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헌내용
춘포 역전
『익산시사』
구술요지
1) 유적, 터 및 기타지명
- 이뜨기: 백사장 음력 사월 스무날 모래찜질을 하려고 사람들이 많이 모였다고 한다.
- 대장촌: 일본사람들의 논으로 대작을 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 딸촌: 대장촌사람들 중에 여자들이 공장을 많이 다녀서 붙여진 이름이다.
2) 전설 및 민담
- 도깨비 방죽: 도깨비가 자주 출몰한다는 방죽이다. 그래서 거울을 중간 중간에 놓고, 말피를 이용해서 제사를 지내야 물고기를 잡을 수 있었다고 한다.
- 도깨비 뱅이: 도깨비 방죽에서 물고기를 잡기전에 하는 제사를 지칭하는 이름이다.
3) 철도이야기
- 춘포역 풍경: 6.25 이후에나 상가가 생겼다고 한다.
- 개국장사: 춘포역주변에 보신탕집에 많이 있었다.
구술채록
A1: 박병화 (72) 1941년
B1 박태건
B2 이동혁
B3 이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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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3: 마을에 대한 이야기를 좀 듣고 싶습니다.
A1: 내가 별스럽게 뭐 아는 것은 없고 내가 여그서 아홉 살 먹어서 이 ‘춘포’에 여그 ‘역전’마을에 와가지고 오늘 날까지 72살 먹더락 지금 꾸준히 살고 있어서 그 후로는 내가 어느 정도는 아는데 내가 아홉 살 전에 일은 몰라 그때 내가 여기 온 게로 왜정시대 학교가 여그가 있었어 학교가 있어 가지고 여그가 아주 벚꽃이 피면 아주 좋았어 여그가 ‘춘포’가 특히 ‘역전’마을이 그리고 그전에는 여기저 제수문 막기 전에 여기 ‘이뜨기’ 막기 전에는 사월 스무날이면 음력 모래찜하려고 오는 사람이 아마 서울서도 오고 막 전국에서 다 오다 시피했어 여그 모래찜 근데 그때는 막 차도 못타고 그냥 며칠 전에 친척들 사는 사람들이 있는 집은 하루 전에 와서 여그 와 자고 모래찜을 하고 가고 그랬어 가지고 여그 제수문 막은 후로부터는 툭 끊어 버렸어.
B1: 어떤 것을 제수문이라고 합니가?
A1: 여그 저 만경강 저 ‘이뜨기’라고 하는 데가 있어요.
B1: 왜 ‘이뜨기’라는 지명이 있었을까요?
A1: 그건 잘 모르고 그냥 ‘이뜨기 이뜨기’해서 ‘이뜨기’만 알지 그리고 거기에다가 수문을 만들었어 그전에는 바닷물이 들락날락하니까 그 모래 백사장이 저그가 있단 말이에요? 여기서 한 3키로도 못 될려나? 거그 가서 모래찜을 하느라고 거-창하게 왔어 그냥 저 버스 탈수가 없지 기차도 만원 되었지 그때는 여그가 ‘대장촌’이 볼만 했었어 그리고 이 ‘대장촌’이 왜 ‘대장촌’이라고 일본사람들이 이름을 지었는 고니 여그가 애당초 농사가 일본사람들 논이 많-디야 이게 순전히 그래서 대작 그래서 ‘대장촌’이라는 유래가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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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3: 그러면 왜 ‘춘포면’은 왜 ‘춘포’라고 바꾸 었나요?
A1: 인자 그 후로는 그 이름은 바꾸어서 ‘춘포’로 했고 그전에는 ‘대장촌’이라고 했고 그랬어 그리고 나 쪼깐 할 때는 일본사람들이 여기 많이 살았거든? 일본 사람들 집이 한 7∼8가구 되어 여그가 현재 있는 디가 그리고 내가 알기로는 나 아홉 살 먹었을 때는 일본 집을 가요 놀러 가며는 그전에 내가 전라남도에서 여기를 왔거든? 아홉 살 먹어서 여그 발을 디뎌가지고 사는 데 어머니하고 인자 그전에는 흉년이 들어가지고 배고 팠자너 해가지고 먹을 것도 없고 그래서 이 ‘대장촌’에 오면 들판도 넓고 먹고 살기가 좋을 것이다 그래 가지고 이 ‘춘포’로 온 거여 근데 ‘춘포’로 와서 해 먹을 길이 없은 게 일본놈 집에 가서 일을 해야 만이 인자 먹을 것도 생기고 그러는데 인자 어머니나 뒤 따라 다니면서 어머니는 일본 집으로 일을 하러 간단 말이여? 가며는 그 집 싸리 문 앞에만 들어 섰다하면 하루 일당을 줘 거그 가서 뭐 자던지 뭐 어디를 갔던지 그 집 싸리 문 앞에 가서 그 집에만 들어섰다하면 하루 일당을 줘 이렇게 해서 일본 집에서 살다가 인자 해방이 딱 된 게 그 살림살이를 우리한테 다 인계를 하더라고 그 일본 집 살림을 근데 그때 말 듣기로는 일본 살림을 가지 간 사람은 엄벌에 처한다고 하는 바람에 아무것도 안 가지고 왔지 딴 사람이 다 가져가 버리고 그래가지고 오늘날 이렇게 살았는데 여기가 왜정 시대 때는 일본군인들 거창하게 주둔하고 있었고 그려 그리고 또 지금으로 말하자면 군인가는 거? 그때 일본말로 헤이따이상이라고 하는 디 요그 요 앞 도로 있지? 그 도로로 빡-빡-하니 막 테 둘르고 막 군인들 간단 말이여 여그서 인자 한국 사람들이 그러며는 막 학생들이 나와서 막 그 뭐야 환송식인가 그것도 하고 그랬어.
B3: 옛날 일본인 지주들이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하던데요?
A1: 어 근게 내가 알기로는 뭐 ‘금촌’이라고 있었고 ‘도다와’ 또 그 둘 밖에 몰르것네 이름을 내가 그때는 어렸을 적이라 그리고 여그가면 정미소도 크-은 놈이 있었고 그려 여그서 방아를 찢어 가지고 일본으로 가지가고 여그서 인자 농사를 지어가지고 벼를 수수해서 기차로 실코 군산으로 다 가 군산서 인자 일본으로 가는 거여 그래 가지고 이 철로가 그래서 제일 먼저 놓아 졌디야 이 ‘대장역’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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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3: ‘도깨비 방죽’이라고 들어보셨는지요?
A1: 그 여그 여그여 옛날에는 거그가 도깨비가 나온다고 해가지고 물고기를 잡으면 지금은 빠찌가리 기계가 있고 물품는 양수기가 있어서 좋지만 그전에는 막 그 사람이 올라타는 이 이 이게 물품는 거여 옛날에 이놈 가꼬 농사지었어 근디 이걸로 농사를 지으면 물을 품는 단 말이여? 품으면 도깨비가 싹 돌라가버려 도깨비가 가지가 버려 그런게 어떻게 하냐 도깨비 뱅이 하는 것이 있디야 그 말대가리 그 말 있자녀 말대가리를 끊어서 말피 그놈을 이렇게 중간 중간에 놓고 이런 거울 거울을 중간 중간에 이렇게 놓고 고기를 잡으면 도깨비가 가져가 덜 못 혀.
B3: 왜 그런데요?
A1: 그걸 보면 놀란 디야 말피하고 거울에 비춘 자기 모습하고 만일에 이것이 없으면 물고기를 싹 거그서 물품어서 잡을 려고 보면 없어 거그가 그러면 며칠 되고 난 뒤에 저 엉뚱한 논배미 같은 데 가서 고기가 있어 막 썩어서 근게 돌라다 갔다 놓은 디야 그래서 ‘도깨비 방죽’이여.
B1: 도깨비 뱅이 하시는 것 직접 보셨나요?
A1: 봤지 그것은 그리고 나도 같이 고기도 잡고 그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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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3: 우리나라 사람이 뭐 풍물도 치고 그러면 일본사람들이 못하게 하지는 않았나요?
A1: 일본사람들이 상관을 한 혀 일하는 것을 그래서 말이 있어 속담이 ‘일본 놈 날일 하듯이 한다.’ 근게 일본사람들 날일 하듯이 우리도 살살하자 말하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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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 ‘춘포역’을 어렸을 때 보셨을 때 그 풍경 좀 알려주십시오.
A1: 그전에는 보기가 좋았어요 벚꽃 나무가 막 이런 놈이(한 아름) 여기서부터 쭉-하니 양쪽 그 역사 그 양쪽으로 해가지고 4월 달 되면 벚꽃이 피면 학생들이 와서 구경도 많이 하고 그냥 진짜 벚꽃 참말로 좋았어요 그래가지고 일본 사람들 아까도 이야기 한 바와 같이 군인갈 때 여그서 막 환송식 또 해주고.
B1: 그전에 상가들도 많았나요?
A1: 예 또 지금 상가가 그전에는 여그가 없었어요 인자 6.25 후에 상가 양쪽에 이렇게 있었고 없었어요 집도 이렇게 좋은 놈 하다못해 깨끗이 지은 놈도 없었고.
B3: ‘춘포역’ 앞에는 별 것이 없었고 저 안쪽에는..
A1: 안쪽에도 별 것 없지 여그가 별 것 없으면 그 안쪽에도 별 것도 없고 그 대신 저 안쪽에 가면 그 창고가 있는 데 그 농사를 지으면 거그가서 공판도 하고 말하자면 매상 그거 하는 디가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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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 저 마을 안쪽에 보신탕집이 몇 채 보이던데요 혹시 예전부터 보신탕집이 많이 있었습니까?
A1: 아 원래 어떻게 된 판인지 몰르는 디 하여튼 보신탕집이 여그가 네 집인가 되요.
B1: 예! 유명하지 않습니까?
A1: 예예 그래가지고 에.. 우리는 여그 사실은 여그 사는 사람들은 별시럽게 안 먹어 근데 왜 처서 그렇게 맛있다고 점-부다 그렇게 오데?
B1: 옛날부터 있었던 집은 아니고요?
A1: 에- 옛날부터는 안 있었지 옛날에는 어떻게 되었는 고니 이 질을 떠나서 저 가면 방천이 있어요 뚝이? 양쪽으로 있어 일본사람들이 그걸 막았어 홍수가 지며는 여그는 살던 못 혀 긍게 일본사람들이 양쪽에다 뚝을 이렇게 쑤-욱하니 쌓는데 ‘개국장사’라고 지금은 보신탕이지? ‘개국장사’라고 그 저 쭈-욱 하니 가는 디 다가 막 지푸락으로 나레를 엮어서 옛날에는 지붕도 했자너 그놈으로 해서 거그서 ‘개국장사’를 하며는 저-동네 사람들이 ‘이리’지나서 ‘이리’시장에 가면서 걸어오거든 걸어서 전-부다 ‘이리’ 와서 ‘이리’왔다는 사람은 하여튼 거그가서 ‘개국’ 한 그릇씩 먹고 갔어 그때는 보신탕이라고 하하하 않코 ‘개국장사’라고 했었어 그러다가 여름에 홍수가 딱-져버린다? 그러면 걍 싹-씰어 가버려 걍 청소를 깨끗이 해버려 긍게로 최우 솥단지만 하나 걸어 놓고 개 한 마리 잡아서 쌂아서 그냥 그 자리에서 뜯어서 거그서 쌂아서 보신탕을 거그서 했어 그것 때문에 아마 여가 이렇게 그래서 여그가 보신탕이 유명한 게 벼.
B1: 아 방죽 바로 밑에서 ‘개국장사’를 했다는 말씀이시죠?
A1: 예에 그렇죠 여 이 가며는 뚝이 있어 그 뚝에 질 따라서 아마 내가 알기로는 한 7∼8집 지어서 장사를 했어.
B1: 뚝 위에서요?
A1: 아니! 밑에서 그런 게 함몰지면 홍수지면 떠낼려가 버린 게 아주 건물도 가 건물 그냥 이렇게이렇게 막아서 지푸라그로 막아가지고 근게 그때는 개고기를 지금은 이렇게이렇게 썰어서 사발에 다 주지만 그때는 막 투가리에 다가 막 큼벙툼벙 썰어 가꼬 주었어 그때는 배고플 땐 게 그냥 그놈 한 그릇 먹으며는 시장에 갔다가 집에가 가면서 먹고 들어가고.
B1: ‘솜리장’.
A1: 그렇지 ‘솜리장’ 그때는 ‘솜리장’이라고 하죠 ‘이리장’이라고 않코 그 순전히 ‘이리’ 걸어 다녔어 이렇게 저 ‘백구’ 사는 사람들도 요리 걸어서 이렇게 다니고 또 여그 사람들도 ‘이리’ 갈려면 걸어서 순전히 걸어서 다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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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3: 텃세가 심해서 다른 마을사람들이 기차 타려고 하면 조심해서 다녀야 한다고 하던데요?
A1: 옛날에는 여그가 소재지이기 때문에 에 말하자면 저- 외촌 애들이 지나가자나? 그러면 여기서 꼬리를 내리고 가야 데 여그서 지가 잘난채 한다고 하면 애들한테 맞은 게 그러고 여기 기차가 통근 열차가 오며는 아까 이 도로 집 앞도로 있자나 아침 출퇴근 할 때 하고 저 거시기 할 때는 신장로가 학생들이 꽈-악 차버렸어 기냥 막 늦게 가면 차 타 덜 못 혀 막 매달려서 가고 그랬어 굉-장했어.
B1: 옛날 사람들은 기차를 어떻게 생각 했나요?
A1: 예 옛날에는 기차를 상당히 아 그때는 교통수단이 버스도 적었고 그런게로 순전히 기차 아니며는 어디 돌아 댕길 수가 있었가니 기차타고 돌아 댕기고 순전 그래서 기차를 상당히 거시기 하지.
B1: 요금이 부담스럽진 않았고요?
A1: 예 요금은 비싸 덜 안 했어 기차요금은 그리고 여기 기차 다닐 때가 좋았어.
B1: 왜요?
A1: 아 여그 손님도 많고 응? 아까도 이야기 한 바로 같이 사월 스무날이면 모래찜하러 온 사람이 그냥 막 빡빡하니 들어서지 그 사람 살 맛 같았어 그런디 아 그거 제수문 딱 막아버리고 그런 게로 짠물이 안 들어온 게 인제 모래찜 하러 안와.
B1: 그곳 지명이 무엇이신지요.
A1: ‘판문’부락 거그 앞에 거그가 모래사장이 있었어 그때 사월 스무날이면요 장사하는 사람 많지 손님 많지 굉장했어요.
B3: 주로 뭘 많이 팔았나요?
A1: 그때는 막걸리 국수 인자 그런 것들 많이 팔았지.
B3: 그러면 ‘역전동’ 주민들은 장사하시는 분들이 많았나요?
A1: 아니지 딴 디 사람들이 와서 그날 거그 가서 장사도 하고 그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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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2: 옛날에 이 마을을 ‘딸촌’이라고 불렀다고 하던데요.
A1: ‘딸촌’ 어 왜 ‘딸촌’이냐 여기 ‘쌍방울’ 공장이 그전에는 있었어 가꼬 여그가 딸들이 굉장히 많이 그 ‘쌍방울’을 다녔어 그래서 여그가 ‘딸촌’이라는 거시기가 있었어.
B2: 여기서 여자분 들이 기차를 타고 많이 다녀서 ‘딸촌’이 된 거군요.
A1: 기차를 타고 댕긴 것이 아니라 그때 ‘이리’ ‘쌍방울’ 그 공장 돌아 갈 때 공원들 그 여자 말하자면 공원들이 이 ‘대장촌’에서 제-일 많이 다녔어 그래서 ‘딸촌’이여.
B2: 어르신 혹시 이곳에 포구가 있었다는 소리 들어 보셨는지.
A1: 그렇지 배도 들어왔다고 그러데 나는 인자 그것은 아홉 살 먹어서 몰랐는데 옛날에는 군산서 여그 까지 배가 들어 왔디야 배가 가꼬 새우젓 같은 것도 여그서 품고 그랬다고 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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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 어르신 그러면 마지막으로 연세와 성함을 알려 주실 수 있는지요?
A1: 박병화 72세.
구술사진
역전마을 대장역
역전마을 박병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