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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시대와 안철수 신드롬

문화의 시대와 안철수 신드롬

-하정일 소장-

문화의 시대라는 말은 이제 거의 상식이 되었습니다. 어린애들도 입에 달고 다닐 정도니까요. 틀린 말은 아닙니다. 현재 한국사회에서 문화의 힘은 그야말로 막강하기 그지없습니다. <도가니>라는 영화가 일으킨 파장이 그 점을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이 영화는 공지영의 동명소설을 저본(底本)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공지영의 원작도 50만 부 이상 팔린 베스트셀러 소설입니다만, 영화와 같은 폭발적인 반향은 없었습니다. 영화 한 편 보고 나서 법을 바꾸겠다고 하지 않습니까. 안철수 신드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평소 정치와는 무관한 사람이었습니다. 정치활동은 고사하고 시민운동과도 거리가 멀었으니까요. 정확히 말하면, 그는 벤처 사업가입니다.(하나 더 추가하자면, 이명박 대통령 직속 미래기획위원회의 위원이기도 했다더군요.) 하지만 안철수가 백신 프로그램 사업체의 CEO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를 경제인으로 보지 않습니다. 대중들에게 안철수는 일종의 문화 아이콘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얼마전에 죽은 애플의 스티브 잡스처럼 말이죠. 그렇다면 일개 문화 아이콘이 정치판을 뒤흔들어놓은 셈입니다. 사실 안철수에 대한 대중들의 반응은 아이돌 스타에 대한 열광처럼 대단히 감정적이고 즉물적입니다. 나를 포함해서 일반 대중들이 안철수라는 사람에 대해 갖고 있는 정보는 별로 없습니다. 그의 정치적 입장이 무엇인지, 이념적 좌표가 어떠한지, 또는 복지나 노동문제에 대한 구체적 정책이 과연 있기나 한지 사람들은 알지 못합니다. 그런 점에서 안철수에 대한 대중들의 반응은 합리적인 것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이러한 열광이 어색하지 않은 것은 그가 문화 아이콘이기 때문입니다. 문화는 논리 이전에 정서니까요.

나는 이 현상에 대해 아직은 판단을 유보하고 싶습니다. 안철수 신드롬이 이런저런 긍정적 효과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못지않게 우려스러운 점도 한두 가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나만의 한가한 기우(杞憂)일까요. 그럴지도 모릅니다. 특히 안철수 신드롬이 박원순 효과로 이어진 것은 희망적인 기대를 한껏 높여주기도 합니다. 거기에는 나름의 대안적 정치성이 잠재해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안철수 신드롬에는 정치 일반에 대한 무조건적인 불신이 담겨 있기도 합니다. 이러한 무조건적인 정치 불신은 진보정치에 대한 무관심을 조장할 가능성이 큽니다. 실제로 안철수 신드롬 이후 김진숙의 크레인 농성이 묻혀버리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진보정치가 현재 지지부진한 상태이지만, 자본주의 너머에 대한 비전과 기획은 진보정치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그런 점에서 안철수 신드롬에는 긍정적 의미와 부정적 의미가 혼재되어 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문화의 시대라는 말에 신중해야 하는 것도 그래서입니다.

무엇보다 문화의 시대라고 할 때 그 ‘문화’가 어떤 문화인가부터 정확히 헤아려야 합니다. 그 ‘문화’란 사실상 대중문화, 그것도 문화산업으로서의 대중문화입니다. 그렇다면 문화의 시대란 문화의 자본 종속이 자배구조화된 상태를 의미할 뿐입니다. 문화산업의 프레임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대중문화가 존재하긴 합니다만, 그러한 대중문화는 ‘문화의 시대’의 범주에서 빠져 있습니다. 물론 문화산업으로서의 대중문화에도 대안문화적 잠재력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가령 지난번에 언급한 <<동안미녀>> 같은 TV드라마가 그러한 경우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것은 문화산업 자체가 문화와 산업의 모순적 결합의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문화가 자본에 종속된 상태에서도 문화논리와 자본논리는 항상적으로 길항(拮抗)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이것이 문화산업의 구조적 아포리아이고 대중문화의 가능성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가능성 혹은 잠재력은 현재로서는 부분적이고 파편적인 수준에 불과합니다. 과장해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이에 대한 분별없이 문화의 시대 운운하는 것은 문화산업의 프레임에 고스란히 말려드는 꼴입니다.

더욱 문제인 것은 문화의 시대가 근대문학의 종언과 맞짝관계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전형적인 근대(근대문학의 종언)와 탈근대(문화의 시대)의 이분법인 셈입니다. 나는 한 에세이에서 근대문학의 종언론이 전제와 조건이 잘못된 명제임을 지적한 바 있습니다. 특히 그것은 마르크스의 (잉여)가치론에 대한 의도적인(?) 곡해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마치 마르크스가 생산과 노동영역 뿐 아니라 소비와 유통영역 또한 (잉여)가치가 발생하는 유력한 장소라고 인정했다는 식으로 말이죠. 하지만 마르크스는 (잉여)가치는 생산영역에서 ‘창출’되고 유통영역에서 ‘실현’된다고 분명하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근대문학의 종언 명제는 보편적 설득력을 가질 수 없는 주장입니다. 전제가 잘못된 가설은 명제로서의 타당성을 애시당초 확보할 수 없는 법이니까요. 이론적 문제를 떠나서 보더라도 생산영역이 (잉여)가치를 둘러싼 쟁투의 장임은 한진중공업 사태와 김진숙의 크레인 농성이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싸르트르의 말마따나 근대문학이 “영구혁명 중에 있는 주체성의 표현”이라면 근대문학은 현재의 상태가 어떠하냐와는 별개로 여전히 유효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한국근대문학이 처해 있는 위기는 주체-객체의 역관계가 만들어낸 유동성의 한 국면일 뿐입니다. 그런 점에서 현상황을 과소평가해서도 안되겠지만, 과대평가하는 것도 유동성을 고착화시키는 섣부른 짓인 셈입니다. 이처럼 근대문학 종언론이 명제로 정립되기 어려운 가설이라면, 그것의 맞짝인 문화의 시대론 역시 현실적 근거가 박약한 설익은 슬로건일 뿐입니다.

따라서 문화의 시대 운운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일이 대안문화라는 거시적 관점을 견지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대중문화 혹은 문화의 시대의 양가성 내지는 다면성을 비판적으로 투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대안문화는 기획인 동시에 척도입니다. 일찍이 임화가 제안한 본격소설론이 그러했듯이 말이죠. 대안문화란 한마디로 대중을 위한, 대중에 의한, 대중의 문화입니다. 대중을 위한 문화는 대중의 소망과 욕구를 반영한 문화를 의미합니다. 이때 대중의 소망과 욕구는 그들의 구체적 삶/생활에서 발원한 소망과 욕구를 가리킵니다. 그런 점에서 대중을 위한 문화란 생활문화와 동의어라 해도 무방합니다. 대중에 의한 문화는 대중이 소비의 주체가 되는 문화입니다. 문화산업에서 대중은 소비의 대상, 곧 객체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대중이 소비의 주체가 된다는 것은 문화산업의 시스템을 뒤흔드는 일입니다. 그 최대치는 보이콧과 리콜 요구입니다. 여기까지 가면 대중에 의한 문화는 일종의 소비자운동이 되겠죠. 대중의 문화는 대중이 생산의 주체가 되는 문화입니다. 생산의 주체가 반드시 대중이 창작자가 되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렇게 될 수 있다면 좋겠지만, 분업화와 전문화를 특징으로 하는 자본주의사회에서 그것은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가능한 길은 re-writing 같은 것일 터입니다.(가령 ‘노가바’-노래 바꿔 부르기-가 거기에 해당할 겁니다.) 독자가 re-writing, 즉 새로운 의미부여를 통해 제2의 작가가 되는 것처럼 말이죠. 그렇다고 대중이 문화생산의 주체가 되는 것이 아예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1980년대에 그 선례가 있었습니다. 생활글 혹은 노동자 글쓰기라든가 소인극(素人劇) 운동 같은 것이 그것입니다. 지금도 그러한 작업이 한국사회의 한켠에서 묵묵히 진행되고 있습니다. 요즘은 아마추어 다큐멘터리가 새로운 추세로 떠오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작업은 현재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한 채 대단히 더디게, 힘겹게, 산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거시적으로 보면, 그것이 대중을 위한 문화, 대중에 의한 문화, 대중의 문화라는 방향성, 그러니까 대중의 생활이 담긴 문화, 대중이 생산과 소비의 주체가 되는 문화로의 방향성을 일관되게 보여주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여기서는 문화와 문학이 이분적적이고 대립적인 관계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말하자면 문화의 시대론의 주장과는 달리 문학과 문화가 대안문화라는 방향성을 공유하는 협업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는 혹은 맺을 수 있다는 겁니다. 가령 서사를 매개로 문학과 문화가 소통하고 장르확산을 이루어가는 과정을 보면 그 점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1980년대에 제기됐던 장르확산론이 이제야 서서히 결실을 맺고 있는 셈이라고나 할까요. 장르확산론의 견지에서 보면, 종말의 위기를 맞고 있는 것은 근대문학 일반이 아니라 이른바 순문학이라는 성채에 스스로를 유폐시키고 있는 문학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학주의는 장르확산이라는 시대적 흐름에 합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합류하는 순간 더 이상 문학주의가 아니니까요.

문학과 문화가 소통할 수 있는 것은 어째서일까요. 그것은 대중과 민중이 한 얼굴의 양면이기 때문입니다. 대중이 생산 영역으로 가면 거의가 민중이 됩니다. 또 민중이 소비영역으로 오면 대부분 대중이 됩니다. 즉 대중의 생산면의 얼굴이 민중이고, 민중의 소비면의 얼굴이 대중입니다. 대중과 민중을 서로 다른 존재들이라고 착각한 것은 생산과 소비를 분리해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생산과 소비를 한묶음으로 바라보면, 대중과 민중은 사실상 한 몸입니다. 이들을 일괄해서 무어라고 불러야 할지 지금으로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과거에는 대중과 민중을 민중으로 통칭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소비가 곧 재생산과정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생산과 소비가 생산과 재생산이 순환하는 연쇄과정이었던 겁니다. 1980년대까지는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2000년대의 후기 자본주의 한국사회는 사정이 복잡해졌습니다. 소비영역에 재생산으로 환원되지 않는 특화된 부분들이 생겼기 때문이죠. 그래서 민중으로 통칭하기가 어려워진 겁니다. 이 문제는 시간을 두고 곰곰히 검토해봐야 할 사안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대중과 민중이 한 얼굴의 양면이라는 사실은 문화의 시대가 허상임을 말해주는 결정적 증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화의 시대는 민중과 분리된 대중, 생산과 분리된 소비에 근거한 명제이기 때문입니다.

 민중과 분리된 대중, 생산과 분리된 소비는, 비유하자면, 실체 없는 이미지 혹은 내용 없는 스타일에 불과합니다. 요컨대 속이 텅 빈 기표인 셈입니다. 문화의 시대라는 슬로건에 동의할 수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안철수 신드롬도 마찬가지입니다. 엄밀히 말해 안철수 신드롬은 내용과 실체가 모호하기 그지없습니다. 내가 보기에 안철수가 표상하는 것은 슘페터적 의미에서의 혁신가형 자본가라는 이미지와 온정주의라는 스타일입니다. 안철수에 대한 열광도 그러한 이미지와 스타일에 대한 열광입니다. 하지만 그 이미지는 실체가 불분명하고, 그 스타일은 내용을 종잡을 수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안철수 신드롬은 문화의 시대라는 허상과 그대로 겹칩니다. 그렇다고 안철수 신드롬이 허상이기만 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대중문화와 문화의 시대가 그러한 것처럼 안철수 신드롬 또한 양가적이고 다면적인 현상입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요체는 이 양가성과 다면성을 망각하거나 외면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정확히 통찰해야만 진보정치와 대안문화의 미래를 기약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획으로서의 대안문화 이상으로 척도로서의 대안문화가 중요한 것은 그래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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