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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진중공업과 김진숙, 그리고 아래로부터의 민족과 민중전형

한진중공업과 김진숙, 그리고 아래로부터의 민족과 민중전형

-하정일 소장-

 한진중공업의 막가파식 정리해고에 맞선 연대투쟁이 몇 달 째 계속되고 있습니다. 김진숙 씨의 크레인 농성도 200일이 넘었다고 합니다. 정리해고라는 제도 자체가 문제입니다만, 그 정리해고마저 최소한의 요건도 갖추지 못한 부당해고라는 데 이번 사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긴박한 경영상의 위기 해소 및 수주 경쟁력 확보’ 때문이라고 하는데, 적자가 난 것도 아니고 174억이라는 주식 배당금까지 챙길 정도의 회사가 할 말은 아니지요. 더구나 수주를 못한 것이 문제라면, 그것은 경영진의 무능 때문이지 노동자 탓은 아닙니다. 하지만 경영진에서 무슨 책임을 졌다는 얘기는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1년 동안에 절반 가까이 정리해고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수백 명의 노동자들을 일터에서 쫓아내려 한다는 것은 법적 요건 여부를 떠나 인간으로서의 예의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그야말로 파렴치한 짓거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한진중공업의 이러한 작태는 신자유주의의 맨얼굴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것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이번 연대투쟁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민중의 각성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촛불시위와의 차이도 거기에 있다고 봅니다.)

이번 사태와 신자유주의의 연관성은 무엇보다 수비크조선소 문제에서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수비크조선소는 한진중공업이 필리핀의 수비크에 세운 조선소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수비크조선소는 수주가 꽤 잘 되고 있는데, 영도조선소는 전무(全無)해서 감원이 불가피하다는 것이 한진중공업의 입장인 모양입니다. 이에 대해 여러 전문가가 장기적으로 영도조선소를 폐쇄하기 위해 수비크조선소 쪽에 수주를 몰아주고 있는 것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하고 있더군요. 수비크조선소가 임금도 훨씬 싸고 노동자들 부려먹기도 쉬워서 그러는 것 아니냐는 겁니다. 그렇게 보면, 그것은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을 보장하는 신자유주의 시스템이 가능하게 해준 일인 셈입니다. 문제는 비(非)대칭성입니다. 자본의 이동은 자유로운데 노동은 그렇지 못하다는 거죠. 그래서 자본은 자기에게 유리한 곳을 찾아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데 비해 노동은 국경이라는 울타리에 속절없이 갇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노동의 세계화가 해결책이 될 수도 없습니다. 국경이라는 제도가 무너져도 언어와 문화의 이질성이라든가 민족적 차별과 착취의 문제는 여전히 큰 장벽으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장기적으로는 노동의 세계화로 나아가야 하겠지만, 중단기적으로는 국경 내부에서 해결책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그것 역시 일종의 이중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노동의 세계화 혹은 민중의 전지구적 연대를 통한 근대극복과 아래로부터의 민족의 재편성이라는 해방적 근대성의 추구, 이 두 개의 작업을 병행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따지고 보면, 민족은 민중이 겪고 있는 현재의 고통을 최소화시켜 줄 수 있는 전략적 거점입니다. 자본에도 모국(母國)은 있는 법입니다. 한진중공업이 영도에도 기지를 갖고 있고 수비크에도 기지를 갖고 있지만, 한진중공업의 모국은 어디까지나 한국입니다. 한국이라는 울타리가 제공해준 다양한 보호와 특혜 속에서 세계로 진출할 수 있었던 겁니다. 자본의 세계화 과정에서 국가는 자국의 자본이 세계로 나아가는 데 음으로 양으로 결정적인 역할을 해왔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민족의 이름으로 한진중공업에 사회적 책임을 요구할 당당한 권리를 갖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한진중공업은 민족에 대해 사회적 책임을 수행할 의무를 지고 있습니다. 민족을 지워버리면 가령 한진중공업이 국내 기지를 없애고 해외로 기지를 이전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막을 명분이 사실상 없어지게 됩니다. 이것이 민족의 전략적 가치입니다. 그런 점에서 민족은 민중을 동원하는 이데올로기이기도 하지만 민중의 고통을 최소화시켜주는 보호막이기도 합니다. 민족 자체가 헤게모니투쟁의 장인 것도 그런 연유에서라 할 수 있습니다.

이때 중요한 문제가 민중이 보호의 대상에서 민족의 주체로 스스로를 재정립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민족의 아래로부터의 재편성에 바탕한 이중과제의 해결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마르크스가 민중의 국제적 연대와 민족주체로의 자기정립을 동시에 주문했던 것도 그래서일 터입니다.(마르크스는 민중이 민족의 지도적 계급이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민족의 아래로부터의 재편성을 뜻하는 것이지요.) 민중은 이중과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입니다. 그것은 민중이 서발턴이고 소수자이고 다중인 동시에 그 이상이기 때문입니다. 민중은 서발턴과는 달리 스스로를 표현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또한 민중은 소수자와는 달리 명확한 집합적 정체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민중은 다중과 달리 자본과의 대립관계가 분명합니다. 자본주의 근대의 극복을 기대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물론 민족주체로의 자기정립을 전제로 해서 말이죠. 200일 넘게 35m 크레인 위에서 농성하고 있는 김진숙 씨는 민중의 이러한 잠재력과 가능성을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는 전형적인 사례라 할 수 있을 겁니다. 한마디로 김진숙은 이중과제의 실천을 체현하고 있는 민중전형입니다.

아쉬운 것은 문학과 문화가 그것을 표현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희망버스’에도 동참하고 시위도 열심히들 벌이고 있지만, 정작 작품으로 그것을 형상화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문학운동의 기본이 문학을 통한 운동이라고 한다면, 작품이 없다는 것은 치명적인 문제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요즘 문학과 정치에 대한 논의가 뜨겁습니다만, 정작 문학의 정치성을 작품으로 어떻게 구체화할지에 대한 탐구는 보이지 않습니다. 나는 그것이 리얼리즘, 좀더 좁혀서 말하면 전형 문제에 대한 고민이 없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민중전형을 빼놓고 문학의 정치성을 논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요. 랑씨에르까지 포함해서 최근 문학과 정치에 대한 논의는 모더니즘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랑씨에르가 거론하고 있는 작품들을 봅시다. 거의 모더니즘이나 포스트모더니즘 아닙니까. 발자크를 거론하긴 합니다만, 그야말로 구색 맞추기 수준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가 문학의 정치의 요체로 보는 것이 미학적 체제이기 때문입니다. 윤리적 체제와 재현적 체제는 감성의 분할 혹은 위계체제를 묵수하는 데 반해 미학적 체제만이 그것을 깨뜨린다는 겁니다. 칸트 식의 삼분법이 연상되는 이러한 논리구도에서 리얼리즘이 설 자리는 없습니다. 당연히 전형 문제 또한 관심사가 될 수 없겠죠.

랑씨에르적 관점에서 보자면, 김진숙의 크레인 농성은 문학의 정치에 있어 본질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랑씨에르에게 중요한 것은 형식미학 또는 표현미학이지 내용미학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용미학은 윤리나 재현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거든요. 내가 문학과 정치에 대한 최근 논의를 일종의 모더니즘 변호론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그래서입니다. 물론 그렇게 된 데는 리얼리즘에 대한 오해도 한몫하고 있습니다. 전형 문제만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일반적으로 전형 하면 보편을 개별을 통해 그리는 것 정도로만 이해하고 있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전형에서 곧바로 상투성과 도식성을 떠올리곤 합니다. 하지만 전형에 대한 루카치의 설명은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닙니다. 가령 루카치는 전형의 특징으로 극단성을 거론합니다. 극단성은 모더니즘적인 예외성과 자연주의적인 평균성을 지양한 경지인데,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잠재성의 현실화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민중전형이란 민중의 잠재력을 허구를 통해 현실화한 것을 의미하는 셈입니다. 잠재력은 민중 모두가 갖고 있다는 점에서 예외성과 다르고, 민중의 일반적 사실태가 아니라는 점에서 평균성과도 구별됩니다. 민중의 잠재력은 다종다양하고 무궁무진합니다. 그런 점에서 도식성이나 상투성과도 관계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리얼리즘의 시대가 끝났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전형도 시효만료 되었다는 겁니다. 하지만 김진숙은 그러한 진단이 시대착오적인 것임을 웅변해주고 있습니다. 김진숙을 민중의 잠재력을 체현하고 있는 민중전형 이외의 다른 방법으로 어떻게 그리는 것이 가능할까요. 다른 방식으로 그리는 것이 가능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것이 참다운 의미에서의 문학의 정치성과는 거리가 멀 거라는 점만은 단언할 수 있습니다. 감성의 분할체제만 깨뜨리면 뭐합니까. 민중의 주체화 혹은 민족주체로의 자기정립에 아무 도움도 안되는데 말입니다. 물론 기존의 감성에 도전하는 ‘새로운’ 감성도 중요하죠.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어떤’ 새로움이냐 하는 문제입니다. 이 ‘어떤’에 대한 고민 없이는 문학의 정치는 불가능합니다. 나는 그 ‘어떤’의 자리에 민중이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요컨대 시대의 변화에 부응하는 새로운 민중적 감성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그럴 때 민족의 아래로부터의 재편에 바탕한 이중과제의 ‘문학적’ 실천이 시작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김진숙은 바로 새로운 민중적 감성을 35m 크레인 위에서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김진숙은, 과거에 전태일이 그러했듯이, 새로운 상상력의 원천입니다. 문학과 문화가 김진숙에 주목해야 하는 진정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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