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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와 서사, 그리고 문학과 문화의 연대

드라마와 서사, 그리고 문학과 문화의 연대

-하정일 소장-

나는 오랫동안 TV드라마에 대해 혐오감 비슷한 것을 갖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90년대에 이러한 감정을 갖게 되었던 것 같은데, 그것은 당시의 드라마들이 이른바 ‘나도 중산층’ 이데올로기를 확산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 생각은 지금도 여전합니다. IMF사태 이후 ‘나도 중산층’ 이데올로기는 풍지박산 났지만, TV드라마들은 지금도 이 어처구니없는 환상을 재생산하느라 여념이 없습니다.

하지만 모든 드라마가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 점에서 나는 경솔했습니다. 대학에서 대중문화론을 강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TV드라마에 대한 완강한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던 셈입니다. 내가 이 편견을 수정하게 된 것은 우연히 <<발리에서 생긴 일>>이라는 드라마를 접하면서였습니다. 어느날 아내가 이 드라마를 보고 있었는데, 심심한 김에 나도 함께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화면에서 헤게모니라는 말이 튀어나오는 것 아니겠습니까. ‘아니, TV에서 웬 헤게모니’ 하며 그때부터 그 드라마를 열심히 보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발리에서 생긴 일>>을 쭉 시청해보니까 그 드라마는 정말로 헤게모니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남녀 간의 사랑도 자본의 헤게모니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드라마의 결말부에서 하지원이 ‘마음만은 지키려 했는데 그게 안된다’라는 고백을 하는데, 나는 이 말이 바로 자본의 헤게모니를 암시하는 표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발리에서 생긴 일>>은 자본의 헤게모니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시도한 드라마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때부터 나는 TV드라마의 세계에 조금씩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TV드라마에도 대안문화적 잠재력이 숨쉬고 있음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전에는 ‘드라마를 왜 그렇게 싫어하냐’고 투덜대던 아내가 이제는 오히려 ‘남자가 쪼잔하게 뭔 드라마를 그렇게 열심히 보냐’고 타박하는 지경까지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내의 비아냥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나는 의연하게 TV드라마를 챙기고 있습니다. 한동안 영화에 탐닉했었는데, 요즈음은 영화보다 TV드라마에 열성이 된 겁니다.

TV드라마의 서사는 영화의 서사가 제공할 수 없는 매력을 갖고 있습니다. 영화는 중심 서사(main narrative)만으로 지탱되는 장르입니다. 영화의 상영시간 상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장편 영화가 시도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결국 실패로 끝났습니다. 한자리에 꼼짝않고 앉아 2시간 이상을 집중하긴 힘드니까요. 그런 점에서 영화는, 소설에 비유하자면, 단편소설과 비슷한 서사장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간적 제약 때문에 영화는 단편소설처럼 단일한 주제, 단일한 사건, 단일한 효과에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습니다.

그에 비해 드라마는 중심 서사와 하위 서사(sub-narrative)가 어우러져 구성되는 장르입니다. 드라마에서는 하위 서사의 역할이 중심 서사만큼이나 중요합니다. TV드라마는 거의 연속극, 즉 장편 드라마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중심 서사만으로는 서사를 채울 수 없습니다. 하위 서사들이 다채롭게 펼쳐지지 않으면 드라마가 성립되기 어렵다는 말입니다. 시청자들 또한 장편 드라마에 대해서는 별 부담을 느끼지 않습니다. 느긋한 자세로 한 시간 정도만 집중하면 되니까요. TV드라마는, 다시 한 번 소설에 비유하자면, 장편소설과 비슷합니다. 중심 서사와 하위 서사가 중첩되면서 서사가 진행된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단편 드라마가 힘을 못쓰는 것도 그래서일 터입니다. 근래에 오면서 영화보다 TV드라마로 사람들이 더욱 몰리는 것도 이와 관련이 깊습니다. 영화는 중심 서사로만 구성되다 보니까 아무래도 삶의 단면만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그에 비해 TV드라마는 중심 서사와 하위 서사가 어우러지면서 삶의 전체상을 보여주는 것이 가능합니다. 삶의 전체상을 보고 싶은 우리 시대 대중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줄 수 있는 거죠. 이는 요즈음 독자들이 단편소설보다 장편소설을 선호하는 것과 비슷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발리에서 생긴 일>>을 보면, 이 드라마의 중심 서사는 삼각관계의 연애담입니다. 전형적인 통속 멜로죠. 하지만 하위 서사들이 중층적으로 작용하면서 드라마는 통속 멜로의 수준을 넘어서게 됩니다. 하지원의 가족사, 조인성의 가족사, 그리고 소지섭의 가족사와 복수담이 어우러지면서 이 드라마는 자본의 헤게모니와 그에 대한 반항과 좌절을 입체적으로 묘파한 사회극으로 고양된 겁니다. 뿐만 아니라 이 하위 서사들은 주인공들이 왜 그런 성격을 갖게 되었는지를 설명해줌으로써 서사의 개연성을 높여주고 있습니다. 영화에서는 이게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영화는 대개 사건 중심으로 가는 겁니다. 반면에 TV드라마는 하위 서사들 덕분에 인물과 사건을 두루 포괄할 수 있는 거죠. 게다가 하위 서사들이 제공해주는 재미도 쏠쏠합니다. 그 긴 드라마를 중심 서사만으로 끌고간다면, 시청자들은 아무리 연애담이라 하더라도 지겨워서 견딜 수 없을 겁니다.

요새 내가 즐겨 보고 있는 TV드라마는 <<동안미녀>>입니다. 아내는 장나라라는 여배우 때문에 보는 거 아니냐고 놀리지만, 나는 여배우에는 별 관심이 없는 사람입니다. 내가 이 드라마에 주목한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는 이 드라마가 여성이 우리 사회의 주체로 일어서는 과정을 그린 성장담이라는 점입니다. 여성이 주인공인 드라마들은 거의 신데렐라 이야기거나 출세담 혹은 성공담입니다. 이런 드라마들은 하나같이 여성의 주체화 과정에는 무관심합니다. 돈 많고 권력 가진 남자를 만나거나 아니면 이런저런 계략이나 우연 덕분에 출세하고 성공하는 이야기가 대부분이죠. 하지만 <<동안미녀>>는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능동적으로, 그러니까 겸손하면서도 당당하게 맞서싸우는 옹골찬 여성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남자 주인공에게 ‘내가 너를 지켜줄께’라고 말할 정도로 말이죠. 이것이 이 드라마의 중심 서사입니다.

다른 하나는 여주인공이 보여준 민중적 품성과 지혜입니다. 드라마에서 여주인공은 연대의 가치를 체득하고 있는 인물입니다. 그녀는 돈 없고 권력 없는 자들과의 연대를 바탕으로 환경에 맞섭니다. 그녀는 노동의 가치를 알고 있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팀장이 경합에서 진 후 여주인공에게 ‘다음에 다시 한 번 정정당당하게 경쟁해보자’고 말하자 장나라는 ‘나는 경쟁에서 이기려고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일이 좋아서 일을 하는 것’이라고 응대합니다. 경쟁주의를 거부하고 노동을 통한 자아성취를 얘기하고 있는 겁니다. 또한 그녀는 사장이 아니라 일개 평직원을 사랑의 상대로 선택합니다. 자본의 헤게모니를 극복한 셈입니다. 요즈음의 드라마들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선택이죠. 더구나 그녀는 출세가 보장된 의류회사를 걷어차고 조그마한 동네 옷가게로 ‘하방(下放)’합니다. 그녀가 존경하는 분이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자유롭게 할 수 있어서이기도 합니다. 시장주의 때문에 의류회사에서는 그게 불가능하지 않습니까. 내가 이 드라마를 출세담이나 성공담으로 보지 않는 까닭입니다. 나는 이러한 행동과 선택들이 민중적 품성과 지혜의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여주인공의 민중적 품성과 지혜는 다양한 하위 서사들을 통해 그려지고 있습니다.

여주인공의 캐릭터가 너무 상투적이지 않냐고 반문할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2000년대의 대중문화와 문학을 생각해 봅시다. 이 상투성 자체가 희귀해진 상태 아닙니까. 상투성 여부도 수행적으로, 즉 맥락에 의해 결정되는 겁니다. 80년대라면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2000년대는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 나는 이 드라마를 보면서 계속 2000년대의 한국문학을 떠올렸습니다. 2000년대의 주류 한국소설에도 청년 백수, 비정규직 노동자, 파트타임 노동자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시대의 반영인 셈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겉만 민중이지 속은 중산층입니다. 소설 속의 민중들은 경제적 궁핍이나 차별/착취로 인한 고통을 거의 보여주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스스로를 세상으로부터 격절시킨 채 고독한 단자로 자족하며 살아갑니다. 이들을 과연 민중이라 할 수 있을까요. 지금도 세상의 한켠에선 부당해고와 비정규직 차별과 열악한 노동환경으로 고통받고 죽고 싸우고 크레인 위에서 농성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삭제된 민중은 민중이 아니라 대중일 뿐입니다. 그런 점에서 나는 2000년대의 주류 한국문학은 중산층적 감수성으로 채색된 중산층문학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에 비해 <<동안미녀>>가 보여주는 민중적 감수성은, 백보 양보해 그것이 상투적이라 하더라도, 소중한 대안문화적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한국의 대중문화와 문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암시해준다는 점에서 말이죠.

나는 문학이 대중문화의 이러한 노력들에 적극적인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럴 때 문학운동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가령 작가회의의 분과 구성을 보면, 시·소설·비평·아동문학 등으로 되어 있습니다. 소위 ‘순문학’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까 외연을 넓히기 위해 ‘민족’을 뗀 것 아닐까요. 이념과 가치의 공유를 기준으로 삼지 않고 ‘순문학’을 기준으로 삼으면서 벌어진 일인 셈입니다. 작가회의가 본디 문학운동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단체임에도 불구하고 2000년대 들어 ‘문학을 통한 운동’이라는 의미에서의 문학운동을 보기 어려워진 것도 그래서입니다.

나는 문학운동을 재활성화하려면 ‘순문학’ 중심주의를 벗어버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제안은 이미 80년대에 제기된 바 있습니다. 민중의 생활글과 수기라든가 르뽀 같은 것들을 문학의 범주에 적극 수용해야 한다는 장르 확산론이 그것이었죠. 장르 확산론의 참뜻은 민중성의 강화에 있었습니다. 80년대 민족문학운동의 현재성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요컨대 80년대의 민족문학운동이 제기했던 아젠다들이 지금도 유효하다는 것, 아니 지금이야말로 더욱 절실해졌다는 겁니다. 현재의 시점에서 보자면 드라마 대본, 영화 시나리오, 르포문학, 나아가 대중문학까지 적극 포용해야 합니다. 이념과 가치의 공유를 기준으로 해서 말이죠. 대안문화라는 거시적 관점에서 문학과 문화가 소통하고 연대할 때 문학운동의 재활성화 또한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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