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명 : 오산면 > 오산마을

구술 기본정보

구분 내용
마을명 오산면 > 오산마을
구술자 장영만(1928)남자
구술자 김영배(1938)남자
구술자 서길웅(1943)남자
면담자 장윤준, 이순영
구술요지 마을 유래담
전설 및 민담
민속
철도
구술일시 2013-07-05
비고 면담장소 : 오산 오산마을 장영만씨 자택
면담시간 : 2013년 7월 5일 11시
내용 : 마을 유래담, 전설 및 민담, 민속, 철도에 대한 인터뷰 진행
키워드  

문헌내용

오산(五山) : 뒤 산이 자라의 형상이라 하여 생긴 이름. 따라서 산 이름이 먼저 이루어졌고 그에 따라 마을 이름이 생긴 것. ‘자라뫼→오산(鰲山)→오산(五山)’ ‘오(五)’ 자로 바뀐 것은 1914년.

『익산시사』

구술요지

1) 마을유래담 :
- 오산마을 : 자라(鰲)의 모습을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
- 원오산마을 : 자라의 알에 해당된다.

2) 전설 및 민담 :
- 일왕과 귀족 : 일제 강점기 때 오산에서 수탈한 미곡을 일왕과 당시 귀족들이 먹었다는 민담.

3) 민속 :
- 불이농장 : 불이흥업농장이 있었다고 함.
- 신사 : 일제 강점기 때 일본 신사 터가 아직 남아 있음.
- 미곡생산량 : 일제 강점기 미곡생산량이 전국 최고였다고 함.

4) 철도 :
- 오산역 : 학생들이 통학을 위해 주로 이용하였음.
- 이리역 폭발사고 : 당시 폭발 사고로 인해 오산마을 유리창이 많이 깨졌다고 함.

구술채록

A1 : 장영만(86)-1928년
A2 : 김영배(76)-1938년
A3 : 서길웅(61)-1943년

B1 : 장윤준
B2 : 이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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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 : 안녕하세요. 원광대학교 대안문화연구소에서 오산마을 조사하러 왔습니다. 반갑습니다. 우리 연구소는 마을 역사를 제대로 보존하고 복원하기 위한 조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오산면에서 오산마을은 제일 중요한 마을이라고 생각되는데요, 오산 마을에 대한 많은 이야기 부탁드립니다.

A2 : 우리 오산마을은 사실 다섯 오가 아닙니다. 자라 오(鰲)를 사용합니다. 목천포에서 우리 형상을 보면 자라의 머리까지 싹 있어요. 원오산은 자라 알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소나무가 좀 있었는데 그게 자라 알이에요. 오산면에 오산은 삼개 마을. 서오산, 오산, 원오산이 한 개 마을이었어요.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갈라져 나간 거에요. 원래 뒤에 보면 아시겠지만 불이(不二) 농장이 있었어요. 우리 아버지가 불리 농장에 다녔어요. 원래 오산에는 불리농장이 있었고요. 원래 이 산을 일본 사람들이 세퍼트 개를 가지고 다니면서 산을 지켰죠. 그리고 그 산에는 신사가 있었고요. 신사 흔적은 이제 없고, 터만 있어요. 현재 우체국이 있는 곳에는 일본 소학교가 있었고요. 불리농장이 있었고. 그런 실정입니다.

A1 : 이 오산이라는 곳은 애당초에 원 바탕은 잘 모르지만. 오산이라는 광역한 곳은 오산 농토가 전국적으로 제일 좋은 농토로 되어 있었어요. 그래서 옛날 농민들도 많이 왔다 갔어요. 당초에 일본에서 우리나라를 침략을 했는데, 후지 간타로라는 사람이 있어요. 그걸 불리라고 하는데, 전언에 의하면 그 사람이 군산 항구에 배로 일본에서 왔다고 해요. 그리고 거기서 넓은 광야를 쭉 둘러 봤나 봐요. 그것이 애당초 불리농장이 창립되게 된 동기야. 그런데 불리농장, 후지간타로라는 사람이 이곳을 개작을 했어요. 개작을 하고 보니 경작인이 필요하니까 여기 이 바닥에는 본디 뿌리를 내리고 살던 씨족들이 별로 없어요. 외금산에 이씨들이 있고, 모산평에 황씨들이 좀 있고, 내금산에 김씨들이 좀 있고. 불과 씨족이 얼마 안 되요. 그러니까 노동인구가 부족하니까 소작인들을 모집을 했어요. 모집을 해서, 자라의 알처럼 생겼다는 동네에다 기숙사처럼 생긴 긴 집을 지었어요. 여러사람들이 거주할 수 있는 가옥을 지었어요. 일본말로 나가야라고 하는데, 긴집이라는 뜻이여. 그곳에 소작인들이 와서 살았죠. 그러니까 오산은 본디 씨족은 얼마 없고, 외지에서 불리농장을 개간을 한 답을 소작하기 위해서 모여든 인민촌이나 다름없어. 그래서 이 오산에는 애향심이 없어요. 그 이유가 집성촌이 없다는 것이죠.

B1 : 각성받이 마을이라는 뜻인가요.

A1 : 그렇지. 그렇게 해서 이 오산이라는 곳이 대한민국에서 미곡생산으로는 제일 다량 생산을 하는 고장으로 아주 유명하게 된 거에요. 말하자면 물고기로 치면 가운데 토막에 해당된다고 불렀어요. 그렇게 부를 정도로 미곡생산의 요지였어. 그래서 이 불리농장이 바로 여기서 20미터 앞에 있는데, 지금도 그 터가 그대로 있어. 그런데 지금은 화재가 나서 전부다 타버리고 사택만 남았어요. 그런데 거기에 2층 집을 지었어요. 사무실. 사무실을 지었는데, 그 사무실이 호남에서 맨 처음 지은 2층집이라고 해서 근방의 사람들이 구경까지 하고 그럴 정도로 기이한 건물을 지었던 것이었어. 목조건물.

B1 : 그렇다면 오산은 미곡수탈이 굉장했을 것 같습니다.

A1 : 그렇죠. 여기서 생산한 미곡을 아주 정밀하게 재생산하는 공장이 또 있어요. 2층 공장이요. 전부 유리로 깔아서 쌀을 그 위에 뿌려놓고 골라. 거기에 이물질이 없도록 잘 선정을 해서 일본 천황에게 상전을 하는 거야. 그래서 당초에 그런 목적으로 군산 철도가. 군산선이 만들어진거에요.

B1 : 군산선….

A1 : 군산선은 이리에서 군산까지 가는 그 철도를 군산선이라고 해요. 그게 뭐나면 농산물 수송 열차를 운행하기 위해 개설을 한 철도인거지. 군산에 가면 미창이 있어요. 미곡창고. 전부다 여기서 만든 미곡을 그 창고에 전부 모아두었다가 배로 해서 일본으로 갔던 거야. 아주 오산은 일본 천황과 귀족들의 식량 공급지야.

B1 : 오산에서 나온 미곡을 일본의 천황에게.

A1 : 암! 그렇지! 여기 오산 쌀이 일본으로 모두 다 갔어.

B1 : 이조시대 때에도 쌀 생산이 많았나요?

A1 : 아니지. 이조시대에는 여기는 개간을 안했지. 지금도 갈대가 많이 나와. 바닷물이 여기까지 들어와서 일본 사람들이 이 만경강에 제방을 쌓은 거지. 사실은 일본 사람들이 우리 한국에 간접 기본 시설이랄까? 사회 시설을 거의 다 지네들을 위해서 만든 거야. 우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말하자면 오산이라는 곳이 바로 대아면. 대아면이라는 곳이 있는데 거기에 이마무라 농장이라는 곳 있어. 이리에는 화성농장. 구 시장 쪽으로. 갈산동 올라가다 보면 있어. 동성극장이라는 곳이 있어. 거기가 원래 농장 건물이었고. 그런 것들이 모두 본거지는 오산이여.

B1 : 익산역 근처에 미곡수리조합 건물이 아직…

A1 : 암! 그래서 평화동에 전북 수리조합이라고 해서 빨간 벽돌 건물로 3층 건물을 지은거지. 지금도 있고.

B1 : 결국 조선인들이 개간을 한 거죠. 지게로 다 짊어지고.

A1 : 그렇죠. 모두 결국엔 조선인들이 삽이랑 지게로 다 만든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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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 : 사엄은 없었나요?

A1 : 사엄은 농감이라고도 하는데, 소작인들을 다스리는 사람을 사엄이라고 해요.

B1 : 사엄은 조선인이 많았다고 하던데요.

A1 : 그렇지 조선인을 써야 경작자와 말이 통하니까.

B1 : 사엄은 대우도 좋고 월급도 좋다고 하던데요.

A1 : 그렇지. 사엄은 그때 당시에 유지야. 왜냐. 소작인들이 소작료를 조금이라도 감하기 위해서 뭐라도 선심을 써야 하고, 또 소작료를 받아야 하는데 경작사항을 판정을 한다 이거야. 예 들면 여기서는 몇 섬이 나오니 얼마를 내라. 이런 걸 결정할 권한이 있다 이거야. 그러니 그 사람이 어른이나 애나 할 것 없이 권력이 높았지. 이거지.

B1 : 사엄을 조선인들이 곱게 볼 리가 없었을 텐데. 해방이후 그들은 어떻게 되었나요.

A1 : 여기 오산에서는 그 사람들이 어디 가질 않았어요. 해방 되고도 여전히 여기서 그 재력으로 권력을 부리고 살았어.

B1 : 경제적 재력….

A1 : 그럼! 일제 때 소작인들을 착취하고 일본인들에게 대우 받았던 재력이지!

B1 : 반민특위 활동은….

A1 : 당연히 그랬어야 했어. 당연히 그랬어야 했는데, 여기까진 그런 게 영향을 끼치진 않았어. 이리 송학동에도 사엄이 하나 있는데, 그 사람은 송학동에서 쫒겨 났어. 그리고 오산에서 살고 있는데 아주 잘 살고 있어. 자손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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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 : 오산역이 폐역 되었죠?

A2 : 한 10년 전에 폐쇄 되었죠.

B1 : 그럼 그 쌀을 오산역에서 군산으로 이동했나요?

A2 : 처음엔 전군도로로 이용했죠. 그리고 나중엔 역을 사용 한거고.

B1 : 해방 이후엔 그 역을 누가 이용 했나요?

A2 : 그 역을 모두 학생들이 이용 했죠. 사실 이리역과 오산역은 4키로 밖에 안 된다고. 그래서 학생들이 많이 이용했지.

B1 : 오산역이 있으면 시장이 생기지 않았나요?

A2 : 사실은 여긴 변두리고. 그래서 그런 게 생기지 않았지.

B1 : 그럼 우리 마을 주민들은 시장을 어디로 이용 했나요?

A2 : 익산시장으로 갔지. 그리고 마늘 같은 건 서천으로 많이 갔고. 물고기 사려면 군산으로 가고 그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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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 : 이리역 폭발사고 기억은 좀 있으신가요?

A3 : 그 사고가 여기까지 영향을 많이 끼쳤어. 그때까지만 해도 유리가 얇았어. 그때 다 깨지고 그랬지.

B1 : 그때 정부의 지원은 오산면에도 있었나요?

A3 : 아무것도 없었지. 역전앞에만 좀 개발이 되었지. 여기까지는 별거 없었지. 사실 그래도 그때 덕분에 이리시가 좀 커졌지. 한 단계 비약하는 계기가 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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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 : 우리 마을은 만경강과 가까운가요.

A1 : 만경강이 가깝죠. 이쪽은 자그마한 산도 있고 그래요. 그래서 지하수를 먹을 만 했어. 그런데 전군도로 아래로는 신오산도 그렇지만 똘물을 먹고 그랬어.

A2 : 전군도로 그 근방에는 흘러가는 물을 지개로 먹고 그랬어요. 남전동 사람들은 똘물을 떠서 여과를 해서 먹었어요.

A1 : 남전동 사람들은 어로 생활도 좀 하고 그랬죠. 여기가 바다였다는 근거가 물이 짰어요. 오산 학교답이 있었어요. 그 학교답을 제가 한때 경작을 했었는데, 그런데 그걸 파보니 밑에 대나무가 쭉 깔려 있어요. 대통이. 염기를 빼기 위해서. 염기를 빼려고 일본사람들이 상당히 지혜롭게 오산을 개간을 한 거죠.

구술사진



맨 왼쪽 서걸웅


왼쪽부터 장영만, 김명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