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명 : 오산면 > 북참마을

구술 기본정보

구분 내용
마을명 오산면 > 북참마을
구술자 박태준(1946)남자
구술자 진창덕(1954)남자
면담자 장윤준, 이순영
구술요지 마을 유래담
민속
철도
구술일시 2013-07-08
비고 면담장소 : 오산 북참마을 마을회관
면담시간 : 2013년 7월 8일 14시
내용 : 마을 유래담, 민속, 철도에 대한 인터뷰 진행
키워드  

문헌내용

남참(南參․남찬문이) : ‘참문이’를 위치에 따라 남․북으로 구분한 이름. 신지리의 만수동과 같이 물이 차던 곳이니 ‘차(滿), 물(水)’과 관계된 이름이리라 한다.
남참(北參․북참문이) : ‘남참’ 참조.

『익산시사』

구술요지

1) 마을유래담 :
- 북참마을 : 영조 13년 호구 총서에 의하면 참의가 살았다고 함.

2) 민속 :
- 효열문 : 호조참의 김완성의 처에 대한 효열문.
- 익산 4ㆍ4운동 : 남전교회가 중심으로 일으킨 독립 만세운동.
- 새마을 운동 : 전라북도 새마을 운동의 모범마을이었음.
- 남전교회 : 갑오농민운동에 실패한 동학군들이 교인으로 다수 있었음. 박정희의 유신개혁에 대해 시위를 벌이는 등 민족운동에 적극적으로 활동함.

3) 철도 :
- 철도 : 미곡수탈을 목적으로 일제가 개설했음.

구술채록

A1 : 박태준(68)-1946년
A2 : 진창덕(60)-1954년

B1 : 장윤준
B2 : 이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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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 : 안녕하십니까. 원광대학교 대안문화연구소에서 북참마을을 조사하러 나왔습니다. 북참마을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 부탁드립니다. 우선 오산의 북참마을은 남참마을과 같은 생활권인가요?

A1 : 맞습니다. 우리 북참마을은 남참마을과 교회를 중심으로 하나가 되고 있습니다. 찜질방이라던가 교회가 중심이 되어서 교류를 하고 있죠.

B1 : 혹시 북참마을을 예전에 부르던 명칭이 있을까요?

A1 : 제가 자세히 찾아보니, 북참마을이 문헌에 나와 있더군요. 1789년도에 영조 13년에 기록된 호구 총서가 있는데, 그 책 자료에 북참이라는 지명이 나오더라구요. 북참의리, 남참의리가 나오더라구요. 북참의리, 남참의리 이렇게 나오는데, 그 근거를 찾아보니 이 쪽에 참의가 살았다고 하더라구요. 남참에도 참의가 있었고. 그 사람들이 은퇴를 한건지 아니면 귀향살이를 하기 위해 이곳으로 온 건지 잘은 몰라요. 확실한건 이 지역에 참의가 살았다는 건 확실해요. 참의가 있는 동네. 북쪽참의리. 남쪽참의리. 그 명칭이 그 때 나와요. 호구 총서에. 그래서 조선 중기부터 이 마을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어요. 그리고 그 근거로 이 마을에 효열문이 있어요. 계유년 5월에 건축을 한걸로 기록이 되어 있어요. 계유년 5월이면 1933년, 1873년, 1813년, 1753년, 1693년 이렇게 되어 있어요. 어찌되었던 마을의 유례가 참의가 살았다는 거에요. 호조참의 김완성이라는 분이더라구요. 그 분의 처가 열녀였다. 그리고 그 열녀문이 있어요.

B2 : 다른 오산 마을은 개척 마을이라고 하던데, 우리 마을은 꽤 오래 되었군요.

A1 : 그렇죠. 다른 마을들은 동척회사 관할에 있는 마을이 이 인근에 많았어요. 거기는 일제시대 때 생성된 마을인데, 이 마을은 조선 때부터 있었던 마을인거죠.

B1 : 집성촌인가요?

A1 : 집성촌은 아니에요. 일본인들이 오산에 농장이 많았거든요. 이쪽 지역은 대규모 농장이 아니라 개개인 일본인들이 와서 농사를 짓는 형태였어요. 우리 마을 입구에도 일본인 가옥이 무너졌지만, 한 채 있어요. 그리고 곳곳에 여러 집이 있었어요. 그런 이유로 이쪽 마을은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면서 특정 씨족이 모여 살았던 마을은 아닌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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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 : 일본인들이 조선인을 많이 탄압하고 억압했나요?

A1 : 그런 것 같진 않아요. 개별 개인 농장 형태이니까 그렇게 심하게 굴진 않았다고 하더라구요. 4ㆍ4중심 교회가 남전교회에요. 그간에 많은 탄압과 수탈을 받았기 때문에 그 영향이 커서 남전교회가 4ㆍ4를 일으킨거에요. 그러니까 개인 농사짓던 일본인들이 탄압을 하진 않았다고 해요. 동척에서 탄압을 많이 한 거죠.

B1 : 4ㆍ4운동이요.

A1 : 우리 마을 나가면 전군도로 신작로가 있어요. 그리고 철로도 있고요. 아래로 내려가면 제방도 있구요. 그러한 모든 것들이 일제 때 강제동원으로 건축된 거에요. 그러면서 굉장히 수탈과 탄압을 많이 받았다고요. 그러면서 일본인들에 대한 감정이 극도로 심해졌죠. 그래서 3ㆍ1운동이 일어나면서 이쪽 지역도 뭔가 해야 하지 않나 싶어서 익산이 좀 늦었지만 이쪽 지역민들이 4ㆍ4를 일으켜서 희생을 많이 당했죠. 그래서 익산 구시장. 3ㆍ1운동 기념탑에도 이쪽 지역민들의 희생자 이름이 많이 올라와 있어요. 그래서 남전교회를 중심으로 매년 행사를 하기도 해요. 그러니까 조선조 때부터 마을이 있으면서 여기가 탄압을 많이 받은 거죠. 그리고 새마을운동. 그 운동 중 전라북도 중심 마을이 바로 우리 마을이었어요. 당시 산업화되기 전엔 농업이 중심이었잖아요. 이 북참마을이 농업의 중심지였어요. 이 마을이 사실 부촌이었거든요. 그래서 전시효과를 노리기 위해 우리 마을을 시범마을로 만들어 놓고 외부사람들 다 구경하고, 가꿔놓고 그랬어요. 그래서 우리 마을 주민들은 피곤했어요. 손님이 온다고 하면 아침부터 마을 청소하고 그랬거든요. 그런 일이 다반사로 많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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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 : 남전교회에 대해 자세히 말씀 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A1 : 익산 사람들이 두동교회를 많이 떠올리잖아요. 남전교회가 시골 교회인데 왜 최초이고 중요한 교회냐. 그런데 처음에 기독교가 전래될 때에는 미국에서 인천을 거쳐 군산으로 들어 왔어요. 남전교회가 만경가가에요. 그래서 배를 타고 만경강을 타고 들어와서 선교를 했어요. 그래서 남전교회가 여기 마을에서 탄생을 했어요. 그리고 길 건너 김제에도 만들어졌구요. 그때 당시에 그러다 보니까 민족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일제에 저항했던 사람들. 갑오농민운동이 실패로 끝나고 난 뒤. 그 사람들이 갈 곳이 없으니까 선교사 밑으로 들어와서 일제에 싸움을 했다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교회 사람들 보면 사실 갑오농민전쟁 때 활동 했던 사람들이 있더라구요. 그러한 시대적 상황. 일제에 대항하기 위해 교회라는 보호막이 있어야 했다. 그런거에요. 박정희 대통령도 삼선개헌 유신때도 교회쪽에 많이 들어가서 시위를 하고 그랬죠. 마찬가지에요. 일제에 대항하기 위해 민족운동을 하던 사람이 교회라는 틀 안에서 노력하고 그랬다고요. 교회 설립 당시 축하행사를 한 걸 교회사 기록을 살펴보면 천명정도가 모였다고 해요. 엄청난 사람들이 모인 거죠. 그러니까 교회가 그 당시에 중심의 역할을 했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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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 : 동학군들을 교회가 많이 흡수했다라는 거죠?

A1 : 그렇죠. 하느님의 말씀도 중요하지만, 내면에 있는 구성원들은 민족의식이 밑바닥에 깔려 있었던 거죠.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을 보호해 주던 곳이 교회고요.

B1 : 남전교회가 중심이 되어서 익산 4ㆍ4가 된 건가요?

A1 : 물론 익산 시장에서 했기 때문에 익산 주민들이 많이 희생되었죠. 그런데 그 주도자들이 바로 이쪽 지역 사람이에요. 이 사람들에 대한 업적이나 내용들이 좀 더 많이 드러나지 않아야 하나 싶어요. 특히 익산 사람들이 우리 4ㆍ4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고 기억해야 하지 않나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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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 : 만경강이 굉장히 가깝나보군요.

A1 : 남참마을 바로 앞에 있어요. 우리 마을도 사실 만경강 생활권이에요.

B1 : 그럼 만경강에 대한 추억이 있으신가요?

A1 : 과거 이곳이 농업 중심이니 집단으로 모여서 해야 했어요. 계승이 안 되고 중간에 끊어졌지만, 다른 여타 지역에 있던 민속행사가 우리 마을에도 있긴 했을 꺼에요. 다만 지금은 안하죠.

B1 : 만경강과 가까웠으면 식수가 곤란 했겠네요. 혹시 식수나 마을 혈자리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으신가요?

A1 : 이쪽 지역이 현대화가 좀 일찍 되었어요. 그래서 수도가 일찍 들어왔죠. 그 전까지는 마을 중심에 공동우물이 있었어요. 두레박으로 물을 퍼내는 우물이죠. 물은 이 마을이 괜찮은 편이었던 것 같아요. 이 마을의 식수를 주변 마을로 보내줬어요. 그런데 여기가 만경강 주변이라서 우물을 깊게 파면 철분이 나와요. 이게 철분이 많아서 그래요. 그런데 몇 개에서 나오는 지하수는 그런게 없었어요. 그런걸 보니까 이쪽 지역이 물이 괜찮은 편이지 않았나 싶어요.

B1 : 남성들은 모종을 중심으로, 여성들은 샘을 중심으로 모였을 텐데요.

A1 : 그런데 새마을운동 전후로 해서 없어졌어요. 다만 터는 있어요. 위치는 있어요. 거기서 조금 더 가면 효열문이 있어요.

B1 : 효열문….

A1 : 이 마을엔 효열문이 있어요.

B2 : 그럼 효열문에 써져 있는 글은 모르시나요?

A1 : 네. 그건 잘 몰라요. 효열문이 하나 쓰러져 있는데, 아직 복원이 안 되었어요. 시에서 복원해 주겠다 하는데, 안 해주고 있어요.

B2 : 혹시 전설 같은 이야기는 남아 있는 것이 있나요?

A1 : 그런건 잘 모르겠어요. 이쪽 지역이 조선 중기 때부터 만들어진 마을이다. 그리고 이 지역 주변이 갈대밭이었다. 그런데 일제 때 농지를 만들고 수탈의 목적으로 도로나 철도를 만들었다고 해요. 특히 박정희 대통령 때 이 쪽 지역을 개발을 하면서 자기네들 목적하에 새마을운동을 하면서 필요에 의해 바뀌었다고 해요.

B2 : 대농장이 아닌 개인적으로 온 일본인들은 왜 온 건가요?

A1 : 지네들도 먹고 살기 어려우니까 오지 않았나 싶어요. 이 지역에 일본인들이 살던 곳이 많아요.

B1 : 해방 이후 그 논들은 어떻게 되었나요?

A1 : 해방 이후 정부땅이 된 거죠. 여튼 일본인들 가옥들이나 일본인들이 살았던 흔적이 아직 많이 남아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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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2 : 시장은 어디로 다니셨나요?

A1 : 익산 구시장을 많이 다녔죠. 걸어 다녔죠. 4ㆍ4운동도 그곳에서 했죠. 일본 헌병대가 거기에 있었어요. 일본인 농장도 거기에 있었고. 그래서 곡물을 조선인들이 정산을 할 때 깨끗이 해서 정산을 받는다고요. 바람을 불어서 쌀이 깨끗하고 좋아야 합격을 한다고요. 그래서 소작농들이 참 고되었죠. 만약 퇴짜 당하면 다시 정산해야 하고요. 그래서 4ㆍ4운동도 거기서 일어났죠. 많은 주민들이 그렇게 만세를 부르면 해방인 줄 알고 만세 부르다가 교인들이 4명 사살 당했죠. 사실 다른 여타 지역은 천도교가 3ㆍ1운동을 주도 했어요. 그런데 익산은 천도교가 실패 했어요. 그래서 익산은 기독교가 중심으로 만세를 부른 거죠. 그래서 4ㆍ4운동 기념도 남전교회를 중심으로 해요. 우리 남전교회가 4ㆍ4의 중심이니까요.

구술사진

진창석


박태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