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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지와 현대자동차 노조

서태지와 현대자동차 노조

-하정일 소장-

얼마전 서태지와 이지아의 이혼관련 소송이 언론과 인터넷을 뜨겁게 달군 일이 있었습니다. 그 여진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모양입니다. 특히 인터넷에서는 결혼과 이혼 사실을 숨긴 것을 어떻게 볼 거냐를 둘러싸고 열띤 공방이 벌어졌습니다. 한편에서는 공인(?)이 거짓말을 했다는 이유로 비난을 퍼부었고, 다른 한편에서는 개인의 프라이버시는 보호되어야 한다며 서태지를 옹호했습니다. 이 사태와 관련해 문화평론가인 진중권 씨가 재미있는 얘기를 했습니다. 결혼과 이혼 사실을 밝힐 것인가 말 것인가는 개인의 취향 문제이니 비난받을 일이 아니라는 말이었습니다.

저 역시 결혼/이혼 사실을 밝히고 말고는 개인이 선택할 사항이라고 봅니다. 연예인이 공인도 아니니까요. 하지만 진중권 씨의 주장은 문제의 본질과는 거리가 먼 발언입니다. 이번 사태의 근원에 시장주의가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빠뜨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서태지는 시장주의의 덕을 제일 많이 본 사람 중의 하나입니다. 서태지의 등장과 함께 한국에서는 문화산업의 시대가 본격화되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서태지의 등장을 문화혁명이라고 칭송하기도 했지만, 나는 이 말이 문화의 부르주아적 혁명이라는 차원에서만 타당하다고 봅니다. 문화가 장인 중심의 수공업적 수준에서 자본 중심의 대공장 수준으로 바뀌었다는 의미에서.

서태지는 문화산업의 논리, 곧 시장주의에 편승해 명성과 부를 쌓은 사람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서태지 자체가 일종의 문화자본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의 이른바 신비주의 역시 시장주의와 결탁한 볼거리-스펙타클 전략입니다. 따지고 보면, 신비주의만큼 호기심을 자극하는 전략도 없습니다. 감추면 감출수록 보고 싶어지는 것이 사람의 욕망 아니겠습니까. 요컨대 서태지는 스스로를 감춤으로써 자신에 대한 대중의 호기심을 극대화시키는 데 성공한 겁니다.

이번 사태 역시 강렬한 스펙타클 효과를 불러일으켰다는 점에서 시장주의와 긴밀히 연동되어 있습니다. 서태지와 이지아 개인으로 보면 고통스러운 일일 수도 있겠지만, 문화산업의 입장에서 보자면 볼거리 창출에 성공한 셈입니다. 그런 점에서 취향 운운하는 것은 이번 사태와 시장주의의 관련성을 보지 못하게 만드는 발언입니다. 취향은 모든 문제를 개인으로 환원시키는 논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시장주의라는 구조가 은폐되는 겁니다. 서태지는 시장주의의 피해자인 동시에 수혜자입니다. 시장주의에 편승해 성공했고 시장주의 때문에 이런 피해를 입은 겁니다. 냉정하게 말하면, 이번 사태는 서태지가 자초한 일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서태지 자신이 스펙타클사회를 만드는 데 중요한 기여를 한 장본인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취향 운운으로는 결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시장주의를 어떻게 넘어설 것인가, 나아가 어떤 시장을 만들어야 하는가에 대한 진지한 고민 없이는 이런 일들은 앞으로도 계속 되풀이될 것입니다. 최근 잇따르고 있는 연예인들의 자살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서태지/이지아 사태를 보면서 불현듯 현대자동차 노조가 떠올랐습니다. 현대차노조는 올 임단협 안에 ‘정년퇴직자나 25년 이상 장기근속자의 자녀들에 한해서 자격요건을 갖춘 경우 우선적으로 채용한다’는 요구를 넣었습니다. 이에 대해 온갖 비난이 난무했습니다. 진중권 씨 또한 비난의 행렬에 동참했습니다. 그 요구가 경영권 세습과 똑같은 노동권 세습이라는 겁니다. 진보신당의 조승수 대표도 ‘조직운동의 일그러진 모습’이라면서 ‘부끄럽다’고 개탄했습니다. 계급 이기주의니 조합주의니 대공장 정규직 중심주의니 하는 비난들이 진보와 보수, 좌와 우를 가리지 않고 봇물처럼 터져 나왔습니다. 물론 현대차노조가 비정규직 문제에 좀더 적극적인 관심을 보여주었더라면 좋았겠죠. 이번 임단협 안에도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 철폐와 정규직화 요구가 담겨 있습니다만, 그 내용이 소극적인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자면, 이 문제는 개별 노조에 강요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닙니다. 개별 노조는 자기 노조원의 권익 신장을 우선시 할 수밖에 없는 데다 비정규직 문제는 단위 산업장 차원에서 해결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실업 문제는 더더군다나 그렇습니다. 노동권 세습을 포기한다고 비정규직이 정규직으로 바뀌나요. 아니면 새로운 일자리가 엄청나게 창출되나요. 비정규직 문제는 산별노조와 민주노총 차원에서 종합적으로 판단해서 결정하고 행동통일을 이끌어낼 때 해결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 진보정당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노동자-예비 노동자인 실업자까지 포함하여-들의 다양한 요구를 결집해 정책으로 반영하고 노동운동을 비롯한 민중운동의 방향을 제시하는 일이야말로 진보정당이 감당해야 할 가장 중차대한 사업 아니겠습니까. 그럼에도 진보정당의 대표라는 사람이 현대차노조를 비난하는 것은 자신들의 무능을 개별 노조 탓으로 돌려버리는 치졸한 책임회피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실 현대차노조에 대한 비난들은 문제의 핵심을 비껴난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무엇보다 경영권 세습에 빗댄 노동권 세습이라는 비난이 그렇습니다. 이 비난 역시 문제를 개인으로 환원시키는 논리입니다. 경영자와 노동자를 개인으로 추상화하면 이 비난이 말이 됩니다. 그러나 사회적 생산관계의 차원에서 바라보면 이런 식의 비난은 어불성설입니다. 왜냐하면 경영권 세습이 소유권과 직결되어 있는 데 비해 노동권 세습은 점유권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현대차노조의 요구가 이를테면 종업원 지주제 같은 것들보다 훨씬 건강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종업원 지주제가 무엇입니까. 노동자를 소액 주주로 만들어 직장에 대한 주인의식을 갖도록 하겠다는 것 아닙니까. 노동자에게 일정 지분의 소유권을 줘 소소유자로 만드는 것이 종업원 지주제인 것입니다. 자본 대 노동의 관계가 대소유자 대 소소유자의 관계로 변형되면 둘 사이에는 일종의 담합 내지는 공모관계가 형성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서 자본주의의 모순들이 희석되거나 봉합되는 거죠. 그런 점에서 종업원 지주제는 소유권의 확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노동권 세습은 소유권이 아니라 점유권의 확대를 의미합니다. 소유권의 확장이 기존 체제를 합리화하는 ‘위로부터의 통치’라면, 점유권의 확대는 기존 체제를 내파(內破)하는 ‘아래로부터의 정치’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요컨대 그것은 근대의 해방적 잠재력을 극대화해 근대를 내부로부터 극복해가는 실천인 셈입니다. 그런데 노동권 세습을 경영권 세습에 빗대다니요.


점유권 요구는 과거에도 존재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도지권(賭地權)입니다. 조선 후기에 소작권을 보장하는 도지권이 제도화된 바 있습니다. 경자유전이 제도화된 거죠. 물론 농민들의 끈질긴 저항과 투쟁이 낳은 성과였습니다. 그래서 많은 소작농들이 소작권을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영구히 보장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소작권의 세습이 인정되었고 심지어는 매매까지도 가능했습니다. 이를 기반으로 평민 부농들이 조선 후기에 급증했던 겁니다. 도지권이 폐지된 것은 일제에 의해서였습니다. 일제가 소유권만 인정하고 점유권은 부정하면서 도지권 역시 사라진 겁니다. 이것만 보더라도 식민지배가 어째서 반민족적일 뿐 아니라 반민중적인가를 쉽사리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점유권은 비(非)소유자들이 제기할 수 있는 당연한 요구입니다. 소작농, 노동자, 세입자들의 기본적 권리라는 겁니다. 현대차노조는 바로 점유권 확대를 요구했을 뿐입니다. 점유권의 확대와 소유권의 축소는 자본주의의 모순과 한계를 극복해가는 과정에서 필수적인 아젠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중권 씨를 비롯한 소위 좌파들조차 현대차노조를 비난하는 것은 어째서일까요. 그것은 모든 문제를 개인으로 환원시키는 태도 때문입니다. 경영자와 노동자를 개인으로 추상화하면 소유권을 물려주는 것이나 노동권을 물려주는 것이나 똑같은 ‘세습’이 됩니다. 사회적 생산관계가 제거된 추상적 개인-이 개인이 바로 사적 개인입니다-의 관점에서 보면 세습이라는 형식만이 남기 때문입니다. 세습의 내용성은 은폐되는 겁니다. 민주주의라든가 인권 같은 문제들에 대한 자유주의의 입장이 그러하듯이 말이죠.

나는 서태지/이지아 사태와 현대차노조 문제를 관통하는 감수성이 바로 이것이라고 봅니다. 요컨대 모든 문제를 개인으로 환원시키는 태도가 취향론과 노동권 세습론으로 표현되었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것을 개인을 특권화한 자유주의적 감수성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이 자유주의적 감수성이 사태를 이성적이고 총체적으로 바라보지 못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신자유주의의 만연은 이데올로기의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감수성의 차원에서도 짙은 그늘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이데올로기로는 자유주의를 비판하면서 감수성에서는 자유주의를 내면화한 좌파들이 양산되고 있는 겁니다. 일부 ‘문화좌파’들이 서태지에 열광했던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감수성의 혁명 없이는 자유주의의 진정한 극복이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대안문화의 건설이 절박한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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