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헌내용
어남(漁南, 으랭이=어랭이, 윗뜸) : ‘어남’은 어량의 남쪽이므로 붙인 이름. ‘어량’은 마을 앞에 내가 있는데 비가 온 때면 밑에서 물고기가 많이 올라와 어살을 치고 잡았기로 ‘고기똘→魚梁’.‘으랭이, 어랭이’는 ‘어량리’의 변한 말.
『익산시사』
구술요지
1) 마을유래담 :
- 어량리(으랭이) : ‘어남’, ‘어동’을 합쳐 부른 지명.
- 야정마을 : 옛 지명은 ‘들시암.’ 들 가운데 샘이 있어 붙여진 이름.
- 어남마을 : 본래는 ‘어서마을’이었다고 함. 외정 때 공출 독려반들이 어서(서둘러) 가자, 라고 말한 것을 듣고 어서마을에 가자는 걸로 착각하여 마을에 난리가 난 뒤로 이름을 ‘어남’으로 고쳤다고 함.
- 어남마을의 부분명 : ‘위뜸’, ‘중뜸’, ‘아래뜸’으로 나뉘며 각각 ‘진주 소씨’, ‘청풍 심씨’, ‘의령 남씨’가 사는 ‘삼성받이’ 마을이라고 함.
- 평쟁이뜰 : ‘평평한 평야’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
- 보안뜰 : 어량천의 ‘보 안에 있는 땅’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
- 암소골 : 이름의 유래는 알 수 없으며, 주변에 ‘각골’이라는 지명이 있음.
- 어남마을 우물 : 총 세 개의 우물이 있었으며, 각각 ‘큰샘’, ‘두집메샘’, ‘수렁샘’이라 부름.
- 제남마을 : ‘방죽의 남쪽’에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
- 제내마을 : 옛 지명은 ‘방죽안.’ ‘방죽 안쪽’에 있는 마을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
2) 전설 및 민담 :
- 금반낙지 : 어남마을의 혈이 ‘금반낙지’라고 함. 이러한 유래 때문에 옛날에는 마을 우물 파기를 꺼려했음. 밥상(금반) 위에 구멍을 뚫으면 좋지 않다는 뜻. 또 일설에는 황등 석산을 개발한 박지근 씨 집안 묘가 ‘금반낙지’라는 말도 있음.
- 강경장 : 배가 많이 들어오던 시장으로 ‘한국 3대 시장’ 중 하나였다고 함.
- 분모골 : 무형리 야동마을에 있다는 명당. 자세한 내력은 알 수 없음.
- 황등 석산에 얽힌 이야기 : 처음 황등 석산을 개발할 때 미군들이 돌을 보러 왔다고 함. 이때 미군들이 돌이 어디까지 박혀있는지를 묻자 박지근 씨의 아들은 모른다고 대답했다고 함. 이후 박지근 씨가 이 이야기를 듣고 ‘미국까지 박혀있다고 해야지’하며 아들을 혼냈다고 함.
3) 민속 :
- 가내수공업 : ‘어남’, ‘어동마을’에서 갈키, 소쿠리, 부채 등을 많이 만들었다고 함. 홋수에 비해 농토가 적어 이러한 ‘가내수공업’이 발달했다고 함. 이외에도 낭산면 ‘하남’, ‘내돈’, ‘외돈’에서 소쿠리를 짬.
구술채록
A : 소진적(78)-1934년
B1 : 이동혁
B2 : 이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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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 : 마을 소개부터 부탁드리겠습니다.
A : 여기는, 여기 인자 주소는 알을 테지. 익산시 망성면 어량리.
B1 : 그 어량리의 유래가 궁금한데, 혹시 그 유래에 대해 들어보셨습니까?
A : 어량리가 10개 동네요. 근디 행정구역이로 허는디 지금 8개 마을로 있거든요. 그렇게 돼있죠. 근디 어량 허먼은 10개 마을이지만, 기냥 어량 허먼은 다른 부락은 그만두고 여기 어남, 어동을 어량리라고 그려, 어량리라고. 으랭이라고 허먼은 어남, 어동을 일컬을 때 으랭이라는 거. 그서 강경에서 택시를 탈 때 어량리 가자고 허먼 여기로 와요. 야정이나 상발 저짝 동네로 안 가고. 그런 게 여기가 원어량이요 말허자먼. 근디 지금 행정구역상은 인자 어남, 어동이죠.
B1 : 마을의 역사가 얼마나 됐는지 아십니까?
A : 내가 인자 보니까, 우리 십이 대조 할아버지가 여기에 오신…, 언제 여그가 어량리가 생긴 것은 모르고 우리 할아버지가 오신 뒤로 생겼다 허고 본다면 한 500년 됐어요. 그 할아버지가 1555년에 묻혔다는 것이 우리 족보에 있어. 긍게 여기가 소씨들 집성촌이에요. 본관이 진준데 진주 소씨 집성촌으로 이루어졌는데 그 할아버지가 여기 와서 마을을 구성한 걸로, 집성촌이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그래갔고 지금 이게 어량리 어남, 어동이 으랭이라고 후딱 그러는데 어남이 우리 소씨가 한 50호 살고, 의령 남씨가 한 20호, 20호 쪼끔 못 되게 그렇게 살어요, 현재. 그리고 청풍 심씨가 열댓도 살고. 그리고 기타 인자 몇 집해서 한 110호쯤 되니까 어남, 어동이. 그런디 이 지명은 왜 이렇게 어량이라고 했냐. 나도 궁금허죠. 근디 다른 부락은 인자 저짝 번로(?)로 야정, 상발, 중발 이런 디가 있는데 야정은 그 동네 앞에 들 가운데가 시암이 있었어. 그래갔고 들시암이라고 그래, 인자 그 동네를. 옛말로 들시암인디 한문이로 해서 들 야 자, 우물 정 자 써서 야정이라고 지금 부른단 말여. 근디 어량은, 여기 어량은 어량이라고 부를 택이 없어. 무슨 근거나 사료가 없어. 근데 여기로 보면은 어량교라고 혀갔고 어량리허고 무형리허고 사이에 다리가 어량천, 어량냇갈에 다리가 놔있어요. 그럼 거그가 고산부락 앞이에요, 그 다리가. 지금 새로 놓고 지금 공사허는 중이지. 그믄 그 다리 밑에까지 그전 저 우리가 어렸을 때 다리 밑이까지 금강 조수가 올라왔었어요. 그런디 그 으른들 말 들으먼은 이 앞이 동네까지 조수가 올라왔다는 거예요. 그랬는디 그 내를 건너댕길라먼 목다리를 이렇게 놓고 댕겼었어요, 우리 있을 때도. 근디 그 다리에서 이게 어량이 물고기 어 자, 다리 양 자거든. 그러니까 금강물이 거기까지 올라올 때 그 다리에서 고기를 잡고 혔지 않냐. 그리서 어량이라고 붙였지 않나, 그렇게 우리가 추측을 허는 거여. 그래갔고 그전에는 저 지금 성제라고 허먼 알랑가 모르겠는데 미륵산 앞에 산 있지. 그 산 물이 이 어량천으로 흘러 내려와요. 미륵산 앞에 쪼그만한 산 또 성제라고 있지. 지금 독 많이 파고 헌 디. 낭산면 석천리. 그 성제 물이 일부가 저짝 낭산면이로 해서 함열 쪽이로 그리 빠지고 이짝이로 일부는 이짝 어량천이로 빠지지. 그 물이 이 앞에 내려오는데 거기에 그전에는 우리 키보다 더 큰 독을 두 개 이렇게 세워놨었어요. 긍게 그 노인네들 말 들어보먼 그 물이 홍수 때 막 치밀어 오먼은 이 동네가 말허자먼 막 그놈이 온 게 그걸 막기 위한 수구맥이로 해서 그 독을 세웠다고 했었어요.
B1 : 그 돌이 어떤 돌입니까?
A : 그게 주춧돌인데 지금은 없어요. 저 아래 마을 그 하천 옆에 그게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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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그렇게 허고서 저 우리 마을은 이게 원래 어서요. 어남이 아니고 어서마을이요, 이게. 그런데 해방 직후 그 공출 저시기가 많어갔고 생활은 어려운데 그 내기가 대간허고 허니까 안 내고 혀. 그런 게 그 독려반들이 면사무소에서 집결해갔고 어디로 가자, 그렇게 해갔고 동네로 가갔고 그 동네 가서 사람도 이렇게 잡어다 묶어다놓고 막 저시기혀갔고서 언제까지 낼 것인가 허고 막 그렇게 했었어요, 사람 잡어다 놓고. 언제까지 낼래, 몇 가마니 낼래, 해갔고 그렇게도 허고 면사무소로 끌고 가갔고 독려반이, 순경이 허는 것이 아니라 독려반이 있었어요, 그때. 그래갔고 그 사람들이 인자 와갔고 아침에 모여갔고 어디로 가자 헐 거 아니요. 근디 거기에서 어느 사람이 어서 가자, 혔단 말이요. 그런 게 우리 부락 주민이 거기서 그 소리를 들었어. 어서 가자 헌 게 우리 마을로 오는구나, 그러고서 빨리 와갔고 막 동네 사람들 보고 피해라, 지금 독려반이 우리 동네 오니까 빨리 피해라, 해갔고 인자 피했단 말이요. 피해갔고 얼매를 있어봐도 안 와. 그 사람들이. 그르니까 나중에 아, 이거 말을 착오했지 않냐. 어서 가자가 빨리 가자 했는데 빨리 가자 소리를 어서 가자 허니까 우리 동네로 오는 걸로 착각을 헌 거요. 그래갔고 동네 사람들이 나중에 가갔고 다 피 보겠어. 그러니까 안 되게 생겼어. 나중에도 또 그런 일이 있으먼 또 혼란이 올 거 아녀, 부락에. 그러니까 지역상이로는 어량의 서쪽이지. 그니까 어서라고 했었는데 그로 인해서 그놈의 지명을 바꾸자 그래갔고 어남으로 이름을 바꾼 거여. (바뀐 지가) 60년 그렇게 됐다고 보야죠. 어남은 여기가 지형적이로 봐서 어남은 맞들 않여. 어서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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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긍게 두 개 부락(어남과 어동) 커서 이게 75년도, 79년대에는 우리 부락에도 120호 살었어요. 저짝에 한 90호 정도 살고. 이게 그런데 혼자 이장이 통솔을 못혀. 원체 크니까. 그리갔고 옛날에는 여기를 저 윗뜸, 중뜸, 아랫뜸 그려. 그래갔고 윗뜸에는 우리 소가가 살고, 중뜸에 청풍 심씨 하나 살고, 아랫뜸에 의령 남씨가 살고, 그렇게 인자 삼성받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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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 : 마을 근처 지명엔 또 뭐가 있습니까?
A : 여기는, 여기서는 저기 인자 평쟁이뜰, 보안뜰, 그러고 이 동네 뒤는 엄소골, 그런 게 엄소골이라고 허는디 그게 암소골인가 모르겄어. 그래갔고 그 엄소골 주변에는 뭐 각골, 뿔이 인자 뿔 형식이라고 혀서…, 저 엄소골인 게 암소골인게벼. 긍게 각골이라고 그 뿔 각 자, 각골 그것이 있지.
B1 : 평쟁이뜰은 왜 평쟁이뜰입니까?
A : 거기는 평쟁이뜰은 들이 넓다고 그랬나, 거기가 충청도허고 전라도허고 한티 붙어있는 고라당이여. 그 들이 넓은 평야예요. 평평한 평야라고 해서 그렇게 부른 디요.
B1 : 보안뜰은 근처에 무슨 보가 있습니까?
A : 보가 있죠. 그 어량천의 그 보가 갇혀있지. 말허자먼 보 안에 있는 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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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 : 마을에 좋은 우물은 없었습니까?
A : 우물은 우리도 시방 여기 보존허고 있는데 우리 선조들이 먹던 우물인데 이 물이 참 좋아요, 맛이. 그래갔고 물이 또 맛도 좋을뿐더러 많이 나요. 그래갔고 그 가뭄에 물이 막 귀헐 때는 이 아랫마을에서 다 질어다 먹어야 혀. 아랫마을은 시암은 두서너 개 있는데 물이 안 나오고 짜. 그러고 가물으먼 안 나와. 그러니까 여그 와서 질어가요, 이 마을에서. 그래갔고 식수를 헌 거요.
B1 : 마을에 우물이 몇 개나 있었습니까?
A : 저 우에 가서 수렁시암이라고 또 있어요. 그게 어떻게 수렁을 파갔고 물을 저시기 혔다고 허는디. 우리 어남마을은 저기 두집메까지 해갔고는 (우물이) 세 개 있어요. 그래갔고 그전에는 으른들이 동네다 시암을 파먼 안 된다, 안 좋다, 그랬지. 긍게 수반이라고 그랬대요. 거시기 저 상, 밥상. 말허자먼 밥상이라고 혔는데 밥상 거그 가운데다가 구멍을 뚫으먼 안 된다, 그런 거시기지. 여기가 혈 산수지리로 해서 혈이 금반낙지라고 그래요. 저 말랭이 가먼 쪼금 우무스럼헌 거기 산이 쪼금 도드러 있거든. 거기가 금반이라는 거요. 긍게 금반이먼은 금소반이여. 금으로 맨든 상. 여기가 그 형국이 금반낙지라고 혀갔고 금소반 그 혈이라고 해요. 근디 소반에다가 구멍을 뚫으먼 어떻게 되겠어요. 그런 게 땅을 파먼 안 좋다, 그랬다고 혀갔고 그전에 시암 파는 걸 꺼려했었어. 그래갔고 그놈만 먹고 그렇게 살었는디 근래 와서는 편의상 지하수 파갔고 막 다 허죠.
B1 : 마을에 우물이 세 개 있었다고 하셨는데, 여기서는 그 우물들을 뭐라고 부릅니까?
A : 큰시암, 뭐 두집메시암 인자 그랬지. 우물이 인자 여러 개 있었는데 그 중에서 젤로 인자 활용가치가 높고 물이 많이 나온 게 인자 큰샘이라고 그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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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 : 옛날에는 여기 으랭이에서 대소쿠리도 많이 만들었다고 들었습니다.
A : 그릉 게 전답이 여기가 70년대만 해도 우리가 100호 넘게 사는디 논이 한 600마지기 정도 밖이 안 됐어요. 그러먼 한 집에 댓마지기 밖에 안 돌아간다는 얘기여. 그럼 밭이 한 300평 되고. 그렇게 해갔고 먹고 살 저기가 없어. 그런 게 그 죽세공, 저 가내수공 죽세공을 혀갔고 갈키, 소쿠리, 부채 그런 걸 맨들어서 팔었어요. 긍게 그게 이상해요. 요기 아래뜸 어남, 어동만 그렇게 맨들었지, 주변 마을은 갈키, 소쿠리 맨드는 건 없어요. 그래갔고 우리 주변은 망성면에서도 돈이 젤로 많은 동네가 어남, 어동이다. 왜냐, 소쿠리를 맨들어서 팔면 이득이 많든 적든 당장에 갖다 팔먼 다만 몇 푼으로 가져오잖여. 그래갔고 돈이 많은 동네가 이 동네여. 그른 게 몸은 대간허지, 그거 맨들고 먹고 살랑게. 대간허지만 인자 그 돈이 많다고 그렇게 소문이 났었고.
B1 : 근처에 대밭이 있습니까?
A : 일본에서 중국산도 오고 그때는 일본산이 많이 왔어. 대만죽도 오고. 그래갔고 그놈 갖고 갈키허고 부채는 거의 다 그걸로 맨들어. 부채나 갈키는 대가 크야 혀. 지금 여기 난 그것 갖고는 갈키 하나 맨들라먼, 그러니까 이게 한 자, 이 저시기가 한 자 막 그렇게 생긴 놈이 와요. 저 대만죽이나 이쪽으는 이 둘레가 한 자네. 중국대만, 일본에서 오고 그 대는 이 둘레가 한 자 이상 돼요. 그런 놈을 빠개야 저 갈키 맨들고, 부채는 마디가 질어야 허잖요. 마디가 있으먼 대를 못 뽀갠 게. 그래갔고 그렇게 크야 마디가 질어갔고 부채를 살을 맨들어서, 맨들 수가 있지. 이 소쿠리는 이 장대 이 근방서 나는 놈, 인자 대나무 밭에서 사다가 그놈 빠개서 대쪼각 짤게 이뤄갔고 인자 소쿠리 맨들지. 요새 담양 같은 경우는 소쿠리 많이 있잖여. 담양 소쿠리 같은 거. 그 소쿠리를 여그서도 많이 맨들었어요. 그 낭산면에서 일호 맨들고. 낭산면은 그 소쿠리만 맨들었지 저 갈키나 저건 안 맨들었어, 부채는.
B1 : 낭산면 어디 마을에서 소쿠리를 만들었습니까?
A : 낭산면에 가먼 돈다메. 내돈, 외돈 있지. 내돈, 외돈 낭산. 하남 거기에서 맨들었죠. 하남 내돈, 외돈 뭐 그런 데서 맨들었죠.
B1 : 그렇게 죽세공을 한 게 언제입니까?
A : 한 60년도 더 되네. 5, 60년 전에. 하여튼 사변 그때, 그 전에부텀 혔응게 만들은 것은 언제부텀 맨들었나 몰르고, 우리가 긍게 80년대까지는 맨들었지. 그래갔고 강경에 그 장에 그 죽세공 장터가 있었어요. 그래갔고 강경장에 갖다 팔었죠.
B1 : 그럼 여기 어남마을은 장을 보러갈 때 강경장으로 많이 가셨습니까?
A : 여기가 생활권이 강경이에요. 거기는 함열이나 여산이나 거리는 같은데 강경에 어시장도 그전에 3대 시장 아니요, 강경이. 그때부텀 혀갔고 그 강경이로 내다 팔고 그맀어.
B1 : 강경장에서만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있었습니까?
A : 그때는 생선국 같은 걸 많이 먹었지. 생선탕, 그런 걸 많이 먹었지. 배가 거그까지 들어왔어, 강경까지. 그래갔고 그게 3대 시장헐 때 그게 경경이 말허먼 일개 항구였었어. 그래갔고 배도 많이 들어오고 그랬어요.
B1 : 어떤 생선이 많이 잡혔습니까?
A : 여기에서는 복깽이. 그 강경 옆에 가먼 성지(?) 있는 데 거기에서 복어를 많이 잡았어요. 복어허고 우어. 그러고 중간에 와서 한 80년대 그때 저걸 또 많이 잡았지. 저 그 뱀장어, 실뱀장어. 그래갔고 그 실뱀장어를 그렇게 혀갔고서는 그 양어장이로 팔어갔고 소득을 많이 올린 디여. 근디 지금은 인자 조수가 안 오먼서 실뱀장어도 읎어 못 잡고.
B1 : 여기서 강경장 갈 때 꺼리는 길은 없었습니까?
A : 여기가 분토골이라는 디가 있는데, 분토골이먼 채산동이여. 지금 현재 채산동이라는 디여. 분토골, 분토골이라고 허는디 거기 사람들이 쫌 괴팍했어요. 그래갔고 그전에는 왜 깡패들 뭐 있고 저기 사람들 가먼 그 요새는 폭행이지. 그렇게 해갔고 맥없이 저 시비 걸어갔고 때리고 뭐 이런 거시기가 있었지.
(현재 행정구역상으로 분토골은 충청남도에 속함.)
B1 : 강경장에서 씨름판이 벌어지기도 했습니까?
A : 강경에서는 잘 않고 이 부근에서는 여기에 내 건너가먼 동촌이라는 디가 있어요. 동촌에 가먼은 추석 때 그 무렵이면 그 난장판을 잘 섰었어요. 그래갔고 거기서 씨름을 많이 했어.
B1 : 동촌마을에도 장이 섰습니까?
A : 시장은 없었어요. 근디 거기에 공판장이 있었거든, 옛날에 공출허고 막 그 쌓아놓는 정미소가 있고 그 저 노적 쌓아놓는 터가 있었는데 거그가 터가 넓은 게 그랬나 거기에서 많이 했어요, 난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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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 : 망성면에 유명한 명당자리는 없습니까?
A : 분모골. 분모골 저기 저 무형리 거기 저 분모골이라고 명당자리 있어요. 거기는 그게 어디 성씬가 몰르는데 송군수가 거기서 나고 헌 자리가 있는데 그게 명당자리라고 혔나 어쩠는가 몰르겠는데.
B1 : 그 분모골이 어디에 있습니까?
A : 무형리 야동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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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 : 아까 말씀하신 금반낙지처럼 또 이름 있는 혈자리가 있습니까?
A : 긍게 금반낙지가 저기 인자 으른들 말 들으먼 지금 거기에 저 황등 석산을 혀고, 석산 지금 다 파먹었나 그냥 석산 허고 있나 모르겄네. 그 박씨네 묘가 거그가 있어요, 그 산에. 근디 그 박씨네 산이 거그가 금반낙지는 그게 기다, 뭐 이 동네로 떨어졌다, 뭐시 그런 전설은 있지.
B1 : 그 전설에 대해 자세히 말씀해주시겠습니까?
A : 아, 긍게 금반낙지라는 것이 금반 그 혈이 이 동네가 금반혈 떨어진 자리다, 그 묘가 금반낙지가 그게 기지 않냐, 그렇게 혔는디 그게 박지근이라고 그분이 황등 석산을 그렇게, 처음 황등 석산을 그분네 산을 석산 개발헌 거여. 그리갔고 돈을 많이 벌고 혔었어.
B1 : 묘를 잘 써서 그렇게 부자가 됐다고 합니까?
A : 그맀나 모르겄어요. 그른 게 인자 거기 잘 살고 헌 게 그게 금반낙지 아니냐. 하여튼 석산 혀갔고 그때 처음 아마 박지근씨가 산을 황등산이 그분들 산인디 거기에 석산 처음 개발헐 적으 그래서 미군들이 와서 그 독을 살라고 거그를 둘러보러왔대. 그런디 그 박지근씨가 어디 가고 아들만 있을 때 왔다가 갔대. 긍게 아부지가 와서 그 사람들 왔었냐고 헌 게 왔었다고. 그서 뭔 얘기했냐, 아니 이 산 그 독혈이 어디까지 박혔냐고 묻더라고, 그리서 몰르겄다고 혔다고. 그르니까 박지근씨가 에 이놈아 그걸 몰른다고 허냐, 미국까지 뻗었다고 해야지. 그리야 독값을 많이 받을 거 아니요. 미국까지 뻗었다고 허지 몰른다고 혔냐, 그런 얘기도 있고 그려. 근디 인자 박지근씨가 부자로 살고 헌 게 거기가 명당자리 아닌가 그렇게도 허고 어떤 사람은 이 동네가 크고 헌 게 이 동네로 떨어졌지 않냐 그렇게도 허고.
B1 : 지금도 거기(금반낙지)에 묘가 있습니까?
A : 거기에 묘가 시방 있어요. 그 박지근씨네 아부지 묘가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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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 : 선바래기는 왜 선바래기입니까?
A : 그 선바래기는 왜 그랬나 몰라. 그 선바래기 그 밑에가 온수동이요. 온수동이라 했고 온수라고 지명이 돼있는 디는 온천이 나올 가능성이 있는 지역이라네. 그래갔고 거기를 온천 개발헌다고 한때 거기 사람들 댓이 이렇게 혀갔고, 모금혀갔고 온천을 개발해보자, 그렇게 혔는디 그 돈이 너무 많이 들으가갔고 한번을 파보는데 뭐 몇 천만 원씩 들으간다나. 긍게 그때 무슨 돈이 몇 천만 원씩 있어. 그래갔고 개발헌다고 어찌고 허다가 그냥 말았었어요. 그 시암이, 그 온수동이라는 데가 거기 우물이 있는디 겨울에도 그리 댕기먼서 보먼은 김이 무럭무럭 나와. 얼들 않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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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2 : 제남마을이 여기서 가깝습니까?
A : 제남마을은 이 앞에 마을이여. 앞에 마을인디 제남은 그 앞에 저 저수지가 이렇게, 옛날 방죽, 방죽이 있는 그 안동네라 해서 제내여, 제내.
B2 : 거기를 방죽안이라고도 하지 않았습니까?
A : 어. 방죽안이었어. 긍게 제내인 게 방죽 안 내 잔 게 방죽안이잖어. 그러고 아까 제남이라는 것은 제 남쪽에 있다고 해서 제남이고.
B2 : 방죽 이름이 따로 있습니까?
A : 거그는 우리네는 여그서 볼 때 방죽안 그 방죽이라고 그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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