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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루맛 쇼>>와 다큐멘터리 영화의 가능성 혹은 서사의 육하원칙

<<트루맛 쇼>>와 다큐멘터리 영화의 가능성 혹은 서사의 육하원칙

-하정일 소장-

최근에 <<트루맛 쇼>>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았습니다. ‘트루맛 쇼’라는 제목은 짐 캐리가 주연한 <<트루먼 쇼>>의 패러디인 것 같은데, 참으로 절묘한 제목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진짜맛은 쇼야!’라는 야유가 소위 ‘맛집’의 실상을 해부하는 작품의 주제와 찰떡궁합이더군요. 나도 TV 맛집 프로그램에서 적극 추천하는 음식점에 갔다가 실망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던 터라 <<트루맛 쇼>>를 흥미롭게 관람했습니다. TV 맛집 프로그램이란 한마디로 돈을 매개로 한 대중조작이더군요. 이 다큐멘터리에서 가장 재미있었던 것은 몰래카메라였습니다. ‘네 칼로 너를 친' 격이라고나 할까요. TV에서 즐겨 활용하는 몰래카메라로 TV의 치부를 폭로했으니까요. 매스미디어의 대중조작을 다룬 영화로는 시드니 루멧 감독의 <<네트워크>>를 첫손에 꼽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영화에서 한 TV 프로그램의 앵커가 시청률을 올리기 위해 모월모일에 자살하겠다고 선언합니다. 시청률은 천정부지로 뛰어오르지만, 자살하기로 한 날이 점점 다가옵니다. 마침내 그 날이 오고 앵커는 진짜로 자살할 수밖에 없게 되죠. 대중조작의 희생양이 된 겁니다. ‘네 칼로 너를 친’ 혹은 ‘내 칼에 내가 맞은’ 역설적 상황이 빚어진 셈입니다. 이 영화는 매스미디어와 시청률과 돈과 대중 사이의 복잡다단한 함수관계를 치밀하게 풀어낸 명작입니다. 픽션과 논픽션이라는 차이는 있습니다만, <<트루맛 쇼>> 역시 이 계보를 잇고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엔딩 크레딧에서 TV가 조작해낸 가짜 맛집의 주인이 이명박 대통령과 함께 찍은 사진이 등장하는데, 이 장면은 권·언·식(食)의 유착을 상징하는 것으로 읽히기도 하고 가짜 맛집=가짜 권력의 알레고리로도 보입니다.

내가 다큐멘터리 영화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마이클 무어의 <<볼링 포 콜럼바인(Bowling For Columbine)>>이었습니다. 콜럼바인 고등학교에서 벌어진 총기난사 사건의 원인을 추적한 이 다큐멘터리는 팩트가 주는 충격과 픽션 못지않은 긴박감을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의료 민영화의 폐해를 폭로한 <<씨코(SICKO)>>도 흥미로운 다큐멘터리였습니다. 나는 <문학과 의학> 수업시간에 이 다큐멘터리를 보여주고 바람직한 의료보장 시스템에 대해 의대생들과 토론하곤 합니다. 우리 다큐멘터리 영화에서는 무엇보다 김동원 감독의 <<송환>>이 제일 먼저 떠오릅니다. 전주 영화제 기간에 이 영화의 릴 테이프를 얻어 <<대중문화론>> 수업시간에 틀어주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비전향 장기수들의 송환을 둘러싸고 그분들이 겪는 고뇌와 갈등을 담담하게 다룬 이 작품에서 받았던 감동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같은 감독의 <<상계동 올림픽>>이 던진 충격도 생각납니다. 88올림픽에 대비해 서울을 정비한다는 구실로 대대적인 철거가 진행되었었는데, 이 다큐멘터리는 상계동 철거민들의 수난과 투쟁을 기록한 작품이었죠. 특히 이들이 87년 6월 항쟁 이후의 민주화 국면에서도 소외된 존재들이라는 멘트는 내게 커다란 당혹감으로 다가왔더랬습니다. 그런 점에서 그들은 우리 시대의 서발턴, 곧 타자 속의 타자인 셈입니다. 그래서 몇 년 전의 인문주간 행사 때에는 김동원 감독을 초청해 다큐멘터리 영화의 가능성과 미래를 주제로 특강과 좌담회를 갖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볼링 포 콜럼바인>>이나 <<송환>>에 비해 <<씨코>>와 <<상계동 올림픽>>은 무언가 2% 부족하다는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팩트가 주는 충격은 훨씬 컸음에도 불구하고 이 미진함은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나는 그것이 서사성의 부족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루카치는 르뽀문학을 비판하면서 서사성의 부족을 지적한 바 있습니다. 다큐멘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다큐멘터리가 팩트에 기초한 논픽션 영화이긴 합니다만, 그것이 서사장르인 한 서사성은 필수요건입니다. <<씨코>>와 <<상계동 올림픽>>에 부족했던 것이 바로 이 서사성입니다. 이 다큐멘터리들에서는 이런저런 팩트들이 유기적으로 통합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에 비해 <<볼링 포 콜롬바인>>은 총기난사 사건의 근본 원인을 찾아가는 수수께끼 풀기라는 목표가, <<송환>>에서는 ‘송환’이라는 종착점을 향한 방향성이 팩트들을 하나의 흐름으로 엮어주고 있죠. <<트루맛 쇼>> 역시 맛이라는 이름의 가짜 음식점에서 몰래 카메라를 통해 맛집의 조작이 이루어지는 실제 과정을 촬영한 중심서사가 이런저런 팩트들을 통합시키고 있습니다. <<트루맛 쇼>>가 제공해주는 긴박감도 그로부터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서사가 무엇인가를 생각할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이야기와 서사의 차이를 밝히는 것입니다. 서사문학을 이야기문학이라 부르기도 하는 식으로 이야기와 서사를 혼용하기도 합니다만, 이야기와 서사는 분명하게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이야기가 명사라면 서사는 동사라고 봅니다. 요컨대 서사는 ‘이야기+하다’입니다. 즉 ‘이야기하다’가 서사인 겁니다. 이야기는 그 자체로 자족적이고 폐쇄적인 세계입니다. 이야기에는 말하는 주체도, 듣는 주체도 없습니다. 오직 이야기만이 존재할 뿐인 거죠. 반면에 서사는 말하는 주체와 듣는 주체가 존재할 때, 곧 ‘말하고 듣다’라는 대화와 소통의 동사적 상황이 성립될 때 형성됩니다. 리꾀르 식으로 설명하자면, ‘~가 ~에게 ~에 관해 이야기하다’가 서사인 셈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야기가 텍스트라면 서사는 컨텍스트입니다. 나는 <서사와 현대문화> 시간에 학생들에게 서사의 육하원칙을 항상 강조합니다. ‘언제/어디서, 누가, 무엇을, 어떻게, 왜, 그리고 누구에게’, 이것들이 갖춰져야 비로소 서사가 구성된다고 말이죠. 기사의 육하원칙과 비교하면, ‘누구에게’가 추가된 겁니다. 다른 요건들도 그 구체적 내포는 다릅니다만, 나는 기사의 육하원칙에 ‘누구에게’가 빠져 있는 것도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누구에게’가 빠져 있기 때문에 불특정 다수라고 흔히 얘기되는 독자가 현실적으로는 실제 독자, 그 중에서도 광고주가 되는 사태가 벌어지는 겁니다. 서사의 육하원칙에서 ‘언제/어디서’는 시공간성, ‘누가’는 주체(작가 혹은 화자), ‘무엇’은 이야기, ‘어떻게’는 플롯, ‘왜’는 주제/의도/목적, ‘누구에게’는 독자(실제 독자 혹은 잠재 독자)를 의미합니다. 서사의 육하원칙을 보면, 이야기는 6개의 요건 가운데 하나일 뿐입니다. 그 이상도 아니고 그 이하도 아닙니다.

6개 가운데 하나에 불과합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이야기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닙니다. 더구나 이야기는 플롯과 연계되어 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1/3의 비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야기가 플롯과 연계될 때 비로소 처음-중간-끝을 가진 자기완결적이고 개연성 있는 이야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죠. <<씨코>>나 <<상계동 올림픽>>의 미진함도 이야기성의 부족에서 기인한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다큐멘터리 영화들에서는 처음-중간-끝이 명확하지 않은 데다 팩트들이 인과적으로 연결되어 있지도 않습니다. 물론 인과관계를 표현하는 방식은 다양합니다. 기계적이고 직접적인 인과도 있지만, 문학에서는 간접적이고 우회적인 인과, 상호작용적 인과, 중층적 인과, 구조적 인과, 상징적 인과 같은 것들이 더 중요하게 작용합니다. 다큐멘터리 영화도 서사장르인 한 서사의 육하원칙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법입니다. 내가 무슨 고리타분한 규범을 얘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서사의 육하원칙이 충족될 때 서사성의 확보가 가능하고 그럴 때 독자들이 구체적 현재성에 근거한 ‘우리의 이야기’로 받아들이게 된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다큐멘터리 영화가 대중화되기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이야기성을 회복하는 것이 시급합니다. 2000년대의 소설이 이야기는 있는데 다른 요건들이 부족해 서사성이 약화되었다면, 다큐멘터리 영화는 다른 요건들은 갖췄는데 정작 이야기가 부족해 서사성이 약화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큐멘터리 작가들은 자기가 취재한 이런저런 팩트들을 최대한 많이 보여주고 싶은 욕구를 갖고 있는 듯합니다. 기록해야 한다는 강박 또는 사명감 때문이겠죠. 하지만 문학에서는 생략과 절제를 잘하는 작가가 좋은 작가입니다. 여백의 미학이 그렇듯이 말이죠. 생략과 절제를 잘할 때 잘 짜여진 이야기, 잘 구성된 플롯의 창출이 가능합니다. 다큐멘터리 작가들은 이 점을 항상 유념해야 할 것입니다. 다큐멘터리 영화는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장르입니다. 영화와 자본의 유착관계가 극심해지고 있는 오늘날 다큐멘터리 영화는 자본으로부터 자유로운 입장에서 한국사회의 모순과 문제점을 영상으로 비판할 수 있는 장르거든요. 요즘처럼 문학과 문화가 온통 상업주의화하고 있는 현실에서 다큐멘터리 영화만큼 민중적 관점에 투철한 장르도 없어 보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다큐멘터리 영화가 내장하고 있는 대안문화적 가능성입니다. 문제는 대중성입니다. 상업주의적인 방식으로 이 문제를 풀어나갈 수는 없습니다만, 배울 것은 배워야 합니다. 이야기성의 강화, 이것이 다큐멘터리 영화가 서사성을 확보할 수 있는, 다시 말해 대중성과 민중성을 결합시킬 수 있는 방책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그것은 다큐멘터리 영화란 다큐멘터리인 동시에 영화이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다큐멘터리의 민중성과 영화의 대중성을 겸비해야만 제대로 된 다큐멘터리 영화가 만들어질 수 있겠죠. 따라서 다큐멘터리 영화 작가와 감독들은 다큐멘터리로의 쏠림을 자제하고 다큐멘터리와 영화 사이에서 균형감각을 유지해야 합니다. 이야기성을 강화하는 것은 그 균형감각을 유지하는 데 있어서 결정적인 사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트루맛 쇼>>를 보면서 느낀 개인적인 소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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