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헌내용
성치(城峙․성재) : 예전 읍성 밖으로 고개 옆의 마을이므로 일컫던 이름.
『익산시사』
구술요지
1) 마을유래담 :
- 원님이 두 번 운다고 하는 ‘용안면’ : ‘용안면’에 부임한 원이 부임 받을 때 한 번, 임기가 끝날 때 한 번 울었다고 함.
- 성치마을 : 성터가 있어서 성치마을임.
- 남면과 북면 : 무학산을 기준으로 남북을 나누는데, 남쪽은 함열, 북쪽은 강경이 생활권이라고 함.
2) 전설 및 민담 :
- 용안의 용 : 용안은 용의 얼굴이라 하여 편안하다고 함.
- 비석 : 비석이 길가를 따라서 아주 많이 있었음.
3) 민속 :
- 시장 : 함열장을 주로 이용.
- 샘 : 샘은 5개였으며 술멕이는 칠석날 하였음.
구술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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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1 : 장종철 (78세) - 1936년
A2 : 김영헌 (71세) - 1943년
A3 : 신영규 (68세) - 1946년
B1 : 장윤준
B2 : 이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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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 : 성치마을의 유래는 무엇입니까?
A3 : 여기가 인자 이룰 성자 아니 재 성자 언덕 치자라 해서 성치. 에. 근디 큰 언덕은 실상 없는데 옛날에 그 성터가 여가 좀 있었다 그러더라구요.
A1 : 어떻게 있었는고니요 여기가 성터요. 지금 여기 보건소 진디 그렇게 해서 거가 성터여. 그래서 옛날에 여그 여 성터라고 않고 동네 이름을 성재라고 했었는디 나중에 이게 행정구역 거시기 허면서 성치로 썼드만. 그게 옛날에는 성재성재 그랬어요. 지금 현재 보건소 있는 데로 이 날랭이로 해서 이 용안 골이거든. 용안 고을의 성인디 성 거시기 해서 성재라 썼는가벼. 근디 나중에는 성치로 또 중간에 성치루 그렇게.
B2 : 그럼 우리 마을의 역사는 굉장히 길겠습니다.
A1 : 동네는 원래는 적었었는디 그 일본 사람 하나가 여기서 살아가꼬 그 사람이 농사짓고 거시기 헝게 거기서 품팔아먹기 위해서 이렇게 와가꼬서는 동네가 형성된 것이지 이 동네 역사는 짧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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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 : 원님도 사셨습니까?
A1 : 그렁게요 원님은 저 면사무소 앞에 가면 동원 구경 허셨나? 어 거기 가면 동원 있어요. 현재 원에 있던 동원 있고 거기 위에 올라가면 향교 있고 거기 다 있어요. 긍게로. 긍게로 지금 일개 여가 면에 용동허고 용안하고 빠개졌거든. 긍게 일개 면만 했어. 긍게 현재 지금은 이개 면이지. 그래서 지금 용안 향교가 이개면을 거시기 허고 있어. 다른디 같으면 함라같으면 지금 오개 면이거든. 다른데는 다 몇 개 면인데 용안만 일개 면이었어. 긍게 옛날에 원님들이 여기 올 때 울고 왔다는 거여. 쯕은게. 쯕응게 울고 왔다가 나중에 갈 적에는 여기같이 용안 인심이 좋다고 해서말여 이렇게 좋은디 떠나간다고 울고 가고 그래서 올 때 울고 갈 때 울었다는 디가 이 용안 골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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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 : 그럼 어르신들은 예전에 장을 보러 가실 적에는 어디로 가셨습니까?
A1 : 함열. 함열장 있고 용안에도 옛날에 장 섰었어. 강경은 8키로고 여기는 4키로거든 그래서 함열장을 많이 봤지.
B2 : 그런데 용안의 법성마을은 강경장도 이용한다 들었습니다.
A1 : 그렇지. 거기는 강경장이지. 거기는 금강변이니 금강 뚝을 타고 강경으로. 긍게루 여기를 보면은 여기를 무학산을 저기해서 저쪽은 북면 이쪽은 남면 이러거든. 그쪽 사람들은 강경장을 많이 봤지. 여기는 함열장을 많이 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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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 : 아까 원님 얘기를 하셨는데 그러면 용안의 인심이 좋다는 이야기입니까?
A1 : 에에 인심. 용안인심이라 하잖여. 용안에 인심이 좋아서. 다시 말하자면 젤 첨에 올 적엔 즉어서 그렇고. 나중에 갈 적에는 인심이 이렇게 좋은 디를 떠난다 해서 울고 떠난다 해가꼬 그런 설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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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 : 그런 우리 마을의 인심이 좋은 사연이라던가 이유에 대해서는 들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A3 : 천성이 원래 좋다고 그랬었어요.
A1 : 그 옛날부터 용안 인심이 좋다고 그랬어. 그 지금 현재 저 공무원들도 여기 면장이나 이런 사람들도 나갈 적에는 참 좋다고 그려. 사람들이 온순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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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 : 우리 마을은 각성바지 마을입니까?
A1 : 각성바지라 할 수 있지. 왜근고니 어느 곳이고 그래요. 옛날에는 지금 말하자면 고을에 집성촌이 살았다 이말이여. 그러면은 여기는 현내여. 현내인게로 그냥 가끔. 그래서 이 교동은 각성바지여.
B2 : 옛날에도 여기가 각성바지였습니까?
A1 : 오십년 전 옛날에는 이씨들이 몇 호 살았었는디 인자 XXX라 해서 이 씨들 몇 분 있는디. 그래서 여기는 각성바지라 볼 수 있어 교동 이 현. 근디 우리만 뿐 아녀 면 소재지는 어디로 가도 각성바지여. 이게 메야드는디라. 그리고 나머지 촌에 가면 집성촌이 있지. 인자 여기 조씨라든지 임씨 이렇게 인자 있는디 현내만은 우리 뿐 아니라 용안 뿐 아니라 아무데가도 거시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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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 : 우리 마을에 비석이 있다는 말이 들었습니다.
A1 : 그렁게로 긍게로 서울 사람들이 인공 때 여기 피난 왔다 갔어. 피난 왔다 갈 적이 지금 말하자면 서울 사람들이 어디서 오셨냐고 그래서 거기 비석 많은디서 왔다고 그러드라고. 아 그러냐고. 그게 왜 근고니 여기 도로변에 옛날에 그 원님들 이런 사람들 비석이 아마 근 30개 근 20몇 개 근 30개 있었을꺼여. 쩍허니 있는디 도로 하천공사 하면서 그것을 도로변이 있응게 욂기는 과정에 혀가꼬 지금 동원자리다가 거기가 다는 아니여도 10개 될껴. 욂기고 또 욂기는디 부서졌고.
B2 : 그게 어떤 비석이었는지 아십니까?
A1 : 긍게 그거까장은 몰르지만 하여튼 공적비지. 여기에 유명한 공덕비인데 거기에 많이 있었는데. 긍게 비석거리 허면 아마 여기가 제일 많았지 않나. 에. 근데 그게 도로변에가 있었어 그것이. 한 20개 넘게 있었어. 그랬는디 이게 도로를 확장공사 하면서 동원자리로 일부 욂기고 파손되고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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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2 : 삼세 오충렬에 대한 얘기를 아십니까?
A1 : 그렇지 여기는 삼세오충렬이 있지. 긍게 전해오는 것으로는 삼세오충이 뭣인고니 할아버지가 남원에서 싸우다가 돌아가셨는디 또 아들허고 아들 둘 허고 손자까장. 그래서 이게 오씨라고 해서 오가 아니라 다섯. 다섯 충신이 났다고 해서 오 충신. 삼대에 걸려서 오충신이 났다고 해서 현재 여기 용안 유림에서 일년에 한 번씩 제사를 모셔. 그 예산은 시에서 해 주고 용안 유림에서 제사를 지내. 유림 여기 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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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 : 우리 마을에는 미신 같은 게 있었습니까?
A1 : 옛날에는 우리 마을에도 이렇게 마을이 있으면은 상 당하잖여. 그럼 못 지나갔어. 어느동네고 마찬가지여 물 당산을 못 넘고 먹는 우물 앞이를 못 건너가고. 옛날에 우리도 저짝에 상 당하면 아래로 가고 그건 우리 동네 뿐 아니고 어느 동네고 마찬가지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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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 : 그러면은 혹시 우리 마을은 샘이 몇 개나 있었습니까?
A1 : 세 개 있었지.
A3 : 다섯 개. 공동샴은 동네로 치면은 성각꾸도 있고 저 지서도 있고 다섯 개.
A1 : 지서까장은 칠 것 없지.
A3 : 우물이 다섯 개가 있었어.
B1 : 그럼 술먹이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A1 : 칠석 날 했지. 우물 청소도 했고.
B1 : 그럼 우물에 들어가면 아들을 낳는다는 그런 얘기 못 들어보셨습니까?
A1 : 근디 그것이 왜 근고니 나도 들어가서 이게. 이게 우물 들어갈라면 암만 여름이라도 추워. 나도 들어가봤지만 쎈 물나오고. 그래서 젊은 사람을 늫기 위해서. 노인네들이 뭐 이렇게 허면은 야 들어가봐 아들낳는다 그렇게 허고. 그게 왜 긍고니 거기 들어가보면 말야 여름에도 추워. 춥고 무서어. 막 들어가서 이렇게 쳐다보면 캄감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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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 : 우리 동네가 그러면 옛날엔 어땠습니까?
A1 : 그 전이 우리 어려서만 혀도 집 열 한가구 있었나? 그래가꼬 여기 인자 일본 부자사람이 있어가지고 형성 된거여. 그래서 인자 자꾸 터는 여가 좋아지고 항게 이렇게 혀서. 우리 동네가 터는 좋잖여. 남향이고. 남향 동네가 드물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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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 : 그럼 그 일본 사람은 농장을 갖고 있었습니까?
A1 : 어. 농장을 많이 가지고 있었어. 그래서 그 사람들 거기 가서 일해서 품 팔아 먹고 그렇게 살았지. 청목. 청목이라는 사람이 살고 저기 가서 금나라 해서 금나는 뭐 익산군 갑부라 해서 거시기고. 그래서 여기가 용안이 왜정 때 전기가 들어온 것이여. 그 거시기 때문에. 그 금나란 사람이 부자여. 지금 말하면 지금 익산군 금융 거시기를 다 그 사람이 쥐고 있었어.
B2 : 그 사람이 모질게 굴거나 하지 않았습니까?
A1 : 그렇지. 뭐 모질게 굴. 뭐 모질게는 안 굴었어. 근디 또 그 사람들 밑이서 먹고 살아야 항게 굽신굽신은 허고 그랬지만은 그 사람들이 못쓰게 그런 것은.
A3 : 그 분들 때문에 전기도 집 들어오고 문화적으로는 좋아 졌다고 보야지.
B1 : 춘포에서는 공출이 심해서 고생을 많이 했다 들었는데 여기는 안 그랬습니까?
A1 : 주로 그건 정부에서 헌 것이지 그것은 개인이 헌 것은 아니지. 일정 때 인자 그것은 하는디 인자 정부에서 강요를 하는 것이지. 긍게 왜놈밑에서 압박은 받았지. 나도 저 학교 댕길 적이 왜정 때 다녔는디 1학년 2학년짜리도 그 풀 베가꼬 말려가지고 마병들 먹잇감 해서 혀고. 솔갱이 따가고 그랬어. 여기서 솔갱이 기름도 있었고. 그게 왜정 때 정부서 헌 것이지 개인 여기 사는 일본 사람이 압박 준 것은 아니지.
B1 : 그럼 그 일본인들이 자기들 농장에서 나온 쌀을 강경장이나 함열장에 팔았다는 이야기는 못들어보셨습니까?
A1 : 그런 부자는 아니였어. 그런 큰 부자는 아니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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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2 : 그럼 우리 마을에 무학산이 있었으면 풍수지리나 전설같은 게 있습니까?
A1 : 아녀 우리 동네는 역사가 짧당게 그래서 그건 옛날 동네 가서 물어보고 해야지. 그러구 이게 그런 양반들이 다 돌아가시고 다 신식것이고 우리는 으른들한테 들은 거시긴디 우리 동네가 역사가 짧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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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 : 우리 마을에 기차가 나려고 했는데 못났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A1 : 아 그것이 용안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여. 나도 어른들한테 들었는데 이게 함라라는 데가 있어. 긍게 용안 부자 열이 당하야 함라 부자 하나를 당한다 그랬어. 그랬는디 함라가 부자가 많았다 이말이여. 아 함라가면 아흔아홉칸 짜리 집도 있고 그런디. 그렁게로 그런 부자들이 있는디 강경서 이짝으로 지나갈라고 그러는디 함라 사람들이 반대해서 여기를 안지나갔다고 그런 소리는 들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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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 : 예전에 함열장이 커컸습니까?
A1 : 그렇지. 컸지.
B1 : 그럼 그 이유는 기차 때문입니까?
A1 : 아니 기차보담도 이 함열을 중심으로 이렇게 각 면들이. 지금 함열에 병원 잘 되는 것도 그거여. 몇 개 면의 중심지여. 말하자면 성당 웅포 망성 용안 이렇게 해서 중심지가 됭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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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 : 용안이 용과 관련되었단 말을 들었습니다.
A1 : 그것은 뭔고니 이게 용 혈로 혀가꼬서는 용두라는 디가 있어. 용의 머리. 그건 용두 마을 가서 들어봐. 용두라는 디가 용의 두. 용 머리리야 그게.
B2 : 그래도 용에 관련된 그런 것이 있으면 알려주십시오.
A3 : 내가 알기로 용안에 용의 내력을 타고 나가지고 용두가 있으면 용의 머리채. 그리고 용살리라는 데가 용의 끝이 용살 리가 있고. 용의 얼굴이라고 해가지고 용안은 편안하다고 했어. 큰 난이 일어나도 사람이 많이 상하들 않는다고 했어.
구술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