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명 : 춘포면 > 장연마을

구술 기본정보

구분 내용
마을명 춘포면 > 장연마을
구술자 박태용(1942)남자
면담자 장윤준, 이순영
구술요지 마을 유래담
지명 유래담
민속
구술일시 2012-09-01
비고 면담장소 : 장연마을 마을회관
면담시간 : 오후 2시
내용 : 지명유래 및 xx에 대한 인터뷰 진행. (1차 조사만 되었을시)
키워드  

문헌내용

장연(長淵, 쟁연) : 익산읍지에 “장연제(堤)는 주위가 13.687척, 깊이가 11척이라”고 한 그 장연제의 옆마을이다. 따라서 못 이름에서 마을이름이 생겼다. 당시의 지도에 의하면 못의 동쪽 끝이 당시의 입석교(立石橋)와 흑석제(黑石堤) 밑까지 뻗친 긴 못이었으므로 장연(長淵)이라고 했다.
『익산시사』

구술요지

1) 마을유래담 :
- 장연마을의 유래 : 긴 연못이여서 장연마을이다. 만경강 이외에 삼포부터 장연마을까지 이어지는 긴 연못이 있었다고 한다.


2) 유적, 터 및 기타지명 :
- 춘포역 및 상환답 : 일본인이 수탈을 위해서 춘포역을 만들었다고 한다. 또한 일본인들 지주가 있었다고 한다. 해방 후 일본인이 도일 하고, 국가에서 토지를 국가로 귀속시킨 뒤 상환답 제도를 실시했다고 한다. 상환답이란 상환량을 정해두고 농민들에게 토지를 분배하는 제도이다.
- 장례산 : 춘포산, 봉개산이라고도 한다. 선산이나 개인 산이 있으면 몇 십리가 되더라도 장례산에 시신을 안치 했다고 한다. 그리고 석탄리에 있는 사람들까지 봉개산에 시신을 안치했다고 한다.

3) 민속 :
- 물 : 만경강 주변의 물은 철분이 많아서 물이 빨갛다고 한다. 이는 함경북도의 철산이라는 지역과 비슷한 물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데, 치아에 좋지 않지만, 폐에는 좋다는 말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물이 예전엔 먹기가 힘들어서 숯과 자갈로 정수해서 먹었다고 한다.
- 신랑다루기 : 마을의 처녀가 시집을 가면, 신랑에게 샘에 절을 시키고 발바닥을 때리던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구술채록

A1 : 박태용

B1 : 장윤준
B2 : 이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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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 : 우리 마을이 왜 장연마을입니까?

A1 : 우리 마을이 왜 장연마을이 됐냐믄 긴장자 못연자여. 긴 연못이라는 말이지. 근데 그 장연이 에 여기는 옛날에 여여 익산천이 없었어. 그래가꼬는 저기 저 천서국민하고 있는 천서리부터 쪼만한 내가 내려서 저 삼포라는 데로 이렇게 흘러갔어. 광동마을 해서. 응 삼포까지. 근디 우리마을은 여가 들판이여 습지 저습지. 그래가꼬는 여기는 뭐 장연서부터 삼포마을 뒤까지 긴 연못이 있었어. 그래서 인자 우리 마을을 기점으로 해서 긴 연못이 삼포마을 뒤에까지 긴 연못이 있었어. 그래서 연못이 경지정리함과 동시에 없어지고 일제강점기에 이 제방을 쌓았어. 이 만경강 제방을 쌓고 익산천 제방을 저 천서초등학교 있는디 천서리까지 이 제방을 전부 인력으로 짐을 날러서 제방을 쌓았다고. 그래서 이 연못이 없어졌어. 경지정리 함과 동시에. 그래서 몇 년 전까지만 한 십여 십오년 전이여? 그 때까지만 해도 저기 시전마을(?) 뒤에서 삼포까지는 긴 수로가 있어. 연못같이 근데 또 거기도 경지정리를 하면서 다 없어졌어. 다 미워버렸어. 그래서 우리 마을의 유래는 장연 마을이 됐어. 긴 연못가에 있다고 해서 여기서부텀 기점이여. 여 우에로는 저쪽은 연못이 아니었고 우리 마을서부터 연못이었고 그래서 젤 여기 이 지역은 평야지역이고 식수가 제일 문제였어. 식수. 그래서 그 전에는 말하자면 이 연못에서 그냥 물을 떠다 먹었어. 그냥 내깔 물을. 근데 여기는 샘을 파믄 철분이 많이 나와. 빨간하게. 근데 내가 듣기로는 함경북도 철산인가 거기 물과 같대. 철분이 많대. 근데 철분은 그냥 먹을 수가 없어 냄새가 나서. 그래서 여기서는 샘을 파가꼬 저 옛날에는 여과장치를 못하니까 그냥 그냥 먹었어. 그냥 샘물을 파가꼬 또랑 물은 못먹게 생겼으니까 냇 연못 물을 못먹으니까 그래가꼬는 물을 삭혀. 저 큰 항아리에다가 한 삼일을 놔 두면 먹으면 없어져 자연 소멸 돼. 근데 그것을 그렇게 먹다가 다음에는 우리 나라 저 우리가 말하자면 정수기처럼 여과장치를 만들어서 숯 넣고 모래 넣고 자갈 넣고 그 위에다가 물을 가둬서 아래로 내려서 그렇게 먹었어. 그래서 철분이 많은 거시기 뭐여 물을 음용을 하면은 이 치아가 안좋대. 그래가꼬 만경강 유역이 몇 년 전에 몇십년 전엔가 만경강 유역 주민들의 치아 상태가 안좋다고 국가에서 보건 그 기관 연구 기관에서 조사해서 그것이 나왔어. 그래서 우리 장연마을부터 여 판문 사천 또 이 만경 주변의 마을이 다 그래. 그래가꼬는 한 사십년 전부터 간이상수도를 마들었어. 그래가고 한 그 때가 칠십년대 칠십년대 이 간이상수도를 저 물 좋은 문종마을 뒤에서부터 그 때 정부 지원사업으로 해가꼬 보조금을 받아가꼬 거기에서 지하수를 뿜어 올려서 여까지 와서 우리 먹고 그렇게 하다가 광역상수도가 되면서 수돗물을 먹게 됐지.

B2 : 연못 이름은 따로 있었습니까?

A1 : 연못 이름은 뭐 따로 없었는갑서라고. 그건 없었고 그냥 긴. 여기서 삼포까지가 직선거리로 한 사키로 될꺼야. 거 삼포마을이라는 데가. 거까지 연못이 있었으니까 상당히 그 긴 연못이지 습지지 말하자믄.

B2 : 그렇게 길면 꼭 강처럼 보였겠습니다.

A1 : 그렇지. 강처럼. 저습지야 여기가. 지금 여기는 제방을 쌓음과 동시에 여기에서 침수가 많이 되가고 저 양수장을 만들어놨는데 옛날에는 양수장이 없을 때는 여기 제방 이 안에하고 저기서 삼포까지는 에 비가 한 100미리만 오면 하얗게 침방수지로 유명했던 데여 여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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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2 : 이가 안좋았다던데 특별히 기억하시기로 그런 어르들이 실제로 많이 계셨습니까?

A1 : 어 그 그때 보건 연구기관에서 조사할 때는 만경강 이 주변에 물을 먹는 디는 참 이빨들이 안좋다고 그렇게. 그 지하수에가 철분 함량이 많다니까. 그래가꼬는 모래에다가 여과를 시키면은 모래가 빨간해져. 근데 그 전에 돌아가신 양반이 나한테 그런 얘길 하더라. 이 철분을 먹으믄 에 보건상으로는 별 안나쁜대 이빨이 그렇고 폐에 좋다든가 뭐가 좋다고 저 함경북도 철산인가 어디에 있는 거 물하고 비슷하다고 얘길 하더라고. 폐인가 어딘가 좋다고 하더라고.

B1 : 그럼 우리 마을은 농사짓는 데에 좀 어려웠습니까?

A1 : 긍게 긍게 여기는 일제 강점기에 이 저 보를 막고 경지정리를 하면서부터 좋아졌지. 경지정리를 함과 동시에. 만경강 제방 쌓았지 여 익산천 제방 쌓았지. 여 전부 인력으로 그 때 그 말하자면 노인들이 지게를 져서 다 쌓은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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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 : 그럼 경지정리를 일본인이 했으면 관리도 일본인이 했습니까?

A1 : 어. 그게 경지정리를 해가꼬 일본사람들이 거의 지주들이여. 그렁게 사천마을에도 지주가 있었고 대장촌에도 지주가 많았고. 그 일본 사람들이 전부 인제 말하자믄 한국 사람들은 소작농이 되었고. 도조 되고 내가 소작하는거여. 긍게 일본놈들이 그 도조를 받아 쌀로 가져간거야. 나락을 갖다가. 그래가꼬 군산까지 첫 길을 놓은거지 전라선.

B1 : 그럼 이 대장역은 일본인들이 쌀을 수탈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든것입니까?

A1 : 어. 그렇지. 그니까 그래가고는 해방과 동시에 광복 후에 한인 물론 지주도 있었는데 그 일본사람들 껄 몰수를 했어 국가가. 그래서 농사짓는 사람들한테 나눠줬어. 그래가꼬 상환량이라고 해서 받았어. 이 저 행정에서. 행정기관에서 받아가꼬 그걸 다 낸 사람은 또 자기 앞으로 각자 등기를 내줬어. 그래서 귀속답이라 그래 그걸. 국가가 귀속 해버렸어 전부. 그 일본사람들 일본으로 돼 있고. 그래가꼬는 상환답이라고 해가고 상환량을 내면은 다 백프로 내면은 등기를 내줬어. 그래서 지금 문제가 뭐가 있냐면 상환량은 우리 춘포면에 백프로 끝났어. 근디 그 때 행정하는 사람들이 막 부장도 해먹고 들어먹고 행정하는 놈들도 들어먹고 도둑질을 해먹어버렸어 나락을. 그래가꼬는 어떤놈들은 내가 옛날에 행정에 거 있었어. 그래서 보면은 어떤 놈들은 상환량을 하나도 안냈어. 내가 우리 땅에다 냈는데 딴 놈이 다 해먹어 버렸어. 그래서 부자된 사람들이 많아. 심지어 동네 이장 구장하는 사람들도 그렇게 해서 구장이 되었어. 막 가서 면에 가서 담당자하고 술먹고 막 저는 한가마니도 안내놓고 지 논에다 다 옮겨버려. 몰르는 사람들은 이제 그 때가 말하자면 농민들이 순박하고 몰라. 그러니까 너 몇가마니 내라 그러면 몇 가마니 내. 그러면 그것을 내가 냈으면 내 논에다가 이 놈을 몇 가마니 낸 것을 정리를 해줘야는디 그게 없어. 걍 지들 멋대로야. 행정보는 부장 뭐 몇 사람들이. 그래가꼬는 그 때 행정기관에서 업무를 본 사람들. 그 때 이장들 한 사람들은 다 먹고 살기가 그랬다는거여.

B1 : 그럼 일본인들이 나락으로 가져갔다는 것입니까?

A1 : 그러니까 이 지역마다 인제 말하자믄 총대처럼 여기다 둬. 자기들 심부름꾼을. 그러면 또 그 사람들이 권력을 부려. 저 수틀리면 너 미우믄 논을 띠어 버리고 이 사람 줘. 그렁게 그 사람 숨 받아주고 그래야 논이라도 얻어서 짓지 그 때는 농사를 짓는게 최고 그거잖아. 그러니까 60년대에만 해도 여기에 논 한 오천평만 지면은 일꾼 안두면 농사를 못졌어. 일꾼 저 인력으로 하기 때문에 일꾼이 필요해. 그 일꾼을 어디 사람들이 오냐 고산 저짝 산중에 사람들이 거 쌀밥먹기가 힘들어 거기는. 경지가 없었어 여기는 많고. 그러니까 거기 사람들이 일년에 나락 뭐 쌀로 뭐 여덟가마니만 몇 가마니 주면 해가꼬 여기와서 일년 일을 해주면 그것을 갖다 식량을 자기들이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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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 : 우리 마을에 천석꾼은 있었습니까?

A1 : 없었어. 어. 천석꾼은 없었고 그 때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들이 뭐 천석꾼도 넘을 꺼야.춘포면에 있는 사람 몇 사람들이 도전이나 뭐 일본놈들 몇 있어. 그 놈들은 많았는데 우리 한국 사람들이 천석꾼 된 사람들은 몰라 에 옛날에 본게 김참봉이라고 있었는디 그 집이 농사를 좀 많이 졌었다고 그런 얘기를 들었어. 그리고 광동에 있는 사람이 좀 많이 지었고. 우리 한국 사람들인데. 근데 그 사람들도 해방된 직후에 광복 직후에 그 사람들도 자기들이 농사를 못 지으니까 다 소작을 줬잖아. 그 사람들도 귀속된 농지가 있어. 한인답이라고 그래. 우리가 행정에서 한인 귀속농지 일본 그 사람 귀속농지. 그래서 농지 명부가 귀속농지 명부가 두 개가 있었어. 행정기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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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2 : 어르신 어리실 적에 이미 제방이 쌓여 있었던 것입니까?

A1 : 아니. 에 그렇지 인제 우리가 어렸을 때 제방을 쌓았어. 말하자면 지금 내가 정확하게 몇 년 됐는가는 모르겠는데 한 그 때는 칠팔십년 넘었을 꺼야. 칠팔십년 됐을 꺼야.

B2 : 얘길 듣고 생각해봤는데 그 정도 습지면 정말 힘들었겠습니다.

A1 : 그러니까 여가 습지라니까 완전히. 긍게 우리 마을에는 몇 집이 안살았어. 긍게 우리 마을에서 세 집인가. 처음에 마을이 생길 때에는 세 집인가 살았을 거야. 근디 인자 경지정리도 되고 자꼬 외지에서 와서 살으니까 마을이 커진거지. 그래서 우리 마을에서는 유명한 사람이 난 사람이 없어. 근데 저 원적이 신기남 의원이 있어. 통합민주당. 신기남 의원데 아버지가 가만있어봐 금방 이름 잊어버렸다. 전라북도 경찰 저 육이오 사변 때 경찰국장을 한. 그 신기남이네 아버지가 전라북도 경찰국장을 했어. 그래서 친일 행위를 했네 안했네 그래서 역사적으로 떠들고 어쩌고 하더만 긍게 그 분의 선대가 우리 마을이 원적지야. 우리 마을이. 긍게 신기남이네 아버지 할아버지 그 할아버지가 우리 마을 출신이여. 근데 딴 사람들은 몰라. 우리 장연 사람들 조차도 몰라. 근데 내가 행정에 근무하면서 에 그 추량인사(?) 그런걸 조사하면서 내가 알아냈어. 우리 마을이기 때문에. 그런 분 이외에는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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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 : 여름에 술먹이는 언제 했습니까?

A1 : 술맥이는 여름에 농사꾼들이 인제 모심고 김매고 인제 호미로 풀을 다 내줬어. 그러고 나서 독대나 백중 때 동네 사람들이 농사 많이 짓는 사람들이 술을 막걸리를 한 말씩 내. 그 때 인제 내가꼬서 또 경비가 거시기 허면은 동네 사람들이 전부 일촌이 모여서 공동 작업을 해. 일케 뭐 논에 엎어져서 풀매주고 꽹가리 치고 장구 치고 풍물 쳐가면서. 그래가꼬 거기서 돈을 조금씩 모아. 그걸 해주면 돈을 쪼금씩 내야 할 거 아냐. 그렁게 그놈 갖고서 경비 하고 돼지 한마리 잡아가꼬 그 돼지를 안주 삼아서 먹고 그때는 인제 고기도 귀헌 때라 돼지고기 한 근씩이나 한 주먹씩 나눠먹어. 인제 내장같은 건 삶아서 먹는 안주로 나눠 줘. 근데 그 것도 호박잎을 따가지고 가면은 세 점이나 네 점을 줘. 그래가꼬는 그 놈 갖고 안주하면서 막걸리 먹고 또 하루 종일 풍장. 지금도 풍장도 각 마을 다 있을 꺼야. 지금도 인자 각 마을 다 있을 꺼야. 우리 마을도 있어. 노인양마들이 가끔 술을 잡수면 한 번씩 풍장거리고 놀고 그러거든. 긍게 그거 쳐가면서 동네에서 하루종일 노는거야. 긍게 여름 내동 농사일을 하고 인제 저 거시기 뭐여 농사일 거의 끝나면 술 한잔 먹고 놀지. 그래서 그것은 해마다 있어. 옛날에는 해마다 있어 왔어. 근데 한 삼십년도 넘었을 꺼여. 그거 없어진지가. 인제 경제적으로 부유해지고 먹고 살만 해니까 것이 없어지더라고 자연적으로 물론 이게 지금도 뭐 복날이나 이럴 때는 복타름(?) 하자고 어런들끼리 모여서 술 한잔씩 나눠먹고 그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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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2 : 여기는 장례식을 어떻게 했습니까? 산도 보이지가 않습니다.

A1 : 옛날에는 장례식이 인제 돌아가시면은 일촌이 다 모여서 그 집에 가서 철야도 하고 놀고 이 저 여기 봉개산이 춘포산이 있어. 거기가 일부는 춘포산이 저 춘포 면으로 되어있는 공공용지야. 면사무소 땅야 저게. 근데 거가 인제 공동묘지가 되버렸어. 그래서 인제 산이 없는 거는 다 걸로 가고. 그렇지 않고 자기 개인 산이 있는 사람들은 멀어도 옛날엔 상여를 미고 가거든. 옛날에는 상여를 그 막대를 만들어 짜서 어? 있어서 난 근데 우리 마을에는 상여가 없어서 상여집에 가서 꽃상여를 다 미고 가고든 이십리도 미고 가고 삼십리도 미고 가고. 그러면은 동네 젋은 사람들이 한참 가다가 또 교대해서 미고 가고 막. 긍게 다섯명씩 미면 열명이고 네명씩 미면 여덟명이 미잖아. 긍게 뭐 시체하나 개벼울 거 같은데 나도 며봤는데 얼마나 무거운가 몰라. 냄새도 나고 말여. 긍게 술을 안먹으면 못 메겠던 게비여. 긍게 술먹고 그랬는가봐. 나는 말여 누구 메러 가서는 아 긍게 나는 젤 앞에 섰는데두 아푸기도 허고 말여. 긍게 여기 아니면은 자기 선산까지 가야혀. 그니까 여기 이 저 봉개 산에 이 춘포 산에 우리가 말하는 봉개산이라는 디 봉개 마을이 거가 있거든. 근데 봉개산이라 그러는데 원명은 춘포산이야. 춘포산인데 저기 저 석탄리라고 대장촌 소재지 지나서 저 마을 있어 갈리라고. 거기서도 일로 와. 이 근방 사람들은 대개가 다 일로 와. 그래가꼬 춘포면 저 뒤에 저 있는 마을에서는 거시기가 없으면 자기네 밭가에 산소도 만들고. 또 일로 오고. 그렇게 해서 장례를 모셨어. 그래서 그 때는 초상이 딱 발생이 되면은 마을 전체 식구들이 전부 그 집에 가서 돌봐주기 위해서 일을 안해. 일들을 않고 자기 일들을 않고 전부 아줌마들은 밥이래도 해줘야 하고 남자들은 가서 술 먹고 윷 놀고 밤새도락 놀음하고 날을 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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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2 : 우리 마을에도 신랑다루기 같은 풍습이 있었습니까?

A1 : 여기도 그런 건 똑같아. 인제 신랑이 삼일에 오잖아. 삼일만에 처갓집에 오면. 오면은 업어다가 저기 샘에다가 절 시키고 뭣이 뭐 저 사랑바위다 업어다 놓고서는 말여 띠를 발목 묶고서 미고서는 뚜드려 패. 게 막 신랑이 좀 잘난체 하고 미운놈으 더 때려서 걸어도 못다니게 때려버리고 그라믄 인제 때리지 말라고 처갓집에서는 막 술상을 가져오고 봐달라고 사정을 하지. 그럼 술 한잔 먹고 인제 웃고 마는거여. 긍게 인제 맞은 실랑만 그 이튿날 다리아파서 못걸어 가는 사람도 생기고 그랬어. 근디 그것이 인제 폭력이라 안 되지. 근데 그때는 그게 보통화된 소일거리여. 놀이거리여. 그래서 그냥 이해를 하고 말지. 이해를 하고 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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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2 : 우리 마을은 배가 깊이 안들어왔습니까?

A1 : 아 강이? 에 어디까지 있었냐면 옛날에 그게 어. 67년도에 만경강 제수문이라고 저 윗티기 가면은 석탄리 동산동 석탄리 석탄동 동산동에서 저 백구정 있는 대 백구 저 백구 소재지 있는디로 제수문을 막았어. 그 제수문을 막기 전에는 군산에서 조수가 들어오믄 우리 마을 요그 한 100미터 우에까지 조수가 올라와. 이 만경강을 따라서 올라와. 그러면 이 지금쯤 가물을 때 같으믄 조수가 막 올라오믄 저녁 때 올라오믄 저수 뻘 흙이 뒤짚어 저가꼬 막 이만씩한 잉어 메기 이런 고기들 떠와 둥둥둥둥. 숨을 못쉬니까 그라믄 망 가져와서 떠서 잡기도 하고 그랬어. 그래가고 그 전에는 에 배가 여기 여여 우에 만경강 따라서 여까지 와. 군산 앞바다에서. 그러면 옛날에 수퍼 대장교회가 여 판문이라는 데서 당초에 교회가 설립이 됐어. 105년 전에. 근디 그 선교사들이 그 배를 타고 와서 여그 와서 내려서 선교활동을 허고 교회를 여기다 만들었어. 그래서 대장교회 역사가 105년인가 106년인가 됐는데 그 당초에는 판문마을에 생겼던 교회가 인제 저 대장촌으로 이사를 가가꼬 교회가 그렇게 되서 이 근방에서는 에 대장교회가 생긴지가 최초로 여기 여 판문마을에서 생겼대. 근디 그 때는 배를 타고 왔다갔다 한거여. 이런 교통편을 이용한 게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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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2 : 배가 들어오면 배와 관련된 지명이 있지 않습니까?

A1 : 아니 그거 우리 마을에는 없어. 우리 마을에는 배가 안왔어. 거기는 만경강이 이렇게 제방을 쌓고 만경강이 만들으면서부터 거 인제 거시기하고 거기에 강이 있어서. 제방 쌓기 전에도 강이 있어서 통행을 했는데 여기는 연못이라 여기서 삼포까지의 연못이라 나가는 강이 없어. 그래서 배가 안다녔어. 근디 인제 저 사천마을이라고 해가꼬 저까지는 해전 거 우에 마을까지는 배가 들어왔대. 그래서 여기는 배하고는 상관이 없어.

구술사진

장연마을 표지석


장연마을 박태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