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명 : 함열읍 > 정동마을

구술 기본정보

구분 내용
마을명 함열읍 > 정동마을
구술자 임창호(1941)남자
면담자 박태건, 이동혁, 이호형
구술요지 지명 유래
민담 전설
구술일시 2012-08-14
비고 면담장소 : 함열면 노인대학
면담시간 : 2012년 8월 14일 10시 50분
내용 : 지명유래 및 민담에 대한 인터뷰 진행.
키워드  

문헌내용

정동(井洞․샘골) : 본 이름이 샘골이다. 마을 앞의 샘물이 좋아서 가뭄에는 이웃 마을에서까지 물을 길어갔다 한다.
- 익산시사 -

구술요지

1) 유적, 터 및 기타지명 :
- 원정동 : 움말(중촌), 샘골(정동), 부장골(부촌)의 세 부락을 가리켜 원정동이라 일컫는다.
- 부촌 : 옛 이름은 부장골. 부자가 많이 살아 부촌이라고 한다.
- 와리 : 기와를 굽던 곳이다.
- 장터거리 : 용왕에 장터거리가 있음. 용왕에서 이백 미터 떨어진 곳에 점촌이 있는데 그곳에서 만든 그릇을 장터거리에서 팔았다고 한다.
- 남당산 : 조선 3대 명당이라고 전해진다.
- 구렁목 : 까치고개에서 정동을 가로지르는 길. 여산으로 죄인을 후송할 때 이 길을 사용했다고 한다.

2) 전설 및 민담 :
- 문화 유씨 형제의 정착 : 문화 유씨 형제가 함열에 내려왔는데 형님은 돌산을 바라보며 학성골에 터를 잡고 동생은 함별면 용산리란 곳에 터를 잡았다고 전해진다.
- 돌산 흙산 전설 : 양쪽 산의 장수가 싸움을 벌였다. 싸울 때 돌과 흙을 던져가며 싸웠는데 돌산에선 흙을 던지고 흙산에선 돌을 던져 지금의 돌산과 흙산이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 남당산 명당자리 : 청송 심씨 이세조 할아버지를 3개월 동안 운송하여 시신을 안치했다고 한다. 후에 청송 심씨가 패하고 강릉 김씨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고 전해진다. 묘가 두 개가 있는데 한쪽은 청송 심씨의 묘이고 다른 한쪽은 강릉 김씨의 묘이다. 청송 심씨들이 나중에 다시 산을 찾았을 때 묘를 관리하던 사람이 강릉 김씨의 묘를 밝히지 않기 위해서 혀를 깨물고 자살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현재까지도 어느 쪽이 청송 심씨의 묘인지 알 수가 없다. 또 무호사화 때 도망쳐온 거창 신씨들의 11개 묘도 있다. 사화로 목숨이 위태로워지자 유골만 짊어지고 도망쳤다고 전햊니다.
- 함열로 철길이 난 이유 : 처음엔 함라로 철길을 내려 했으나 함라의 양반들이 반대하여 함열로 철길을 돌렸다고 한다.

구술채록

A 임창호. 1941년.

B 이동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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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 어르신 사시는 곳은 어디십니까?

A : 나는 인제 여그 함열읍 와리, 정동이라는.

B : 왜 마을이름이 정동인지 들어보셨습니까?

A : 이게 이름은, 정동은 우물 정 자 골 동이요. 그게 인제 샘 정 자라고 그러지. 물이, 아무 곳을 지표를 파드래도 물이 많이 솟아오른다고 해서 정동이랍니다. 그런데 이게 정동이라는 동네가 원래 철로 변에서 23번 국도까지가 정동이었어요. 옛날엔 길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삼 개 부락으로 인자 갈라졌어요. 인자 옛날에는 움말, 샘골, 부촌, 부장골 긍게 부촌, 이렇게 해서 부촌, 돈이 많아가지고 부자가 산다, 이렇게 해서 인제 했는데 사실은 그게 하나의 인자 그전 지명이요 옛날. 그 세 부락이 원정동이야. 그렁게 인자 그 마을에서 부르기를 움말, 샘골, 부장골 이렇게 불른기야. 이렇게가 인자 원래 정동이었어요, 이게. 근데 지금은 인자 부촌, 중촌, 정동 이렇게 갈라졌지. 나는 인제 삼대가, 우리 고조부터 여기 오셨는데, 웅포에서. 지금은 함열이라고 허는 곳은 원래 인제 옛날 양반들 말씀을 들어보면은 함라면 함열리가 함열이여. 그르믄 호남가에도 그것이 나와, 인심은 함열이고, 인심이 굉장히 좋았던 모양이라. 인심은 함열이요 허는 것이 함라면 함열리여. 이 함열읍은 원래가 와리라고 허는 디여. 기와 와 자 와리, 기와 굽는 동네. 기와를 굽기 때문에 기와 와 자 와리라고 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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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 함열에 대해 굉장히 많이 아시는데 더 알고 계신 게 있다면 말씀해주시겠습니까?

A : 여기, 함열이라는 이곳은 정착을 젤로 먼저 헌 분이 문화 유씨, 에… 최씨, 성 최씨, 그 다음에 진주 정씨, 이 세 성씨가 먼저 왔답니다, 여기에, 이 함열 관할에. 먼저 와서 인제 함라 쪽 말고 긍게 인제 여기는 에, 어르신들이 뭐라고 허냐면 유, 최, 정이 먼저 이제 상주했다고 해서, 젤로 먼저 이 세 성씨들이 와서 상주를 했는데 사실은 인제 그 양반들이 말씀허시는 거고, 그면 인자 정자 쪽으로 가먼 김제 김씨들이 진가를 이루고 이쪽 정동 한쪽은 부촌 쪽은 청도 김씨들이 일가를 이루고 그 밑에 성매자(?)라고 허는 디 가면은 문성 구씨들이 일가를 이루고, 긍게 사실은, 기본은 조선조에 이 심씨들, 청송 심씨들이 남당산을 기점으로 해서 그 세력을 잡아서 그 산을, 말허자먼 심씨들이 어거지로 차지했다라고 해요.

B : 그럼 이 함열에서 제일 오래된 마을은 어디입니까?

A : 우리들은 잘 모르겄어요, 지금. 그 문화 유씨가 먼저 왔다고 그러는데, 그 자기들은. 그 문화 유씨는 형제분이 와서 돌산이 지금 돌을 캐고 있잖어. 그 돌산에 와서 탁 바라보니까, 형은, 나는 여기 정착허겠다, 그게 학성골. 배울 학 자 이룰 성 자로. 그래서 인제 한분은 거기 정착허고 동생분인가는 함별면 용산리 성안이라고 허는 디가 있어. 이 근처에서 유명헌 곳이 엿이여, 엿. 찹쌀엿, 용산 찹쌀엿이라고 해서 그게 유명헌 것이 그 옛날에 인자 유명했고 거기에 정착허신 분이 인자 동생분이 그리 가셨디야. 자세한 건 모르겄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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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 그럼 돌산 흙산 이야기는 들어보셨습니까?

A : 그건 인자 함열 저 옛날 뭐 전설의 야바위에서 나왔지, 방송 나왔어. 흙산하고 돌산. 그 옛날 장수가 둘이 있는데 그 돌산이 된 유래는 장수가 둘이었는데 싸우다 보니까 흙산에서 돌을 던지고 돌산에서 흙을 던져서 저쪽은 흙산이 되고 이쪽은 돌산이 됐다 이거여. 하나의 전설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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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 아까 말씀하신 학성골이 왜 학성골인지 들어보셨습니까?

A : 어째서 그랬는지는 모르지, 나는. 그리고 인자 그… 내가 아는 것은 한 가지 있어. 천주교인들이 함열읍 성매리 용왕, 정착을 박씨들이 했어, 박씨들. 거기는 에… 아마 천주교 박해 당시에 거리 온 거 같여요, 인제. 천주교인들한티 물어보먼은 잘 몰라. 그러드만 용왕이라는 동네에 장터거리라는 곳이 있어. 용왕이라는 동네에 장터거리. 장터거리라는 동네에서, 그 용왕에서 한 200매다 거리에 점촌이 있어, 점촌. 그릇 굽던 곳. 그릇을 구워가지고 장터거리라고 허는 디 가서 장사를 했어. 왜그냐면 성당에 계시는 천주교인들이 박해를 받으니까 피난을 온 거야. 피난을 왔는데 먹고 살어야 될 거 아니냐 이거여. 그른게 그 당시에 천민은 손을 안 댔어. 그릇 굽는 사람들은 천민이 그릇 구웠다 이 말이여. 백정이나 이런 거. 그러면 그릇을 구웠으면 팔어야 밥을 해먹고 살 거 아녀, 돈이 나와야. 그러니까 거기에서 한 200매타 거리 되야, 점촌허고 이쪽은. 그러면 지금은 거그가 달밭가든이라고 허는 디가 거그 생겼는데 그것이 장터거리야. 그것은 용왕에는 천주교인이 옛날에는 백프로 거의 다 살았는디 지금은 인자 많이 떠나고 저그 했시요. 지금은 장이 안 서고 지명이 그 옛날에 그릇을 팔 때만 장터거리였고 지금 성당 다니는 분들보고 지금 물어보먼은 그런 것이 있었어요?, 이렇게 나와. 점촌이라는 곳은 지금 그 그릇 굽던 그곳은 주유소가 생겼어, 지금은. 그것이 새치주유소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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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 그럼 도깨비나 여우한테 홀렸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셨습니까?

A : 그런 얘기는 못 들어보고 남당산이 대한민국의 인제 조선땅에서 3대 명당이래, 명당. 명산. 남당산 심씨들 묘가 있는데 그 청송 심씨 이세조 할아버지를 뭐 3개월 동안 운송을 해서 모셔가지고 묘를 썼대요. 그런데 그 옛날 그 할머니들 말 들어보면은 거기는 산신령이 나타나는데 그 제각 그 뒤에 이렇게 인제 그런 전설이 있고 그런디 중간에….

B : 산신령이 뭘 했다는 이야기는 모르십니까?

A : 그런 건 인제 모르겄고 그 중간에 심씨들이, 청송 심씨들이 패하니까 강릉 김씨들이 득세혀가지고 거 자리에 밑엔가 우엔지는 몰라도 강릉 김씨 조상이 거그가 묻혔어, 지금.

B : 명당자리를 뺏은 겁니까?

A : 그러죠, 인제. 심씨들한테 뺏은 거야. 그러니까 지금은 다시 심씨들이 인자 원상복구를 해놨는데 이 근처 함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나이 드신 분들은 시제 지낼 때 저분들은 심씨 제산지 강릉 김씨 제산지, 이렇게 얘기를 해요. 왜그냐, 내 외가가 청송 심씨이기 때미 더 잘 알아요. 그래서 그 우에 산소가 청송 심씬지 아래 산소가 청송 심씬지, 그 산을 관리허던 분이 그 찾기 위해서 저 심씨들이 딱 권력을 잡으니까 혀를 깨물고 죽어버렸어. 그 산 관리헌 관리인이. 확실히 밝혀라, 어느 쪽이 강릉 김씨고 어느 쪽이 청송 심씨냐, 그런 걸 밝히지 않기 위해서 혀를 깨물고 자살했다는 전설이 있어요. 거기는 아래에서 상을 다 차려놓고 똑같이 제사를 지내요, 심씨들이 지금. 근디 인제 그분덜도 청송 심씨 이세 할아버지 산소가 우엔지 아랜지를 몰라. 그러고 강릉 김씨들도 우에가 시조인지 아래가 시조인지를 몰라. 지금은 뺏겨서 청송 심씨들이 완전히 장악을 하고 있으니까 강릉 김씨들이 인자 안 가지. 그 무호사화 때 그 옆에 거창 신씨들이 야반도주해서 와서 묻혀있는 11개가 있어 묘가, 거창 신씨들. 무호사화 때 거창에서 유골만 짊어지고 와서 무덤을 쓴 거여. 사화에 다 죽게 생겼으니까. 그 신씨들 말씀을 들어보먼은 왜 이게 구분 없냐, 야반도주해서 안 죽고 조상묘 지키기 위해서 유골을 짊어지고 왔는데 그냥 쓴 거다 이거여. 그 당시에는 아마 강릉 김씨한테 얻었는지 청송 심씨한티 얻었는지 아마 그랬을 거요, 제가 생각할 때는. 우리가 산을 바라보면은 왼쪽에 큰 묘 두 장은 청송 심씨와 강릉 김씨 그 조상들이 묻혀있고 어느 쪽인가는 몰라도, 거기서 바라볼 때 우측으로 저쪽 조그만 능선에는 11개가 묘가 있는데 거그가 거창 신씨들이 무호사화 때 피난을 와가지고 썼대요, 묘를. 그것이 인제 그 말 들어보먼 청송 심씨가 90일을 상여를 끌고 와서 묻혔다는 거여, 인자 90일 동안, 석 달을. 그 왕후가, 심씨들 왕후가 많이 나왔잖아요. 긍게 득세를 헐 때 인제 이 산을 강탈을 혔다고 봐야 혀. 우리가 생각헐 때는 강탈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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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 아까 말씀하셨던 움말이 왜 움말인지 들어보셨습니까?

A : 그건 모르겄어요, 나도. 샘골은 물이 잘 나와 하여튼 그 근처가 다. 세 개 부락이 물이 엄청 잘 나와서 미력이라고 허는 여그 바로 여그 이 동네에서도 가물 때는 정동에 가서 샘골이나 움말이나 부장골 가서 물을 길어다가 먹었어요. 우리 어려서도 그랬어요. 부장골 우물은 일 년 열두 달 품어도 물이 그대로 있어, 지금도 그거 폐쇄 안 허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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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 매통제라고 들어보셨습니까?

A : 매통제라는 곳이 철로가 나면서 일부 산을 깎아내렸어. 산이 깎여서 기찻길 우에 말허자먼 절구통처럼 이렇게 해가지고 나온 디가 있어. 지금은 건널목이 생겨서 저기 했는데 우리 어려서 여름에는 거기 와서 놀고 겨울에는 그 들판에, 그 들판을 간지평이라고 그러거든. 그러면 거기에다가 인자 덧 같은 걸 놓고 오리를 잡기 위해서, 겨울에. 그 우에서 지키고 있고. 오리가 많이 널러 오니까. 그리고 매통제 그 옆에가 까치고개야. 깐치고개라고 그러지, 깐치고개. 깐치고개라고 그랬어, 옛날에는. 그게 지금 함라 가는 그 구름다리 철길 위에 가먼 그쪽이 인제 깐치고개야. 그래서 인제 그 깐치고개에서 함라에서 이렇게 와가지고 깐치고개에서 우리 정동을 가로질러가는 길이 있어. 구렁목, 구렁목이라고 그래. 그래서 그리 지나가면은 지금 금마 가는 그 삼거리 있지. 그 밑에 하림 정규 공장이 있어. 그 정규 공장 그리해서 과동이라고 허는 데서, 과동이라고 해서 남당산 뒤 그 시제산 뒤로 해서 함라 고을에서 죄수들을 끌고 갔답니다. 함라 고을이니까 왜냐면 세법권이 여산읍이 관할이야. 긍게 인제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는 건 여산 와야 되니까 중대 죄인은 함라읍 사또가 보내는 거야. 그르먼 그렇게 후송허는 길이 이렇게 갈래로 이렇게 해서 걸어서.

B : 그 길이 죄인들을 후송하는 길이었습니까?

A : 예. 그렇게 해서 여산 고을로 갔답니다. 긍게 함라에서 성당을 거쳐서 그 이렇게 해서 인자 그 남당산 뒤 골목이 있어, 뒷길이. 옛날 다니던 길이, 지금은 다 없어졌지만.

B : 그 길을 구렁목이라고 불렀습니까?

A : 예, 지금 저 부촌 이 까치고개에서 넘어가면은 23번 국도가 나와. 그걸 구렁목이라고 그랬어, 우리 어려서. 그렇게 해서 그 옛날 할아버지들 말씀 들어보면은 죄수들을 데리고, 호송을 그 길로 해서 에, 남당산 그 시제산 그 뒤로 가면은 길이 있어, 지금도 있어. 그렇게 해서 여산 고을에 갔어. 여산 고을에 권한이 다 있어. 그리고 여산에서 정리를 못허면 전주, 완산, 그 전라 가명으로 인자 끌고 가, 여산서. 긍게 인제 이 익산 이 근처에서는 젤로 높은 곳이 여산 고을이여. 긍게 여산 고을 가먼 그 숩정이라는 디 가서 사형을 시켰잖어, 천주교인들을. 함라에서는 못 시켰어. 용안읍에서도 못 시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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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 철도와 관련된 이야기는 못 들어보셨습니까?

A : 옛날에 이 길이 용안에서 저쪽으로 길이 인자 함라로 나가야 되는데 함라 원님이 사시고 높은 양반들이 그것은 쌍놈들이나 허는 것이지 여기로는 지나가면 안 돼, 시끄럽고 허니까 안 되니까 못 허게 해서 이 길이 이렇게 함열로 인제 돌아갑니다. 나도 들은 얘긴데 함라 고을로 해서, 일정 때 인자 함라로 해서 임피 읍내가, 임피가 또 원님이 사시니까 그렇게 해서 군산을 경유허기 위해서. 왜그냐면 일정 때 수탈허기 위해서 길을 낸 것이거든. 조선 땅에 나는 곡식을 일본으로 가져가기 위해서, 배로. 그래서 인자 그게 안 되니까 익산으로 나니까 익산역에서 다 군산으로 낸 거야.

B : 철도가 난 후에 함열은 뭐가 달라졌습니까?

A : 기차역이기 때문에 인자 학생들이 통학을 했어요, 기차. 6.25 후에는 지금처럼 이렇게 좋은 차가 아니었어요. 화물칸을 나무판자 조각으로 의자를 만들어 놔가지고 다녔어. 그 당시에는 기차가 늦게 오먼은 30분도 늦게 오고 1시간도 늦게 오고 그랬어요, 6.25 후에. 그리고 사람들이 외처를 가기 위해서는 에, 웅포, 성당, 용안, 삼기, 낭산 이쪽에서 기차를 타기 위해서 함열역으로 와야 하니까 함열이 그래서 시장이 생겼겄지만, 더 커졌다 이 말이여. 기차 철길이 놓여져가지고 기차역이 생기니까 이 와리라고 허는 이 함열이 급속도로 발전을 했지.

B : 기차와 관련된 사고는 없었습니까?

A : 열차사고로 인명피해는 있었어요. 사람이 건너다가 피해를 당허고, 죽었으니까. 그리고 여그 인제 동지 건널목 가보면은 거기는 인자 말이나 소가 건너가거든. 그면 인제 이 말도 기차에, 그 건느기 위해서는 레일 사이에 말발굽이 좁으니까 끼어가지고 못 보고 기차에 치어죽은 예도 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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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 6.25 때 빨치산들이 지금 함열 성당 자리에서 사람들을 많이 죽였다는데, 그 이야기 들어보셨습니까?

A : 그게 소학교여. 옛날 소학교 자리에요. 근데 거기서 죽인 것은 아니지. 소학교 자리가 아니라 그 쫌 올라가면은 지금 거그가 쓰레기장을 했는데, 둥그리 방죽이라고 그래. 둥그리 방죽 위에서 창으로 찍어죽이고 때려죽이고, 그리고 용왕산 지금 탁예장(?) 씨가 그 정규 공장허는 그 우에 가먼 우묵헌 디가 있어. 거기서 죽이고. 함열에서는 용왕산 거기서 죽이고, 두 군데에서 죽였어요.

B : 몇 명이나 죽었습니까?

A : 숫자는 모르지. 지금 우리 마을에 움말이라고 허는 디가 정동이여. 정동마을에, 근디 인자 그 유일허게 잘 아는 내 친구가 국방대학 교수가 있어, 유재승이라고. 정년 했지, 늙었으니까. 그 집이 잠실이었어, 누에 키우는 잠실이 그 말허자면 이 빨갱이들이 전부 반동분자라고 잡어다 느가지고 거기서 데려다 다 죽였어. 양쪽에서. 그 자리가 지금도 있어. 그 원 집은 덮어져 있고, 거그가 지금, 그게 인제 천석꾼이라고 그래서 부자였어, 원래. 그 유, 대 자, 건 자, 대건 씨라고 그 할아버지가, 에, 그 할아버지 자제분이 유 재 자, 청인디 그 양반 돌아가시고 그 셋째 아드님이 유 재 자, 성인디, 유재성인디 국방대학 교수를 했어. 그 사람이 그 6.25 때 대한 역사는 참 잘 알어. 그 잡어다 가둬놓던 그 자리가 그대로 보존이 돼있어, 지금. 근디 인제 건물만 세우면 그 자리가 되야.

구술사진

정동마을 구술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