마을이 있고, 거기엔 점촌이라는 마을이 있습니다. 부대 훈련장 안에 굴이 있는데, 탄피를 줍는 사람들이 그곳에서 그릇같은 것들을 발견했어요. 그리고 그곳을 파는 사람이 혼자 독점해서 그곳을 다 팠다고 해서 독점이라고 합니다. 지금도 그곳을 파면 그릇같은 것들이 수 없이 나옵니다. 그곳에 당제라는 곳이 있습니다. 점촌의 돈 많은 사람이 그곳에 집을 짓고 자식들을 교육 시켰다고 합니다. 그리고 점촌에 사람들이 살면서 도자기를 굽고 살았다고 해요.

A2 : 부대 사격장이 있던 자리입니다. 그런데 그릇을 굽다 남은 것이 내가 어릴 때 많이 발견되곤 했어요. 지금도 발굴하는 양반들이 많이 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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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 : 어르신 항복골은 어디에 있나요?

A1 : 항복골은 미륵산 기준성 넘어서 있어요. 그때 왕이 되었던 장수가 되었던. 부대를 이끌고 있었는데, 적과 싸움을 준비했답니다. 그런데 바위가 있는 곳은 성을 안 쌓았는데, 그 쪽으로 적이 올라와 졌다고 합니다. 미륵산 장군봉 밑이 그 자리입니다. 그때 패하니, 준암바위에 잡혀서 항복을 하라며 주리를 틀렸다 합니다. 그리고 항복골 가서 항복을 했다합니다. 준암바위는 금마 방죽, 금마 저수지 안에 있습니다. 거기에 맞은 바위도 있습니다. 우리가 듣기론 항복골에서 항복을 했다고 합니다. 기준왕 시절이죠.

B1 : 또 다른 지명 유래는 없나요?

A1 : 그리고 망을 봤다 해서 망골, 망실이 있으며, 징을 쳤다고 해서 징골이 있습니다. 즉 망을 보고 징을 쳤다는 이야기에요.

A2 : 지금도 망골에 가면 깃대를 꼽던 동그란 자국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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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 : 종편마을은 배가 들어왔다고 하는데, 구룡마을은 배가 들어 왔을까요?

A1 : 예전엔 황등까지 배가 들어 왔다 합니다. 그리고 우리 마을엔 비만 오면 고기가 시커멓게 올라 왔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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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 : 철도는 왜 금마를 통과 하지 않았나요?

A1 : 어르신들 말씀에 따르면 금마는 양반이 살던 곳이라고 해요. 왜정대 일본놈들이 와서 철도를 여산에서 금마로 낼려고 했답니다. 그런데 금마 양반들이 시끄럽게 철도를 여기에 내냐며 막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철도가 함열에서 익산쪽으로 갔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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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 : 혹시 구룡마을 출신 큰 인물은 없나요?

A1 : 우리 마을은 큰 인물이 없고, 금마도 큰 인물이 없어요. 금마출신 국회의원도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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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 : 마을의 전통은 없나요?

A1 : 칠월칠석날 술멕이를 하면 삼일 밤낮을 했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모종은 수령이 300~400년이 되었는데, 지금도 모종에 모여 술멕이를 하며 잔치를 합니다. 우리 마을 주민들 모두 모종에 큰 애정이 있어요. 양로당이 있어도 모두 모종에 모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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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 : 기세배 이야기 부탁드립니다.

A1 : 기세배는 지금 없어졌어요. 금마 장터 상대라는 마을이 있어요. 그곳이 금마의 제일 큰 마을이고, 우리 구룡마을이 두 번째 마을입니다. 그때 마한제라 하여 금마 중학교에서 익산의 각 마을이 모두 모여 기세배를 하였습니다. 지금은 마한제가 없어졌는데, 무척 아쉽습니다. 마한제는 익산군이 금마와 합쳐지며 없어졌습니다.

B1 :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구술사진

구룡마을 구술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