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명 : 오산면 > 옥포마을

구술 기본정보

구분 내용
마을명 오산면 > 옥포마을
구술자 오창남(1939)남자
구술자 곽인석(1938)남자
구술자 김보경(1958)남자
면담자 하정일, 장윤준, 이순영
구술요지 마을 유래담
민속
철도
구술일시 2013-07-04
비고 면담장소 : 오산 옥포마을 마을회관
면담시간 : 2013년 7월 4일 14시
내용 : 마을 유래담, 민속, 철도에 대한 인터뷰 진행
키워드  

문헌내용

옥포(玉浦)․중광리(中光里) : 만경강 하부의 평야부로 전에는 김제군 청하면(靑蝦面)과 통하는 나룻터가 있었는데 그 나룻터의 이름이 ‘옥포’였다.

『익산시사』

구술요지

1) 마을유래담 :
- 옥포마을 : 김제 동지산으로 다니던 배의 포구가 있던 마을.

2) 민속 :
- 포구 : 익산-군산-김제의 경계지역. 포구가 있었다고 함.
- 간척 : 본래 바다였으나, 일제 강점기 때 농경지로 간척을 했다고 함.
- 지경장 : 김제에 있는 지경장을 주로 이용함.
- 우물 : 물이 짜서 빨래나 식수로 이용하기 어려웠다고 함. 콜레라의 원인으로 믿고 있음.
- 전기시설 : 수문 작동 때문에 전기시설이 타 마을보다 일찍 정비되었다고 함.
- 피난터 : 한국전쟁 피난터.

3) 철도 :
- 임피역 : 일제가 수탈한 곡식을 임피역을 통해 군산으로 수송했다고 함.

구술채록

A1 : 김보경(56)-1958년
A2 : 오창남(75)-1939년
A3 : 곽인석(76)-1938년

B1 : 장윤준
B2 : 이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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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 : 반갑습니다. 원광대학교 대안문화연구소에서 옥포마을 조사를 나왔습니다.

A2 : 우리가 역사를 대충이라도 알아야 자료제공을 해 드릴 텐데 대충이나마 잘 모르네요.

A1 : 지금 옛날에는 굉장히 많이 마을이 컸는데, 지금은 42가구만 남았어요.

B1 : 우리 마을이 신지리 옥포마을인데요. 여기에 포구가 있었다는 이야기인가요?

A1 : 네. 제가 이야기만 들었는데, 예전에 김제 동지산으로 다니는 그 포가 있었다고 하더라구요.

A2 : 예전에 일제 때는 그 나루를 이용해서 김제를 다니고 그랬데요.

A1 : 여기가 만경강인데요. 만경강 제방이 있어요. 여기가 바닷물이 오던 곳이에요. 그런 것을 왜놈들이 축조를 해서 제방을 쌓았는데, 그 전에는 나룻배가 있었다는 거에요.

B2 : 그럼 우리 마을은 예전에 김제와 교류가 있었나 보네요.

A1 : 지금 우리가 앉은 곳은 익산인데, 저쪽 집은 군산이에요. 그러니까 지금 우리 마을이 군산이랑 익산 경계고. 만경강을 넘으면 김제이죠. 군산, 익산, 김제 경계마을이 우리 마을이에요.

B1 : 그럼 만경강과 우리 마을 직선거리고 얼마나 되나요?

A1 : 한 700미터 정도 되죠.

B1 : 만경강이 굉장히 가깝네요.

A2 : 저도 들었는데, 예전에는 물고기랑 바닷고기가 참 많이 들어왔다고 해요. 지금은 새만금 때문에 그렇지 예전에는 밀물, 썰물 때문에 바닷고기가 참 많이 들어 왔데요.

A1 : 왜놈들이 축을 쌓기 전에는 여기가 바다에요.

A3 : 여기가 조수 방지를 하고 논도 만들려고 수문을 만들고 뚝을 쌓은 거죠.

B1 : 그러면 일본인들이 농토를 만들어서….

A1 : 벼 나락까지 다 털어갔죠. 그때는 공출이라고 했어요. 벼농사를 지으면 공출을 하잖아. 그게 군산에서 다 합쳐서 배로 일본으로 가져갔데요.

B1 : 우리 마을은 그럼 쌀을 군산까지 어떻게 가져갔나요?

A1 : 배 수송은 안하구요. 임피 역전이 있으니까 임피 역전, 전군도로. 이렇게 군산으로 이동시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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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 : 임피가 참 가깝나 보네요. 그럼 시장은 어디로 다니셨나요?

A1 : 임피가 가깝죠. 우리 마을엔 솜리장, 대아장, 지경장 이렇게 이용했죠.

B2 : 지경장이요?

A1 : 지경장. 김제에 있는 장을 지경장이라고 했어요.

A2 : 대아장에 소장이 있었어요. 가축장. 그래서 대아장으로 많이 갔었어요. 우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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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2 : 우리 마을이 구술옥자를 쓰던데, 옥이 많이 나는 곳인가요?

A1 : 아니에요. 포자는 분명히 포구라는 뜻인데, 구술은 없어요. 예전에는 중광리라고 했지. 지금도 군산에 중광리라는 말이 있어요. 우리 어릴 적에는 군산이랑 익산이 여기 경계니까. 그래서 그냥 다 통틀어서 중광리라고 말했지, 해방 이후에나 옥포가 되었지.

B1 : 혹시 중광이나 옥포나 오산에 회사 같은 거 있었나요?

A1 : 농장. 회사라고 안하고 농장이라고 했죠. 오산에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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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2 : 우리 마을엔 바닷물이 많이 들어왔나요?

A2 : 그래서 샘이 짜. 굉장히 짜. 흰 빨래를 못 할 정도야.

A1 : 작두샘 팔 줄 아는 기술자가 우리 마을에 살았어요. 그래서 집집마다 다 개인샘이 있었어요. 상수도가 있으면서 없어졌지.

A2 : 그래서 물 색깔이 푸르스름해서 밥을 해먹으면 참 파란 밥이 되었어요. 철분이 많아서.

A1 : 그래서 치아가 참 안 좋지.

B2 : 여과는 안했나요?

A1 : 여과기를 만들었지. 모래, 숯 같은 거 넣어서 받혀서 먹고 그랬어. 그런데 사실 내가 해봤지만 그게 참 힘들고 보통 작업이 아니야. 청소하기 너무 힘들어서 여과를 잘 안하고 그랬지.

A2 : 예뚜기라고 그렇죠? 박정희 대통령이 시찰을 하는데, 평화동 거기. 동익산 뒤에. 거기에 마을 주민이 이빨이 하도 안 좋아서 수도를 깔아줬데요.

B1 : 샘을 깊게 팔수가 없었겠네요.

A1 : 그렇지. 집집마다 다 샘이 있어요.

B1 : 땅을 깊게 파면 아직도 뻘이 나오나요?

A1 : 그렇지! 아직도 뻘이 나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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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 : 그럼 논물은 어디서 끌어오시나요?

A1 : 예전에는 대아리 저수지를 썼어요. 거기 물을 군산까지 썼다고. 그건 일본인이 만든 거에요. 군산 식수까지 그걸 댔는데, 농번기에 매일 싸웠어요. 부족하니까. 그러다 중간에 금강 양수장을 만들었어요. 나포에. 그래서 금강물을 용수로 썼다고. 그래서 그 물을 올리다 보니까 동이리까지 가요. 그 물이. 대아리 물이 동이리를 거쳐서 여기서 먹던 거를 농번기엔 물이 적어서 싸움이 많았는데, 금강물을 양수해서 탑천강으로 품어서 여기까지 오는 거지. 그리고 그 물이 김제까지 가는 거야. 김제 가는 건 여기서 먹는 것을 보내주는 거지. 만경강 밑으로 해서.

B2 : 물고기가 참 많았나요?

A1 : 그럼 물고기가 참 많았어. 새만금 때문에 그렇지. 나 어릴 때는 조수 때문에 피해도 있었지만 물고기는 참 많았어. 지금은 둑을 막아서 농경지야 농경지. 그땐 흔한게 망둥어였어. 장어는 지금도 가끔 하나씩 나오고 그래요. 뻘에 사는건 다 있었어.

B1 : 우리 마을은 집성촌인가요?

A1 : 각성받이 마을이지. 논 따라서 들어온 사람들이 참 많아.

A3 : 예전엔 호열자가 참 많이 돌았어. 물 때문에 그런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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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 : 술멕이는 어떻게 하셨나요.

A2 : 칠월칠석에 했죠.

A3 : 한 가지 이상한 건 우리 부락은 샘이 좀 괜찮았어. 다른 마을은 너무 더러웠는데, 그래도 이 마을은 그냥 먹을 만 했어.

A1 : 이 근방 동네는 황톳물이 나왔어. 그래도 여기는 맑은 편이었어. 염기는 좀 있어도 색깔은 참 깨끗했어. 그런데 기름같이 뭐 뿌옇게 뜨긴 해. 하여간 우리 마을이 전기는 일찍 들어왔어.

A2 : 저기 수문 있죠? 거기 작동 해야 잖아요. 그리고 무슨 전기 회사가 있었다고 해요. 제가 분명히 들었어요. 그래서 이 동네가 빨리 전기가 들어왔어요. 그런데 그 전기가 군산에서 들어 온거죠. 선들문. 선들문이 크게 문이 7개 있었어요. 그거 때문에 그래요. 우리 친정동네엔 70년도인가 들어왔어요. 그런데 이 동네는 해방 이후에 바로 들어왔다고 해요.

A1 : 지금 그 경로당 자리. 거기에 변압기가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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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2 : 도깨비 같은 건 없었나요?

A1 : 최분터가 있어요. 사람이 늙으면 모시는 곳. 거기에 도깨비 불이 많다고 그랬어요. 시신을 육탈 될 때까지 모아서 있었거든. 사람이 죽으면 살이 있는 시신을 매장 하는 게 아니라 나무 같은 곳. 교탁 같은 곳에 받쳐 놓으면 살이 없어지잖아. 그럼 뼈만 추려서 묻는 거야.

B1 : 애장은 어디에 하셨나요?

A1 : 애장은 대게 만경강 둑에 많이 했지. 여긴 산이 멀고 그러니까. 만경강 둑에 묻은 거지.

A2 : 지금도 뼈가 나와요.

B1 : 공동묘지는 어디에 있었나요?

A1 : 전군대로 가다가 호원대 들어가는 좌측 산. 거기가 공동묘지였어요. 군산시에서 거기 공원화 한다고 파묘하라고 했는데, 파묘 안한 사람들이 많아서 결국 못 만들었지.

B2 : 예전에 당산나무가 있었나요?

A3 : 당산나무가 있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다 없어졌지.

A1 : 당산나무가 없어진지 좀 오래 되요. 당산나무 임자가 무당도 했는데, 거기서 죽고 하니까 그냥 자동으로 없어지고 그랬지. 관리를 제대로 안하고 그러니까.

B1 : 당산나무 없애면 동토 맞는다고 하던데.

A1 : 일부러 잘랐나 그런 건 모르겠어요. 우리가 어릴 적에 없어졌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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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2 : 고기도 많이 있었다고요.

A1 : 여기는 참개, 말조개, 장어가 참 많았어요. 여기가 물이 많으니까 고기가 참 많았지. 똘물이 오염되어서 없어졌지만, 그땐 참 많았어. 왜놈들이 개간을 해서 여기가 농토가 된지 얼마 안 되. 지금도 염기가 가끔 올라오는 곳이 있어. 논에서 풀 메다가 참개를 참 많이 잡았다고. 그런데 농약이랑 물이 더러워지니까 없어졌지. 민물 새우도 참 많았고.

A2 : 배추를 절일 때 그냥 만경강 물에 담구면 배추가 절어졌다고. 모래땅이니까 여기는 해수욕도 많이 하고 그랬어.

A1 : 조수가 드나 들 때는 땅이 안 죽었어. 바다 생물이나 이런 게 많이 살았어. 그런데 지금은 없어졌지. 온갖 것이 다 많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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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 : 그리고 또 다른 이야기는 없었나요?

A1 : 우리 마을이 원래 피난터였어. 6.25때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고. 그래서 사람들이 피난터라고 했어. 그래서 이 마을이 각성받이 마을이야.

B1 : 전쟁 때 인민군이나 국군 같은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진 않았나요?

A1 : 인민군? 사실 인민군은 해코지를 안했어. 우리 마을 사람들에게 나쁘게 안했다고. 그런데 지방민이 참 많이 해코지 하고 그랬지.

A2 : 원래 인민군은 해코지를 안했데요. 그런데 국군 중에 지역사람들. 인민군들에게 머리 사람 쓴 사람들. 인민군들 앞잡이. 이런 사람들이 참 나빴다고.

A1 : 사실 이북 사람들이 와서 여기에 해코지를 안했고.

A3 : 만경강에 방공호를 많이 팠어. 개인호. 그걸 인민군이 판거야. 인민군들이 파서, 그렇게 부역시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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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 : 우리 마을이 예전엔 농사짓는 분들이 많아서 부촌이었겠어요.

A2 : 그렇죠. 예전엔 참 부촌이었는데, 지금은 빈촌이죠.

구술사진



왼쪽부터 김보경, 오창남, 곽인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