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헌내용
자라(者羅․자래고지) : 마을 지형이 자라가 엎드린 형국이라 하여 생긴 이름. ‘자라고지’의 ‘고지’는 ‘곳(處)’의 뜻.
『익산시사』
구술요지
1) 마을유래담 :
- 자라마을 : 자라 형상을 닮았음.
- 별곡 : 자라마을의 옛 지명.
2) 전설 및 민담 :
- 무학산 : 학이 많이 산다고 함.
- 교항 : 옆 마을 교항에는 다리목이라는 곳이 있었는데 어시장이 있었다고 함. 나루터도 있었음.
- 자라고지 호박고지 나물 해먹세 : 다른 마을 사람들이 자라 마을에 대해서 놀리는 말.
3) 민속 :
- 시장 : 강경장 이용.
- 거리제 : 현재에도 거리제를 지낸다.
구술채록
● ● ●
A1 : 김영국 (64)-1949년
A2 : 조남선 (73)-1941년
A3 : 임규진 (80)-1934년
A4 : 조용남 (78)-1936년
A5 : 박종문 (73)-1941년
A6 : 남철희 (76)-1938년
B1 : 장윤준
B2 : 이순영
● ● ●
B1 : 우리 자라마을을 예전엔 뭐라고 불렀습니까?
A3 : 우리 저 자라마을이 행정관청에서 명명한 것은 용안면 창리 그 자라 자라부락 되어있습니다. 이 창리 일구 이구 삼구 했을 때 여기가 삼구로 지정되어 있어요. 용안면 창리 삼구가 자라마을이거든요. 근디 그 자라라고 하는 일은 뜻은 명명이 어떻게 해서 나왔냐 하는 것은 나도 좀 내력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여러 참 좀전에 사시던 으른들이 자라라고 들고 명명붙여왔던 것이에요. 근디 어서 언제서부터 자라라고 불렀냐 하는 것은 지금은 기록은 안되어 있습니다만은 지금 행정구역단위로 익산군 용안면 창리 삼구입니다. 근디 마을로서는 자라마을 자라마을 그랬어요. 근디 그게 뭐 어서 크게 의의가 있어서 자라마을이라 했느냐 그런 것은 뭐 전해내려오는 것은 없습니다만은 자라라고 하는 것은 이 자라 그 형태는 이에 굳건허고 아주 그냥 오래오래 생명을 가지고 있는 것이거든요. 자라가. 그래서 그것이 영원토록 이렇게 참 에 빛을 내라 하는 뜻에서 자라라고 명명을 붙인 것 같애요. 커다란 뜻은 없습니다만은.
A6 : 거기다가 쪼끔 덧붙여서 한 말씀 더 드릴께요. 그 우리 마을이 물론 명명이 자라로 해서 이렇게 됐는데 자라에 이 마을의 형태가 거북이. 자라 마을로 되어 있기 때문에 그 전 어른들 말씀이 자라로 명명이 되얐다. 인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A4 : 우리 옛날에 자라 마을을 자라 마을이라 안했잖여. 자라 고지지.
A3 : 에이 그것은 잘 모르고 얘기하는 것이고 자라마을이라고 명명해서 내려왔어요.
A5 : 그게 자라 마을이 이름 붙이기 전에 그게 어느 집 족보에 있거든? 그게 족보에 있어 지금. 그 족보에 자라 명칭이 자라 마을이 아녀.
A1 : 자라 마을이 그 맨 처음에는 일곱 가구가 살았다고 한 거 같으드라고. 그 나이 들으신 어른이신 옛날 분들 말을 들으니까 일곱 가구가 살았디야. 그래서 그 뒤로부터 마을이 이렇게 형성 되었다고 그랬더라고. 그니까 지금이 와서는 자라 마을이지만 그 전에는 무슨 마을로 형성이 되었다고 그러드라고.
B1 : 아까 말씀이 자라형상이라 하셨는데 그럼 자라 모양의 자세한 것에 대해서는 알고 계십니까?
A2 : 아아. 어디고 앞이고 어디가 뒤인가? 근데 인자 거까지는 우리가 몰르고. 근데 중간이 집을 짓고 항게 그 형태가 변하지.
A5 : 인자 도로도 끊기고.
A1 : 지금 형태로 봐서는 이 자라 마을이라면 이 등이 높잖여. 그래서 우리 마을 형태도 지금 등 높은 형태를 갖추고 있잖여.
● ● ●
A1 : 그리고 인자 자라마을이라고 하면은 여기가 충청도 전라북도 경계 지역이여. 그래가지고 여기 우리 금강변에 여기 우리 주위가 있어. 그래서 그 넘어는 충청도. 여가 전라도. 여가 전라도 끝이여. 전북 끝.
B1 : 그러면 우리 마을은 강경장을 이용하셨습니까?
A1 : 인자 우리 마을에서는 강경이 한 8키로정도 밖이 거리가 안되요. 그래서 이 앞도로. 23번 국도로. 옛날에만 해도 이 국도가 다 비포장도로였지. 이게 23번 도로여 우리 앞에 마을 도로가.
● ● ●
A6 : 용안면 무학산이라는 얘기 들어봤어?
B1 : 잘 못 들어 봤습니다.
A6 : 저 뒤에 보면은 무학 거기가 팔각정까지 뒤에 있고 계단이 742단을 만들어 놨어 거기. 그런데 거기 무학산이 왜 무학이라 했냐. 춤출 무자 학학자하고. 학이 거기서 지금도 황새 백조들이 거기.
A3 : 거기서 살아요. 지금도 학이.
A6 : 그래서 그 정기를 받은 용안 자라 중신 다 많이 발전 되었어.
A3 : 거기가서 지금도 저녁이믄 학이 날라와서나 무학에서 살어요.
● ● ●
B1 : 그리고 용안은 무슨 뜻입니까?
A3 : 그게 지금말여 용용자하고 편안할 안자로 용안이라고 하거든요. 근데 그 명명이 언제부터 용안이라고 되어있는가는 잘 모르는 실정입니다만은 편안할 안이라고 하는 것은 아주 고요하고 이렇게 참 조용헌디다 하는 그런 의미를 자아내는 것 같애요. 그러면은 그 용안이라는 지역은 제가 지금 현재 낼 모레가 80이에요. 그런데 그 용안 사람이 내가 살아온 과정에서 우리 나라의 정변도 많지 않았습니까. 참 625 사변도 났었고. 일정 때 625 사변에다가 정변도 많았죠. 그렇지만 타 지역은 우 좌익 해가지고 서로 죽이고 했어요. 그렇지만 이 용안이라는 땅이 여기서는 한 사람도 그 때에 자기들끼리 다툼을 갖지 않고. 주민끼리 다툼을 가지고서 죽이고 살리고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하나도 없었어요. 용안이라는디가. 그래서 과연 지명이 용용자 편안하다 하는 것이 과연 이 지역이 아주 고요허고 편안하다. 참 아름다운 지역이다 이렇게 표현헐 수 있죠.
B1 : 용안에 원님 이야기가 있단 말을 들어봤습니다.
A3 : 내가 대답할께요. 그것은 옛날부터 내려오는 하나의 거시긴디 용용자 편안할 안자라는 것은 편안한. 용이 편안하다는 것을 떠들은 것이라 이거에요. 그 원님이 용안 골로 오실 때에는 아주 그 고을이 적어. 고을이. 여산 같은디는 골이 크거든요. 골이 적으니까 너무 적은 골을 말여 원을 살으라고 하니까 섭섭허지 않겠습니까. 좌천이지 따지고 보면. 그래서 들어올 때 울고. 울고 들와. 그리고 나갈 땐 울고 나가. 나갈 땐 왜 그러냐. 이 골이 용안에 와보니까 인심 좋고. 참 들이 넓어서 먹을 것 많고. 먹을 것 많으면 인심이 좋은 것입니다. 그럴 거 아닙니까? 읎어가지고 그야말로 참 그 호구지책의 갈망이면 인심이 좋아질 수가 없어. 그러나 넉넉한 이 곡창지대니까 이것이 인심이 후허다 이말이여. 그래서 울고 들왔다 울고 나간다 그런 말이 있어요. 그랬다는 얘기가 있어요. 섭섭허니까 울고. 들어올 때는 너무 적어서 울고. 나갈 때는 하도 고향이 인심이 좋고 그런디 섭섭해서 울고 나가고. 그래서 울고 들어왔다 울고 나간다 하는 얘기가 있습니다. 허허허. 우리는 보든 못했죠. 그치만 그것이 옛날부터 내려오는 얘기요.
● ● ●
B1 : 그럼 자라마을 주민들은 시장을 어디로 이용하였습니까?
A3 : 여기가요 강경 함열이 저짝이로는 남쪽으로 가면은 전라도이지만 서도 함열이고 동쪽으로 나가면 강경이에요. 사실상 시장을 본다 하면은 강경장을 많이 봤죠. 왜냐 강경은 말여 장이 좀 커. 함열은 적고. 그래서 큰 물건을 헐 것 같으면 강경을 가야혀. 지금도 그래요. 지금도 강경을 가면 좀 큰 물건이 있지 않나.
● ● ●
B2 : 무학산 말고도 용안에 다른 많은 산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A2 : 제가 말씀드리것는디 다른 산은 없고 또 우리 마을은 여기 금강 금강 변을 끼고 있어. 바로.
A3 : 바로에요. 금강이 충청도 전라도 경계 아닙니까. 그 산 있죠? 무학산 밑이가 바로 금강입니다.
B1 : 저희가 춘포에 갔을 적엔 만경강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럼 여기 분들은 금강에서 무엇을 하곤 했습니까?
A2 : 금강 금강 말고 여기 샛돌이라고 있어. 에. 금강에서 딸린 샛돌. 인자 옛날에는 조수물 물이 빠졌다 들어왔다 빠졌다 할 때 인자 빠졌다 할 때 우리 마을 주변 인자 그 때만 해도 우리 어렸을 때지. 한 열 두어살 때 가면 물이 빠질 때면 가서 고기도 잡고 지금으로 말하자면 그 게 게도 잡고 그런 시기가 있었죠. 인자 지금은 그런 것이 없어. 에. 하구둑을 막아서.
A6 : 아까 그 산 얘기허다가 용안 무학산 외의 산. 그 용두산이라고. 용의 머리라는 산. 그래서 용이 편안할 지금 용 머리에 지금 저기까지도 돼 있어요. 그래서 용두산을 저 끝으로 무학산 밑으로 짝 이어져 있어요.
● ● ●
B1 : 교항마을에 예전에 어시장이 있단 말을 들어봤습니다. 진짜입니까?
A3 : 글쎄요. 그 때 당시에 어시장이 있었다는 그런 사항은 우리 세대에는. 직접 못봤어요. 그러나 거기가 금강으로 이렇게 들어가서나 그렇게 되어 있거든요. 그래서 다리목이라는 데가 있어요. 근데 다리목 거기서 어시장도 세웠다. 그런.
A2 : 그 전에 나루터. 나루터도 있었단 말도 있더만.
● ● ●
A1 : 선생님. 우리 마을이 자라 마을로 형성되기 전에 맨 첫 번에 일곱 가구가 살았디야. 일곱 가구가 살았는디 그전에 마을 이름은 별곡리로 지어졌드라고 하드라구요. 별곡마을. 일곱 가구가 살았다고 하드라구. 그래서 별곡리라고 해서 이름이 지어졌는지 내려오면서부터 자라마을로 바뀌었다고 하는 것 같드라구요. 인자 그렇게 알으시면 되것네요.
B1 : 그 일곱가구 어르신들은 어떻게 마을에 자리잡았는지 알고 계십니까?
A6 : 할아버님들 말씀이 우리 마을에 정착한 것이 약 그 때 20년 전에 150년 정도 됐었다고 했으니까 백 한 칠십년? 그러고 시초 여기에 장착지가 정씨라고 나는 얘기 들었어요. 어디 정씨인지 그것 까지는 몰르고. 안 들었어요? 나는 그런 얘기를 들은 기억이 있어요. 그 후에 임씨들이 이렇게 거시기 했고.
● ● ●
B1 : 용안에는 일본인들이 많이 살았습니까?
A3 : 예 살았죠. 대지주들이 살았죠. 옛날에 살던 금라 일본 사람들 금라 이런 사람들. 금라라는 사람이 있었고. 일본 사람들이 살았어요. 살면서 해방되면서 다 나갔습니다.
B1 : 그 사람들이 쌀을 어디로 가져갔습니까?
A3 : 그건 몰르것습니다만은 지주 노릇을 했죠 일본 사람들이기 때문에. 악덕하진 않았죠. 왜그러냐 사람들이 다 좋았어요. 해방 온 뒤로는 딴 데서는 불상사도 일어나고 그랬지만은 용안은 그렇게 안했습니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용용자 편안할 안자에요. 그래서 서로서로 도와줬어요.
B1 : 그럼 그렇게 나쁘진 않았나봅니다.
A3 : 그렁게 그러니까 해방되어서도 안나가고 살았으니까. 그 사람 아 금라 딸이 초등학교 선생질을 허고 있어요. 일정 때. 저도 일정 때 공부를 허고 그랬어요. 그러다가 허다가 일정 해방 되고 서도 선생질을 허고 있습니다. 그래가지고서 참 그렇게 거시기를 안했어요.
● ● ●
B1 : 우리 마을의 오래된 것들은 무엇이 있습니까? 나무나 바위같은 것은 있습니까?
A3 : 긍게 우리 마을은 이게 저 자라라 했는데 옛날에는 우리 어렸을 때는 자라고지 자라고지 그랬어요. 자라 고지라고 그냥 그렇게 했는데 중신리 사람들이 우리 초등학교 댕길 때는 뭐라고 그랬는고니 자라고지 호박고지 나물 해먹세 그렇게 놀렸단 말여. 그것은 지어 낸 이름이지 다. 다 기록할 사항은 아니지만은 그렇게 골려먹었어 우리가. 그러니까 이름만 따가지고 자라고지 호박고지 그렇게 놀려먹은 경우가 있어요. 딴 동네 사람들이.
● ● ●
B2 : 우리 마을에 상여집이나 공동묘지는 어디에 있었습니까?
A6 : 그거는 저쪽에 상신 마을이라고 있었는데 지금은 다 폐지 되얐어요.
B2 : 그럼 애장은 어디에 하곤 했습니까?
A6 : 공동묘지. 에 고 저쪽에 보면 자명사 고개 넘어가는 데 보면 공동묘지가 있었어요. 고개 넘어가기 전에. 용안이 이쪽에 공동묘지였죠.
B2 : 그럼 거길 넘어갈 땐 굉장히 무서웠겠습니다.
A3 : 그렇죠. 우리 어렸을 때는 거기 공동묘지를 가덜 안했죠. 무섭고 그러니까. 지금은 길도 나고 그랬지만 옛날엔 그런 것도 없었죠.
B2 : 그럼 귀신에 홀렸다거나 하시는 얘기는 들어보신 적 없으십니까?
A5 : 어린 애들 어린 애들 거다 묻잖여. 묻으면은 여우가 그 어른 애들 패묵듯 해서 먹는다 해서 밤에 거 가서 지킨 사람들도 있어요.
A5 : 우리 부모 때 밤에 가다가 자빠져서 이도 빠지고 그랬다고 들었어.
B2 : 그럼 도깨비 불도 있었습니까?
A2 : 도깨비 불같은 거는 이 저 거시기 불은 거시기 많여. 번쩍번쩍 하는 거. 그런 것은 많이 있었어. 무서워서 못갔으니까는.
B2 : 그럼 혼 불도 있었습니까?
A5 : 혼 불은 많이 봤어. 나는 봤는데.
A6 : 그게 참 나가면은 그 집에 틀림없이 사흘 안에 초상이 들어. 밤에 쉭 허니.
B2 : 근데 실제로 도깨비 봤다는 분은 없으셨습니까?
A5 : 도깨비 방아 찍고 그런 거는 봤다는 느꼈다는 사람은 얼마 안되는디 나는 직접 우리 어머니한테 들은 소린디 이 부락이 저 우로 나가는 그 전에는 다 산지로 묘지로 되어 있었어. 묘지다 헐고 집 짓고 그랬는디 거기 묘지에서 우리 어머니도 살았는디 저녁에는 와서 번히 와서 도깨비들이 와서 방아 찍고. 응 방아 찍고 그런 소리도 다 듣고. 거기도 인자 저녁에 마실 나올라믄은 채 귀신이라고 채처럼 생긴 귀신이 딱 하니 붙는다는 거여. 그래서 몸사리치고 해쳐 나온 일도 있다고 나 몇 번 들었어.
● ● ●
B1 : 우리 마을의 술먹이에 대해서 얘기해주십시오.
A6 : 그 전에는 칠석날. 총각들을 어린 사람들은 샘 속으로 갈라믄 추우니까 너 장가 갈라믄 이 속에 가서 깨끗이 청소 해줘야 한다. 들어가서 딱 다 긁어내주고 퍼주고 하면은 우에서 저기 하고 그 날 인제들 동네 풍물도 치고 했고. 오늘 날은 대동회가 우리 마을 기준으로 한다면은 내려오는 그 전통적인 그 풍물 놀이가 있었어요. 근데 지금은 많이 희박해져서 오늘도 치고 했지만은 그걸 겸해서 마을 그 입구에 돼지 머리 갖다 놓고 돈도 걸어가면서 교통 안전좀 기원하고 그래서 절들 다 하고 그런 전통으로 오늘 날 지금까지도 내려 오고 있습니다.
B1 : 여러 마을을 돌아다녔지만 거리제는 처음 들어봅니다.
A6 : 에. 지금은 그 명맥을 잊기 위해서 지금은 간소화 되었지만은 아직도 하고 있어요.
A1 : 요즘은 각 가정마다 차도 많고 하지만 교통사고도 인자 우리 시민께 교통사고도 없이 잘 좀 부탁허고 우리 마을 사람들 건강하게. 또는 여기는 농사짓는 사람들이 많아서 금년 농사도 풍년들게 해달라고 모든 것을 비는 마음에서 말하자면 쉽게 얘기해서 거리제라고 하지. 그런 제를 오늘날까지도 내려온 것이여.
● ● ●
구술사진
오른쪽부터 김영국 조남선 임규진 조용남 박종문 남철희
왼쪽부터 조남선 김영국
왼쪽부터 조용남 임규진
왼쪽부터 조용남 임규진 조남선 김영국
왼쪽부터 남철희 박종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