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광대학교 대안문화 연구소 : 익산시 구술사 DB

TEL 063-850-5275
FAX 063-850-7311

칼럼

> 간행물 > 칼럼
크게 작게 인쇄

엄마야 누나야, 독산에 올라 달구경하자

원광대학교 대안문화연구소 박태건 수석연구원의 ‘지역 정체성 찾기’

▲ 엄마야 누나야, 독산에 올라 달구경하자


하늘에 화를 내도 되는가? 감히, 태풍이 쓸고 간 자리에서 묻는다. 대대로 땅만 바라보고 살았던 농도민의 거친 손엔 백수피해를 입은 벼이삭이 가득하다. 바람이 불면 훅, 날아갈 쭉정이다. 이런 판에 인문학이란? 한가로운 학문인지도 모른다. 재앙같은 기후 변화가 무분별한 개발의 응보이며 이윤의 극대화가 속도지상주의를 낳았다고 주장한들, 폐허에 간신히 발 딛고 선 이들에게는 들리지 않는다. 요즘 같은 시절에 현장을 찾아 구술사를 진행하는 인문학은 어쩌면 잔인하다.

잔인한 것은 또 있다. 구술사 조사를 통해 파괴된 전통을 확인하는 일이다. 추석 다음 날, 함열읍에서는 달맞이 축제가 열렸다. 장수들이 서로 흙과 돌을 던져서 흙산과 돌산이 바뀌었다는 전설의 독산이 축제의 공간이다.

한가위 이튿날, 이른 저녁밥을 든든히 먹은 아이들을 앞세우고 제일 좋은 옷을 차려입은 사람들은 독산에 올랐다. 산마루는 제법 널찍해서 씨름대회며 장기자랑이 열려도 좋았다. 달집 태우기를 한다던가. 마을 유지들의 축사가 줄기차게 이어지는 축제가 아니다. 그저 산마루 여기저기에 자리 펴고 앉아 하염없이 달맞이를 하는 것인데, 이날만은 청춘 남녀의 즉석만남도 허락되었다. 이른바 ‘함열식 공개 미팅’이다. “이 지역에 처녀 총각이 그리 다 오는 거여, 여기서 한 10리 넘지. 그래도 갔어. 처녀 총각 볼려면… 내 나이 때 사람들은 다 알아, 너도 갔냐?”(황순식씨 78세) “아∼ 갔지”(황순생씨 75세) 형과 아우는 청년 시절로 돌아 온 듯, 얼굴빛이 환하다.

이 아름다운 전통이 지금은 과거형이다. 수줍은 연정이 오고갔을 바위며, 씨름대회가 열렸던 공터는 불과 몇십 년 전에 사라졌다. 석산 개발업자가 손을 댄 것이다. 함열사람들의 독산의 추억도 쪼개져 버렸다. “어휴, 아까운 돌 많았어.” 학을 닮아 학바위. 허리 굽은 할머니를 닮아서 할미 바위, 치마같이 넓은 치마바위…. 모두 사라진 전통이다.

“개발로 독산이 허물어지면서 그 놀이가 흩어진 것은 아쉬워, 이 지역에선 말하자면 그런 느낌을 다 가지고 있어….(황순생), 석산개발업자도 결국 번 돈 다 까먹고 어렵게 되었지,”(황순식) 전설 속의 장수들이 던졌던 바위들은 지금쯤 무엇이 되어 찬비를 맞고 있을 것인가? 사라져 버린 바위들과 함께 추억의 한가위 밤도 흩어진다.

그것은 우리가 잊어버린 가치. 돈으로 바꿔버린 전통이다. ‘제비손이구손이’를 하며 노는 아이들의 소란함과, 마을 씨름 선수를 응원하는 흥분과, 노인이 되어서 얻는 삶의 넉넉함과, 첫 만남의 설렘이 교차하던 곳. ‘함열의 카니발’이 열렸던 독산의 여윈 이마에도 여전히 달은 비출 것이다.

얼마 전 석산 개발업자들이 경찰 조사를 받았다는 보도를 보았다. 무단으로 석재를 채취한 것이 이유다. 돌은 오랫동안 변치 않는 영원의 물질, 옛 석공들이 돌에 새겨 넣은 것은 단순한 문양이 아니다. 굳건한 신앙과 영원한 국가의 번영이다. 세월의 바람에 깍이어 또 다른 세계의 문(門)이 된 옛 건축물을 만지는 순간, 우리는 과거와 소통한다.

소통과 공감이 강조되는 요즘. 사람들이 모여 이야기꽃을 피우기란 쉽지 않다. SNS를 통한 소통이란 것도 소셜미디어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다른 세상 이야기다. 평균수명이 늘어가면서 경제인구로 포함되지 않은 노인을 ‘잉여의 삶’으로 눈총을 주기도 한다. 이런 시대에 세대를 공감할 ‘이야기 판’이 열릴 리 만무하다.

아침부터 찬비가 내린다. 모두 어렵고 힘들다고 한다. 추석을 앞두고 설레지 않은지 오래다. 문득, 독산에 올라 지혜를 나누던 함열의 아름다운 전통을 생각한다. 엄마와 누이와 달을 보며 소원을 빌던 나이로 돌아가고 싶다. 추석이 되면 답답한 마음에도 한가위 달빛이 스며들겠지. 추억의 달빛이 우리 모두에게 따뜻함으로 번지길 기대한다. 더 늦기 전에,
코멘트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