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명 : 용안면 > 용두마을

구술 기본정보

구분 내용
마을명 용안면 > 용두마을
구술자 추철호(1953)남자
구술자 홍순길(1933)남자
구술자 윤호근(1928)남자
면담자 장윤준, 이순영
구술요지 마을 유래담
전설 및 민담
민속
구술일시 2013-03-10
비고 면담장소 : 용안 용두마을 마을회관
면담시간 : 2013년 3월 10일 17시
내용 : 마을 유래담, 전설 및 민담, 민속에 대한 인터뷰 진행
키워드  

문헌내용

용두(龍頭․용머리․용두코쟁이) : 용두산의 앞 마을이므로 일컫는 이름. 용두산은 동국여지승람에 산의 형상이 궁륭형으로 생겼는데 밑이 바로 물과 접했다고 했다.여지도서에 기록된 용두포(龍頭浦)도 용두산 밑이다.‘용두코쟁이’의 ‘코쟁이’는 굽은 곳, 우묵한 곳, 좁은 곳, 출입구 등의 뜻인데 여기서는 강이 굽은 곳이기에 생긴 말이다
『익산시사』

구술요지

1) 마을유래담 :
- 용두마을 : 용 머리의 모양을 하고 있기에 붙여진 이름. 바위산.
- 목련암 : 목련암인지는 모르지만 산 중턱에 절터가 있었다고 함.

2) 전설 및 민담 :
- 다목 : 다목이라는 일본인이 용 머리의 바위를 부셨는데, 말년이 안 좋은 이유가 용 머리를 부셨기 때문이라고 함.
- 동학 : 동학농민운동 민담.
- 갈대자리 : 갈대를 엮은 상품들을 팔아서 생계를 유지하였음.
- 큰 나무 : 큰 나무를 군인들이 사격연습을 하는 바람에 나무가 죽었음.
- 홍수 : 금강에서 홍수가 날 적에는 무주 구천동의 문패까지 떠밀려 내려왔다고 함.
- 소펄 : 경상도 사람들이 많은 사람 땅이라고 하며, 현재의 망성이라고 함.

3) 민속 :
- 시장 : 강경장을 주로 이용했음.
- 샘 : 샘은 많이 있었는데 웅포나 성당보다 지대가 높아 짜지는 않았음.

구술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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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1 : 추철호 (61)-1953년
A2 : 홍순길 (81)-1933년
A3 : 윤호근 (86)-1928년

B1 : 장윤준
B2 : 이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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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 : 용두마을의 소개좀 부탁드리겠습니다.

A1 : 용두는 글자 그대로 용머리. 인제 용처럼 용안리 전체가 놓여있는 형상이거든요 산 형세가. 그래가지고 그 쪽에 최고 위에 인제 머리 부분에 해당한다 해가지고 용두라. 그렇게 해 놓은 것 같애요.

A2 : 인제 전해오는 말로는! 여기 산 있지 않습니까? 산 제일 끄트머리가 금강. 금강이요. 그 넘어는 부여군이고. 충남 부여군이고. 근디 그 끄트머리에 용 머리가 있었답니다. 에. 그리서! 용 용자 머리 두자라고 해서 용두. 그 용을 따서 용안면! 이런 전설이 있지이. 안은 편안할 안.

A1 : 용이 편안하다. 용이 편안히 누워 있단 형상. 그리고 용산이라는 마을이 있어요. 그긴 용의 꼬리 그렇게 해서 어떤 분이 만드셨는지는 모르겠는데 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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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2 : 그럼 이 뒤의 산은 무슨 사입니까?

A1 : 이게 용두산이지 용두산. 그리고 저쪽에 있는 용안에 있는 산이 무학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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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2 : 그럼 실제로 용에 관련된 재미난 이야기는 뭐가 있을까요?

A2 : 듣는 말에 의하면 다목이라는 일본 사람이 있었어요. 다목이가 그 머리를 부셨답니다.

B2 : 그 위가 바위였습니까?

A2 : 아 바위였지 그게. 그렁게 머리가 바위여 다. 이게. 순 돌. 돌인데 거기에 머리가 있었다는디 다목이라는 놈이 그거를 부렸다고 그런 설이 있어요. 왜부셨는지는 일본놈들이 우리 나라 산에다가 그런 꽂고 그런 형상이지. 우리 나라를 해치기 위해서 그런 나쁜 행동을 허구서 그 사람이 말인 적에는 그 때의 그걸 저 부셔서 그렇게 혀 놓고서는 병이 나서 옆구리로 이 똥도 싸고 밥도 먹고 이랬다. 다목이가. 에 잘못되야서 벌받아서 그랬다는 설이 있어요. 동토를 맞었나 뭘 맞었나. 허허허.

B2 : 다목에 관련된 다른 이야기가 있습니까?

A2 : 여기 이 앞에 농장도 많이 있었고. 여기 넘어가면 망성면 화산리 하포라는 데가 있어요. 거기도 담옥둑안이라고 그래요. 담옥이가 둑을 쌓았다고 해서 담옥둑안이라고 해요. 그 안에도 논이 있었고 그 앞에두 이 금강제방 밖에 논을 많이 가지고서 둑을 밖에다 쌓아 놓고 그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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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2 : 동학이 우리 마을이 관련이 있습니까?

A3 : 이 지역사적으로 말하면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서 동학난 시절이 한 때 있었지. 동학난 시절에 여기 주민들이 그 지역을 지키기 위해서 이 산에 올라가믄 과거에 토성 짰던 쌓았던 자리가 지금도 있어. 토성 쌓았던 자리가. 그러나 그것이 오랜 세월이 흘르고 붕괴됐기 때문에 유야무야 돼 있지만 그런 자리가 여기 있고 동학란이 일 때 우리 증조할아버지가 우리 익산 북면에 접지로 허셨어.

B1 : 동학란이 일어나고서 우리 마을에 그럼 지나갈 때의 일에 대해서 알고 계십니까?

A3 : 어떠한 기사는 내가 잘 모르것어. 내가 없었을 때니까. 내가 중간에 어른들한테 얘기를 들어서 그런게비다 허고 알고 있고 내 증조 할아버지가 동학란데 용안 고을에 접지로 허셨여. 그 익산 군지에도 일부 올라 있어 그 내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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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 : 우리마을이 과거엔 어땠습니까?

A3 : 중간에 들은 얘기로 보면 여기가 고산지대로서 인가가 별로 없었던 자리여. 인가가 별로 없었던 자리고 생활권이 약해가지고 허덕이던 처지에 그 때의 이 앞에는 전부다 노전이라고 해서 갈밭이 죽 있었어. 강가에. 그걸 벌채를 해가지고 거기서 나오는 갈로서 갈자리. 갈자리를 만들어서 시장에 짊어지고 가서 팔고 거기서 얻어지는 익금으로 생계유지를 했다는 그런 얘기를 들었어요.

B1 : 어느장으로 가서 팔곤 했습니까?

A3 : 그 때 팔로는 강경이지. 강경이라는 것이 우리나라 그 상고시대의 3대 시장의 하나여. 우리나라의 3대 시장의 하나로 들어 가 있어. 그래서 거기다가 팔고 얻어지는 익금으로 생활고를 해결했다는 이야기가 있어. 지금은 교통편이 좋아져서 자동차가 없는 집이 없지만 교통시설이 좋아져서 강경 아니면 여기 있는 사람들이 생활필수품을 구매하는 디 애로가 있었는디 걸어서래도 강경장을 봤어. 그러나 지금은 교통이 만들어져가지고 여그서 한 번 타는 요금이나 이리까지 가나 함열가서 내리나 용안가서 내리나 같은 요금이 들어가. 그렁게 여기서 샀다 하면 이리까지 가서 장을 봐 가지고 와. 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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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 : 우리 마을은 집성촌입니까?

A1 : 여기는 전부다 각성바지여. 한 집이 여러 식구가 살고 있는 집은 이 집하고 나하고 두 집 뿐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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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 : 목련암에 대해서는 아십니까?

A3 : 목련암 용두에 용두에 나도 그런 사찰이 있다는 것은 구경은 못했고 흔적은 흔적지는 있어. 흔적지는 지금도 있어. 그게 어디냐면은 이 넘어가면은 저 말랭이 넘어가면 펑퍼짐한 밭이 있는데 거기에 암자가 있었는디 중간에 암자가 헐렸대. 그래서 지금은 흔적도 없어. 유적물 같은 것은 발견헐지 몰라도 그 자리가 헐린지 그 말도 내가 말만 들었지 그 과거에 있던 증거물은 내가 본 적이 없고 또 그 집이 헐리고 낭게 밭으로 써먹고 활용되고 있다가도 그나마 황폐지로 묵어져 있는디 과거의 흔적을 발견하기 위해서 그거를 개발하거나 한 사람은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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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 : 우리 마을이 큰 나무나 큰 바위 같은 것은 있습니까?

A3 : 나무는 이 앞에도 아름드리 나무가 있었는디 XX 선거땐가? 군인들이 이 앞에도 오래된 나무가 이렇게 되는 나무가 하나 있었어. 근데 그 때 당시에 군인들이 경비허로 나온 애들이 거기다 대고 총을 쏘드라고. 그래서 나무 결국 죽었어. 그러고 지금도 내가 안올라가봐서 모르는디 이 산 고개를 넘어가면은 평평하지만 쪼끔 평평허진대가 있어. 거기에 큰 바우가 있는데 그 바위를 가면은 과거에 놀러 댕기면서 촌 속담으로 고니든다고 그런 얘기가 있거든? 그걸 하기 위해서 구녁을 뚫어놓은 자리가 있는데 나도 중간에 올라가보니까 그것이 풍맞은 데가 있어서 자리가 헤져있었어. 오래도록 구녁이 있었어. 중간이 몇 해 전에 올라가보니 풍맞음이 심해가지고서 전부다 마모되가지고서 전부다 흔적이 없어져버렸어.

B2 : 고니는 무엇입니까?

A2 : 고니라는 것이 장기 두지 않습니까? 장기처럼 민간인이 만들어가지고 장난으로 허는 것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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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 : 금강에 홍수나 물이 범람했을 때의 기억이 있습니ᄁᆞ?

A3 : 그 때에 홍수 때의 내가 직접 보지는 못했고 그 무렵의 흔적을 더듬어서 그 헌 얘기를 내가 들었는디 여기가 금강이라는 디가 무주 구천동서부텀 대홍수 때 물이 내려오기 마련이여. 그러면은 그걸 어떻게 해서 그짝물이 오느냐 하면은 입증한 근거가 없잖여. 그런디 비가 많이 오고 물이 많이 내려오면은 모든 작목과 변소같은 것이 쓸려가지고서 내려오거든? 여기 뿐 아니라 이 근방 사는 사람들이 거기가 제일 가까이고 그렁게 나무를 건졌어. 내려오는 나무를 건져서 보니까 거기 나무에 붙은 표찰이 있는데 표찰이가 무주 구천동에서 내려오는 표찰이 있었어. 아 그래서 여기가 무주에서부터 물이 내려오는구나 하는 것이 입증이 됐어. 문패가 그런 문패가 있었다 그 말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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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 : 용두산에 산제나 기우제는 지내셨습니까?

A3 : 과거에는. 지금에는 그런 얘기가 없어졌지만 내 증조 할아버지때만 해도 산신제도 지내고 기우제도 지냈던 때가 있었어. 기우제는 해마다 있는 것이 아니고. 산신제도 그것도 나는 기억이 잘 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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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 : 우리 마을이 샘은 몇 개나 있습니까?

A3 : 옛날에는 지금은 많이 개발되가지고서 상수도가 좋아서 집집마다 수도를 쓰고 있지만은 과거에는 수도라는 것은 재원이 모지렁게 생각지도 못허는 그런 처지거든. 그래서 자기 나름대로 자기 편리한대로 구뎅이를 파가지고 거기서 괴는 물을 가지고서 식수로 쓰고 있던거여. 그래서 샘이 한 두 개가 아녀. 많이 나갔어.

B2 : 웅포의 경우는 금강 때문에 물이 겅건했다 하던데, 여기는 어땠습니까?

A3 : 아 거기허고 여기허고 또 달버. 시방 얘기허고 웅포나 여기허고는 지형적으로 여기허고 성당허고 레베루를 얘기헌다면 1메타 80인가 나와. 거기가 웅포가면 2메타가 넘지? 긍게 조수물이 밀려 왔다가. 금강 하구둑을 막기 전에는 조수물이 밀려 왔다가 썰물이면 쑥 내려가면 그럴 때 얘기여.

B1 : 우리 마을은 금강하구둑이 없을 적에도 샘이 짜진 않았단 얘기입니까?

A3 : 응 아니지. 또 하나 곁들일 것은 이 마을에도 식수로 쓰지 않는. 거진 다 생수원이 있응게 식수로 안쓴다고 얘기 했지. 이 골짝마다 셈이 다 있어. 샘이 다 있는디 과거에 식수로 쓰던 샘이여. 집집마다 관이 매설되가꼬 안심하고 쓰고 있지만 과거에는 그 소독 자체도 생각지 못해고 골짝마다 물도 귀허니까 자기 나름대의 가까운데서 허우적거리고 물 나면 식구들이 쓰고 허던 그런 때가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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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 : 술먹이는 언제 하셨습니까? 술먹이가 아니더라도 우물 청소라도 언제 하셨는지요.

A3 : 우물청소라고 해서 특별허게 멋이 허는 거는 없고 일년에 두 번 그런 우물 청소가 있었는디 시방 나 있는 자리도 그 아래 우물이 있어. 있는디 쓰질 않응게 머시 헌디. 일년에 두 번은 두 번 세 번은 칠월 칠석날하고 팔월 때허고 섣달 그믐 때허고 해서 우물 그 근방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그 동원해가지고 샘을 다 퍼서 청소를 허고 다시 쓰기 위해서. 그런 흔적이 있어. 그건 나도 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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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 : 금강에 경상도분이 많이 사셨다는 마을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A1 : 화산리 소펄이라고 그래. 거 쪽이 경상도 사람이 살기가 힘들으니까 여기는 논들이 좋고. 그 때는 경기정리가 안 되고 그 뻘 강 뻘이 있었으니까 그걸 개간해가지고서들 많이 왔던 것 같애요.

구술사진


윤호근 홍순길 추철호


윤호근


홍순길


추철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