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마면 해제

1. 개괄

금마면은 대륙과 해양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충지에 자리한 고대 왕도다. 노령산맥의 줄기가 주줄산에서 달려와 용화산에 용트림하고 진안 뜸봉샘의 첫 물줄기가 금강의 도도함을 얻어 이 지역을 북에서 서로 끼고 돌아가는 형상이다. 또한 남쪽의 만경강으로 길이 여니 고조선의 기준왕에서 견훤까지 이곳을 웅비의 터전으로 삼을 만하다. 이러한 연유로 이 지역에는 한강 이남의 대표적인 청동기문화 지역이자 철기문화가 최초로 유입되었다.
4세기 백제의 근초고왕 때 마한지역이 복속된 후 금마지역은 백제의 최후의 영화를 빛낸 무왕의 근거지가 되었고 견훤 또한 이곳을 근거로 세력을 넓혔다. 지역민들은 금마면이 과거 행정의 중심지였음을 상징하는 유래를 기억하고 있었다. 특히 고문헌의 내용을 보충하는 지명과 관련한 사례가 다수 채록되었다.
금마면 일대의 구술사 채록은 익산의 문화적 토대를 마련했다. 금마면은 노령산맥이 그 힘찬 용틀임을 멈추고 강을 끼고 평야로 드러눕는 산진처(山盡處)의 길지에 해당한다. 무왕과 선화공주의 기록이 채록된 삼국유사가 몽고의 침략이 한창이던 시절 채록된 것을 감안하며 국민 불안을 극복하고 국민통합을 이루려는 곳으로 금마지역이 역사적으로 호명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역사는 이 지역이 소외의 공간임을 이야기한다. 통일신라가 이 지역에 세운 보덕국이 무왕에게 당한 치욕을 갚기 위한 중앙의 외면경계였다면 고려 태조의 훈요십조는 견훤에 시달렸던 내면 경계의 표시였다.
1907년 철도가 부설된 후, 익산의 중심은 금마면에서 현재 익산시로 옮겨지게 되었다. 더불어 시·군 통합에 따른 문화 충돌로 감수성마저 희미해지고 있음은 안타까운 일이다. 신흥도시인 구 이리시 지역민과 구 익산군 출신의 정서적·문화적 차이가 그 원인인데 무속의례를 경계시하는 기독교로 대표되는 신흥 문화의 일방적 승리로 귀결되는 양상이다. 따라서 역사적 문화적 자부심이 사라진 곳에서 민속과 유래담 등을 채록하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또한 전통문화의 명맥이 사라지는 것에는 산업화에 따른 공동체의 해체가 영향이 미쳤음을 밝혀둔다.

2. 채록 요약

1) 마을유래

마을의 지명을 알면 지역의 역사를 알 수 있다. 금마면의 경우 면소재지 인근의 마을은 과거 행정의 중심지였음을 알 수 있는 지명유래가 채록되었다. 대표적인 마을은 누동마을과 옥동마을이다. 이 마을들에는 사정터(사형장), 궁평(궁)과 창평(창고)의 지명 유래가 전해지고 있었으며 옥동마을의 경우 옥이 있어서 붙여졌다는 사례와 함께 예전 행정담당자가 살았던 ‘동원’의 위치 등이 전승되고 있었다. 옥과 관련된 유래는 상대마을에도 채록되었다.(옥담말) 또한 행정구역 개편 상 생성된 지명과 근대화 이후 새롭게 명명된 지명이 보인다. 행정구역상 만들어진 지명은 신기마을이 있다. 산북마을의 아리랑고개는 인근 부대의 군인들이 혹독한 훈련 때문에 부르게 되어 명명된 지명이다.
한편 고문헌과 상이한 내용도 채록되었다. 지명은 대상의 특징에 따라 대부분 정해지는데 밤나무제, 서당골이 이러한 경우다. 이와 관련하여 갈산마을과 구룡마을, 황동마을은 고문헌과 다른 특징에 따른 명칭이 전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갈산마을은 앞의 산봉우리가 원추형인 갈모처럼 생겨 유래한 것으로 전해졌으나 구술채록의 결과에 의하면 인근 산에 칡이 많이 나서 갈산(葛山) 이라는 지명이 생겼다. 또한 구룡마을의 경우 ‘구’는 아홉 구(九)와 거북구(龜)를 같이 사용하며, 마을 주민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며 항복골 역시 ‘황복(皇伏)’이 아닌 임금을 따른다는 의미인 황복(皇覆)’으로 불렸다.(황동마을)
구술채록과정에서 고문헌의 내용을 보강하는 구체적인 실례도 나타났다. 도천마을의 경우, “원우록을 보면 소양곡의 친한 사람의 이름을 따서 도내골이라고 하였다”고 하여 구체적인 출전이 전해지고 있다. 상대마을은 행정 중심지의 윗편에 있어 붙여진 이름(상대 上大)으로 후에 ‘마을이 커져서 나눠졌다’는 행정구역 변화 양상이 채록되었다. 그 외 마을의 별칭을 통해서 고문헌 자료의 내용이 보강되었는데 ‘서계마을’(서편말이라고 함), ‘신정마을’(오목새터) ‘연동마을’(마을에 우환이 생길 경우)의 사례가 그것이다. 특히 연동마을의 경우 연방죽이나 연꽃이 있었던 것 이외에, 마을에 우환이 생기려면 연이 울거나 또는 연이 나갔다 들어오는 경우가 전해진다는 민담과 관련한 지명유래를 알 수 있었다. 그 외 지명과 관련된 명칭으로 ‘독점'은 장독을 구운 곳이 아니라 장독을 많이 깨서 지은 명칭이며 ’당내깔‘은 닭을 잡았던 장소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임을 확인 할 수 있었다.

그 외 마을지명에 대한 고문헌의 사례가 전해지는 않는 경우, 행정구역 개편상 새로운 이름을 얻은 경우도 보였다. 황각마을의 경우 “익산에서 제일 명승지라 이르는 경치 좋은 곳으로 익산 구지에도 사시 풍경이 입과 붓으로 다 형용할 수 없어 시인 묵객이 끊이지 않는다” 고 전해지며 “황각동은 중국에서 풍경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황학루(黃鶴樓, 黃閣)에서 취한 명칭이다.”(익산시사) 그러나 현재에는 이러한 내력이 전해지지 않으며 황동마을과 인접한 황각마을은 ‘일본인이 황동마을로 개칭한 것’만 전해지고 있다.

2) 전설
금마지역의 전설은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된다. 첫째 전쟁과 관련된 이야기, 둘째 지형과 관련된 이야기, 셋째 기타 전설이다. 첫째 전쟁 이야기는 이 지역이 과거 군사적 요충지였음을 의미한다. 군사 요충지다 보니 산악지형이 발달된 미륵산과 용화산 일대에서 주로 채록되었다. 사자암 아래에 위치한 구룡마을의 경우 지명유래에서 ‘전쟁’과 관련한 내용이 많았다. ‘망실’, ‘징골’은 각각 적의 침입을 망을 보고, 징을 쳐서 알리는 파수대의 역할을 했던 지역이다. 또한 ‘쌈터’, ‘욕골’, ‘당제’, ‘항복골’은 전투의 현장임을 알려주는 지명이다. ‘욕골’은 ‘당제’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졌던 병사들이 화풀이를 한 곳이며, ‘항복골’은 구룡마을 인근에서 시작된 전투가 그곳에서 끝났음을 알려준다. 전쟁의 당사자는 지역에 따라 기준왕이 되기도 하고, 백제-신라군으로 다르게 전해진다. 전쟁과 관련된 이야기는 지명유래와 결합하여 스토리텔링적 요소를 갖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항복골’의 유래다. 각 지역에서 전해지는 항복골 이야기를 정리하면. ‘성의 허술한 부분으로 적이 쳐들어와 왕이 준암바위쪽으로 도망을 쳤으나 잡혀서 항복골에서 항복을 했다’는 것이다. (구룡, 누동, 옥동, 용순) 그 외, 금마면 일대가 전쟁의 요충지였음을 알려주는 일화는 익산토성 인근의 용순마을에서도 전해지고 있다.
둘째, 지형과 관련해서는 금마면이 고대 수상유통의 중심지였음을 나타내는 구술내용과 석재산업이 융성하게 된 연유가 나타나 있다. 이것과 관련된 지명유래는 구룡 마을에서 풍부하게 발견된다. 이 이야기에 의하면 ‘미륵산 앞까지 큰 배가 들어왔다’는 것이다. 구룡마을 앞을 지나는 개천 앞을 일컫는 ‘용물안’이란 곳은 용의 형상을 하고 있는데 현재는 허리가 잘려 있다. 그 이유를 마을 사람들은 ‘전투선들이 후퇴하며 이곳을 지나가다 산허리를 끊고 갔다고’ 믿는다. 사자암 바로 아래에 있는 구룡마을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거나 ‘파도에 밀린 모래가 쌓여 지금의 미륵산이 되었다’는 등 고대에는 수상유통과 관련된 전설이 채록되고 있다.(구룡, 누동,) 큰 배가 오고 갔다는 이야기는 왕궁면 탑리에서도 전해지고 있는데. 탑마을 앞에 세워진 인석이 ‘배가 지나가는 통로’라는 것이다. 그 외 바위와 관련된 이야기로 (구룡-‘뜬바위’, ‘범징이’, 산북-용바위, 선바위) 등의 이름을 가진 바위가 있었으나 석산개발로 전부 없어졌다. 그러나 이를 통해 익산지역에 발달된 석재산업이 풍부한 자원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셋째, 익산시의 대표적인 전설 민담인 ‘서동전설’은 ‘구룡’, ‘연동’ 마을에서 전해지며, ‘소세양 황진이 전설’은 ‘용순’, ‘도천’ 마을에서 기록과 유사한 내용이 채록되었다. 그러나 구체성이 부족하여 후세에 다시 전해진 것으로 생각된다. 재미있는 것은 소세양과 관련하여 절벽에서 투신한 ‘황각동 처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는 점이다.(누동, 황각)
한편 금마면에서는 풍수와 관련된 이야기가 흥미롭게 전해지고 있다. 갈산마을에 전해지는 ‘미닐’이라는 풍수가는 금마면이 쇠락하게 된 연유를 ‘삼기산’과 ‘황등산’의 형태로 예언했다. 그 외 ‘인석’(누동)과 ‘괴무덤(신기)’과 관련된 이야기도 풍수와 관련된 이야기다. 구룡마을의 뜬바위 아래에는 은으로 된 밥그릇 뚜껑이 묻혀 있다고 전해지는 그것도 풍수와 관련된 것으로 추정된다.


3) 민담
금마면에 전해지는 민담의 특징은 불교적 전통과 사회문화적인 부분에 기인한다. 빈대절터(구룡)와 상원사(황각) 이야기는 절의 규모가 컸던 것과 이로 인한 폐해를 의미한다. 또한 미륵탑 인근에 널리 알려진 ‘개비석’ 이야기는 사람의 목숨을 살린 효견설화의 유형으로 (노상, 누동, 용순, 신기)에서 전해지고 있으며 상대마을에는 ‘효자이야기’가 전해진다. ‘한겨울에 산딸기를 구해 늙은 부모를 봉양’하거나, ‘병에 걸린 부모를 위해 하늘이 잉어를 보내 준’ 이야기가 그것이다. 이를 통해 규모가 컸던 상대마을의 전통을 알 수 있었다.
그 외 ‘귀신이야기’(상대, 서계)와 ‘도깨비 이야기’(갈산, 연동), 혼불 이야기 (산북, 서계)가 전해진다. 도깨비 이야기는 도깨비와 씨름을 했거나, 도깨비 불에 홀렸다는 이야기가 주를 이루며 ‘혼불’은 초상이 나기 전에는 조짐이 있다는 민간설화와 관련이 있다. 민담 채록중 흥미로운 것은 ‘여우이야기’(상대,옥동, 종평)다. 옥동마을에 전해오는 여우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금마에서 소장수가 황등에 가서 소를 사왔다고 한다. 그런데 금마로 돌아오는 길에 어떤 여자가 자기도 금마에 가는 길이니 동행을 하자고 했다한다. 소장수는 무서운 생각에 여자의 다리와 소의 다리를 묶었다고 한다. 그리고 집에 도착하니 여자가 여우가 되어 도망갔다고 한다. 그 뒤 소장수가 황등에 가서 황등친구의 집에 갔다. 그런데 친구의 집 방안에서 그 전에 자신에게 나타났던 여우의 목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그 뒤 문을 열어 여우의 머리를 세차게 세 번 때리니 여자가 여우로 변신하여 도망갔다 한다. 알고 보니 여우가 마을 뒷산에 굴을 파서 사람들을 홀려 병을 얻게 하고, 그 뒤 경을 읽어줘 치료를 해줬었다고 한다.” 그 외 구렁이에게 잘 해 준 할머니가 복을 받았다는 ‘구렁이 이야기’(서계) 등은 인간과 동물의 친연적 사고가 반영된 민담으로 생각된다.

4) 사회 민속적인 부분
금마면에서 구룡마을, 상대마을은 금마의 큰 마을 중 하나였다. 구룡 마을에 ‘독’을 구워낸 ‘독점’이라는 지명이 있는 것도 거주민의 규모를 말해준다. 이 마을에서는 민속전통이 비교적 풍부하게 남아 있었다. 음력 초사흘 저녁에 산제를 지내고 칠월칠석날이면 현재도 마을 잔치를 하고 있다. 금마군이 이리시와 통합되기 전에는 금마 중학교에서 마한제를 했는데 이때는 금마의 각 마을이 기세배놀이를 했으며 구룡마을과 상대마을이 어른마을로 기세배를 받았다고 한다.(구룡, 누동, 상대, 옥동) 그 외 산신제는 (구룡, 누동, 연동, 종평, 황각)에서 고려장은 (황각, 도천) 마을에서 행해졌다.
또한 철도부설과 관련해서는 금마를 거쳐 전주로 지나가려던 기찻길이 지역의 대표적인 양반(이씨와 소씨 등)의 반대로 놓이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많은 지역에서 채록되었다.(구룡, 누동, 신기,옥동,용순, 종평, 황동)


3. 시사점

금마면 구술채록 중 흥미로운 것은 예전에 큰 배가 왕래했다고 전한 것이다. 미륵산 아래 위치한 구룡마을에서는 큰 배가 왕래했다는 이야기를 믿고 있었다. 이 이야기는 ‘못을 메워 미륵사를 건립했다’는 것과 사자암의 지명법사가 ‘하룻밤 사이에 신라로 금을 수송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과 결부하면 당시의 지형이 현재와 달랐음을 유추할 수 있다. 또한 왕궁터에 세워진 인석이 배의 관문이었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살펴 볼 수 있을 것이다. 금마면과 해양교통에 대한 논의는 이 지역의 해양문화의 역사를 통해 살펴 볼 수 있다. 웅포와 성포는 조선의 5대 포구로 꼽혔던 곳이며 이곳에 남아 있는 무속 제례(웅포 용왕제, 성포 별신제)는 해양 문화적 특성을 보여준다. 따라서 익산지역은 무속신앙의 주요 거점인 모악산을 비롯하여 원불교의 중앙총부와 천주교의 성지가 지역에 넓게 분포되고 있으며, 기독교의 각종 종파와 신흥 종교도 전통이 깊다.

금마면은 구술사 채록을 통한 ‘지속가능한 개발’의 가능성을 갖고 있다. 전주시와 익산시가 인접해 있고, 천년도 더 된 오래된 길이 도-농 연결선상에 위치한 탓에 지역의 문화공간화의 가능성을 보유하고 있다. 이러한 가능성은 금마지역이 갖는 문화적 낙후성이 자본주의적 근대화의 해독을 상대적으로 덜 받았기에 더욱 기대감을 높이고 있다. 지역의 문화원형을 발굴하는 구술사 채록은 금마면의 대안적 잠재력을 키우는 일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