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헌내용
교동(校洞․항교골․생기골) : 향교(鄕校)가 있어 생긴 이름.
『익산시사』
구술요지
1) 마을유래담 :
- 함해국 : 감해국이라고도 하며 옛날 백제시대 이전부터 부족국가가 형성되어있었다 함.
- 염주바위 : 함라산의 모양이 스님이 장삼을 입고 손을 벌리는 모양이라 붙여진 이름.
- 육모정 : 좋은 폭포가 있다고 함.
- 어래산성과 오성산성 : 백제시대 전쟁터.
- 서벽정 : 호남 24경중 하나로 이배원의 장자 이집천이 만든 공원.
- 양사청샘 : 향교에 있는 우물로 아주 물이 좋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
- 시루샘 : 시루처럼 구멍이 많아 붙여진 이름.
- 묵정 : 검은 우물로 우물이 깊어서 검어보였기에 붙여진 이름.
- 재곡역 : 용안과 이리 사이에 있는 함라의 역원.
- 갈마 : 재곡역원 근처의 말을 길렀기에 붙여진 이름.
- 분수령 : 함라면사무소 앞이 금강과 섬진강의 분수령.
2) 전설 및 민담 :
- 삼부자 : 조해영, 김완균, 이배원 세 명을 함라의 삼부자라고 함.
- 김완균이 부자가 된 이유 : 김완균의 조부가 거지를 살렸더니 좋은 묫자리를 알려주어 그 곳에 묘지를 쓰니 부자가 되었다고 함.
- 후한 인심 :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들의 인심이 후해 일을 하지 않아도 밥은 얻어먹었지만 미안한 마음에 스스로 웅포에 가서 소금 한 가마니를 짊어다었다고 함.
- 스님 밥그릇 명당 : 삼부자집의 집터들이 스님이 먹는 밥그릇 자리라고 함.
- 청류정 : 현감의 아내가 살았다는 명당.
- 은행나무와 금광 : 금광의 기운을 받은 은행나무 민담.
- 허균 : 허균이 유배생활을 하며 성소부부고와 음식 관련된 책을 지었다고 함.
- 허균과 매창 : 허균과 매창의 사랑 민담.
- 관원쟁이 : 병사들이 전투하면서 후퇴하는 것을 막기 위해 관원들이 지키고 있었던 곳.
- 옥터 : 저수지 가운데 옥이 있어서 죄수들이 탈옥을 하지 못 했다는 민담. 현재 함라파출소 자리.
- 500년된 은행나무 : 은행나무를 훼손한 사람이 흉사를 겪었다는 민담.
- 숭림사의 동종 : 일본인이 수탈함.
- 혈맥끊기 : 재곡과 웅포 사이의 명당의 혈맥을 일본인이 끊었다고 함.
- 공바우와 공기바위 : 공기바위 정기를 받고 태어난 사람의 걸음이 빨랐다는 민담.
3) 민속 :
- 웅포 용왕제 : 옛 전투 시에 희생당한 사람들을 달래기 위한 제사였다고 함.
- 기싸움 : 함라의 기싸움은 교동 수동 행동 사람들이 몸싸움을 통해 화합을 기원함.
- 매고 : 풍물을 치며 집집마다 돌며 악귀를 쫓아냄.
구술채록
● ● ●
A1 : 조상호 (71)-1943년
B1 : 장윤준
B2 : 이순영
● ● ●
B1 : 함라에 대해 전반적으로 옛날엔 어땠는지 이야기좀 해주십시오.
A1 : 지금 함라가 지금 소외된 곳이 되야뻐렸고 그러지만 여기가 한 백년전만 허드라도 여기가 지금 상당히 행정 중심지였고 번화가가 그렇습니다. 그 전에는 함열현 그것이 이조 말엽에는 함열군으로 승격되고 함열군 소재지입니다. 함열읍이라 했죠 여그가. 인자 중요한 곳이었고 또 함열현 함열군이 지금 함라면 웅포면 황등면 성당면 함열읍 이게 5개 읍면이 옛날 함열군이었죠. 말하자면 여그가 군청소재가 있었고 원님이 여서 있었으니까. 여그가 소재지고 상당히 번화가였어. 그리고 여그가 함라가 또 중심지에 있고. 왜 중심지에 있는고니 이 산 넘어가 웅포가 있어요 웅포. 웅포가 우리 구한말 시대 우리 한국의 5대 포구 중에 하나 들어갔다 그래요. 그 만큼 번창한 포굽니다 이게. 웅포가 말하자믄 해창이 있었고. 해창이 뭣인고니 이 뭐든 집산지 물건을 쌓는 창고가 해창인데 거기서 배로 이렇게 운송해서 인천이나 서울로 이렇게 서울 마포 나루로 실어 나르는 해창이 있었고 또 함열현에 그 북쪽에 가면 성당 포구에 가서 또 세곡창이 있었어요 거가. 그래서 호남 이쪽에 말하자믄 용안이랄지 함열이랄지 저 고산 남원 운봉 이짝에 모든 물건들이 이짝으로 실려와서 세 군데 실려와서 배로 이렇게 날르는 그런 역할을 했던 세곡창이 성당포구가 있었고. 또 거 우로 올라가믄 강경은 우리 한국에 3대 포구 중 하나 있었죠. 3대 시장 중 하나가 있었고. 그게 금강 말하자믄 해운 교통수단으로 이용됐고. 긍게 함열현이 발전헌 것은 바로 우리가 산 넘어가 웅포 포구가 있어가지고 포구를 많이 이용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또 많이 와 있었고 그래서 여그가 번창했는데. 인자 그 한일합방이 되고 한일합방이 되고 1914년돈가? 그 몇핸가 호남선이 개통됩니다. 호남선이 개통되는데 그 철로가 강경에서 이 함열 함라를 거쳐서 군산으로 일케 설계가 다 되야 있었어요. 그런데 그걸 못했죠 여그 사람이 반대를 해가지고. 그게 왜 그렇게 강경서 함라를 걸쳐서 임피를 거쳐서 군산까지 철도가 났는고니 군산이 그 때 그 진포에서 말하자믄 군산으로 항로가 개설되면서 모든 물품을 인자 옛날이는 웅포나 성당포구나 강경서 했는데 이제는 큰 기선 군함으로 큰 배로 할라고 보니까 여기가 수심이 얕고 안되니까 인자 군산서 항구를 개설해가지고 모은 집산지 물품을 일본으로 실어나르기 위해서 그 철도를 구설할라고 했는데 여기 분들이 그걸 반대를 했는데 반대를 헌 원인이 인자 여기 분들이 좀 일찍 부자 사람도 많고 그러니까 그분들이 일본도 역도 갔다 오고 그러니까 기차 철마가 달리고 그런 것을 와서 얘기하고 그러니까 이 우리 푸르른 고장에 쉽게 말하자믄 이 조용한 곳에 철로가 다니믄 이게 쓰겠느냐 안되겠다 그렇게 반대했고. 그렇게 반대운동 일어나니까 그 때 함열 그 때 와리라 그래 함열을. 와리 와리에 담옥이라는 일본 사람이 와서 농장을 개설했다고 그려. 담옥이라는 사람이 있었고 여 저 함라에서 함열 가자면 중간에 관농이라는 관농장이 있어 관농장. 그건 일본 사람이 관농이라는 사람이 농장을 개설했고. 이 분들이 생각헐 적으 무슨 생각을 했는고니 이 함라 사람은 그래도 봉건주의 사상에 꽉 쩔어있고 아주 개화가 뭣인지 모르는데 이 철로가 나믄 그 만큼 좋을틴디 여그 사람이 반대하니까 그 어부지리를 얻은 것이지요. 그래서 부자 사람들 움직였습니다. 쉽게 말하자믄 철로를 당신들이 반대를 하는데 당신들 힘으론 안된다. 우리를 통해야 한다 해서 그 사람들이 돈을 많이 받아서 조선 총독부 가서 움직여가지고 철로를 일케 바꿨죠. 바꿔서 와리로써 이렇게 갈 것을 함열서 확 틀어서 지금 익산으로 나간 것이지요. 그래서 역을 함열역으로 일케 옮겼다 그래요. 그래서 그 후로 함열은 와리는 지금 급속도로 발전을 허고 쉽게 말하자믄 여기는 급속도로 퇴화가 됐다. 그것이 불과 100년 전 못되지 한 80년 전 될랑가.
B1 : 훨씬 더 옛날에는 함라가 어땠습니까?
A1 : 제가 알기로는 여그가 마을이 형성 되고 사람이 산 지가 굉장히 오래되더라구요. 마한시대부터 그 전부터 일케 여그가 사람이 살았드라구요. 왜냐면 마한시대 전에 이거 여기가 52개 부족국가가 형성됬드라고요. 에? 그 때 여기가 함해국이란 부족국가가 형성됐는데, 함라니까. 함해국. 함해국이라고도 허고 감해국이라고도 허고. 그 부족국가 형성되고 아마 아마 그 그러니까 굉장히 오래됐죠. 그 후에 백제 땐 여것을 가물아현이라 그랬고 아마 그 고려시대는 함열 또는 함라 이렇게 하다가 이조 시대와가지고선 여그를 함라 함열하고 용안하고 합쳐서 알연현이라고 했다가 또 태종 때 다시 이렇게 함열 현으로 고쳐가지고 어쩌고 내려오다가 이조 말엽은 함열군 이렇게 허다가 지금은 함라면인데. 여가 지금 잘 살다가 이조 말에는 여가 집성촌이 많이 형성이 됐죠. 특히 임천 조씨들은 한 350여년 전에. 임진왜란 후에 여기에 와서 집성촌을 이루었고, 또 김씨랄지 박씨들이 많이 살다가 그렇게 집성촌이 많이 이루어졌었죠 제가 알기로는.
● ● ●
B1 : 삼부자집은 어떻게 부자가 되었습니까?
A1 : 그 아까 삼부자집 얘기를 했는데 그 분들이 부를 형성된 것을 보면 전설적인 얘기 같은 것들이 많이 있드라구요. 전설적인 얘기 말하자믄 이 함열 여가 삼부자 집이 조씨 이씨 김씨 이렇게 이뤘는데 에 조씨를 지금 조해영 가옥이라고 집도 남아 있고 조해영씨 그 4대조부가 조한기씨여. 조 한자 기자 조한기씬디 이 분이 구한 말에 정읍 군수를 졌어요. 긍게 사천군수허고 정읍군수를 허셨어. 그래서 그 집을 정읍집이라고 헙니다. 근디 이 그 조한기씨 이 분이 정읍군수를 허면서 많은 사람들을 구휼을 혔다 그러더라고. 없는 사람을 갖다가 자기 돈으로 구휼을 배풀었다 그러더라구요. 그래서 인심을 굉장히 얻었다고 허드라고요 말하자믄. 근데 그 조한기씨부터 많은 재물이 있어 내려오다가 인자 그 조해영씨때에 조해영씨 그 때에 말하자믄 왜정 때 장사를 말하자믄 농장같은거 또 광산같은 거 사업에 투자를 해서 돈을 많이 모았어요. 많이 모았고. 그 우리가 만석꾼이라고 하면은 저기 우리가 개념이 농사를 지어서 쌀이 만석을 수확허야 만석꾼이라 했는디 인자 그 개념보다도 그 전에 돈이 많으면 만석꾼이라 했다 그려요. 이 분들이 실지 토지에서 소산되는 것은 한 4000석써 5000석 됐다 그려요. 그런데 그 분이 돈이 많고 그러니까 만석이라고 했다 그러드라구요. 그 분이 셋이 있는데 그 조해영씨는 그렇게 농장도 있었고 황등같은디 가서 석산같은 것도 개발도 혔고 무슨 호남방직 그런데 가서 주도 갖고 계시고 어뜨케 왜정 때 평의원 이런데 정계로 진출도 했고 그렇게 해서 많은 부를 축적했고 또 김해균씨 김완균씨 가옥. 지금 거기가 그 집이 호남에서는 우리 전국적으로는 단일 집으로써 가장 큰 규모라 그려. 99칸 집인데 제일 큰 집이고 그 집이 그대로 보존돼 있어. 하나도 유실 안되고. 근디 그 집 6대조 이름은 잘 기억이 안나고 그 분이 여그와서 살면서 그 때는 상당히 고생을 많이 하셨다 그래요. 그래서 인자 마차를 끌었다 그래요. 마차. 말하자믄 그 구루마라 그럴까 마차를. 인제 마부 마부생활을 했는데. 지금 여그서 황등 가다가 보면은 철도거리 밑에 그 집에 산 제실이 있고 선산이 있어요. 그 황등 가보자믄 황등 이쪽으로 가자믄 그 XX랄까 있더라 무슨 회사. 그 밑에 가면 그 집 선산이 있습니다. 제실이 있는데 여기 그 말하자믄 김완균씨 6대조분께서 그 마부생활을 하시면서 그 황등을 갔다 오다가 그 근방에서 말하자믄 지금 선조 제실이 있는 그 근방에서 어떤 거지를 한 분 만났다 그래요. 저녁 때 보니까 이 양반이 씨러지셔서 다 죽을 형편이라던 것이 배가 고팠던지 그랬는지. 그 분을 자기 마차에다가 실고 자기는 마차 마부로 허면 못 살 정돈데 심성이 착하고 남을 일케 잘 돌볼 수 있는 그런 심정이 되얐등가 그렁게 그랬죠. 인자 집에다 모시고 와가지고 그 분을 잘 보살폈다 그래요. 그래서 이 분이 원기를 회복되고 내가 왜 여그와 있느냐 그러니까 사실 얘기를 전부다 해주니까 당신같은 사람은 앞으로 맘씨가 좋으니까 크게 여기서 부를 잇고 살 것이다 허면서 내가 쓰러졌단 자리가 어디냐 함 가보자. 그래서 그 분 모시고 가니까 이 곳에 말하자믄 묘를 당신이 쓰면은 당신 집이 크게 부를 이룰 장소인게 여기에 써라. 인자 여기다가 산소를 써가지고 부를 일었다 그려. 인제 이런게 전설적인 얘긴데 차꼬 그렇게 부가 되고. 말하자믄 김완균씨 증조부께서 운봉 군수를 했죠 운봉 현감을 혔죠. 그 과거를 시험보고 현감도 혀고 또 김완균씨 할아버지는 아주 그 효자였다고 그래요. 효자였다고 그래서 이조 말엽에 정부에서 국가 말하자믄 왕실에서 그 효자 정려각을 내려서 정려각이 있죠. 그 집 옆에 있습니다. 효자각 그런 것도 있고. 또 김완균씨 큰 형님이 김해균씨입니다. 이 분이 아주 유명한 분이죠. 이 분은 남로당 출신이고 박헌영씨 고등학교 동창이라 허드라구요. 박헌영씨 고등학교 동창이고 이 분이 영어를 잘하시죠. 그래가지고 어디 보성전문학교 거그 영어교수로 계시고 이 분이 돈이 많고 그러니까 이 양반이 그렇게 많이 있으면서도 이 사회주의 계통에 있으면서 아마 자산이 아마 좀 남은 자산이 그러니까 있었등개비여. 그래서 사회주의 사상에서 박헌영씨를 많이 돌보고 같이 월북해가지고 박헌영씨는 처형당했는데 이 분은 처형도 안당하고 또 이북에서 뭔 상인가 뭐 대학교수인가 해고 뭐 그런 얘기가 있더라구요. 근데 이 분이 서울서 살은 집이 혜화장이라는 그 있어요. 해화장. 긍게 이화장 혜화장 경고장 쉽게 말하자믄 혜화동에서 크게 그 뭐라 헐까 그 가정집에 정원을 이루고 산다는 것이 전국적으로 이렇게 몇이 안되는데 이 혜화장을 이루고 살았다 허드라구요. 그 만큼 그 김해균씨가 그 남다른 앞을 내다보고 살고 그런 거 같애요. 근데 이 분이 인자 그 그런 사상을 갖고 있으면서도 남다르게 많은 사람들에게 구휼을 배풀고 그런 내용들이 동아일보에 1915년인가 25년인가 몰르지만 거그가 다 그런 기록이 남아 있드라구요.
B1 : 예. 그런 기사를 저도 보았습니다.
A1 : 예 그래서 625때도 다들 부르주아다 혀가꼬 다 그런 사람들 뭡니까 다 끄집어 내고 처형허고 집도 다 때려부시고 물건 다 가지고 난리가 났는데 여기는 그대로 다 지켜줬어요. 그 만큼 많은 사람들에게 배풀었죠. 배풀은 덕이죠 말하자믄. 그래서 여기는 삼부자집이 하나도 다치지 않고 625동란이 넘어갔어요. 긍게 많은 사람들을 배풀은 것이 나타났고. 왜 그런 것이 나타났는고니 지금 우리가 전라도를 보면은 좌도 우도라고 칭했지 않습니까. 우도로는 저짝의 목포랄지 광주 좌도는 남원 순천 여수 근방인디 그 분들이 걸어서 서울을 한양을 갈라 하믄 대개 삼레를 거친다고 삼례. 삼례를 거쳐서 일케 논산으로 혀서 공주로 혀서 서울로 가는데 그렇게 가질 않고 삼례를 거쳐서 반드시 함라 함열을 왔다 그래요. 함열을 오면은 여기서 한 사흘간 묵으면은 편히 잘 잡술수도 있고 갈 적에 노잣돈도 든든히 주니까 여그 함열을 다 거쳐 갔다 그려요. 그렁게 그래서 아마 인심은 함열이라고 아마 그랬던 것 같아요. 그 호남가에도 나오죠. 뭐 뭣은 화순이요 인심은 함열이요 호남가에 나옵니다. 그 유명흔 그 판소리입니다. 임방울 국창이 불렀던 노래인데 인심은 함열이요 그런 거이 나오는데 아마 굉장히 인심이 좋았던 모양이에요. 그 때부터 인심이.
B1 : 그러면 이씨부자들은 어떻게 돈을 벌었습니까?
A1 : 그리고 인자 이씨들 거그도 말하자믄 만석꾼인데 이배원씨라고 그 분이 만석을 이뤘는데 그 분 할아버지가 임피 사셨죠. 근데 경주 이씨라 하더라구요. 경주 이씬데 임피에서 사셨는데. 인자 그 가산이 몰락하고 그랬는데 자기 처갓집이 웅포 어디 상제 어디에 있었는데 몰락하니까 처갓집을 가는 도중에 이 함열을 들려 이 객주집에서 하룻밤을 자는데 자면서 신세타령을 했다 그려요. 내가 이거 살 길이 막막해서 고향을 버리고 처갓집을 들어 간다 하니까 사람들이 거꾸리 스말만 있어도 처가살이 안한다는디 뭐드러 처갓집을 가느냐. 장사를 하믄 먹고 살 길이 있지 않느냐 인자 그렇게 얘기를 허주시더란거여. 인자 그러니까 이 양반이 내가 무슨 장사를 허냐. 가진 것도 없고 그런디 그래서 거기 객주 있는 사람들이 얘기를 허주는디 가장 돈 벌 수 있는 방법은 누룩 장사를 한 번 해봐라. 누룩. 옛날에 술 만들라믄 누룩이 필요 했잖여. 근디 누룩 주 원료가 뭐여 말하자믄 밀같은걸로 만드는 것인데 인자 그런 것이 여기는 없고 저쪽 고산 지방이랄지 완주 지방에 많으니까 그걸 가서 사다가 좀 말여 여기 부잣집 많으니까 거기 팔고 그러면 돈도 벌꺼 아니냐. 그래서 이 양반이 처갓집 가는거 포기허고 여기서 정착하면서 누룩 장사를 했다 그려. 그래서 돈을 많이 벌었어 인자. 근데 이 양반이 상술에 뛰어나고 그래서 야 돈을 벌려고 허면은 곡물 장사 곡식 장사를 해야 돈을 벌지 않겠느냐 해서 바로 이 등 너머가 산 넘어가 웅포 포구가 발달되어 있으니까 거기서 배를 한 두어척을 사가지고 개성이나 평양같은 데 가가지고 이런 보리같은 것 사가지고 쭉 내려오면 돈을 벌고 또 여기서 쌀같은 것 실코 거그가서 해서 곡물장사를 해서 돈을 엄청 벌은 것이죠. 그래서 나중에 이배원씨 집을 나중에 수리하다 보니까 그 창고속에 방쪽에서 항아리속에서 엽전이 엄청나게 나왔단 소리가 일화로도 있고 그래서 돈을 많이 벌고 농토를 장만하고 또 함열 와리 여그다가 농장을 개설허고 인자 이렇게 해서 부를 축적한 분들이여. 그래서 삼부자들이 그렇게 돈을 벌었죠.
● ● ●
B2 : 삼부자집들의 집이 굉장히 크다던데 그 얘기에 대해서 한 번 해주십시오.
A1 : 그래서 이 분들이 인자 돈을 벌고 그러니까 집을 지을려니까. 그래서 젤로 먼저 이배원 그 할아버지가 이석기씨라고 허든가? 그 분이 집을 지었어요. 제가 알기로 1914년인가 17년인가 아마 그 때 집을 지은 거 같애요. 그 집을 사랑채 안채 막 집을 잘 지었어요. 그리고 그 후에 조해영씨 할아버지께서 집을 지었어요. 그 양반은 뭘 들여 지었는고니 대원군 살던 집이 무슨재죠? 낙선재? 그 그 목수를 딜여다가 집을 지었습니다. 조해영씨 가옥을. 엄청 집을 잘 지으신거죠. 집을 지으니까 김완균씨 할아버지께서 또 아흔아홉칸짜리 집을 지었어요. 그 분은 경복궁 그 지은 사람을 다 들여서 집을 집고 담장도 그 안채같은 디는 담장을 화초장이라고 담장을 지었거든 여그다가 이렇게 무늬를 넣고 담쌓는 것이 경복궁 무늬와 비슷하다는데 지금은 그걸 하는 사람이 자격이 없어가지고 이번에 그 집을 복원 시키는데 담장을 엉터리로 해서 문제가 생겼다더라구요. 잘 지니까 함라에서 그래도 젤 오래 사셨던 조해영씨 할아버지께서 나보다 집이 더 잘되얐다고. 나도 집을 더 잘지야것다 하면서 백두산 가서 나무를 구입해다가 지을려고 구입했는디 못 졌어요. 돌아가시고 말하자믄 뭡니까 저게 뭐라 그려 인자 그 해방되니까 못졌죠. 그래서 그 재목을 가지고 숭림사서 갖다가 숭림사 증축했다고 그러드라구요. 그래서 문제는 뭣인고니 지금 조해영씨 집같으면 옛날 열두대문 집이라고 졌는데 지금 본채는 헐려 없어지고 사랑채만 있고 그 신혼방 말하자면 그 터만 있고 옛날 사당이랄지 양옥 사당채 동쪽 다 이런건 나중에 몰락하니까 집들이 다 팔려 나갔고. 인자 그렇게 해서 그런 상태가 있고 한디 이런 집들이 보면은 나는 그려 이게 한옥이라고 볼 수가 없드라고요. 왜냐믄 이게 한옥이라믄 우리가 이조 시대에 왕조 시대에 지은 집이 아니고 왜정 때에 우리 한옥과 일본 말하자믄 접목해서 좀 지은 집이죠 쉽게말해서. 그렇게 지어졌는데 그래도 우리 한국 식으로 많이 지어졌고 김완균씨 같은 집은 아흔아홉칸 지어졌고. 그 때만 하더라도 개념이 우리 서민들은 백칸을 못지었어요. 더 지으면 안되야. 긍게 아흔아흡칸 이상 못졌다 그래요. 그래서 아흔아홉칸 집을 짓고 내려왔죠.
● ● ●
B1 : 그럼 재밌는 일화도 있겠습니다.
A1 : 또 인자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동아일보 취재해보면 봄에 왜정 때 많은 걸인들이 함열 여기를 오면은 삼부자집에서 숙식을 제공허고 또 옷도 해보라고 주고 많이 대접해서 사람들이 왔는데 실제로 그렇게도 했지만은 여기에 사는 사람들은 인제 그 때는 모든 농사 제도가 소작농이고 그러니까 내 농사가 없고 그러니까 맨날 농사 지어서 지주 갖다주고 좀 갖다 먹고 그러면은 먹을 것이들 없잖여. 또 지금처럼 부업도 없고 그러면 할 일이 없어. 쉽게 말하자믄. 그래가꼬 정월 때 보름때쯤 날은 풀리고 그러면은 담장에 쭉 서가지고 할 일이 없고 일용직을 했다고 그려. 여그 이 사람아 여그 할 일 없지? 할 일도 없는데 우리 곰개 가서 소금 한가마니 지고 오세 그랬다 그려. 소금 한가마니 그것도 백 댓근 다섯근 나가는디 상당히 무겁잖여 그걸 짊어지고 이 함라산을 넘어왔다 그려. 쉽게 말하자믄 이게 이백사십메타 고진데. 그건 우리가 넘어갈라고 해도 한시간쯤 걸려요 웅포까지 사키로쯤 되는데. 가서 소금 한가마지 짊어지고 옮니다. 왜그런고니 부잣집가서 빗자루 갖고 얼쩡거려도 밥은 줘 얻어먹어. 인자 부잣집 인심이 좋으니까. 밥은 얻어는 먹지만 미안하단 말여. 날마다 그것도 하루 이틀도 아니고 매일 허느랴. 그러니까 할 일 없으니까 가서 소금 한가마니라도 지어다 주자 이래서. 긍게 이게 뭐라 헐까 어떻게 허믄 우스갯소리겠지만 야 이 사람아 할 일 없는가? 우리 웅포 가 곰개 가서 소금 한가마니 지고 오세 인자 이렇게. 하하.
B1 : 삼부자집이 그만큼 인심이 좋았다는 말이겠습니다.
A1 : 그렇죠 그런 얘기가 있어요. 우리 곰개 가서 소금 한가마지 지고 오세 이런 얘기가 있어요. 이게 어떻게 보면 미담이라 그럴까 어떻게 보면. 인자 그런 것이 있었고요. 제가 알기로는 아마 오십년대까지 육십년대 초까지만 해도 여기 조해영씨 사랑방에서는 유명한 국악인들이 참 많이 왔었어요. 김소희랄지 임방울씨 같은 분들이 여기서 상주하다 싶이 와서 풍악을 즐기고 이랬습니다. 가야금이랄지 판소리랄지 그런 것들 막. 또 판소리같은 것들도 공연도 허고 하다가 육십년대가 넘으니까 그 부잣집들이 쇠퇴해 가니까 그런 것이 없었고. 육십년대만 허더라도 이 함라에서는 회갑잔치를 하면은 반드시 국악인을 불러다가 뭡니까 그 뭐 절헐 때 그거 불러서 허고 인자 그런 것이 있었죠. 그러다가 지금은 아주 그런 것들이 없어졌고. 내가 보니까 어떻게 보면은 그 때는 참 좋았다. 그 때는 인심이 좋았다 그러죠. 이 조그만 고을에 그 만석꾼이라 불리는 부자가 셋이 있었단 것은 우리 남한에서는 없었다 그려. 그 때 이조 말에 해방되가지고 조사를 해보니까 우리 전국적으로 만석꾼이 아흔 세명인가 있었는데 말하자믄 이 함라에서 세 분이 있었다는 게 어떻게 보면 그 여그가 상당히 부촌이 아닌 부촌이었다 이런 생각이 들고. 또 천석꾼이 또 네 분이나 있었고. 그리고 백석꾼 백석꾼이 또 한 이십 분 있어가지고 아주 여기가 풍요로운 고장. 그러니까 사람들이 이렇게 만이 운집했겠죠.
● ● ●
B1 : 그러면 우리 마을이 혹시 풍수지리적으로 좋은 자리가 있었다거나 이런 얘기는 들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A1 : 그것이 재밌는 것이 뭣이고니 이 함라산이 지금 해발 한 이백 사십메타 되는 그런 주산인데 함라산이. 이 함라산에 그 이제 한 팔부 능선 쯤에 염주 바위가 쭉 있습니다. 지금 XX 땜에 안보이는데 그것을 염주바위라 하는데 한 오백미터가 쭉 있어요. 그게 뭣인고니 이 함라선 형국이 스님이 장삼을 입고 손을 벌리고 있는 그런 형국이라 그려. 그리고 이 바위를 스님 염주 형이라 그려 형이. 그리고 스님의 그 식사를 보고 탁발이라고? 주발이라고? 뭐라고 뭐 있잖아. 스님들은 몇 가지 있어. 밥 하나 찬 하나 물 하나 있죠. 대개 그렇게 먹드라고 스님들은 보믄. 근디 그 삼부자집 처가 스님들의 밥그릇 터다라고 그런 얘길 허더라고. 긍게 그런 풍수지리학적으로 얘기하는데 나는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얘기 하는 사람들이 있더라구요 허허. 인자 그런 것이 있고.
● ● ●
B2 : 삼부자집이 60년대 몰락하면서 마을에 무슨 소문이 돌거나 그러진 않으셨습니까?
A1 : 저그 이 분들이 망헌 이유가 왜그런고니 토지개혁 때문에 그랬죠. 따지자면 자기들이 토지들을 가지고 있다가 그 625 후인가 전인가 토지개혁이 있어가지고 전부다 그 토지들을 소작인에 주고 소작인들에게는 그 뭡니까 연등상환인가 뭘 그렇게 해서 하게 하고 정부에서 하고 하는 제도가 있었어. 그 때 이 분들이 다들 소작 내주고 자기 앞으로 갖고 있는 그런 농토는 없으니까 인자 몰락 할 수 밖에 없는 것이고. 인자 그 중에서도 조해영씨 같은 분들은 그러든가 않등가 자기 앞으로 토지를 많이 갖고 있었어요. 그래서 젤로 괜찮았고 다른 분들은 고생을 많이 했죠 그런대로.
● ● ●
B1 : 함라의 특별한 지명에 대해서는 무엇이 있는지 알고 계십니까?
A1 : 제가 인자 알기로는 여기에서 그 전에 대비가 출생했죠. 대비. 긍게 헌종 이조 헌종이면 이십 사대여? 몇 대여 그게? 거 헌종비가 여기서 탄생혔는데 여기에 그 이조 말에 말하자믄 홍기섭이라는 분이 여그 와 현감으로 와 있었어. 홍기섭이라는 분이. 그 집 홍기섭의 손녀 딸이 인물도 출중허고 역술에 아주 능허고 그랬다 그려. 근데 그 때는 그 광산김씨들이 정권을 잡아가지고 모든 것들이 광산김씨들의 말하자면 왕권을 외척 하다시피 했는데 거 헌종비가 말하자믄 그 광산김씨 하던 그 분이 칠년만에 세상을 뜨니까 인자 령을 내려가지고 전국적으로 말하자믄 왕비를 새로 뽑는데 응당히 광산김씨가 들어가가지고 세를 휘둘러야 하는데 이 함열에 있는 홍기섭 손녀 딸이 뽑혔다 하드라고요. 긍게 그만큼 아마 서울까지도 소문이 났던 개빈데. 이 분이 인자 대비로 뽑혔는데 근데 불행하게도 아이들이 하나도 없었어요 이 분이. 그래서 아마 나중에 대비로 추종되고 그 함열 여기에 그 어사가 출두헐 때는 이리 손도 대지 못했다 그려. 대비 있는 곳이라고 탄생한 곳이라고 그려서. 그런 특전도 누렸고. 여기서 저짝으로 7키로나 8키로 떨어진 곳에 가면은 서수가 나오죠. 함라하고 경계 군산 경계. 거그 가믄 그 때 원님이었던 홍기섭씨 물망비가 있습니다. 거가 있고 거가 마포란 디가 있는데 마포가 말하자믄 섬진강 하륜데 그 물이 비가오면 넘치믄 다리를 건널수가 없고 그렁게 홍기섭 원님께서 마포교를 증수를 해가지고 그 증수비가 현재 거기에 있습니다. 있고 그 땅은 지금 지형상으로는 옥구군인데 지금 군산시에 편입되가지고 군산시에서 그 홍기섭 원님 물망비허고 마포증수비인가 그 비가 있는데 그걸로 인해서 그 둘을 거기다가 뭐 역사적 동산을 꾸미고 그러드라구요. 그런 것이 있고. 인자 그 분이 아마 좀 대단하지 않앴나 그런 것이 있고. 그 함열 현감이 살던 디가 동원 아닙니까 동원. 동원인디 그 말하자믄 부인 살던 곳 내아라고 하죠. 내아채가 함라산에 올라가다 보믄 육모정이란 폭포가 있습니다. 육모. 육모정. 육각형 모정 정자에 폭포가 있는데 거가에 내아채가 있었다 그래요. 근디 거가 말하자믄 폭포가 아주 큰 폭포는 아니지만은 한 60년대만 하더라도 물이 참 맑게 많이 내려왔고 모든 사람들이 여름에는 거가서 목욕도 하고 아주 경관이 수려했었어요. 근데 이조 말엽에 쉽게 말하자믄 현감이 살았을 때는 아무나 들어가들 못했는디 말하자믄 우리가 다 합방이 되고 난 뒤부터는 민간인이 들어갈 수 있게 되고 그러다가 청류정을 청류정. 활을 쏘는 장소를 만들어가지고 이렇게 활도 쓰고 그랬다 그려 이제 흔적만 남아 있지 그려. 근데 이제 그 우게 가면은 금광이 있었슴다. 금을 캐는 광 금광. 금광이 있는데 이 앞동네가 향동입니다. 향동. 은행나무 향자고 마을동자 향동인데 거기 가면은 지금도 은행나무가 한 사오백년 된 수령짜리가 두 개가 있어요. 두 개가 있는데 그 짝을 향해서 지금도 이파리 나오면 노란 빛만 있으요. 한쪽에. 그것이 그 금광에서 금빛이 받아서 그런 영향이 되지 않았나 해가지고 많은 사람들이 거서 인자 왜정때부터 금을 캤는데 뭐 금을 많이 캤다 그래요. 그리고 저 금광 굴도 남아 있고 또 이 오십년대 육십년대만 하더라도 금광을 채굴해가지고 금방아를 쪘습니다. 금방아. 그 금광석을 이 발동기로 돌려서 그걸 가루로 만들여. 말하자믄 이렇게 가루를 만들어가지고 그걸 물로 씻습니다. 냇갈물로 씻지요. 가만히 물에다가 씻으면 이제 꾸정물로 해서 모든 물은 내려가고 금가루는 이 가마니에 늘어 붙죠. 그래서 금을 채취한 그 금방아가 한 육십년대 말까지는 있었으요. 금방아를 채취한 것이. 그런 것이 좀 있었고. 뭐 특이하다면 그런 것이 있었고. 그 다음에는 제가 알기에는 조금 더 올라가보면은 이조 광해군 때에 여기 허균이라는 사람이 한 삼년 간 유배생활을 했어요. 삼년 간 유배생활을 하면서 성소부부고같은 이런 책을 썼고. 육십 사권이라고 했는데 거그 보면 동음 뭐 음식에 관한 것도 썼고. 그 때 여그 있으면서 부관아에 가면 매창이라고 하든가? 그 기생이 있으요. 그래가꼬 허균허고 매창하고 아주 재미난 로맨스가 있었죠. 네? 허균이가 함열서 말하자믄 유배생활 하면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근데 거기 가보면은 지금 매창의 그 기념비도 있고 시비도 있고 아마 그렇다고. 그래서 거기 가보는디 여기 함열서는 허균이 한 삼년간 살어 있으면서 성소부부고라는 책도 썼고 그랬는데 그분이 어디 살은 흔적도 없고. 그래서 내가 이리시장님 보고 몇 번 그런 얘기도 했는데 여그다 그 허균의 그 집터 복원 함 했으면 좋겠다 했더니 관광과에서 그런 얘길 허도 안혀. 그런 것이 있어요 내가 보믄. 그런 것이 있고 또 함라산 서쪽으로 가면 소방산이라고 있어요 소방산. 거기 가면 옛날에 봉화터가 있습니다. 알죠? 봉화터 있는거. 봉화터가 있어요. 군산 성산면서 봉화를 받아가지고 불을 피워 용안으로 하는데가 거가 있지요. 그런 것이 있고.
● ● ●
B1 : 함라산성은 어디에 있습니까?
A1 : 함라산성은 인자 함라산성은 지금 거그가 흔적이 다 없어졌는데 함라산 그 말하자면 정상으로 쭉 이기 있었다 그려요. 근데 흔적은 없어졌어.
B1 : 그럼 그 함라산성이 옛날 백제 이전 시대의 유물 같은 것일까요?
A1 : 함해국의 흔적은 여그가 그 여그서 쪼끔 가면은 와우에 성림부락 있는데 성림동 있는데 그게 아마 함해국의 옛날에 수도가 아니했지 않는가 그런 생각도 들어요. 성림 거기 있었고. 그래서 좀 조금 서쪽으로 한 사킬로 좀 가면 어래산성이 있죠. 어래산성. 어래산성이 있는데 그게 아마 그 백제시대부터 그런 산성이 있었던 거 같아요. 왜냐하면 그 때 어래산성 때 소정방이가 거기 와서 있었단 얘기도 있고 군산 오성산성에서 기거해가꼬 뭐 있어가지고 여그 와서 진을 치고 부여로 들어갔다는 얘기도 있고 그 일례로 거그가면 거 부여 백제시대 고분들이 남아 있고. 어래산성 그 넘어가면 관원정이 관원쟁이가 있어요 관원리. 또 서수면에 가면 장군리가 있고 무장리가 있고 그랬는데 인제 지명이 왜 그런고니 그 군사들이 싸우다가 후퇴를 못허게 관원들이 지키고 있다고 해서 관원리라는 그런 얘기가 있더라구요. 왜냐믄 이 전쟁이 일어나믄 막 돌격하면 그 뒤에 헌병들이 말하자믄 후퇴 못하게 막고 지키고 있어요. 그와 같이 관원들이 지켜서 있다고 해서 관원정이 관원쟁이가 있고. 또 서수면 가면 무장리. 거기서 무장을 했다든지 장수들이 기거했다고 장군리 그런 걸 보면은 아마 여가 저 진포대첩이 쉽게 말해서 웅포 근방에서 이루어지지 않앴느냐 그런 얘기가 되고. 지금 웅포가면 60년대 말까지만 해더라도 용왕제가 있었어요. 용왕제가 있는데 용왕제라는 게 대개 보면 어선이 출허헐적에 무사안일 기원해서 제사를 지내는 것인데 거기는 그런 개념이 아니라 진포대첩 헐 적에 그 많은 사람들이 희생헌 그 사람들 영혼을 달래주는 그런것이였다 그려. 어떻게 보면 진포대첩이라는 것이 여기서 일어졌다는 것이 확신이 많이 간다고 허드라고. 근디 지금 서울 사람들은 진포가 저기 서천이라고 하는데 이런면에서는 좀 뭐 학자들이랄지 이런 분들이 좀 연구논문이라도 발표해서 이런것이라도 확실히 발표해주었으면 좋지 않겠냐 이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 ● ●
B1 : 서벽정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A1 : 서벽정은 뭣인고니 이배원씨 장자가 이집천씨라는 분이 있어요. 이집천. 이 분 큰 아들이 이화영씨라고 이 전에 익산 시장도 완주 군수도 허고 그 분인데 이집천씨가 화당 숭림사 가면 현판을 그 양반이 썼습니다. 그 양반 현판들이 많이 남아 있어요. 저 내가 보면 황등 XX정도 그 양반이 썼다 하던가. 뭐 있고 저기 아마 있어요. 뭐 호남에 글씨 잘쓰는 분인디 그 분이 그 서벽정이라는 산정 말하자믄 그 공원을 이루었죠. 그서 그 제가 알기로는 아마 육십년대 까지만 해도 서벽정이 그대로 보관이 되어 있었어요. 서벽정은 말하자믄 공원. 이집천씨의 공원인디 호남 24경이라고 이렇게 호남에서는 이렇게 절경으로 잘 꾸며놓은 산정입니다. 그래가꼬 그 집을 아주 뭐라 할까 참 그 잘 지었었어요. 그 때의 그 유리를 오색유리를 썼고 내가보면. 그 집 밑에다는 온실도 만들어놓고 아주 정자도 많이 만들어 놓고 조경같은 것은 섬에서 돌을 갖다가 정리를 허고 이런 그 귀한 꽃나무도 많이 심어놓고 그랬어요. 하여튼 참 좋았어요. 인근에서 초등학교에서 많이 소풍도 오고 그랬죠. 아니 그런 참 했는데 이 양반이 그 뜻을 다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시고는 그 집 지금은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췄네요. 터만 남아 있어요. 그런거 보면 아쉽고. 그게 참 잘 지어진 것인디. 지금 남아 있는 것은 사정이 하나 남아 있죠. 옛날에 활 쏘던 장소 사정인데 이것도 개인지로 넘어가서 개인이 지금 산으로 쓰고 있고.
● ● ●
B2 : 우리 마을에 우물은 많이 있었습니까?
A1 : 여그가 그렇게 우물이 좋든 안했어요. 물은 좋든 안했고 좀 어뜨케 보면 요 함라가 물이 좋은 디가 없다 그런디 이 교동에 가면은 양사청 우물이 있었어요. 양사청섐이라고 있는데 양사청 우물이라고 있는데 교동에 가면 교동에는 향교가 있어서 교동이라고 하지 않아요? 인자 그 거기가면은 공자님 그 위패로 해서 선인들 98선인을 모신 그 위패를 모신 대성전이 있고 그 옆에 가면 유생들이 숙식허는 난신재가 있고 뭐뭐 또 교직사가 있고 또 앞에 나오면 대성전 명륜당 위생들이 말하자믄 강의를 하는 명륜당이 있고 동쪽에는 동재 서쪽에는 서재. 유생들이 말하자믄 거기서 공부를 인자 그런게 있는데. 거기에 그 양사청이라는 것이 있었드라구요. 양사청이 뭐인고니 지금으로 말하자면 감찰청인데 감사. 헌병이라고 할까 경찰이라고 할까 잘못허는 사람들을 잡아다 다스리는 것을 양사청이라고 그래. 향교 옆에 지어졌던 게 있더라고. 그렁게 향교에서 유생들이 이 곳에서 잘 못한 사람들을 잡아다가 다스렸는지 그런지 그런데 그 앞에 그 사람들이 쓰던 우물이 있었어요. 양사청 우물이라고. 그 우물이 참 좋았습니다. 한 60년대 까지만 해도 그 우물이 있었고 그 후에는 인자 집집마다 작두샴이다 뭐다 헌다든가 지금 상수도 들어와서 흔적도 없어졌지만 아주 좋은 샴이 있었고. 또 여기 안정이라고 허믄 샴이 좋다고 해서 안정인데 편안할 안자 샘정자 해서 물이 좋아서 안정이라는 그런 것이 있고. 근디 그 삼부자집 가면 우물 터는 많이 있어요. 우물은 있는디 좋은 우물은 아닌 것 같애.
● ● ●
B1 : 관아가 있었으면 옥도 있겠습니다. 옥에 관한 이야기에 대해서 아시는 게 있습니까?
A1 : 옥터는 지금 함라 파출소 자리가 옥이 있었다 그래요. 거기에 옥터가 있었는데 인자 그 저희 아버지 때죠. 제가 어릴 때 보믄 아버지 때를 얘기를 하시더라고. 그 옥을 헐은 얘기. 그 옥을. 그 연못 가운데 저수지 가운데 옥이 있어가지고 죄인들 탈출 못허게 하고 그런 얘기가 있었고. 그러면서 그 분들이 그려. 그 옥을 털고 헐고 할 적이 말하자믄 가보니까 옥 속에. 그 양반들이 그려. 행여나 잘있거라 이런 글씨도 써놓고 그랬다고. 여기서 함열에서 옥에서 죄수 가둬만 놨지 판결권은 여기는 없었어요. 현감은 있었는데 부사는 없었거든. 부사는 여산이여. 여산에 부사가 있었고 모든 죄수들은 여산에 보내면 여산서 사형을 시킨다던지 여산 부사소관이고 함열서 현감은 여산으로 이송시켰다 그려요. 말하자믄 그게 있었고. 그 주변으로 갖다가 옥하리라고 동네가 있었어. 그래서 우리 어렸을 때만 하더라도 옥하리 옥하리. 근데 지금은 옥하리라고 하믄 몰라. 모르는 사람 많지 뭐. 인자 그런 것이 있었고.
● ● ●
B1 : 또 특이한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A1 : 또 여기는 인자 노소란 것이 있었지. 노소. 노인네들이 모여서 인제 여생을 보내는 보내는 노소가 있는디 제가 알기로 한 350년 쯤 될 거 같애요. 노소가 창립 된지. 근디 그 때부터 지금 이한수 시장까지 모든 분들이 근데 그 때는 함열면 현감이니까. 나중에 익산 군수랄지 이런 분들이 꼭 노소를 찾아와서 비망록에다가 말하자믄 자기 이름을 쓰고 싸인 한 것이 지금까지 보관이 돼 있어요. 아마 그것은 상당히 희귀한 일이지 않은가 그런 생각이 들어요. 노소에는 그리고 향악이 있어가지고 뭐라고 이 물론 관아에서 하겠지만 여기 자체에서 잘잘못을 가려서 잘하는 사람들 표창도 허고 못하는 사람들 벌징도 허고 그랬다고 그려. 그래서 특이헐 것은 윽강법이라고 있어. 윽강법. 윽강법이 있어가지고 대개 정월달. 정월 아마 초 열여섯날 쯤 되면은 노소 말하자믄 함열 현감이 노소의 승인을 얻어가지고 사원들 활 쓰는 사람들을 동원시켜가지고 불량배들을 다 잡았다 그려요. 초법적으로. 잡아서 죄를 물었다 하는데 대개 어떤 사연이고니 상하를 몰르는 사람. 쉽게 말해서 어른 아래를 몰라보는 사람. 또 게으른 사람. 게으른 놈. 불효허는 놈. 이 세 가지 죄목을 가진 사람은 여하를 막론하고 잡아다가 저 혼을 냈다 그래. 그래서 우리 지금 했던 노소가 잘 몰르는디 우리 때만 하더라도 애들이 잘못되고 까불면은 이놈의 자식 노소 가서 벌좀 받아야지 않겠느냐 인자 그렇게 해서. 여그가 다른 곳에 비해서는 좀 더 뭐라할까 상하의 질서 선후배의 질서가 잘 되 있었고 또 저 사람들이 조금 뭐라할까 온순하다 할까 부모에게 불효헌 사람이 적었다고 그런 것이 특이하다 헐까. 인자 그런 것이 있었어. 그 실례로는 그 원님 아들이 한 분이 아주 망나니가 있었다 그래. 긍게 인자 자기 아버지가 원님이고 그러니까 막 다니니까 못된 짓을 다 한 모냥이야 여하튼간. 지금 말하자면 아가씨들한테도 그러고 막 못된짓 하니까 노소에 잡아다가 그 원님 아들을 거세를 시켜버렸어. 예? 그러니까 초법적 아닙니까. 어마어마한 일이지 이게. 그런 초법적인 그런 것을 갖고 있던 디가 노소. 윽강법을 행했다 그래. 그러니까 어떻게 보믄 관아에서 못헌 일을 그 노소에서 말하자믄 질서를 찾고 그랬다고 하는 것 같더라고. 노소가 그런 것이 있었어.
● ● ●
B2 : 시루샘에 대해서 들어보신 적 있으십니까?
A1 : 시루샘이 아마 그것이 아마 그 미어지고 없어졌을거여. 근데 아마 그 우물이 상당히 컸습니다. 근디 물이 참 잘나고 근데 거기서 주로 인자 많은 아낙네들이 와서 빨래도 허고 그러는디 그 밑이가 시루처럼 구녕이 많고 물이 잘 솟는다 해서 시루샘이라 했는디 물이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참 많이 솟아올르고 그래서 그 물로 빨래도 허고 그랬었어. 그랬고. 또 동국여지승람인가 보면은 함열에 묵정이 있었다 그러거든요. 묵정. 묵이란 것은 검잖여 그래서 검은 샘이라는 묵정이 있었다는데 그 샘의 깊이가 상당히 깊어가지고 물이 마르지 않고 또 가물 때는 거기서 기우제를 지내면 비가 오는 그런 묵정이 있었다 그려. 지금은 산 속에 있는데 인자 나무가 우거져가지고 찾을 길도 없드라구요. 인자 그런 묵정같은 것이 있었고. 그런 것이 있어요.
● ● ●
B2 : 우리 마을은 축제가 뭐가 있었습니까?
A1 : 여기는 그 마을 축제가 여기는 아주 50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크-게 헌 행사가 있었습니다. 기싸움이라고. 아주 유명헌 것이 있었어요. 지금 금마에서도 허고 있고 이거 원래 시조가 함라여. 예. 여기서 헐 때는 장있었어. 장이 있었어. 왜냐믄 사람이 많이 모여드니까 임시 장이 설 정도로 이렇게 사람들이 많이 모여. 김제까지 김제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기싸움을 구경허러 많이 왔다 그려요. 이 제가 중학교 댕길 때 오십년대까지만 허더라도 그런 행사를 했었어요. 어떻게 하는고니 여기는 풍습이 슷달 그믐달이면 매고라는 것이 있어요. 매고. 매고라고 풍물을 치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그 악귀들을 다 쫓아냅니다. 슷달 그믐날. 인자 풍물을 앞세우고 아이들은 캄캄하니까 슷달 그믐달 캄캄하니까 대나무 빗자루다 불을 붙이고 이렇게 밝게 댕기면서 집집마다 댕기면서 제일 첫 번에 가서 우물에 가서 그 저 말하자면 귀신을 보내고 또 부엌에 가서 잡귀신을 다 보내고 또 측간 변소에 가서 그것을 다 혀. 집집마다. 그렇게 혀고 인자 그 슷달 그믐날 보내죠. 긍게 그 동네에서 매고분이 오야 금년에 잘못된 것을 잘못된 것을 내 쫓고 인제 새맞이를 한다는 그런 풍습이 있어가지고 또 잘 대접들 해주죠. 섣달 그믐달 다 대접을 허고 설날을 맞이 하면은 초삿날부터 초삿날 대개 보면 떡들을 해가지고 말하자면 고사를 많이 지내요 그 전에는. 그런 풍습들이 많이 있었어요. 그러면 인자 매고 치는 분들이 그 때는 동네 말하자믄 농기가 있습니다. 농기를 앞세우고 집집마다 다 돌아다녀. 이제 새맞이를 했으니까 또 좋은 일이 들어오라고 풍물을 치고 댕기면은 그게 고마워서 그 집에서 인사 술도 대접해주겠지만 쌀을 한 말을 준다든지 에? 뭣을 좀 준다던지 그것을 모아가지고 정월 열나흘날 깃고사를 지냅니다. 기고사. 말하자믄 농기 고사를 지내요. 농기고사를 지내요. 인제 그걸 보고 깃고사라 그러는데. 그러면은 깃고사를 놓고 말하자믄 제사 차려놓고 동네에서 제일 오래허신 장수허신 그런 분이 그걸 보고 뭐라 그려? 술 따르고 절하는 사람 보고. 제주라 하나? 그 분이 제주가 되야가지고 소원을 빌어요. 소원을. 우리 동네에 뭐 무병장수라하든지 노인들 빨리 죽고 어린애들은 뭐 장수라하라던지 그런 소원을 그 소원을 빌면은 그 옆에서 나도 좀 내 소원도 같이 들어주쇼 하고 그 양반한테 부탁을 하지. 그런 우리 딸 시집가게 해둘라든지 우리 아들 취직을 해야한다든지 그런 소원을 빌면서 기고사를 보내죠. 말하자면 정월 열나흘날. 아주 그런 풍습이 있었어요. 아주 그게 엄청나게 큰 풍습이었어요. 그리고 인자 오십년 대 까지만 하더라도 육이오 지난 지 얼마 안되니까 우리 토속신앙이 아주 많이 있었지요. 많이 있어가지고 정월 열나흘날적에 보면은 달이나 큰 그 고목나무 밑에나 또는 이런 큰 돌 밑에가 고사를 지내는 사람이 참으로 많이 있었습니다. 이 떡을 시루해다 놓고 촛불 켜 놓고 무슨 무당이랄지 당골네 있는 사람이 소원을 빌어 주는 그런 것들이 참 많이 있었어요. 많이 있었는디 젊은 사람들이 떡 시루를 이렇게 엎어서 갖다 자기들이 먹는다든지 떡을 엎으로 댕긴다는 사람도 있고 그런 재미도 있고 또 젊은 애들은 정월 열날 아침에 반드시 쥐불놀이를 했어요. 쥐불놀이. 그것을 쥐불놀이를 허기 전에는 자기 집에서 모든 자질구레한 것들을 청소를 해서 불을 놓고 바깥에 나가서 이렇게 논두렁 밭두렁 태우는 그런 풍습이 있었어요. 그런게 오십년 전까지 잘 이어졌는데 지금은 누가 하덜 안혀. 그리고 인자 정월 보름날이 되죠. 되면 이제 그 기고사를 지낸 그 기를 들고 동네에서 나옵니다. 나올 적에 좀 여유가 있고 풍년이 들었으면 애들을 무등을 태우죠. 남자 여자 옷을 잘 입고 무등을 태우고 춤을 추면서 풍물을 이렇게 치고 나오는 그 풍물이 있어요. 꽃나무 풍장이라고 하는데. 꽃나무 풍장을 치면서 행진해서 길을 이렇게 나옵니다. 길을 이렇게 나와요. 우리 교동 가면 인자 있어요. 나오면 거가 다리가 있어요. 다리가 인자 세낫갈다리라 해가지고 다리는 하난데 길은 세가지로 가는 길이 있어요. 거기를 세낫갈 다리라 그래 거기를. 그럼 우리 교동에서 기를 들고 나오고 수동에서 기를 들고 나오고 안정에서 농기를 들고 나오죠. 그럼 농기가 세 개 합쳐지지 않습니까. 그럼 동네 분들이 다 총출동 하는거여. 그냥 기가 섯으면은 인자 거기서 풍장을 치고 그러면은 기세배가 이루어 지는데 인자 그 농기에다가 그 농자지천하대본이라고 이렇게 농기에다가 쓰는데 수동만 여따가 큰 본기에다가 써요. 수동만 농자지대본이라고. 왜 수동은 싯골이라고도 허고 숫골이라고도 허고 가장 으른 동네다 해서 숫골. 쉽게 말해서 어른이 사는 동네다. 또 노소. 노소가 있는 데가 숫골이다. 그래서 우리 기도 세배를 받아야 한다. 세배를 해라 그런 식으로. 우리 교동은 뭡니까? 우리는 공자맹자를 모시고 있고 98성현을 모시고 있는데 우리가 세를 받아야지 왜 세를 하냐. 인자 그런 다툼이 나오죠. 그래서 서로 기가 있으면은 기를 자빠뜨릴라 하고 그런 과정에서 뭐냐 몸싸움이 일어나죠. 그걸 기싸움이 일어나는데 그게 참 장관이죠 그게. 그 때 풍물이 또 그 기싸움에 닿게거름 막 때려 부실 때 풍물을 치는거여 막. 그럼 막 한판 잘혀. 그러다 어떻게 보면 기가 찢어질 수도 있고 뿌러질 수도 있고 그려. 그래가꼬 또 화합해서 노는 것이 기싸움이 농기싸움 기세배인데. 1955년인가 6년인가 인자 이걸 안흐니까 전주방송국에서 취재가 왔드라고요. 나와서 그 때 그 때만 하더라도 풍물을 익한 사람이 있었어요. 그래서 풍믈을 다 녹음해 가고. 그래서 그 때 516혁명 일어나고 전국민속 경연대회가 있어가지고 이 농기 출전해가지고 두 번인가 상받고 그랬죠.
● ● ●
B1 : 함라에 풍수지리적으로 못된 짓을 하거나, 아니면 혈이 끊겨서 안좋은 일이 생겼다거나 하는 일이 있었습니까?
A1 : 인자 그것보다도 여그서 제가 알기로 60년대 촌대 여기 향교에 한 500년 된 은행나무가 있었습니다. 큰 은행나무가 있었죠. 엄청 큰 은행나무요 그게. 아마 으른들이 팔로 한 여덟 개 아홉 개 해야 둘레가 되는 큰 은행나무가 있었는데 지상으로부터 한 20미터? 거기서 두 가지가 나왔었죠. 이 두 가지가 나온 그 가운데가 오래되가지고 썩어가지고 말하자믄 다른 작물이 났았어. 말하자믄 탱자도 열고. 근데 거기에 벌이 집을 지었어. 벌이 집을 지니까 중학교 댕기는 애들이 그 벌집을 태운다고 불을 붙여서 벌집을 태웠어. 태웠는데 이 놈의 불이 안꺼지네 인자. 쉽게 말해서 은행 나무가 속에서 썩은 것이 타는 거여 인자. 계속 타는 거여. 이게 꺼져야지. 애들은 겁나 도망 가뻐리고 이 함라 의용소방대가 출동해가지고 그 때는 그 뻠쁘가 그 눌르는 걸 해가지고 소방대가 물을 쏴도 거까지 못미치니까 사다리로 해가지고 거기다 껐어 인자. 그런디 안에 불나서 불을 끄는디 하루 정도 걸렸을 거야. 아침에서 오후 저녁 때나 끝났으니까. 그래서 그 은행나무가 다 탔다 탔응게 바람 불면 쓰러지면은 그 주위가 그 향교 부서지고 집 부서지니까 안되겠다. 그래서 군에서 벼라하는 철수 명령을 내렸죠. 근데 그 큰나무를 어떻게 벼. 벨 수가 없지. 그래서 허니까 그래도 60년 대 배고플 땐데 아주 나무를 잘 베는 사람이 나타나드라고. 근데 내가 인자 그 때 고등학교 졸업허고 근무헐 땐데 내가 보니까 참말로 나무를 잘 베드라고. 저- 꼭대기서 올라가서부터 차-근차근 나무를 이렇게 베서 떨어치더라고. 올라가가꼬 조금씩 조금씩 하나하나 베서 내려왔어. 그래서 삼일쯤 돼서 이제 큰- 원둥만 남았었어요. 그러다가 오후 세시 쯤 어이 내려와서 좀 샛거리좀 먹으라니까 올려줘라고 해서 밧줄로 올려 줬어요 이렇게. 60년 대 샛거리 하면 뭐 찐빵이나 먹고 물 한그릇 마시고 앉았다가 나무를 비거든. 비기 전에 이 사람이 항상 나무를 비면 꼭대기 갖다가 끌어서 잡아댕기면 끊어지는데 그 양반이 중간에 이걸 맸다고. 중간이다가. 아니 꼭대기에 매랑게 아니 여기도 괜찮어 하면서 중간에 매가지고 밑에를 비고 잡어댕깅게 잡아댕기니까 이게 훽 돌았어. 훽 돌아서 이 사람을 쳤어. 그래서 이 사람이 뺑뺑 툭 떨어져 죽어버렸어. 그래서 큰 나무를 동토 맞아서 죽었다고 굉장했어. 그 큰 나무를 베는 것이 아닌디 은행나무 귀신이 죽였다고. 60년 대 뭐랄까 얘깃거리가 되고 그래서 우리 동네 어디다가 그 시신을 뭡니까 그 놓아두고 그 어디에 진안서 어딘가 부인이 와서 상을 치루는데 그랬어요. 은행나무를 비어서 죽었다고. 내가 보믄 그것이 아닌데 허허. 그렇게 그런 얘기가 있었어요. 은행나무에서 죽었다 그런 얘기가 있었다.
● ● ●
A1 : 그리고 향교에 대해서 약간 얘기를 더 하자면 그 향교 우리나라에 각 고을마다 하나씩 있으니까 한 360개가 있던 향교 아닙니까. 고을마다 특징은 다 있고. 또 이조시대에는 이게 학교니까 동네 서재에서 쉽게 유학을 해서 시험을 보고 젤 첫 번에 초시를 보믄 그 뭐라 그려 그 박초시 그런 사람들이 성균관에 봐서 말하자믄 공부를 해서 급제를 하잖여. 여기 향교는 영소절(?)이란 것이 있어가지고 이조시대 그 남궁? 이름이 잘. 아무튼 그 분이 중국을 가가지고 중국 황제로부터 공자님의 영정을 이렇게 하사를 받았어요. 아주 그게 국보급인데. 국보만이 아녀 어마어마한 것이지 이게. 아주 고귀한 그걸 가지고 와가지고 있다가 누군가 그 사람이 상소를 혀가지고 숙종이 허락을 받아서 거기다가 모셔놨거든. 근데 오십년대까지 해도 있었어요 그게. 에? 근데 얼매나 좋은 것인디. 그게 얼맨가 언제 없어져버렸어. 참 그게 어떻게 안타까운가. 그리고 향교에서 지금 제사를 일년에 두 번 지내거든요. 봄 대제 가을 추제 그건 인자 공자님하고 98성현도 있고 이제 한국 사람도 중국 사람도 있는데 대개 이 향교서 제사지낼 때는 생걸로 지내요. 익은 것이 아니라 전부 생걸로. 인자 소도 잡아서 포를 떠서 말려서 그런다던가 뭐 생걸로 지내는데 모든 제기들이 놋으로 되가지고 그래가꼬 거기다가 염소같은 통을 만들어서 거다가 술을 쒀서 국자로 떠서 한다던가 그런 제기도 다 도둑맞고 없드라고. 참 어떻게 관리를 허는가 안타깝고. 인자 그런 문제가 있더라고.
● ● ●
B1 : 숭림사에 대해서도 혹시 알고 계신 게 있으십니까?
A1 : 숭림사는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숭림사는 저 기록들이 여러 가지고 있고 여러 가지 얘기가 있는데 어떤 사람은 신라시대부터 있던 절이라고 허고 어떤 사람들인 숭림사를 증수헐 때 보니까 고려 충공왕 때 증축했다는 그런 것이 나왔다 그려. 근데 이 숭림사가 지금 대한예수 아니 대한 불교 조계종으로 알고 있는데 이 사 절은 반드시 대웅전이 있죠. 대웅전이 없으믄 암자죠. 숭림사는 대웅전이 없고 보광전이라고 있어요. 그리고 영소전이니 난소전 이런 것이 있는데 그 옆에서 보면 그 터가 있는데 그게 옛날에 아마 숭림사 대웅전 터라고 얘기 하는 사람도 있고 임진왜란에 소실됐다는 얘기도 있고 인자 여러 가지 얘기가 있드라고. 근디 많이 후에 여러 사람들이 증축을 해서 지금은 절을 잘 가꿔놨죠 근디 숭림사에 아주 종이 좋은 종이 있었다 그려. 동종이 있었다 그려. 그래서 저녁에 종을 치면은 은은하게 함라까지 느껴졌다 그려. 그럼 그 종소리가 참 숙연했어. 밥 헐 때나 어째나 사람들이 종소리 들으면서 자기를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고. 참 그 숭림모종이 함라8경에 들어간대 숭림 모종이. 그렇게 위대한 종인데 그 종을 일본 사람들이 수탈해갔어요. 대동아전쟁때. 긍게 그런 내역을 사람들이 몰라. 그래가꼬 내가 웅포 사람들하고도 그런 얘기 한 번 했어요. 이 숭림사에 그런 내력이 있으니까 숭림사 그런 현판 하나 붙이면 오는 사람이 볼 것인디 왜 그런거 안해놓냐고. 그랬는디 안해놨드라고. 숭림 모종은 그런 얘기가 있죠.
● ● ●
B1 : 재곡역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A1 : 이 함라가 말하자믄 여기 그 재곡역이 향동에서 말을 갈아타는디가 향동이었거든요. 그래가꼬 인자 관아에서 이 재곡에다가 역사를 둬가지고 용안서 말을 타고 함라로 오면 함열로 오면 함열서 이리로 가지 않습니까. 역이 말하자면 재곡역터 말하자믄 옛날에 향교자리가 그거 저 있었고 말을 기르던 갈마라던 동네가 저기 지금 앞으가 갈마 말을 기르는 데가 있었고 그려요. 그리고 제가 어렸을 적에만 하더라도 역마차가 있었어요. 역마차가 있었고. 또 50년대까지 장이 크게 섰거든요. 그 때 시장에서 운력거가 있어서 마님들이 타고 다니고 그랬어요.
● ● ●
B1 : 또 특이한 얘기가 있습니까?
A1 : 그리고 여기가 다른 지역허고 특이한 점은 여기가 분수령이 있어요. 물이 내려오면 두가지로 갈러져서 하나는 섬진강으로 하나로는 금강으로 흐르는 분수령이 바로 이 면사무소 앞입니다. 그걸 지리적으로 아는 사람이 없드라고. 지금 면사무소 앞에. 저기 여기서 비가 오면 이짝으로 내려오는 물은 함라 들판으로 거쳐서 저 금강으로 저 성당포 금강으로 나가고 요짝으로 흐르는 물은 이리 탑천으로 흘러서 섬진강으로 나가고 그래요. 긍게 한 고을에서 두 강으로 흘르는 그 분수령이 이 함라면사무소 바로 앞으가 있는디 아무도 몰라 그게 분수령인지. 그 특이한 것이 그런게 있어요.
● ● ●
B2 : 신기하거나 기이한 일은 무엇이 있었습니까?
A1 : 그런 것은 저 칠목 같은 거 칠목재 같은 거 혈을 끊었다는 얘기가 있고. 근디 그것 보다도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웅포 넘가다보면 넘어가다 보면 재곡. 재곡역이라는 곳에 선왕당이 있었고. 그 넘어가다 보면 말하자믄 그 일본 사람들이 혈을 끊고 침을 박은 장소가 있어요. 그 밑이가 지금 현재는 골프장으로서 허허벌판이 됐는데 그 밑에가 경주 김씨들 선산이 있었고 제실이 있었거든요. 아 경주 최씨. 근데 거기가 보면은 그 아주 우리 한국에서 드물게 명당이라 그려요. 앞으로 금강이 옆으로 쭉 흘러있고 모든 산봉우리들이 거를 다 이렇게 이렇게 바라보고 있는 명당자리고 거기서 그래서 거가 크게 인물이 난다고 해서 일본 사람들이 혈을 끊었죠 그거를. 그래서 함라서 인물이 안난다고 그려. 함라산 혈을 끊어서 함라서 인물이 안난다고.
● ● ●
B2 : 재밌습니다. 또 뭐가 있습니까?
A1 : 아까 그렇고 염주바위가 있었지만 끝으리 가믄 공기바우가 또 있어요. 옛날 장수들이 공기하던 공기바위도 있고 그려. 근데 함라 어떤 분이 공기바위 정기를 타고 났다고 해서 공바우라고 하는디 그 별명이. 그 양반이 그 장수의 그런 혈기를 타고 났는지 모르지만 아주 걸음을 잘 걸었다 그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사람 보고 축지법을 썼다고 그러는디 그 사람이 그 정도로 걸음을 잘 걸었어요. 그 함라에서 자기 부인이 밥을 헐려고 허면은 곰개 여기 웅포서 곰개가서 약방서 약을 지고 집에 오믄 밥이 넘는다고 그랬어 솥에서. 그 만큼 걸음을 잘 걸었다고 그려. 쉽게 말하자면 공바우. 말하자믄 공기바우의 정기를 타고 나서 그 양반 별명이 공바우 그런 우스갯소리도 있고 허허.
● ● ●
B1 : 혹시 함라에 꼭 다른 곳을 갔으면 하는 곳이나 주의해야 할 것에 대해서 말씀해주십시오.
A1 : 그 전북대학교 공과대학교수 XXX교수라 그랬든가. 그 분이 여기 와서 자료를 백 번 조사를 허고 그랬어요. 그런디 자기가 여기 와서 조사 혀본 것 그것은 삼부자집 보다도 더 보존가치가 있고 그걸 개발해야 할 것은 재현해야 할 것은 돌담이라고 허드라고요. 돌담이 종류가 한 40개가 있는데 어떤 것은 모양이 제대로 보존이 돼 있고 어떤 것은 많이 파손이 됐는데 거의 다 복원이 가능하다고 그것만 잘 되어지면 문화재 말하자믄 뭐라 할까 옛날 그 자료로 참 손색이 없것다고 그런 얘기를 허더라고.
● ● ●
B1 : 함라에 대해서 하시고 싶으신 말씀이 있으시다면 해주십시오.
A1 : 저는 그래요 저는 함라가 다른 고장보다 일찍 문화도 받아들였고 문명도 받아 들였는디 제일 낙후가 된 것이 안타깝고 지금 이 함라가 초등학교만 하더라도 역사가 굉장히 넓거든요. 구한말에 세워진 학교고 그 만큼 문명을 일찍 받아들였고 여기 경찰서도 파출서도 전라북도서는 유일하게 오래전에 세워졌고. 의용 소방대는 전라북도에서 두 번째로 세워졌고. 교회도 113년 전에 세워졌고 모든 신식문명들을 받아들였는데 어떻게 보면 누구의 잘못인가는 모르겠지만 퇴폐허고 다들 객지로 나가있고 고향을 떠나가 있고 참 안타깝죠. 그서 좀 우리 젊은 사람들이 앞으로 함라 이런 역사를 바로 알고 좀 과거에 그 화려했던 것 잘못된 것이 무엇인가를 깨닫고 좀 옛날처럼 이렇게 복원헐 수 있는 길이 무언가를 깨닫고 같이 했으면 좋겠는데 젊은이들이 없어요. 그게 참 안타깝죠. 특히 이렇게 옛날에 풍물소리랄지 이런게 귀에 쟁쟁히 들리는 것도 같고.
구술사진
조상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