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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으로서의 지역과 ‘아래로부터의 민족’

대안으로서의 지역과 ‘아래로부터의 민족’
 
-하정일 소장-

근래 내가 가장 관심을 쏟고 있는 주제가 지역(local)입니다. 십수년 동안 익산에서 선생 노릇을 하면서 지역이 지닌 대안적 잠재력에 조금씩 눈을 떠가고 있어서입니다. 지방도시가 다 그렇습니다만, 익산 역시 매우 낙후된 곳입니다. 인구가 줄어들고 있을 정도니까요. 도시화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인구의 집중과 팽창을 뜻한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익산은 도시화 경향에도 역행하고 있는 곳인 셈입니다. 산업기반도 미약하고 도시환경도 허술한, 그야말로 기차역 하나로 버티고 있는 곳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요즈음 이 낙후성이야말로 하나의 가능성이라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익산 주민들이 들으시면 펄쩍 뛸 소리라는 것을 잘 압니다. 낙후성으로 인해 익산 주민들이 겪어온 고통이 너무도 자심하기 때문이죠. 그런 점에서 익산은 앞으로 많이 ‘개발’되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내가 가능성 운운 하는 것은 그 낙후성 덕에 익산이 자본주의적 근대화의 해독을 덜 입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익산이 ‘지속가능한 개발’의 가능성을 여전히 갖고 있다는 겁니다. 대도시들은 자본주의적 근대화가 이미 불가역적 대세가 되어버린 상태입니다. 그런 점에서 대도시는 리모델링만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지방의 소도시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마음먹느냐에 따라 대도시와는 다른 개발 모델을 세우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리모델링이 아니라 모델링이 가능하다는 겁니다. 나는 지역의 대안적 잠재력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봅니다.

물론 지역이 대안적 가치로 가득 찬 낭만적 공간은 아닙니다. 그것은 지역이 표상하는 의미들이 무엇인가만 살펴보더라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지역이 표상하는 대표적인 의미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삶의 기원이라는 의미이고, 다른 하나는 삶의 터전이라는 의미입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전자입니다. 삶의 기원으로서의 지역은 분명 소중한 가치입니다. 뿌리 없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하지만 근대 이후 상황은 달라졌습니다. 산업화와 도시화는 삶의 기원을 근본에서부터 뒤흔들어 놓았습니다. 쉽게 말해 할아버지의 고향과 아들의 고향과 손자의 고향이 서로 다른 상황이 벌어지게 된 겁니다. 이 경우 손자의 삶의 기원은 어디일까요. 원적지일까요, 본적지일까요, 아니면 출생지일까요.

더구나 이주와 이산을 보편화시킨 지구화는 이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민자 혹은 디아스포라들에게 삶의 기원이란 어떤 의미일까요. 이민 1세대들에게 그것은 떠나온 지역, 곧 고향을 의미할 겁니다.(디아스포라 문제가 지역 문제인 소이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지만 이민 2세대나 3세대들에게 아버지 혹은 할아버지의 고향이 삶의 기원일 수 있을까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지요.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그 삶의 기원이란 종족적(ethnic) 기원일 뿐입니다. 요사이 유행하고 있는 디아스포라 담론들을 선뜻 받아들이기 힘든 것도 그래서입니다. 경계인이니 사이성(in-betweeness)이니 하면서 디아스포라가 국민국가의 한계를 투시할 수 있는 존재인 것처럼 말하지만, 사실 그 담론들에는 종족적 기원에 대한 묘한 집착이 숨어 있는 듯합니다. 삶의 기원과 삶의 터전 사이에서 유동하고 있다는 것은 결국 종족적 기원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 아닐까요. 지역이나 이산 문제가 민족주의나 지역주의에 악용되곤 하는 것도 그와 관련이 깊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리프 딜릭은 <<포스트모더니티의 역사들>>에서 이러한 딜레마의 해결책으로 장소(place) 개념을 제안합니다. 간단히 말해 삶의 터전에 주목하자는 겁니다. 지역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한 삶의 기원 혹은 종족적 기원이라는 문제설정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딜릭의 제안이 온전한 해결책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장소 개념을 사용한다고 삶의 기원이라는 문제가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고향을 떠난 사람들에게 삶의 기원에 대한 동경이 하나의 ‘사실’ 혹은 실존적 고민으로서 엄연히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선천적인 것으로든 후천적인 것으로든. 그런 점에서 디아스포라 뿐 아니라 현대인은 모두 일종의 경계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삶의 기원과 삶의 터전 사이의 긴장을 견뎌내는 데서부터 우리는 출발해야 합니다. 민족이 그러하듯이 말이죠. 그것이 실사구시적인 태도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다만 딜릭의 제안은 그 긴장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 어디인가를 적시해주고 있다는 점에서 적극 참조할 필요가 있습니다.

딜릭의 제안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장소, 곧 삶의 터전에 주목할 때 ‘아래로부터의 민족’을 만들어가는 것이 가능해진다는 주장입니다. 딜릭 식으로 표현하자면, ‘미국인과는 다른 미국인, 일본인과는 다른 일본인, 중국인과는 다른 중국인’을 만들어가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지배층이 만든 ‘위로부터의 민족’과 경합하는 저항적 잠재력이 삶의 터전으로서의 장소에 내장되어 있다는 거죠. 그 저항과 경합의 과정에서 새로운 민족의 창출도 가능할 겁니다. 딜릭은 굳이 장소라고 명명했지만, 나는 지역이 그러한 잠재력을 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딜릭도 삶의 기원이라는 문제를 전적으로 부정한 것은 아닙니다. ‘미국인과는 다른 미국인’이 가능한 것은 삶의 기원에서 유래하는 역사적 정체성이 결정적으로 작용한다고 보고 있으니까요.

가령 전통이 그렇습니다. 요사이 ‘만들어진 전통’이라는 말이 유행하면서 모든 전통이 근대에 와서 창안된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만, 정작 그 용어의 창안자인 홉스봄은 모든 전통이 만들어진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홉스봄에 따르면, 만들어진 전통이 아닌 ‘순수한 전통(genuine tradition)’도 분명하게 존재합니다. 그러면서 홉스봄은 순수한 전통의 요건으로 내구성(strength)과 적응력(adaptability)을 들고 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의 전통은 일종의 집단 무의식으로 디아스포라들의 역사적 정체성 형성과정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할 겁니다. 그렇다면 더더군다나 지역이라는 용어를 꺼릴 필요가 없는 셈입니다.
 
오히려 나는 용어 문제보다는 지역의 아래로부터의 재규정, 곧 민중적 관점에서의 급진화가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뭉뚱그려 지역이라고 말하지만, 사실상 지역은 계급적으로 날카롭게 분할되어 있습니다. 이는 디아스포라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먹고살기 위해 다른 나라로 이주한 사람들도 있지만, 더 잘 살고 보다 출세하기 위해 이민 간(또는 유학 간)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들을 한묶음으로 디아스포라라고 부르는 것이 합당할까요. 좀더 혹독하게 말하면, 주류 디아스포라 담론들은 지식인 중심적이랄까 엘리트주의적인 혐의가 짙습니다. 나는 거기에 이주 민중들의 욕구나 소망이 담겨 있다고 느껴지지 않습니다. 이주 민중들의 화급한 욕구란 새로운 삶의 터전에 정착하는 것 아닐까요. 그런데 주류 디아스포라 담론은 마치 정착하지 말라고 요구하는 것 같은 인상을 줍니다. 정착에 집착하는 순간 국민국가라는 프레임에 걸려들기 때문이라는 거죠. 이주 민중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러한 요구는 배부른 사람들의 한가한 음풍농월일 뿐입니다.

물론 정착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을 겁니다. 정착만으로는 민중의 참다운 해방이 불가능하니까요. 정착의 최대치란 일반적으로 중산층 되기 아니겠습니까. 중산층 되기는 민중해방이라기보다는 계급구조의 합리적 재배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국민국가를 넘어서는 시야가 필요한 것은 그래서입니다. 하지만 국민국가를 넘어서는 작업은 새로운 국민국가를 만들어가는 노력과 병행해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김진석 교수는 그것을 포월(包越)이라고 표현했지만, 나는 내파(內破)라는 표현을 선호합니다. 왜냐하면 새로운 국민국가를 만들어가는 실천이란 곧 국민국가를 내부로부터 극복해가는 작업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둘은 동전의 앞뒷면인 셈입니다. 그런 점에서 그것은 이중과제입니다. 반면에 주류 디아스포라 담론을 비롯한 탈근대 담론들은 단번에 국민국가의 프레임을 뛰어넘으려 합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이 기획들에는 행복하게 살고 싶은 민중의 소박하면서도 절실한 일상적 소망에 대한 존중심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그 점이 내가 탈근대 담론을 믿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얼마전에 서경식 씨가 민족문학 개념을 견지해야 한다는 주장을 편 바 있습니다. 나는 서경식 씨의 디아스포라 담론은 주류 디아스포라 담론과는 다른 진정성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개인적 체험과 재일 한인/조선인의 삶에 대한 깊은 이해가 적절히 조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서경식 씨의 디아스포라 담론에는 자신의 지식인적 체험을 특권화시키지 않으려는 진지한 성찰이 배어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의 민족문학 개념에도 종족적 기원에 대한 욕망이 은밀하게 깔려 있습니다. 그가 생각하는 민족문학이 national literature가 아니라 ethnic literature이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그는 종족적 기원을 중심으로 민족문학을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민족문학을 이렇게 생각하는 한 재일 한인/조선인 문학은 삶의 터전을 갖기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주권의 근거가 애매해지기 때문이죠. 물론 종족적 기원을 공유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우리는 재일 한인/조선인 문학에 적극적 관심과 배려를 기울여야 합니다. 하지만 그 관심과 배려는 재일 한인/조선인 문학이 일본문학의 한 주체로서 당당한 주권과 시민권을 갖도록 도와주는 차원에서의 관심과 배려여야 할 것입니다.

재일 한인/조선인 문학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스스로를 일본 민족문학의 한 주체가 될 수 있도록 주류 일본문학과 싸워나가야 합니다. 그곳이 그들의 삶의 터전이기 때문이죠. 그 싸움은 ‘일본문학과는 다른 일본문학’, 그러니까 ‘아래로부터의 일본 민족문학’을 만들어가는 투쟁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와 시장주의로 얼룩진 일본문학과는 다른, 민족과 민족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민중연대의 국제주의 정신으로 충일한, 즉 새로운 주권과 시민권에 바탕한 일본 민족문학의 창출을 기대할 수 있게 될 겁니다. 지역을 삶의 터전이라는 의미를 중심으로 아래로부터 재규정할 때, 다시 말해 민중적 관점에서 급진화시킬 때 지역이 대안적 가치를 담지한 공공영역으로 재탄생할 수 있음을 여기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 문제와 관련해서는 소비자의 책임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가라타니 고진도 강조한 바 있지만, 시장은 소비자들이 주체성을 발휘할 수 있는 유력한 공간입니다. 가라타니의 소비자 중심주의에는 반대하지만, 소비자들이 새로운 시장을 만들 수 있다는 것에는 나 또한 같은 생각입니다. 놀 수 있는 마당이 있어야 신명나게 놀 수 있는 법입니다. 판소리나 탈춤이 그러했듯이 말이죠. 대안문화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대중문화론 시간에 학생들에게 대안적 대중문화-곧 대안문화-란 대중을 위한, 대중에 의한, 대중의 문화라고 강조하곤 합니다. 그 중에서 대중에 의한 문화가 바로 소비자가 주체가 되는 문화를 의미합니다. 소비자가 주체로서의 역할을 할 때 새로운 시장의 창출이 가능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대안문화가 신명나게 놀 수 있는 마당도 마련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역도 가능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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