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명 : 함열읍 > 부촌마을

구술 기본정보

구분 내용
마을명 함열읍 > 부촌마을
구술자 김연호(1944)남자
면담자 박태건, 이동혁, 이호형
구술요지 마을유래담
지명유래담
전설 및 민담
민속
철도 이야기
구술일시 2012-08-13
비고 면담장소 : 함열 부촌마을 김연호씨 자택
면담시간 : 2012년 8월 13일 10시 50분
내용 : 지명유래 및 부촌마을에 대한 인터뷰 진행.
키워드  

문헌내용

본시는 ‘샘골(井洞)’과 같은 마을이었으나 호구가 늘음에 따라 1964년에 나누었음 ‘정동’참조옛날부터 부자가 많이 살아 생긴 명칭

『익산시사』

구술요지

1) 새로 채록 된 내용 :
- 지명유래: 옛날에는 우물 정자 마을 동자 '정동'이라고 불렸다. 함열읍에 큰 흉년이 와도 물이 마르지 않는 좋은 우물이라고 해서 '정동'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2) 유적, 터 및 기타지명
- 정동: 옛 마을 지명이자 공동우물 이름이다.
- 송정: 소나무가 많아 사람들이 자주 놀고 쉬었으며 마을 무제를 지내던 곳이다.
- 매통제: 소를 끌고 다니는 매를 만들 만한 나무가 많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부촌마을에 상징이라고 한다.

3) 전설 및 민담
- 도깨비와 씨름한 이야기: 고구마 밭 주인 할아버지가 도깨비하고 씨름을 했다는 이야기이다.

4) 민속
- 기우제: 마을 여자들이 제사 음식을 장만하고 기우제를 지내는 사람은 목욕재계를 한 뒤에 제사를 지냈다.
- 마을 잔치: 부자가 많이 살아서 잔치를 하면 크게 하고 소리꾼을 초청해서 놀기도 하였다.
- 빗자루 태우기: 액운을 내쫓기 위해서 빗자루를 태웠다.

5) 철도이야기
- 옛 함열역 풍경: 조그만 간이역이었다.
- 기찻길: 함라에 만석꾼, 천석꾼, 양반들이 많이 살아서 기차를 반대했다 한다. 그래서 현재 함열역 자리에 기차가 개설되었다고 한다.

구술채록

A1 김연호 (69) 1944년


B1 박태건
B2 이동혁
B3 이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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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촌마을 이장님 집 앞에서 간단한 이야기 이 내용은 이후에 다시 채록)


A1: 우리 마을에 자랑할 것도 사실은 없고 그 그러니까 아까 이야기 하다 시피 그 면장이라는 사람이 그 마을을 빠게 놓아가지고 했는디 옛날에는 여그가 부자가 많이 살았었어요 그리고 집성촌으로 우리 청도 김가들이 한 100여구 살았었습니다. 옛날에 제가 지금 청도 김가인데 그 본이 경상북도 청도군 청도 읍네에 있는 그 지금도 시초 할아버지 산소가 거그가 있습니다 1년에 한 번씩 제사도 지내고 다니고 그러는데 한 100여 구가 있었는데 그 인제 노인 양반들이 그전에 제가 어려서는 100여 구가 되었는데 노인 양반들이 작고하시고 아들 들이 그 좀 머리가 좋아서 그랬는지 하여튼 운이 좋았는지 전부다 객지로 나가가지고 거 다 서울 같은데서 이런 직장 잡아가지고 사니까 저도 서울에 한 20년 하다가 좀 그럴 일이 있고 아버님이 작고하셔가지고 81년도에 작고하셔가지고 79년도에 내려오긴 내려왔는데 내려와서 보니까 뭐 지금 농사 짓는 뭐 솔직히 많습니까? 절대 농사 짓어서는 지금 가르키기 힘듭니다 그래도 한 달에 100원이든 150만원이든 일정적인 수입을 가진 사람은 얘들들 대학을 가르킬 수 있고 하지만 농사 보통 여그서 지금 많이 짓는다는 사람은 대경작자는 많이 있어요 몇 명 있습니다 있기는 근데 그런 사람들도 자기가 손수 벌어서 산게 아니라 농촌 진흥공사에서 자금을 얻어가지고 20년 상환으로 20년을 벌어서 1년에 얼마씩 갚는 이런 형식으로 해서 한 400∼500마지기 갖은 사람도 있습니다 여 ‘중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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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 예전부터 부자들이셨습니까?

A1: 여그가 마을에 옛날에 부자들이 많이 살았죠.

B1: 일제시대 때에도 그분들이 부자셨어요?

A1: 예 그전에 일제시대에 우리 여그 부락이 아닌 ‘정동’부락에 그 ‘유재철’씨 아버님 이름 존함을 제가 모르겠습니다만 ‘유재철’씨 아버님이 천석꾼이를 했어요.

B1: 그분이 가장 유명한 부자이셨나요?

A1: 함라는 뭐 만석꾼이도 있었으니까 함라 지금 새로 집을 다듬어가지고 관광지로 해놓았지 않습니까? 그런디는 만석꾼이가 살고 뭐 5천평 이렇지만 여그는 제일 부자가 그 천석꾼이가 ‘유재철’씨도 작고하셨습니다만 그분 아버님이 천석꾼이를 했었고 그 나머지는 보통 먹고 살만한 농사 그 100여 마지기씩 이렇게 짓고 그러고 일꾼들 머슴들 옛날에는 전부다 지금은 누가 그런거 하지 않지만 머슴들이 옛날에 와서 일을 많이 했죠 긍게 농사를 40∼50 마지기 지으면 자기가 일을 못하니까 머슴을 두었어요 지금은 기계화가 되니까 그런 것이 필요 없지만 머슴을 두어 가지고 1년에 쌀 8가마니 9가마니 이렇게 세경을 주어가지고 일을 시키고 그랬는디 지금은 그분들도 다 돌아가시고 허니까 기계화가 되어 버리니까 20∼30마지기 50마지기 짓는 사람도 기계를 살려면 굉장한 돈이 들고 여기서 농촌지도소에서 거기에서 임대차 기계를 임대차 해줍니다 해주는데 그 임대차가 그 많은 숫자라 언제 날짜가 나올지를 몰라서 가져오지를 못해 그러니까 여 근방에 있는 기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 한테 맡겨가지고 그분들이 다 해줘요 소득이 없어도 별수가 없어요 나이는 늘었지 그러면 누가 지금 그 옛날처럼 쟁기질을 하나 경운기를 하나 트랙터로 다 해버리니까 한 마지기 지금 트랙터 하는데 4만5천원입니다 그러지 자 노타리 처가지고 심는디 돈 2만 5천원인가 그러지......(현대 농업 상황에 대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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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3: 어르신 그러한 이야기도 좋지만 조금 부촌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실 수 있는지요?

A1: 에- 그러면 그 옛날에 기미년 흉년에 여그가 제가 ‘정동’이라고 했자나요 정자가 우물 정자에 마을 동자 골 동자 ‘정동’이라고 해가지고 샘 정자 이렇게 마을 동자 ‘정동’이라고 했어요 기미년 흉년에 그 물이 안 말랐습니다 이 여기 샘에 그래가지고 여근방 함열에 있는 사람들이 물을 여그와서 다 길어다 먹고 빨래를 여그와서 할 정도로 그만큼 쓰면 그만큼이 금방 고여져.

B1: 기미년 흉년이 그렇게 심했습니까?

A1: 기미년! 흉년이 무지하게 심했죠 뭐 물이 도저히 비도 안 오고 물을 어떻게 대가지고 호미로도 해서 하고 진짜 소출도 못할 정도에 그 딴데 같으면 문화원 같은데 가서 물어보면 아시겠지만 기미년 흉년이 굉장한 흉년이었습니다 제가 그때는 뭐 나지도 않았을 때인데 에- 그런게 그때에 그 우물로 써 여근방 먹었다는 그거 하나 그것이 자랑이었고.

B1: 흉년이 참 심해가지고 사람도 많이 죽고 힘들게 살았겠네요.

A1: 예 그때 기미년이면 몇 년도 인지는...

(기미년 관련 기록을 찾음 그러나 찾지 못함)

A1: 하여튼 기미년 흉년이라고 했어요 기미년 흉년에 그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여그와서 그 우물을 길어가 먹고 빨래도 하고 그러고 지냈다는 그 옛날 어른들이 전설도 있고 지금도 우물이 남아 있습니다 근데 각 가정에 수도가 들어오고 하니까 물을 잘 안 쓰고 거기 근방에다 관정을 파가지고 품어 내니까 그 물이 없어져버려 달아서 지금도 자리는 있습니다.

B1: 자리는 있는데 물이 없다고요?

A1: 네.

B1: 그 우물 이름이 무엇입니까?

A1: 그 우물이 그러니까 우리 동네에 있었으니까 ‘정동’ 이라고 했죠.

B1: ‘정동’우물?

A1: 예 그것이 깊이가 한 12미터 되까? 이정도 근데 지금은 마니 매꾸어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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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3: 어르신 기미년 흉년이 크게 들면 기우제도 지내고 그러자나요?

A1: 아- 물론 그 보편적으로 산에 지금은 이렇게 요그가 밭으로 변했지만 그전에는 소나무가 나무가 좋은 나무가 빡빡하니 진짜 좋았어요 근데 저 철길 바로 옆 도로가 산소가 하나 있었는데 넓고 좋아 그 산소가 그게 이제 옛날 지금도 지금으로 말하자면 그 시제를 모시는 산소인데 거기가 넓으니까 거기다 놓고 그 들판을 처다보고 기우제를 지냈지.

B1: 누가 지냈습니까?

A1: 이제 동네 어른들이 인제 어른들이 지금으로 말하면 그 여자들이 장만도하고 여자들은 장만해가지고 그 참 하는 사람들 목욕재계하고 나가서 기우제 지내고 그랬지 그런 것을 하여튼 기우제를 지내는 건 그 뒤에도 우리 어려서도 기우제를 지내는 것을 봤습니다 그니까 기미년이 지나서 아 지나서도 비가 많이 안 온 해가 많았죠 흉년이 든 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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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3: 소나무 밭은 없어 졌나요?

A1: 다 없애 버렸죠 인자 지금은 없애고 밭으로 다 만들어서 사용하고 있지.

B3: 저녁에 다니면 으스스 하셨을 것 같아요 소나무가 많아서.

A1: 어 그럼 그전에는 참 사람들이 들에서 일하고 오며는 그 나무가 크고 좋으니까 거그와서 쉬었다고 점심을 먹으며는 거그와서 한나절을 쉬어가지고 들판에 나가 또 일을 하고 들어오고 이제 참 놀이터 식으로 이렇게 있었어요.

B2: 어르신 무제 지냈다는 저 소나무 많았다는 곳을 뭐라고 했나요?

A1: 에-- 거기보고 소나무가 많았다고 해서 그랬는지 ‘송정’이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소나무가 많았다고 해서 ‘송정’이라고 했는지 하여튼 ‘송정’이라고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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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3: 그러면 이처럼 마을에 특이한 지명을 가지고 있는 것이 있나요?

A1: 없습니다 여기는 원래 원래가 이 평야지 였던 대라 특이한 것은 없습니다 그분이 하나가 인제 천석꾼이었다는 것하고 이 마을 평준하게 이렇게 살면서 우리 청도 김가 들이 한 100가구 사니까 딴 사람들이 침범을 못하고 타승바지가 얼마 없었는데 우리가 나가면서 집을 팔으니까 타승바지가 또 사가지고 들어오고 하다 보니까 지금은 한 30호 남았습니다.

B3: 어르신 옛날에는 부자들이 많이 살았으면 잔치도 크게 했을 것 같은데요?

A1: 예 잔치 같은 것 옛날에 여 지금은 뭐 환갑잔치를 안 하지만 그전에는 다 잘 살았으니까 환갑잔치를 하면 한 이틀씩도 하고 그랬죠.

B1: 아- 이제 옆에 마을도 초대해서요?

A1: 그럼! 저 기생들 불러다 놓고 한 이틀씩 하고 그랬지.

B1: 소리꾼들도 오고 그랬어요?

A1: 그러믄요!

B1: 유명한 소리꾼도 오고 그랬습니까?

A1: 아니 그런 사람들이 아니더라도 하여튼 요 근방에서 그전에는 여 근방에 술집이 많았어요 여그가 함열에 가면 옛날에는 관이라고 하지 왜? 무슨 관 무슨 옥정 뭐 이렇게? 그런데 가면 소리를 잘하는 사람이 있었어 그런 사람들을 돈을 주고 불러다가 3∼4명을 불러다가 하루 종일 놀고 그 이튿날도 딴 사람이 와서 한 이튿씩 그런 잔치도 하고 그렇게는 많이 했죠 그런 것을.

B1: 술집이 많았다는 것은 그 돈이 많아서...

A1: 그렇지 부자라 먹을 만 하고 왜냐 그것이 없는 사람을 위해서 잔치를 해주는 거야 먹여주고 돼지 잡고 막 이렇게 해가지고 그런 잔치를.

B1: 잔치는 없는 사람을 위해서 하는 거지만 술집이 많은 것은 상당히 이 주변에 잘 사는 사람이 많았던 것 같은데요.

A1: 그러죠 저 함열에는 술집이 많이 생기는 참 그때만 해도 극장도 돌아가고 지금은 폐가 되었지만 극장도 있었고 그 여기가 모이는 장소 였어 웅포 성당 용안 용안은 일부 강경으로도 가지만 여기 함라 여 근방이 남산 거그가 다 이리 모여 왜냐면 버스가 여그 밖에 안다니고 기차가 여기 밖에 안다니고 그러고 그런데는 지금 이야기하지 그전에는 가설극장이라는게 있었자너 가설극장 인자 운동장에다가 텐트 쳐놓고 하는 것 서커스 이런 것도 1년에 한 번씩 오면 그 노름꾼들이 모여서 하는 그 뭔 패라고 일주일씩 막 이렇게 하는 것이 있었어요.

B1: 노름꾼들이 마작 말고요?

A1: 아니 마작 말고 그것보고 뭔 장터 같았다고 하도 오래 돼서 기억이 잘 안 납니다만 그것을 하면 한 일주일씩을 해 그러면 거기 있는 사람들이 거즘다 저녁에 놀러와 그러고 가설극장 같은 것을 하면 공짜로 하니까 그걸 보러와 그러고 서커스 같은 것도 하면 여그가 중심지라 여그서 주도하면 돈 주고 들어가서 옛날에 서커스도 보고.

B1: 6.25 전쟁 전 이야기 인가요?

A1: 6.25 후에도 그렇게 했죠 6.25때는 제가 자세히 모르지 나도 44년 생이니까 6.25때는 잘 모르는디 6.25 후에 그 장터가 그렇게 섰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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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 어디서 그렇게 돈이 많이 돌아서 장터가 크고 사람도 많았을 까요?

A1: 그전에는 에 지금은 노름이라는게 없어졌습니다 옛날에는 노름꾼들이 마작이나 투전이라고 하죠 투전을 가지고 노름을 하면 그 집 한 채가 지금은 그전에는 지금도 등기본 등본이 있습니다만 그전에는 그런 것 가지고 다니면서 주면 고만이고 그놈을 옮기고 법이 그렇게 돼 있었어요 지금은 정상적으로 등기를 내야하지만 그전에는 그놈 넘겨주면 그 사람 것이고 또 따면 또 잡아 댕기고 이런 식으로 노름이 심했어요 그러니까 그 먹고 그런 일이 많았었지.

B1: 한마디로 농사를 지어서 그 돈이 다 생겼을 까요?

A1: 인자 땅을 가지고 노름 하는 것은 아니 농사 짓는 것은 집에서 먹을 것 만들고 그러고 6.25 막 직후에는 농사를 짓어 놓으면 그놈들이 강탈을 해가니까 감추어 놓기도 하고 땅을 파서 저녁에 해놓고 위에다 살짝 이렇게 벼 같은 걸로 덮어 놓고 이런 일도 수도 없었고 옛날에는 다 그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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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 6.25때 여기 빨치산이 많았나요?

A1: 예예 빨치산들이 많이 와가지고 요 앞에 가면 ‘용왕산’이라고 있는데 거기서도 많이 죽었지만 지금 천주교 자리가.

B1: 천주교 자리요? 어떤 천주교 자리요?

A1: 함열 천주교 있는데 가 옛날에 왜정시대 소학교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우리 지금 함열 초등학교 함열초등학교가 학교가 있엇는데 학교가 적으니까 거기에서 불과 한 200∼150 미터 떨어진 곳에다가 소학교를 지었어 그래가지고 산 위에 중턱에가 있었는데 그 밑에가 굴을 파 놓고 그 사상이 불순하다든지 한 사람들을 끌어다가 넣어 놓고 집단 총살을 시키고 그랬는디 지금은 천주교에서 그놈을 싹 밀어가지고 마당을 매꿔서 마당을 만들었지만 옛날에는 제가 학교 다닐 때만 해도 그 굴이 있어가지고 막 무섭다고 들어가면 뼉다구가 많았어요.

B1: 천주교 성당 마당자리가 그 굴이라는 것이죠?

A1: 그렇죠 마당자리가 지금 성당을 지은 바로 옆에 마당자리가 그 자리가 맞아요 그 성당을 지을 때도 그것을 알았을 거에요 왜냐면 이 성당이 원래 지을 때 옛날에 저 국회위원이었던 ‘강세영’씨 사사오일에 저기에 들어갔던 ‘강세영’씨에 그 양반이 집을 뜯어다가 천주교를 지었거든 천주교를 이렇게 지었는데 나중에는 그 헐어버리고 크게 지었지.

B1: 그러면 ‘강세영’씨 집 밑에 굴이 있었고 거기에 천주교가 만들어진 건가요?

A1: 아니죠 ‘강세영’씨 원 집은 용안면 인데 용안인데 ‘강세영’ 박사가 집을 관리 할 사람이 없으니까 뜯어다가 천주교를 지었어.

B1: 그 집 뜯은 것도 다 없어졌겠네요?

A1: 지금은 다 없어졌죠 다 뜯어 내버려 갔고.

B1: 천주교 성당 지은 자리는 옛날에...

A1: 으응 소학교라고 해가지고 일본 놈들 일본 사람들이 소학교라고 했자나요 학교를 우리 국민학교를 그전에 지었는데 그 뒤에다 소학교를 지었어 소학교를 지어가지고 거기서 1∼2학년 까지는 이 짝에서 배우고 인자 4∼5학년이 되며는 그 소학교를가 그니까 좀 크다고 해가지고 거기 가서 가르켰어 가르켰으니까 그때 당시 진짜 사람 거기서 많이 죽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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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 어떤 사람들이 많이 죽었을 까요?

A1: 그 주로 옛날에는 그 뭐라고 할까 착취를 하고 일꾼들을 데려다가 제대로 부려먹고 돈을 잘 안 준다던지 하면 그 사람들이 빨치산에 앞잡이가 되가지고 누구누구 이름을 부르면 그 놈다 이렇게 끌어다가 죽인다고.

B1: 지주들도 많이 죽었어요?

A1: 그렇지 지주들이 주로 많이.

B1: 그럼 부촌이 돈이 많았으니까 부촌 사람들이 많이 죽었겠네요.

A1: 부촌 사람들은 별로 거기서 증용은 많이 갔어도 거기 가서 죽은 사람들은 없어요 증용으로 다 가서 많이 죽었지.

B1: 증용이라는 것이 언제...

A1: 일본 왜정시대 일본에 들어가서 ‘아우지’탄광 같은데 이런데 가서 증용을 살았지 않았습니까? 지금 증용자들 그 서류를 해가지고 받아 준다고 지금 항상 그 나오고 하는 증용 그 증용을 많이 갔어 여기 사람들은 안 죽을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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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 증용 갈 때는 어떻게 했습니까?

A1: 증용 갈 때는 익산역 있지 지금은 솜리역이지 옛날는 솜리역에서 타면 이리 지나가서 철로 도변에서 서서 손 흔들고 그랬지 다 증용 갈 때 우리 어려서도 막 가서 손 흔들었지 막 이러고 가따 오고 가서 온 사람은 드물어 거진다 탈출해서 온 사람이나 이런 사람들이 가서 제대로 하고 온 사람은 드물어.

B1: ‘함열역’도 있는데 굳이 ‘솜리역’까지 왜 갔을 까요?

A1: 솜리가 거 근방에 집결지 였으니까 익산하고 옛날에는 솜리하고 익산하고 따로따로 였었자나 여기는 익산군이었고 거기는 이리역이 있었어 근디 이리역 되기 전에가 솜리역이여 왜정시대 익산역 되기 전에가 익산이 아니라 이리역 되기 전에가 솜리여 그래가지고 익산하고 합치면서 익산역이 되었지 통합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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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 예전에 ‘솜리역’은 작았었나요?

A1: 아니여 전라선 호남선 군산선이 갈리는 곳이니까 컸지.

B1: 그 앞에 풍경은 보셨나요?

A1: 아 이제 왜정시대니까 말도 못 했지 뭐 저 쉽게 말하면 우리 어려서 가보면 그 얻어먹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많이 있었고 지금은 그런 거 다 정부에서 해주고 하니까.

B1: 부랑자도 많고 건물들도..

A1: 건물들도 통 없었지 그러고 그때 당시 인자 사람이 많이 보이니까 그 창녀촌이 형성이 되가지고 그것이 오래 지속 되서 그랬는디 그 ‘화춘화’ 쇼 할 때 ‘이리역전’ 폭발 사건 때 그때 그 창년촌이 쓸어버렸지 다 그때 다 무너져 버렸은게 그래서 그 창녀촌이 없어져 가지고 아파트 같은데서 암암리에 하다가 지금은 거희 별로 저기 허고 그때 당시는 그리 참 지금도 말하면 많이들 다니고 그랬어.

B1: ‘함열역’ 앞에는 어땟나요?

A1: 함열역은 조그만 하니 간이역 이었지 그래도 그런데로 지금 여그 중간에 선 것이 다송리역이 없어지고 여기 오다보면 황등역도 지금 없어 졌자나요 황등역이 없어지고 다송역 없어지고 그래도 함열역은 살아있고 여그 위에 가며는 용동리라는 곳이 있어 용동역도 사라지고 그 위에 강경이 있고 이런 식으로 조금씩 타는 데만 남겨 놓고 여그를 다 없앴어요 지금.

B1: ‘함열역’ 앞에는 여전에 어떠셨어요?

A1: 뭐 이런 초가집 있었고 말도 부리고 리어카 꾼도 있고 지게 꾼도 있고 그런 식으로 다 ‘이리역전’ 가도 그랬고 여그도 장날이면 장을 보러오자너 보따리를 어따 싣고 올 차가 없으니까 보따리를 못 짓고 오면 말꾼이 그놈을 실어다가 날라주고 그랬어 새벽에 가서 나르는 사람 집에 가서 보따리를 다 챙겨서 가따 놓으면 거기서 펴서 장사를 하고 저녁 때 되면 싸놓으면 그 말꾼이 그루마에다 실어다가 집에다 다 가따 주고 이런 식으로 했지 뭐 지금처럼 버스가 있어 트럭이있어 그러고 초가집이 있었고 뭔 집이 있었을 것이요 옛날에 그러고 지금은 그 장터 자리가 없어 졌지만 그 전에는 쭈-욱 한 네 칸이 장보는 자리를 만들어 놓았 었어 이렇게 앞 뒤로 장보러 댕기면서 살 것 사고 그랬지만 지금은 그것을 다 없애버리고 그 함열 시장을 현대화 시장 진다고 지엇지 그 시장이 이렇게 쭉쭉 있던 것이여 그것이 지금은 그런 거 있는 데가 없을 것이여 그 전에는 다 그런 것이 있었어요 지금도 어딘가는 보존하려고 남겨 놓은 곳도 있것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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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2: 기찻길이 놓이면서 양반들이 반대하거나 그런 일은 없었나요?

A1: 예 여기가 내가 들은 말에 의하면 ‘함라’가 여기 함라읍이라는 것이 그전 이조 시대 함열읍이 함라여 함열리 함열리가 함라가 그게 함열읍 지금 함열이라는 곳입니다 거그가 지금도 향교도 크게 있지만 양반들이 많이 살았어 아까도 했지만 만석꾼이가 있고 천석꾼이 막 이런 사람들이 많으니까 이놈들이 무슨 소리를 하냐고 새카만 구렁이가 기어댕기게 이리 못한다고 반대해가지고 여기서 이리 돌려가지고 이리 나갔다는 거야.

B1: 원래는 함라로 가는 것이었는데요?

A1: 함라는 가는 선이 양반들이 절대로 못 돈다고 해가지고 이리 이렇게 돌렸다는 거야.

B3: 새카만 구렁이요?

A1: 옛날에는 석탄을 때고 돌아 댕기고 막 삑삑하고 허고 하니까 막 시끄럽고 그랬자녀 그런게 그런 것을 못하게 했다 그 소리여 그래서 이 짝으로 돌렸다고 그런 이야기가 있어요 그것은 확실하게 이야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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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 기찻길 놓고 나서 마을이 많이 커졌나요?

A1: 아니죠 커진 것도 없고 마찬가지지 다만 여기서 인자 우리도 저 이리로 저 지금 솜리 후에 이리 되었을 때 학교를 그리 다녔지 긍게 통근 열차가 그 함열에 섰어 서가지고 용동도 아니 저 지금 다송리라고 아까 없어졌다는 디 거그도 황등이랑도 통학생을 위해서 통학차가 학생들을 나르니라고 있었는데 인자 커지고 버스가 많이 다닌게 역전이 자동으로 다 없어 져버렸어 시간 맞춰서 그전에는 가끔 시간 맞춰서 한 시간이나 이렇게 되야 두어 시간 되야 댕겼지 없었자녀 그 뒤로는 버스가 좀 생기니까 시내버스가 저 시내버스가 아니라 시외버스가 생기니까 그래도 30분마다 하나씩 댕긴게 그 시간에 맞춰서 그놈을 타고 댕긴게 편했지 그러안으면 새벽 밥을 먹고 그놈을 타야 학교를 가서 한참을 있어야 하는디 그 뒤로는 인제 여유가 있으니까 그 버스를 많이 타고 댕긴게 그 열차가 자동으로 폐쇄가 되버린거여 참.

B1: 옛날에 그럼 통학기차가....

A1: 그렇치! 통학 차라고 했지 통학차.

B1: 기차가 대부분 함열역이 통학생이 많이 이용했었나요?

A1: 많이 이용했지 저 낭산 응포 청당 여그서 다 그리 걸어와서 거기서 그 열차를 탔으니까.

B1: 통학생 말고 누가 많이 이용했나요?

A1: 그 다음은 장사꾼들 인자 시골에서 뭣을 조금씩 캐가 지고 장만하고 자기가 키운 것을 가지고 그리도 익산이 크자녀 솜리라는 데가 크니까 그 중앙시장 같은디 노점에다 놓고 노점상을 하고 다 팔으면 또 들어오고 그 사람들이 주로 이용하고 그랬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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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3: 기차에 사람도 많이 치이고 그랬었나요?

A1: 아 그전에는 철도 사고도 많이 났었지 아 자살하는 사람이 다리 밑에 들어갔다 모가지 이렇게 내가지고 자살한 사람도 있고 지금처럼 신호 체제가 잘 안되니까 그 신호를 못 보고 지금은 중간 중간 한 500미터 마다 신호가 체제가 되어있자녀 근데 인자 집을 빨리 갈라니까 철길을 건너가야 빨리가 옛날에는 나락을 전부다 집에다 실어 날랐자녀 집에 와서 탈곡을 했자녀 지금 인게 들판에서 해가지고 나락을 가지고 RPC 같은데로 가지만 그전에는 다 지게로 짊어져가지고 집에다 쌓아놓고 좋은 날 잡아서 한꺼번에 훌터가지고 그 나락을 내고 그랬단 말이여 그것을 다 지어 날랐어 그런게 철길을 많이 건너다가 사고가 종종 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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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 다른 마을은 풍물이나 다른 민속놀이를 많이 했었는데 여기는 개화가 빨리 되어서 그런 것은 없었나요?

A1: 풍물도 치죠 여기도 쳤지 명절 때 되면 섣달 그믐달 되며는 액운을 쫓는다고 그래가지고 풍물을 저녁에 막 비(帚)도 빗자루도 태워가면서 막 풍물하고.

B1: 빗자루를 왜 태웠나요? 횃불로 사용하려고요?

A1: 그 빗자루를 횃불을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금년 운을 액을 다 내 쫓는다고 그래서 다 쓸었다고 해서 그 비를 태운 거야 그 화장실에 있는 비 같은 것 그런 것을 왜냐면 액운을 내쫓는다고 그래가지고.

B1: 그러면 비를 특별히 만들어서 태우는 것이 아니라.

A1: 그러지 액운 쫓는다고 그래가지고 헌 비를 태웠다 아 여기서 섣달 그믐달 되면 그 놀이를 하고 애들들 뒤 따라 댕기고 그렇게하면 집에 가면 음식 장만 한 것을 다 내놓자나요 섣달 그믐이니까 저녁이니까 초하루날 아침에 제사를 지낼려면 장만한 놈을 내놓으면 막 술도 먹고 놀고 애들 들은 떡도 먹고 막 이러고 뒤 따라다니면서 쭈-욱 어른들은 풍물 치면 애들 들은 횃불 들고 막 앞 뒤로 댕기고 장난하고 막 장난하고 이러고 놀았지.

B1: 사람이 많으니까 볼만 했겠네요.

A1: 그렇죠! 그 전에는 진짜 지금 인게 사람이 없은게 그러지 엣날에는 꼬마들도 많았었고 참 그랬죠 아 함열 초등학교가 6반까지 6클래스까지 있었어요 60명이 우리도 3클래스 까지 다녔는데 나 까지만 해도 3클래스 다녔는데 우리 뒤로는 6클래스 까지 있었어 함열 초등학교가 60명씩 59명씩 그런게 일게 반에 360명이 있었다는 이야기여 60명 인게 6반까지 있었어 그렇게 컸었는디 지금은 다 합쳐도 180명도 안된게 그렇게 없어져버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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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 서로 투석전 같은 것도 하고 그랬나요?

A1: 아 그렇지 그런 것도 많이 했지 인제 우리 어려서 미력 여고 저녁이면 막 이 동네는 전기가 좀 늦게 들어왔어요 근디 그 짝 동네는 전기가 함열이 가까워가 지고 먼저 들어왔어 미력동이 미력이 지금이 이리 넘어오다가 ‘아사달’공원 오다가 ‘파이넬’이 있지 그 올라오는 고비 있지 이렇게 그 고비가 지금 인게 깎아서 그러지 옛날에는 거기가 높았어.

B1: 그 고비를 무엇이라고 했나요?

A1: 거기는 밭이지 밭 자리에 다가 여기 돈을 많이 벌은 ‘유재철’씨라고 그 사람이 돈을 많이 들여서 지었는데 그 IMF 맞아가지고 망해서 팔아 먹었어 그래가지고 식당을 3∼4사람이 인수해서 한다고 그랬는디 제가 알기로는.....

(현대 개인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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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 예전에 그 고비를 무엇이라고 불렀나요?

A1: 옛날에는 미력리에서 이렇게 건너서 학교를 가고 헐라면 ‘콩나물’고개를 건너가고 했지.

B1: 왜 ‘콩나물’고개라고 했나요?

A1: ‘콩나물’고개를 걸어간 것은 미력동 거기 앞에 두부도 많이하고 콩나물을 기르고 그렇게 했어 두부 집도 있었고 콩나물 기르고 이렇게 하는 집이 그런게 이런 도외지에서 콩나물을 길러가지고 이리에 가서 팔고 그런거여.

B1: 지금도 ‘콩나물’고개라고 부르나요?

A1: 아니여 지금은 뭐 누가 그런거 아는 사람도 없어 인자 어른들이나 나이 많이 잡순 분들이 그놈을 알 수 가 있지 그 젊은 사람들은 몰라요.

B1: 또 다른 지명들 있나요?

A1: 혹시 그런게 나도 나이가 얼마 안되고 그러니까 이제 나이 70되서 무엇을 알것어요 그 전에 것은 잘 모르지만 내가 대충 적으로 헐 때 보며는 그렇게 서울 살았고 그랬는디 아 나는 이런 것인지 모르고 얼마 전에 문자가 하나 왔더라고 그면 하는 가보구나 내가 기다렸는데 이게....

(김연호씨 개인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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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1: 참 옛날에 ‘갈기’라도 잡고 했는디 우리가 그 지금 ‘금강하구둑’을 막았으니까 그렇지 막기 전에는 짠물이 들어왔다 나갔다 그랬어 웅포까지 우리 얼마 전만 커서 뭐 그래가지고 지금 그 뚝을 막는 바람에 짠물이 안 들어오고 민물만 있으니까 그 ‘갈기’가 없어졌지 옛날에는 털 달린 ‘갈기’가 짠물이 와따 가따 하면...

B1: ‘갈기’가 무엇인가요?

A1: ‘갈기’라고 조그만 하니 이만 한 것이 있어 저 게라고 하자녀 쪼만한 게 있어 그것이 무지하게 많았어 그러면 그것을 잡아가다 이 궁뎅이를 파놓고 막 갈대밭에서 마-악 흔들고 가면 다 그리 들어 가자나 잡아 다가 담아넣고 먹기도 하고 그놈을 달여서 옛날에 김장 할 때 지금으로 말하면 젖국으로도 사용하고 그런 했는디 지금은 ‘금강하구둑’을 막아지면서 그것이 없어져 버렸자녀 그것은 민물만은 먹고 못 살어 그 짠물을 먹어야지 그러지 갈대밭은 지금도 가상에 조금 성당 쪽으로 저 짝 쪽으로 한산 쪽으로 조금 있지만 이 짝으로는 다 없어져 버렸자너 그것이 그 전에 갈대밭이 있을 때는 아니 짠물이 들어올 때는 갈대밭이 많았어요 여그가 그 그걸 막아가지고 생태계가 변해 버렸죠 완전히 그 그런게 그놈을 막아 놓으니까 민물로 허니까 가물어도 물 걱정은 없다 이거지 물 걱정이 없는게 문제가 아니지 옛날 생태계가 부셔져버렸지.

B3: 거기를 ‘갈기밭’이라고 했나요?

A1: 인자 갈대밭 갈대밭 속에 살았어 그것이 그러면 막 거기에 그 새들 그 종달생 같은 이런 새들도 그 갈대밭 그러면 그놈에다 집도 짓어 놓고 재잘재잘하고 진짜 참 그런 시절이 좋았고 그랬는디 지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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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 옛날에 ‘성당포구’에서 굿 같은 것 하는 거 보러 다니시고 그러셨어요?

A1: ‘성당포구’에 그렇지 지금은 그 포구로 저그가 배가 들어왔으니까 배가 강경까지도 그 전에는 왜정시대는 강경이 5대 포구 였어 웅포와 함께 5대 포구 안에 들어가는 포구에요 그 성당도 그 배가 들어와 가지고 우어 같은 것도 거기서 잡고 가고 지금 그 짠물이 들어 올 때는 실뱀장어 뱀장어 그것을 잡으면 꼭 진짜 뭔 만하다고 할까 바늘만혀 그것이 잡히면 그거 한 마리가 무지하게 비쌌어요.

B1: 왜요?

A1: 민물장어 민물장어 그놈을 잡아가지고 일본에 수출했다니까 전부다 그 성당에서 그 웅포 곰개나루터 있어 거기가면 지금은 놀이터도 만들어 지고 했는디 거기에서 주로 쭈-욱하니 망을 쳐놓아 그러며는 물이 저 짝에서 썰물이 들올 때 아궁지는 크게 해놓고 저 짝에서 쪼만하게 해서 묶어 놓자너 그러면 들어 오며는 인자 물이 썰물이 나갈 쯤 되며는 걷어가지고 그놈을 털어서 그놈을 게리는 거여 이렇게 쪼만해 바늘 만에 그놈을 짠물에 이렇게 담아 놓으며는 중간 상인이 사가 비쌌어 한 마리에 그때 천 원씩 이렇게 했으니 굉장했지 담배 한 값에 120원 130원 할 때니까 비싼 것 아니여? 그래가지고 거기가 그랬는디 생태계가 무너져버려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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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 이 근처에 도깨비 이야기 들으신 것은 있나요?

A1: 그런 것은 없고 그 전에 요 앞에 가면 ‘독산’이 하나 있었는디 거기가 있었는디 ‘할미바위’가 있고 ‘장수바위’가 있었어 근데 그것이 지금은 없어져 버렸어 독을 캐니라고 그것 할 때 반대를 무지하게 하고 했는디 그게 유씨들 땅 그 종산이었어 유씨들 버들 유자에 유씨들 그랬는디 우리 어려서 추석에 참 그 옛날에 밀을 많이 갈았자나 밀을 해가지고 빵을 쪄가지고 그리 놀러가 소풍을 가듯이 가며는 지금은 가라고 해도 못가 어릴 때 마음인게 그 ‘애기바위’를 걸어서 ‘장군바위’라고 하거든 ‘장군바위’가 있는디 장군이 애기를 낳은 옆에가 그 또 애기 두어있는 푹 들어간 자리가 있어.

B1: 장군이 애기를 낳았다고요?

A1: 어 애기를 낳았다고 해가지고 그러면 바위가 크-은디 그것이 있었는디 나중에까지 결국에 폭발을 시켜버렸어 그것을 못하게 문화재에서 굉장히 난리 피고 저 짝에 있는 ‘흑산’하고 이 짝 ‘독산’이라는디 옛날에 여자가 이 짝 ‘흑산’에 있었고 남자가 ‘독산’에 있었는디 여자가 치마로 독을 들어다가 여기에다 놓고 남자는 던진게 나가덜 못하고 그래서 이 짝이 ‘독산’이 되고 저 짝은 ‘흑산’이 되었다고 지금 양쪽에서 독을 캐먹고 있어요.

B1: 지금도 ‘독산’이라고 하나요?

A1: 예 ‘독산’이라고 해요 ‘흑산’도 ‘흑산’이라고 하고 지금 그 삼기 농공단지 있죠? 가기 전에 레미콘 공장 있는디 여기서 나가다 보면 레미콘 공장 있는 데가 그게 ‘독산’이여 그게 다 파먹어 버려서 지금은 뵈도 안혀 그리고 좀 더 가면 그 막 돌도 좀 남았지만 밑에서 독 일 들을 많이해 그게 ‘흑산’이여 거기서 조금만 가면 농공단지가 나오죠 근게 이것이 전설따라 삼천리에도 나왔어요 이 ‘독산’이 ‘전설 따라 삼천리’에 그 써서 여기 사는 작가가 하나 있었는디 그것에 대해서 해가지고 ‘전설 따라 삼천리’에 나왔어.

B1: TV에서요?

A1: 아 그 전에는 라디오 방송이 있을 때지 ‘전설 따라 삼천리’.

B1: ‘장군바위’가 ‘독산’에 있었다고요?

A1: 예.

B1: ‘애기바위’도 있었고?

A1: 아니 큰 바위가 장군이 누었던 자리하고 애기 자리가 있고 구더기다 높게 있었다니까 그게 그러니 거기를 기어 내려가 가지고 놀다가 기어 올라오고 그랬어 우리가 근게 ‘장군바위’는 옆에가 크게 뚱뚱하니 서있었어 그런게 애를 낳는 걸 지켜보았다고 해서 ‘장군바위’라고 이렇게 크-은 놈이 뚱뚱한 놈이 있었고 그게 바위가 있었는디 다 그것이 없어져버렸어.

B1: ‘할미바위’도 있었어요?

A1: ‘할미바위’는 없었고 ‘장군바위’하고 애기 낳는 바위가 있었다고 아니 옛날에 그걸 우리가 그 소풍 다니는 식으로 초등학교 때 소풍도 갔었어 그리 그러면 팔월 보름날 그리 빵 싸가지고 놀러가고 그랬었는디 그것 참 아까웁지 없어 진게 참 지금도 그 문화재 같은 데서도 그 문화원에 가면 잘 알거여 문화원에서도 저 지금 익산에 체육공원에 있는 거기 문화원에 가면 문화원장이 내가 잘 아는데 우리 앉이면 서로 그런 이야기를 지금도 해가면서 그 이야기 하고 그러는데 제가 새마을 협회 회장을 한 10여년 해가지고 새마을 협회가 지금은 장소가 있지만 그 전에는 장소가 없어서 거기서 회의를 했어 문화원에서 만나서 자주 이야기도 하고 농담도 자주 하고 했었는디 지금 북부 시장 앞에가 새마을 협회 회관을 짓자녀 4층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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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 어릴 때 공동묘지에 가지 말라고 그런 이야기는 없었나요?

A1: 아 공동묘지가 요 앞에가 있었지 지금 오다 보면 읍사무소 아까 제일 아파트 옆에 88올림픽 해가지고 남은 돈으로 그 지었어 체육공원 아니 체육센터를 지어주었어 근디 거그가 수영자도 있고 헬스장 다 있거든 근디 거기가 공동묘지였었어 거기가 공동묘지 자리여.

B1: 혹시 거기서 귀신 나왔다는 소리 들으셨나요?

A1: 귀신이 나온게 아니라 상여집을 그 전에는 지금은 다 차로 옮기지만 상여집을 동네마다 지어 놓았어 그래가지고 사람이 죽으면 상여집 거기서 그 기구를 목상을 내다가 만들어서 짊어지고 갔다고 상여집이 거기가 있었고 그랬는디 다 그런 것도 없어져 버리고 그 자리가 그 자리여.

B1: 그러면 옛날에 주변에서 원통하게 죽었다는 사람 소리를 못 들으셨나요?

A1: 원통하게 죽은 사람은 다 원통하게 죽었지 뭐 하하하 아 우리 저기는 뭐 그렇게 아주 아까도 이야기 했지만 평준하게 살아가지고 그렇게 저기 헌 사람은 없었어요 평준하게 살아갔어.

B1: 그래도 뭐 옛날부터 무슨 귀신이 있었다 그런 말 없었나요?

A1: 그 전에는 다 저 도깨비 귀신이 있다고 그래가지고 요 뒤에 가면 지금도 밭이 있는데 거기에다 할아버지 한 명이 우리 집안 할아버지인데 요 할아버지가 고구마를 옛날에 캐가니까 이렇게 뾰족하게 고구마 집을 막을 짓고 거기 있는디 도깨비하고 싸움이 붙었는디 왼다리를 걸으면 넘어간다는디 아 아침에 가본게 어떤 놈이 그게 진짜 인지 어떤 놈이 고구마를 캐갈라고 다리를 묶어 놓았는지 그 도깨비하고 밤새도록 싸움을 하고 아침에 깨보니까 발이 묶여져 있드라는 거여 근게 어떤 놈이 고구마를 캐갈라고 그랬는지 그래서 그 도깨비가 도깨비하고 싸움했다고 그러고 도깨비가 사람을 끌고 다니면서 파란 불이 앞을 뺑뺑 돌아다니며 밤새도록 돌아 댕겨본게 그 논에만 밤새도록 돌아 댕겼디야 그래서 지쳐서 쓰러졌는디 아침에 사람이 새벽에 지나가다 보니까 그 양반이가 거기가 쓰러져있어 할아버지가 그래서 가보니까 그 논만 밤새도록 돌았디야 근게 실제 여그 도깨비가 불을 키고 끌고 댕겼다는 거지 이렇게 그런 이야기도 있고.

B1: 어디에서요?

A1: 미력리 미력리에 가면 그 저기가 지금 ‘아사달’ 체육공원 바로 밑에가 그 논이여 그래가지고 그 할아버지가 살기는 살았는디 얼마 안 있다가 정신을 잃으니까 죽드만.

B1: 아 도깨비 탓이라고 사람들이...

A1: 그리고 사람들이 탓이라고 그러지 정신을 혼을 빼갔다고 해가지고 그런 것도 있고 옛날에는 흔했어 도깨비가 근게 지금으로 말하면 말이야 인이야 인 저 짜-악 들판에가 이 짝에도 있다가 저짝에도 있다가 그러자나 파란 불이 그것이 잘 아실 테지만 사람이 옛날에는 순전 부엌에서 불을 때서 밥을 해 먹었자녀 그러면 앉으면 비를 깔고 앉어 이렇게 그걸 나무를 때고 이런 식으로 했는디 그놈이 몽당이 되며는 인자 들판에다 가따가 거름 허느라고 지금은 비료 화학비료로 하지 옛날에는 거름으로 다 농사를 지었자녀 막 썩혀가지고 그런게 그런 것이 거기에 따라 가며는 거기에 사람에 인이 묻어가지고 그것이 널러 댕긴다 이거여 이렇게 그래서 ‘도깨비불’이라 한다고 했거든 그 인은 확실히 널러 다녀요.

B1: 직접 보신 적은 있으신지요?

A1: 내가 도깨비는 못 봤지만 그 인 불이 널러 댕기는 것이 들판에서 많이 널러 다녔어 내가 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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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 언제 보셨나요?

A1: 보통 우리가 아까도 이야기 했지만 그 제를 지내는 데 비 오라고 기우제를 지내는데 거기가 넓기는 앉아서 놀기가 좋아 바람도 불어오니까 늦게까지 앉아있으면 그 불이 널러 댕겼어 그 전에 그리고 거기가 참 사람들이 밤이면 그리 다왔어 자 뭐 이런 선풍기가 있어 뭐뎌 밥만 먹으면 그리 다 모였어 그 젊은 사람들이 이짝 저짝으로 나눠서 술래잡기도하고 이름 찾기도 하고 술래잡기 이렇게 하고 거기 앉아 놀고 그랬어.

B1: 거기를 뭐라고 불렀나요?

A1: ‘매통제’ ‘매’갈았다고 해서 ‘매’가는 나무가 있었다고 해서 매를 가를 수 있을 만한 큰 나무가 그렇게 많았다 이거여.

B1: ‘매’가 무엇인가요?

A1: 옛날에 나락 같은 것을 찢을 때 소가 끌고 다니면서 매를 갈자너 그게 나락을 찢자너 나락을 넣어가지고 매를 가는 매 길쭉허니까 소가 끌 듯이 메고 뻉뺑이 돌으면 그놈이 골에 있던 튀어가지고 까지고 까지고 이렇게 하며는 완전 미는 안되도 현미가 되자녀 그러면 현미를 더 집에서 갈고 닦에서 밥을 해먹고 그랬지 그것을 만들 만한 나무가 많다고 해가지고 ‘매통제’.

B1: ‘매통제’가 부촌마을에 하나의 상징이었네요.

A1: 그렇죠 거기도 나무가 굉장히 컸지 그 전에 이런 아름다리 나무가 빨간 나무가 지금은 귀하지 그런 나무가 그런게 앉아서 놀고 그랬다니까 그런게 나무가 많으면 풀이 얼마 못 커 풀이 안 커 그런게 사람들이 모이면 풀이 또 자연적으로 없어지고 그런게 순전히 앉아서 놀고 했던 자리가 그 자리이었어.

B1: 옛날에는 거기 많이 모여서 놀고 그랬나봐요?

A1: 그럼 이야기도하고 지금은 밭 만들어 가지고 밭하고 하니까 누가 안혀 그리고 거기가 산소도 있었는디 산소도 다 뭉게 버렸는가 산소도 없어져 버렸디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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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 어르신 성함이 어떻게 되시는지요?

A1: 김연호.

B1: 연세는 어떻게 되시는지요?

A1: 44년생.

B1: 어르신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구술사진

부촌마을 매통제


부촌마을 김연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