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명 : 용동면 > 대조마을

구술 기본정보

구분 내용
마을명 용동면 > 대조마을
구술자 김득추(1958)남자
면담자 하정일, 장윤준, 이순영
구술요지 마을 유래담
전설 및 민담
민속
구술일시 2013-02-20
비고 면담장소 : 용동 대조마을 마을회관
면담시간 : 2013년 2월 20일 11시
내용 : 마을 유래담, 전설 및 민담, 민속에 대한 인터뷰 진행
키워드  

문헌내용

대조(大鳥)․행정(杏亭) : ‘대조’는 그 지형이 큰 새의 형국이라 해서 일컫게 된 이름이라 한다. 그래서 새의 머리에 해당하는 부분의 묘소에는 전에 비석만 새우고 상석은 놓지 않은 것도 새의 머리를 누르지 않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말에 좀 넓게 터진 곳을 ‘큰새’라고 하니 그런 큰새의 한문자 표기인지도 모른다.‘행정’은 마을 뒤에 오래된 은행나무가 정자를 이루고 있었기에 생긴 이름.
『익산시사』

구술요지

1) 마을유래담 :
- 대조마을 : 큰 새의 형상이었기에 대조마을이라고 함.
- 행정 : 오래된 은행나무가 있었다 하여 대조마을이라는 이름 대신 불렸던 이름.

2) 전설 및 민담 :
- 공회당 : 경주 김씨 집성촌이라 집성촌 내에서의 어른들이 모여 상벌을 주는 곳.
- 세정승 혈 : 세 정승이 나온다는 명당.
- 용두의 비석 : 용두에는 비석이 없는데, 비룡을 비석으로 누르면 안 되기 때문이다.
- 구렁목 : 굽어진 곳에 있는 목으로 농번기가 지나고 어른들이 모여서 쉬어가던 곳.
- 수로 : 수로가 나면서 신왕마을이 잘되고 대조마을이 쇠퇴했다는 말이 있음.
- 나비혈 : 지나가는 스님이 이장님 댁 근처가 나비혈이라 꽃을 많이 심으면 좋은 일이 있을 거란 말을 듣고 실제로 그렇게 하니 집안에 좋은 일이 많이 생김.
- 용두 수렁 : 경지정리를 하기 이전에 수렁에 구멍이 있어서, 그 곳에 빠지면 죽는다는 말이 있었음.

3) 민속 :
- 충청도 문화권 : 언어는 충청도가 많이 섞여 있음.

구술채록

A1 : 김득추(56)-1958년

B1 : 하정일
B2 : 장윤준
B3 : 이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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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2 : 대조마을이 왜 대조마을입니까?

A1 : 저희 마을은 대조거든요. 큰 대자 새 조자인데 대조라는 명칭이 큰 새라는 뜻을 갖고 있어요. 그래서 이 모양이 마을 모양이 큰 새 모양이라고 그러드라구요. 어른들 얘기는 그러고.

B3 : 좀 더 자세히 얘기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A1 : 저희가 대조 마을이라는 게 큰 새 형상이라 대조마을이 있고 행정이라고 불러지게 된 이유도 은행나무가 굉장히 큰 은행나무가 고목인데 낙뢰를 맞아가지고 이렇게 좀 상해있는 그런 은행나무가 있어요. 그래서 저희는 대조라기보다는 행정마을이라는 이름을 많이 들어요. 은행나무 행에 정자나무 정자 말 그대론대 그 뒤에 은행나무 굉장히 오래된 고목이 있어요. 그 고목이 있어서 행정이라고 불렀고 아까 얘기한대로 대조라는 마을은 큰 새 형국을 이루어서 대조라는 마을이 생겼고요. 저 잘은 모르겠는데 저희 이 앞에 들판이 인자 옛날에는 경지정리 되기 전에 74년도에 경지정리가 이루어 졌거든요. 74년 이전에는 정월 대보름날 되면 앞에 두무마을 바로 앞에가 두무마을인데 이 옛날에는 논물을 가두어서 농사를 지었잖아요. 그서 이 두무마을허고 가는 길이 거기가 수문이 있었어요. 그래서 수문을 막으면 두무허고 저희 허고 거의 이렇게 얼음판이 된다고 그러나. 옛날에 인자 얼음판이 되요. 그럼 정월 대보름 날 마을별로 싸운다고 이러나 쥐불놀이 한다고 그러나 이런 것도 하고. 그런 것들을 했던 기억이 나요 저 어렸을 때. 그런 것들이 기억나는데 뭐 그런 정도. 그 다음에 그 유래는 아까 말씀 드렸고. 그리고 저희 마을에 그 문헌에도 나와 있듯이 경주 김가가 거의 과반을 이루고 있어요. 그래서 저희 어릴 때에 마을 공회당 여기는 인자 마을 회관은 없고 공회당이 있었어요. 그 공회당이 역할이 뭐였냐면 뭐 농사일 끝나고 쉬고 그런 놀이 그런 것도 했지만 저 어릴 때 보면 그 집성촌이다 보니까 마을에 잘잘못을 젊은이들이나 뭐 이렇게 잘못을 저지르고 그러면 뭐 옛날에 멍석말이 한다고 그러나요. 그렇게 총회를 해서 어른들 있고 잘못한 뭐 말썽부린 젊은이 있으면 말아서 때리기도 하고 그런 기억들이 나요. 뭐 그때도 저는 나이는 많이 안 먹었지만. 상벌이라는 것들을 그런 식으로. 왜냐하면 집성촌이라는 그런 것들이 씨족사회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 것들이 이루어지는 것들이 자연스러웠기도 했겠죠. 뭐 항열 집안 그런 것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뭐 지금은 그런 시설들이 다 없어졌어요. 회관중심체제고 공회당이 있긴 있는데 쉬는 정도에. 그리고 지금은 마을이 옛날하고 틀려져서 인제 경지정리 되고 하우스 이런 것들로 이루어지다 보니까 서로 인자 말하자면 뭐라고 해야 되나 그 바쁜 것 때문에 인자 그런 두레나 옛날에는 뭐 모심는 거나 반을 이루어서 했잖아요. 그랬는데 지금은 기계화가 되고 다 자기들 바쁘다 보니까 그런 동네 상 지금 대조 이 여기도 경로당이 있지만 상조회가 따로 있어요. 그 책을 가져올 껄 그랬나 오래된. 그런 그 옛날에 인자 한문으로 다 이렇게 쓰고 지금은 한글로 쓰는데 그런 상조모임이라는 게 있어서 지금 상조계장님도 있어요. 그래서 지금 이장 상조계장님 경로원장님 이 여기는 경로당이잖아요. 그래서 경로원장 그래서 체계가 세 개로 나눠져 있어요. 그래서 저는 그 상조계에 이장은 총무를 봐요. 그래서 인자 상조계 계장님은 대부분 제일 나이 많이 하신 분. 경로원장이 제일 많으시고 그 다음에 나이순으로 그런 식으로 진행을 하고 있고 마을 일이 그렇게 이루어지고 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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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2 : 저희가 조사를 해보니 우리 마을에 세 정승이 날만한 혈을 갖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A1 : 그게 인자 그 제가 아는 견해로는 저희 집안 중에 516 당시에 대한민국에 최연소 판사를 했던 분이 계시는데. 저희 집 뒤쪽에 터가 잇는데 그 터가 굉장히 좋은 터였대요. 근데 긍게 박정희 정권 시절에 판사를 해서 쉽게 얘기해서 사형 이런 것들을 해서 너무 젊은 나이에 해서 단명을 하셨어요. 서른 몇 살인가에. 그리고 고 바로 앞에 같은 집안인데 고려대 나와서 칠전팔기 했나. 한 아홉 번인가 열 번 봐서 하여튼 뭐 사시 합격해서 부장판사 했든가 그래서 지금 변호사 하고 계시고.

B2 : 그럼 풍수지리적으로 굉장히 좋은 마을이군요.

A1 : 그렇다고 해요. 근데 저희 인자 이쪽에 저희 집안쪽에는 몰라요 전북대학교 김기현 교수라고 풍수지리에 상당히 그런쪽에 계신 분이 계셔서 아까 여기도 잠깐 언급 돼 있드만. 저희 종산이 저 용안가면 용두 있잖아요. 용두. 이렇게 여기서 쳐다봐도 이렇게 가다가 산이 꺽어진 그 근방이 용두거든요. 용 머리라고 해서. 거기에 저희들 인자 그 경주 김씨 사승공파의 시조가 거기 계세요. 사승공파의. 그래서 흥왕에 묘가 있고 그쪽에 할아버지들이 사승공파. 그래서 흥왕하고 행정이 주로 경주김씨 사승공파들이 사는 곳이거든요. 그래서 아까 거기가 용머리라고 해서 용두잖아요. 저희들이 용두에 시제 모시는데 거기에는 비석이 하나도 없어요. 용 용이 승천을 해야 하는데 돌로 누르면 승천을 못할 거 아니에요. 그래서 용두에 저희들 시제 모시는 어른들 시조들 계신 그 묘는 비석도 하나도 없어요. 에 왜냐면 용이 승천을 해야 하는데 비석이나 상석 새우면 못 날으니까. 그런 게 있어서, 말하자면 비석이나 상석 이런게 하나도 없어요. 그냥 묘만 있고 시제만 모시는 그런 게 있어요. 그래서 저희 마을에서는 교수님들도 많이 있고 그 아까 얘기 했던 판사 나오셨고 검사도 나오셨고. 주로 인자 그런 교육쪽에 많은 사람들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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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2 : 우리 마을은 산신제나 술멕이같은 행사는 하셨습니까?

A1 : 그런 것들은 인자 기본적으로 칠석날. 지금도 저희 마을은 칠석날에는 그 마을 길 닦고 모여서 식사정도는 해요. 옛날같이 이렇게 풍물도 있지만 이런거 기본적으로 조금씩 하기는 하지만. 왜냐면 서로 지금 바쁘기 때문에 옛날같이 동네를 막 돌고 마을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꽹개리 치고 그런 것들은 들하죠 옛날보단. 이 기본적인 거는 마을 길 닦고 옛날에 이 저희도 우물이 한 개 두 개 세 개. 세 개 있었나요. 그러면 인자 칠설날 되면 우물 싹 퍼내고 그 안에 들어가서 청소도 하고 저도 인자 그 우물 속에 들어가서 청소같은 것도 하고 그랬는데. 지금도 우물 터? 우물 터는 없나? 지금은 다 없어졌구나. 근데 지금은 아쉽게도 우물도 없잖아요. 다 상수도 들어왔고. 그나마 작년에 우물 조금한 거 있었는데 그것도 없애버렸더라구요. 그래서 그런 것들은 지금은 전혀 없어요. 마을 우물 그런 것들이 전혀 없고. 지금은 인자 그런 것들도 거의 말하자면 뭐 않고 말 그대로 동네 청소나 하고 풀 좀 깎고 모여서 막걸리나 한 잔 하고 헤어지는 정도로 끝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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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2 : 구렁목은 어디입니까?

A1 : 여기 지금 삼정하고 이렇게 저기 집 한 채 있는 데 있죠? 거기가 구렁목이었어요.

B3 : 구렁이가 있어서 구렁목입니까?

A1 : 뭐 그런 말도 있었고 뭐 저도 어렸을 때 저기 이렇게 산 이렇게 내려가는 길에 두꺼운 구렁이 이런 것들이 나오고 그랬어요. 그래서 옛날에는 이 칠십 그 야산개발 경지정리가 칠십 몇 년도에 됐잖아요. 아까 말씀드렸듯이. 그 전에는 말 그대로 뭐 옛날 동물 뭐 산짐승들은 크게 여기는 깊은 저기가 아니여서 없었어요. 그런 것들은 기본적으로 없었고. 뭐 저희 면에 갱명산하고 봉화산하고 두 개가 있는데 연화마을 가면 뭐 혹시 옛날에 봉화 지냈다 해서 그런 쪽에 가면 뭐 토끼정도 한 두 마리 있는 그 정도였지 여기는 뭐 깊은 산은 아니었기 때문에 산짐승은 크게 없었어요.

B2 : 그럼 구렁이가 좀 많이 있었습니까?

A1 : 글쎄 그 정도는 아니었고 뭐 뱀 같은 거는 산이 있으니까 많이 있었는데 거기가 옛날에는 주점같이 가게가 있었어요. 가게가. 뭐 시골에는 나쁜 저기지만 농번기 일 끝나면 거의 겨울에 할 일이 없잖아요. 그래서 거기에 가게가 있으니까 모여서 술도 마시고. 옛날에 뭐 마작이라고 하나요? 그 대나무로 이렇게 돼 있는. 저도 어렸을 때 기억에 초등학교도 안 댕길 적에 엄마 손에 뭐 아부지 이렇게 모시러 가면 집에 안 들어오고 뭐 노름 한다고 그러나 마작한다고 하나 그런 거 하면 집에 잘 안 들어오시고 그랬잖아요. 그래서 거기 가면 방에 그 대나무로 만든 그 마작이라고 하나 그런 것들 하고. 그래서 그게 저희 유래가 구렁목이 그런 역할을 했었어요. 거기에 가게가 있어서. 이 근방에 그런 가게가 없어서 이웃마을 모이고. 지금도 터는 있는데 그 앞에 기와집 앞에가 그 터였었거든요. 그런 것들은 했는데 그렇게 큰 뭐 구렁이가 나오던지 산짐승이 나오던지. 그나마 그 앞에가 좀 커서 용성이랑 그쪽이 들이 커서 특별하게 그런 것은 없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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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3 : 우리 마을에 상여는 있었습니까?

A1 : 저희마을에 상여가 없어진지가 얼마 안됐어요. 아까 얘기했던 공회당 옆에 상여집이 있었어요. 그 상여집은 초상하고 나면 거기에 보관을 하잖아요. 그래서 어릴 때 숨바꼭질 할 때 거기에 숨이면 절대로 못 찾어. 무서워서 가지도 않지만. 그래서 그런 기억 들이 있는데 그런 상여집도 없어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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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3 : 경주김씨가 어떻게 마을에 들어왔는지, 또 재미난 이야기가 있었는지 얘기해주십시오.

A1 : 경주김씨가 흥왕이 큰집이고 저희가 작은집이거든요. 그래서 그 저도 족보일을 보면 이 동네에서는 저희가 제일 큰집이고. 그래서 그쪽 총무부하고 돈관리 하면서 족보에 관여를 해봤는데 그 특별하게 어디서 옮겨온 것은 없었고. 저희가 인자 그 위에 어른들 중에 흥왕에 가면 흥왕 초등학교 뒤에 그 저희들이.

B2 : 흥황말입니까?

A1 : 흥왕. 초등학교가 저희는 흥왕 하나 뿐이 없습니다. 흥왕초등학교 하나 뿐이에요. 저희 면에는. 그래서 할아버지부터 손자까지 다 동문이에요. 거의 여기 뭐 1회 졸업생부터 저희가 지금 칠십 몇회라 하는데 1회부터 뭐 거의 집안이 다 말하자면 동문이에요. 그래서 특이한 게 저희집에는 특별한 큰 싸움이 잘 안나는 것중에 하나가 그런 것들이요. 왜그러냐면 저희 용동이 조용한 면이기도 하지만 초등학교가 하나다 보니까 모두다 선후배고 다 동문일 꺼 아니에요. 뭔 일이 생기면 뭐 이렇게 연결되면 형의 친구 아니면 뭐 동생 할아버지 아버지 다 연결이 돼서 그런 부분에 저희들이 따른 데 보다는 융합도 잘 되고. 뭐 모여 하면 선후배니까 잘 되고 그런 것들을 하니까 저희 집에는 뭐 융합이나 소통이 잘 되는 면이라고 볼 수가 있어요. 그래서 그 저희 인자 그 김가들 중에는 흥왕하고 이쪽에 저기가 많이 살았던 이유 중에 하나가 옛날에 장예원 판결사를 했던 분이 흥왕에 할아버지허고 긍게 손자. 할아버지허고 손자가 두 명이 말하자면 장예원 판결사를 했어요. 긍게 옛날에는 벼슬을 하면은 이랬다드만. 내가 인제 이 동네 살면 이 동네 저기 이게 높잖아. 높은 산이 하나 있잖아. 그러면 그 근방에 제일 높은 산에 가서 이 만큼 내 땅 이렇게 했다는 그런 얘기를 이제 족보 만들면서 그 아저씨가 한 분이 그런 얘길 해주시더라고. 그래서 저희 할아버지 묘도 저희가 지금 종종 산이 어디가 있나면 와동에 있어요. 그 와동에 가면 저희 종산 대종종 그니까 아까 얘기한 용두에 할아버지가 계시다 하셨잖아요. 거기도 계시고 지금 저희는 중종종인데 중종종의 큰 저기는 종종의 저기는 와동에 있어요. 와동에 가면 따로 있고. 또 저희 저희 인자 그 저희 지금 납골당을 했는데 사종. 사종의 말하자면 그 어른도 시제 모실 때 장예원 판결사를 허신 분이 계셔서 흥왕 그 동네 뒤에가. 대부분이 옛날 전설에는 마을 뒷산에는. 지금도 그렇지만 마을에 인접헌대는 묘를 못 쓰게 하잖아요. 근데 저희 할아버지는 저기 바로 뒤에 있었어요. 바로 이 산에. 말하자면 집하고 20미터도 안 떨어진 산에 있었어요. 지금은 납골로 옮기면서 싹 옮겼는데 그랬듯이 초등학교 저기 뒤에 9대 할아버지가 장예원 판결사를 해서 바로 뒤에 묘가 있었어요. 그래서 제가 알기로는 아마 그런 벼슬을 하면서 이쪽으로 내려와서 터가 이루어져서 경주 김씨들이 여기에 사승공파 할아버지가 이렇게 오면서 이쪽으로 되지 않았나 그렇게 얘기를 들었거든요. 그래서 아마 집성촌이 흥왕에 가면 김가들 솔찬히 있어요. 그래서 저희 마을은 특히나 한 3분의 한 저희 어렸을 때만 해도 90프로 95프로 성씨 다른 사람들이 몇 가구 안됐어요. 한 서너가구. 근데 지금은 많이 외지에서 들어왔고 그래서 몇 십 가구 되는데 한 지금은 거의 100프로는 아니더래도 90몇 프로는 될 정도로 말하자면 집성촌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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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3 : 혹시 마을에 도로가 나면서 혈자리가 안좋아졌다는 그런 얘기는 들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A1 : 그건 인자 제가 그럴 리는 없겠지만. 요즘 들어서 그런 길이 나고 그런 저기 변화는 거의 없었어요. 마을길 포장하고 기찻길 그런 건 애기 때부터 있었고. 근데 한 가지 바뀐 건 뭐였냐면 아까 오던 큰 길에 배수로 있잖아요. 그게 강경서부터 익산 저 김제까지 가는 수로잖아요. 농수로. 그 수로가 생기면서 말하자면 혈이 막혔다는 그런 말이 있어요. 그래서 저쪽 신왕 그쪽허고 그쪽은 좀 뭐라고 헐까 잘 되고 저희는 쇠퇴하지 않았나 그런 얘기들을 허드라구요. 왜냐면 물이 내려오는데 물이 막혔거든요. 막히면서 인제 경지정리 되고 그 농로 사업이 크게 되면서 막혔다는. 그래서 그렇게 큰 저기가 이 동네서 옛날같이 검판사 나오고 그런 것이 저기하지 않았나 그런 얘기가 있더라구요. 그런 뭐 아까 얘기대로 그런 것들이 길 나고 그런 얘기들을 어른들은 하시더라구요.

B2 : 그런 얘기가 있었군요.

A1 : 그리고 저희들이 지금 아까 큰 거기였었고 이따 저희집으로 갈랑가? 이쪽으로 저 어른들이 옛날에 스님이 가시면서 저는 인자 저쪽 남쪽으로 저 끝에 살아요. 근데 거기에 뭐 혈 중에 나비혈이라고. 근데 저는 꽃 이런 것들을 좋아해서 화단도 집에 만들고 꽃도 잘 심고 그러는데 그래서 그런 꽃들을 심으면 나비들이 많이 날라오기 때문에 좋아져서 그런다고는 하는데 그래서 그런지 뭐 저희 조카들도 그렇고 서울대학교 연대 그런 데를 다 다녀요. 다니고 졸업하고 뭐 뭐 며느리도 의사고 걔도 의사고. 그 다음에 여동생 아들 딸도 연대 다니는데 하나는 연대 의대 다니고 공대 다니고 그러는 지 몰라도.

B2 : 나비혈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얘기해 주십시오.

A1 : 저도 잘은 모르는데 그 옛날에 스님들 뭐 뭐라고 해야지? 돌아다니면서 공양 그런거 하면서 지나가다가 한 마디씩 하잖아요. 그런 것들로 뭐 인자 우리 어머님이 말씀 해 주신거여요. 그래서 그 스님이 그렇게 지나가는 말로 그런 말을 했대요. 말하자면 여기가 나비 혈이라 꽃 같은 것들 이런 것들을 많이 심으면 좋을 거라고. 그런 것들도 있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뭐 저희 형도 좋아했고 저도 좋아했고 그래서 나무 같은 것도 심고 꽃도 심고 그러는 편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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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2 : 주면에 삼정 두무 산왕마을이 있습니다. 삼정마을은 예전에 뭐라고 부르셨습니까?

A1 : 제가 알기로 원래 그 삼정도 대조였다고 알고 있거든요. 근데 인자 너무 커지다 보니까 나눴다고. 왜 그러냐면 삼정에 농협 면사무소 파출소 그런 것들이 다 있거든요. 기차역전이 있다 보니까 그 모든 행정기관 그런 것들이 모이다 보니까 그래서 나눠졌다고 알고 있어요. 옛날에는 대조라는 그런 한 저기였었는데. 행정구역 나눠지면서. 저기 용동이라는 지역이 용안면이었어요 원래. 용안면이었어요. 역전도 용안역전이었어요. 근데 그게 칠십 칠십사년도에 갈라졌나? 아니여 팔십? 팔십몇년도에 갈라졌나. 긍게 행정구역이 용안 지금 23번 국도를 따라서 저쪽은 용안이고 이쪽은 용동이거든요. 너무 크다보니까 용동이라는 걸로 행동구역을 나눴어요 80년도에. 그래서 역전도 용동역전으로 바뀌었고 면사무소도 용동면사무소로 바뀌었어요. 그래서 용안하고 용동 구별이 그 때부터 된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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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2 : 방금 기차역에 대해서 얘기하셨습니다.

A1 : 네 기차역이 있었죠. 지금은 폐쇄되었어요.

B2 : 그럼 일본인들도 있었습니까?

A1 : 그 정도까지는 저도 모르고요. 저도 인자 학교는 함열로 다녔는데 인자 초등학교 나오고 나면 여기 이쪽 두무 이쪽은 강경으로 가고 이쪽은 함열이나 익산으로 갔어요. 그래서 기차 통학하고 그랬거든요. 그래서 저 어렸을 때 학교 다닐 때만 해도 기차역이 굉장히 번성했어요. 저 초등학교도 지금은 전교생이 한 80명 뿐이 안 되는데 그 때 저희 초등학교 다닐 때 선배들 정도는 1300명 이렇게 됐어요. 초등학교 하나니까요 여기는 더더군다나. 그래서 세 네 개 반 까지밖에 없거든요. 근데 아쉽게도 지금은 역사속에 묻혀서 지금은 70명? 80명? 뭐 이렇게 장학금 주러 가보면 한 10명 내외에서 졸업식 하고. 저기 고창마을 가면 화가 하셨던 이왕재 선생이라고 있어요. 고창 가서 물어보면 상당히 잘알아요. 고창에 상당히 그 저희 초등학교 출신 중에는 거기 가면 뭐 줄줄이 잘 얘기 할꺼에요. 이제 그 정도 하면 우리 마을은 거의 얘기가 다. 제가 아는 정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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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3 : 도깨비나 여우에 홀린 그런 이야기는 마을에 많이 있습니까?

A1 : 도깨비불 뭐 그런 거는 시골에 다 있지 않았었나요? 저도 술 먹고 들판 매번 돌은 적은 있어요. 근데 그런 것들은 동네마다 있지 않아요? 뭐 구체적으로 그 정도는 아니었고 저도 술에 취하면 여기서 저 두무하고 강경하고 충청도 경계잖아요. 그래서 술 마시고 하여튼 논길로 오는데. 대부분이 그 홀릴 때가 대부분이 뭐냐면 안개가 자욱히 꼈다던지 좀 그런 때 그러니까 술은 취했는데 어떻게 돌다보면 내내 거기같고 또 가다보면 거기같고 그래서 몇 번 돌던 때가 기억이 나요. 그래서 술 좀 깨면 찾아오고 그랬던 게 기억이 나는데 도깨비불은 거의다 있었던 것으로 기억은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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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2 : 방금 얘기 중에 충청도하고 가깝다고 하셨습니다.

A1 : 두무 다음이 바로 망성면이고 망성면허고 여기 충청도 강경허고 한 8키로? 7키로 8키로 뿐이 안 떨어 졌거든요? 그래서 생활권이 강경이었죠. 왜그냐면 강경이 저희 초등학교 시기에 강경장 강경에 대해서 안나오던가요? 강경이란 데가 옛날에 3대 시장 4대 시장 안에 들었잖아요. 그래서 지금도 뭐 젓갈이 유명한 게 그것 때문에 유명하기도 하고. 제일 거기 시장이 강경이에요. 어렸을 때도 그렇고 저는 인자 고등학교 때나 방학 때 콩 심고 뭐 콩 팔러 돼지새끼 팔러 고구마 팔러 전부 리어카에 싣고 전부 강경장에 내다 팔았어요.

B2 : 그럼 강경장을 이용하는 익산 시민들이 우리 마을을 지나갔거나 하는 기억은 있으십니까?

A1 : 저희 마을부터 두무 그 해서 그 망성으로 나가는 길이 있어요. 가는 길이. 거의 그 길을 이용하죠 이쪽 사람들은. 아까 두무 가는 길이 수문이 있었다고 그랬잖아요. 거기 막으면 물 찬다 그랬잖아요. 그 수문 넘어서 그 여기 지금 신덕이라는 지금은 신덕으로 바뀌었더라구요. 그리해서 기찻길 넘어서 강경으로 넘어 다녔죠. 그래서 물문 있는 데서 여름에 쉬고 이 물 인자 이렇게 물 내려 가면 거기서 말하자면 물고기니. 여기는 그 경지정리 되기 전에는요 뭐 장어 가물치 매기 이런거 엄청 많았어요. 왜냐하면 옛날 말 그대로 물 내려가는 똘이 있었으니까. 그래서 저희 어릴 때는 아마 지금은 뱀장어 그런 거 먹을라면 몇 십 만원 줘야 될껄요? 저희는 연탄불에다 구워먹고 그랬어요. 그거. 뭐 참게 뭐 그런 이 똘에 그런 것들이 엄청 많았어요. 아 그 똘에 지금은 용두라고 그래가꼬 그 뭐라그러지? 수렁이라고 그러나? 이 똘 가운데에 똘 한쪽 폭 들어간 데에 그 수렁이라는 데가 있었어요. 그래서 거기 빠지면 용두구댕이로 나온다고. 그래서 말하자면 도낙이라고도 하고. 우리 어렸을 때 말하자면 물이 솟는다고 그러죠. 큰 지하수 같은 거 이렇게 나온다고. 거기에 빠지면 못 나온다고. 빠지면 용두로 나온다고. 그래서 말 그대로 지하수 통하는 그런 것들이었을 거에요. 그래서 경지정리 되기 전에는 저희들이 뭐 민물고기 그 똘. 또 예를 들어서 물 내려가는 그게 솔찬히 크잖아요. 옛날로 비하면. 근데 거기 뚝이 있잖아요. 대부분. 그러면 기니 참게니 그런 게 엄청 많이 살았어요. 이게 아까 똘 경지정리하고 농수로가 생기면서 그 다음에 용수로 생기고도 갈기 그런 게 있잖아요. 갈기 그런 것이 엄청 진짜 마당에까지 용수로를 통해서 왔는데 그게 세멘으로 되면서 싹 없어졌어요. 생태계가 완전히 파괴 된거지. 세멘화 되면서. 그래서 옛날에는 여기가 그런 옛날에 먹을 게 별로 없어잖아요. 쉽게 얘기해서 먹고 살기가 베겼는데. 그래도 시골 사람들이 건강하게 컸던 이유가 민물고기나 그런 고단백질 그런 것들을 먹고 살아서 그랬지 않앴는가. 그 예를 들어 옛날 손으로 모내기 헐 때고 이럴때는 그런 거 잡아먹고 살았잖아요. 물고기 송사리. 장마 지고 나면은 소쿠랭이 갖고 물 내려가는 똘 밑에 내려가면 뜨면 뭐 이만큼씩 한 바가지 나올 만큼 많았으니까 말려가지고 이렇게 먹고. 그런 추억이 정말 이렇게 많았었는데. 그 아까 얘기했던 그 막는 수문 그 옆에는 뭐랄까 크면 헤엄치고 놀고. 여름 내 놀고. 그런 추억들이 없어졌어요.

B2 : 그럼 이 곳은 충청도 생활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A1 : 여기는 거의 충청권 생활이라고 봐야혀요. 그래서 제가 어디 서울 같은 데 가서 얘기하다 보면 전라도 산다 그러면 응? 충청도 말 쓰는데? 그렇게도 해요. 여기가 전라도 말과 충청도 말이 섞였어요. 그래서 얘기하다 보면 충청도 사람 아녜요? 그런 얘기도 듣고. 좀 이쪽 저기 허면 아닌데? 전라도 사는데? 그러면. 그게 바로 경계기 때문에 말투가 약간. 왜그냐면 지금은 연무대 황하잖아요. 거기 옛날엔 전라도였어요. 거기 다. 물론 지형적으로 알아보면 알겠지만 황하까지 전라도였기 때문에 여기가 거의. 저희 외삼춘 사는 데가 원래 그 연무대 황하였거든요. 거기 면장도 하시고 그랬는데 어렸을 때 놀러가면. 걸어서 다 가고 그랬죠. 걸어서 가고 그랬는데. 그래서 저희가 약간 전라도 말투지만 충청도 말투도 섞여 있어요. 저희는 잘 못 느끼는데 그 친구들도 가끔 모르는 사람하고 얘기하다 보면 어? 충청도 사람이냐고 물어보는 것도 있고 그래요.

B2 : 음식은 어떻습니까?

A1 : 음식은 거의 전라도 음식이면서 저도 인제 젓갈 좋아하거든요. 그 이유는 충청도 장을 거의 그쪽으로 보다 보니까 음식은 젓갈 정도도 이쪽에 많이 먹는 편이거든요. 음식 문화는. 전라도 음식이지만 젓갈도 잘 먹는 그런 쪽이에요.

구술사진








김득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